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321)
나의 악당들 321화
57. 서전(2)
에아본 후작의 궁전은 ‘궁전’이라 는 이름답게 상당히 넓고 호화로웠 다. 높고 두꺼운 담은 내성 노릇을 했고, 네 개의 건물이 멀찍이 마주 보는 가운데엔 작은 숲과 넓은 안뜰 이 펼쳐져 있었다.
난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시종을 따라 안뜰을 가로질렀다. 그 길에 발치를 마른 잎으로 가린 나무들을, 평화로운 숲을 구경했다.
삐리릭-
두꺼운 가지 위에 자리 잡은 작은 둥지에서, 깃털이 온통 새까만 참새 가 튀어나왔다. 잠시 울어대던 새는 자기를 향한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어디론 가 휙 날아가 버렸다.
그 아래에선 양 볼을 부풀린 다람 쥐가 어디론가 바쁘게 달려가고 있 었다. 아직 겨울인데 먹이는 어디서 구한 걸까.
김승수로 살며 쌓은 상식과는 달 리, 이 세상에서 숲은 그리 평온한 장소가 아니었다. 우거진 이파리와 가지 아래 맹수와 도적은 물론 온갖 괴물들이 암약하는 탓이다.
하지만 궁전 한가운데 조성된 숲에 고블린이나 살인자 따위가 숨어 있 을 리는 없었다. 한마디로 저곳은 이 세상에선 극히 드문, 무장 없이 거닐 수 있는 안전한 숲인 것이다.
내가 숲을 보고 감탄한 걸 눈치챘 는지, 앞장서 걷던 시종이 불쑥 입 을 열었다.
“후작 각하께선 이 숲을 아주 좋아 하십니다. 일주일에 적어도 한두 번 은 꼭 산책을 하시죠.”
“……그래요?”
“다만 크기가 조금 부족하다 느끼 시는지 몇 해 전부터 숲을 넓히려고 하십니다. 담장 북쪽의 부촌 거리를 비우고 있는데, 그게 바로 숲 때문 입니다.”
“거리를 비운다면.”
“물론 강제로 쫓아내는 건 아닙니 다. 충분한 돈을 쥐여주며 설득하는 거죠.”
으흠.” 도시의 주인이 건물을 비워달라고 부탁을 하는데, 과연 그게 강압적이 지 않을 수 있을까?
난 쓴웃음을 머금은 채 새삼 숲을 돌아보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마냥 평화로운 장 소로 보였는데…….
지금은 늙은 권력가의 힘과 의지를 상징하는 무언가로 보였다.
“어서 오시게, 포이닉스 경.”
비단 튜닉에 실내용 외투를 걸친
후작은 웬 커다란 방에서 나를 맞이 했다.
대리석이 깔린 넓은 공간은 온갖 물건들로 가득했고, 네 방향의 벽엔 수십 점의 그림이 걸려있었다.
“각하. 여긴……
“전시실일세. 아리아가 가문의 역 사가 담긴 곳이지.”
전시실보단 박물관 같은 느낌인 데……. 그래, 뭐. 그거나 그거지.
얼른 훑어보니 장내엔 낡은 무구나 십자가 따위가 전시되어 있었으며, 박제된 동물이나 괴물도 여럿 보였 다. 벽에 걸린 그림들은 몇몇 풍경 화를 제외하면 대부분 초상화였다.
전시실 안에 사람이라곤 호위기사 와 시종들까지 포함해 열 명 남짓이 전부였으나 전시품과 그림들로 인해 장내가 좁게 느껴졌다.
“잠시 기다리게.”
주름진 미소를 지은 후작은 가슴높 이의 협탁에 다가서 그 위에 놓인 수정구에 손을 얹었다. 반지 하나가 빛을 내더니 거기 담겨 있던 마나가 수정구로 흘러 들어갔다.
번쩍!
순간 전시실이 환해졌다.
눈살을 찌푸려 휘황한 빛에 적응한 뒤 다시 살피니, 벽면에 걸린 그림 들이 형형색색으로 빛을 뿜어대고 있었다.
“어떤가? 이런 걸 본 적이 있나?”
“……아뇨, 이게 뭡니까?”
“‘콜비안의 마법물감’이라네. 마나 를 불어넣으면 이처럼 그림이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
그의 말대로 기이한 빛은 그림에 생동감을 더하고 있었다.
그림이 움직이는 건 아니었지만, 초상화 속 사람들은 눈빛을 번쩍였 고 얼굴엔 생기가 흘렀다. 마치 수 십 명의 사람들이 주변을 둘러싸고 이쪽을 지켜보는 것 같았다.
“ 이쪽으로.”
후작은 떨떠름해 하는 나를 손짓으 로 이끌었다.
북쪽의 벽면엔 세 개의 커다란 그 림이 각자 널찍하게 자리를 차지하 고 있었다. 하나는 열댓 명의 전사 들이 바글거리는 괴물들을 향해 돌 격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었고, 나머지 둘은 초상화였다.
“아리아가 가문의 뿌리와도 같은 분들인데…… 누군지 알겠나?”
둘 중 오른쪽에 걸린 건 금발의 미남자였다. 주홍빛 눈동자가 어쩐 지 이지적인 빛을 뿜어서 침착해 보 이는 인상이었다.
왼쪽에 걸린 건 똑같이 금발 사내 였지만, 수염이 덥수룩하고 얼굴에 흉터가 가득해서 험상궂기 짝이 없 었다. 고동색 눈동자는 어두운 톤이 었지만 금방이라도 불길을 뿜을 것 같았다.
난 그의 정체를 단박에 알아차렸 다.
“……이분이 제오트 오브 제오레군 요. 사나운 정복자이자 건국왕이라 는 ” “정확하네.” “그럼 오른쪽 분은 정복왕의 하나 뿐인 동생, 오스 변경백이겠군요?”
“그렇네. 아리아가 가문을 연 분이 지.”
두 초상화를 멍하니 살펴보다 후작 을 돌아보았다.
“이거, 정말로 정복왕과 오스 변경 백을 보고 그린 겁니까?”
“하, 당연하지 않나. 설마 모작을 걸어뒀을까?”
“하긴…… 그래도 좀 신기하네요.” 마법물감의 효과 때문일까, 아니면 화가의 뛰어난 솜씨 때문일까. 당장 이라도 정복왕이 튀어나와 고함을 지를 듯 생생한 그림이었다.
“후후, 경이 흥미를 보이니 나도 기쁘군. 이것도 좀 보겠나?”
후작은 오스 변경백의 초상화와 마 주 보는 위치에 서 있는 박제를 가 리켰다. 붉은 피부를 가진, 거대한 오크의 박제였다.
“‘므카웨’일세. 아주 전설적인 오크 지.”
그 설명을 들으니 헤일라가 해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오스 변경백이 죽였다는 바로 그 오크군요.”
“그래, 맞네.”
후작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지금이야 왕국 역내의 그린스킨들 을 대부분 토벌했지만, 먼 옛날엔 그 흉측한 놈들이 수백 수천 마리씩 모여 거대한 무리를 이뤘다더군. 이 곳 앤트럼 역시 그러한 무리가 창궐 했고, 므카웨는 그 무리의 우두머리 격인 놈이었네.”
그는 박제된 므카웨의 배, 가슴, 목을 순서대로 가리켰다.
“가문의 시조께선 이 거대한 오크 의 배를 장창으로 휘젓고, 심장에 장검을 박고, 목을 단도로 그었지.”
손을 뻗어 므카웨의 가슴에 남은 상처를 만지작거리던 에아본 후작은 나를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고작 열네 살, 그 어린 나이에 말 일세.”
“대단하네요.”
“아리아가 가문의 사내들은 이 일 화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다네. 그 용기와 결단력, 침착함이야 말로 귀족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 이지.”
박제된 오크를 가만히 올려다보던 후작은 나를 안내해 다른 수집품과 박제들, 그리고 그림들을 소개해주 었다.
외부인인 내게 이런걸 보여주는 이 유가 궁금했지만 일단은 잠자코 있 었다. 후작은 말솜씨가 좋고 지식이 풍부해서, 그의 안내를 받아 전시실 을 구경하는 건 썩 즐거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역사박물관을 구경하는 기분으로 후작을 따르던 것도 잠시, 서쪽 벽 에 걸린 초상화들을 볼 땐 또 새로 운 감상을 느껴야 했다.
“여긴, 살아있는 사람들을 모아둔 거군요?”
“조금 다르네. 비교적 최근에 그린 것들이라 그런 것일 뿐, 일부러 살 아있는 사람들을 모아둔 건 아니거 든.”
서쪽 벽에 걸린 건 이 시대 사람 들의 초상화였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건 각진 턱에 인자한 분위기를 가진 중년인으로, 북부의 대영주이자 밀라놀 왕국의 유이(뗘三)한 공작 중 하나인 ‘웨벨 터 공작’이었다.
그 옆엔 또 다른 북부의 대영주 ‘프릭스 변경백’이, 또 그 옆엔 얼마 전에 죽었다는 마르바의 대영주 ‘트 리스탄 백작’이 걸려 있었다.
“그런데…… 라이오넬 3세의 초상 화는 없군요?”
내 질문에 후작은 어깨를 으쓱거렸 다.
“모든 사람들의 초상화를 구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짐작했겠네만, 이 쪽은 모두 내가 모은 것들일세. 나 와 人]’이가 좋지 않거나 교류가 없는 이들의 초상화는 그릴 수 없었지.”
그는 그렇게 말하며 한쪽을 향해 손짓했다.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포 도주를 건네자 후작은 마른 입술을 축였다.
“덕분에 동부 영주들의 초상화는 별로 없지. 아일란트는 더 심하다네. 전시실을 통틀어, 자하카르나 발루 인이라는 성을 가진 자의 초상화는 하나도 없거든.”
“……혹시 제게 이곳을 보여준 이 유가,”
“아, 오해는 말게.”
그는 가볍게 손을 휘적거렸다.
“여길 내가 몸소 소개해준 건 영지 의 일을 빚진 것에 대한 선물일세. 사실 아무나 드나들 수 있는 곳은 아니거든.”
“흠, 그렇군요.”
“다만, 뭐- 별도의 선물로 초상화 를 하나 그려주고 싶은 마음은 있다 네.”
“예?”
“물론, 경이 동의한다는 전제하에 말이지. 보다시피 우리 가문은 대대 로 솜씨 좋은 화공을 구하는데 큰 노력을 기울여왔거든. 그를 마냥 놀 리는 건 큰 손해란 말이지.”
“……O 으 w
내가 애매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이 자, 후작은 웃는 낯으로 날 설득했 다.
“너무 어렵게 생각할 것 없네. 난 그저 이름 높은 기사의 초상화를 남 기고 싶을 뿐이야. 경에게도 손해가 되는 건 아닐 걸세. 아니, 오히려 이득이지.”
“오히려 이득이라면?”
“문화교류 차원에서 종종 귀족들을 여기 초대하거든. 소문만 듣고 경에 대해 오해를 품은 이가 있다면 그 잘생긴 얼굴을 보고 생각을 바꿀 수 도 있겠지. 경의 평판에 꽤 도움이 될걸?”
별로 마음에 드는 제안은 아닌데.
나는 가만히 눈썹을 긁적이다가 혹 시나 해서 후작에게 물었다.
“혹시 완성된 초상화를 제게 주실 수 있습니까?”
“물론. 화공의 삯을 겸해 원본은 내 수집품 목록에 넣고, 복제본을 경에게 주겠네. 오늘 스케치를 해두 면 추후 마법물감으로 채색까지 해 서 선물해주지. 어떤가?”
……뭐, 카메라도 없는 세상이니 초상화 하나쯤 가지고 있는 건 나쁘 지 않겠지.
고민 끝에 제안을 받아들이자 에아 본 후작은 곧장 화공을 불렀다. 귀 한 유물들 사이에서 그림을 그릴 순 없었기에, 우린 전시실 옆에 딸린 작은 내실에 자리를 잡았다.
난 평상시에 즐겨 입는 셔츠와 까 만 튜닉 차림으로 의자에 앉았고, 화가(晝架) 건너편에 앉은 화공은 내 얼굴을 샅샅이 뜯어보며 스케치 를 해나갔다.
에아본 후작은 할 일도 없는지 화 공 뒤에 다리를 꼬고 앉아 포도주를 홀짝거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스케 치를 흘긋 살피곤 말을 꺼냈다.
“슬슬 대화 정도는 괜찮을 것 같은 데. 안 그런가?”
예, 각하.” 후작은 화공의 동의를 얻자마자 수 다를 쏟아냈다.
이 넓은 궁전에 대화 상대가 없는 것도 아닐 텐데, 왜 계속 나한테 이 러는 거야? 귀찮은데.
“……그래서, 아무래도 오스는 대 학에 보내야겠네.”
“대학 말입니까? 왕도에 있는?”
“그렇네.”
“오스 백작은 올해 열여섯이잖습니 까? 근데 대학을 보내신다고요?”
후작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손자는 서부의 내로라하는 석 학들의 교육을 받았네. 대학에 못 보낼 것 없지.”
“아무리 그래도……
난 미간을 좁히다가 이내 입을 다 물었다. 포이닉스의 기억을 더듬어 보니 왕도에 있다는 대학은 김승수 의 상식 속 대학과는 조금 달랐기 때문이다.
“……하긴. 오스 백작이면 별 문제 없겠군요.”
평민들의 경우 아무리 똑똑해도 스 무 살은 넘어야 대학에 들어갈 수 있지만, 귀족은 아니었다.
귀족들은 피지배층에 비해 우월한 존재임을 증명해야 하는 자들이다. 그런 그들에게 있어, 어린 나이에 대학에 들어 고등한 교육을 받는 건 권위를 위해 썩 괜찮은 이력이었다.
그런 이유로 가문의 권세가 높을수 록 어린 나이에 대학에 드는 건 언 제부턴가 일종의 관습이 되었다.
물론 전통적인 교육법이 있어서 자 식을 대학에 보내지 않는 가문도 꽤 있었다.
모자란 자식을 밖으로 내보이기 부 끄러워하는 귀족도 많았고, 값비싼 학비를 감당하지 못하는 귀족도 부 지기 수였다.
“그럼. 내 손자지만, 강단이 조금 부족한 것 외엔 빠지는 부분이 전혀 없는 아이일세.”
하지만 오스 백작은 에아본 후작의 손자이자 후계자다. 대학에 들어간 다면 교직원과 학생을 모두 헤아려 도 그보다 고귀한 이를 찾기 어려울 터였다.
“그런데……. 사실, 대학에 보내기 전에 다른 경험을 시켜주고 싶네.”
“다른 경험이요?”
“그렇네.”
후작은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가 말 을 이었다.
“서쪽으로 보내는 병력의 지휘관으 로 삼을 생각이네.”
“……예에? 아니. 그게 무슨,”
“물론 명목상의 지휘관이지. 실질 적인 지휘는 전문가인 장군에게 맡 길 테니까.”
“음, 그런 거라면 별 상관 없지만.”
난 무의식중에 눈썹을 긁적이다 화 공의 째려보는 시선에 얼른 손을 내 렸다.
“……혹시 그 결정, 루얀 남작 때 문입니까?”
후작은 대답 대신 포도주로 입술을 적셨다. 그리고 작게 한숨을 내쉬더 니 화공과 시종, 그리고 호위기사들 까지 내실에서 내보냈다.
……어, X팔. 뭐야, 불안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