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322)
나의 악당들 322화
57. 서전(3)
내심 당혹스럽다. 침묵이 흐르는 내실에 에아본 후작과 단둘이 남은 탓이다.
이건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까놓고 말해서, 나라는 존재는 병 사 삼사십 정도는 순식간에 찢어발 길 수 있는 괴물이다. 비무장한 상 태긴 하지만 그게 내 위험성을 극적 으로 깎아줄 것 같지도 않다.
노회한 후작이 이런 사실을 모를 리 없다. 여태껏 나와 대면할 때마 다 기사와 전투마법사들을 우르르 대동했던 걸 감안하면, 그 역시 내 가 가진 위험성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 뜬금없이 독대라니?
감각을 한껏 끌어올려 봤지만…… 딱히 걸리는 건 없다. 비밀 호위라 거나, 뭐, 마법적인 수작 같은 걸 부려뒀을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경계심이 마구 샘솟는다.
내 심정이 얼굴로 드러난 걸까? 포도주를 홀짝이던 늙은 대영주는 날 보고 픽 웃음을 흘렸다.
“긴장할 필요 없네, 경. 나는 그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뿐이거든.”
에아본 후작은 그렇게 말하며 사이 드테이블에서 질 좋은 유리잔을 하 나 꺼내 포도주를 채웠다. 그리고 나를 향해 쓱 내미는 것이었다.
여차하면 상대의 목을 꺾어버릴 수 있는 난 잔뜩 긴장해있는데, 자칫 목숨을 빼앗길 수도 있는 후작은 태 연하기 그지없다. 우스운 일이다.
“……하.”
문득 나 자신이 털을 바짝 세운 길고양이처럼 느껴져서,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예. 말씀하시죠, 각하.”
잔을 받아들자, 후작은 도로 자리 에 앉으며 다리를 꼬았다.
“그래, 어디 보자……. 아하, 루얀 이야길 하고 있었지?”
“ 예.”
“그래, 루얀. 가엾은 아이지.”
가만히 포도주를 홀짝였다.
단델리산 포도주가 명주로 유명하 다더니, 깊지만 자극적이진 않은 향 기와 입 안을 가득 채우는 부드러운 질감이 썩 만족스러웠다.
“난 그 아이의 아비를 무척 아꼈 네. 알더 백작 말일세. 멍청할 만큼 정직하고, 불의를 보면 참을 줄 몰 라서 대영주보단 기사에 어울리는 녀석이었지.”
“……루얀 남작과는 성격이 좀 달 랐나 보군요.”
“완전히. 내 기억 속 알더는 아주 순하고 온화한 녀석이었거든. 꼭 소 처럼 말일세.”
후작은 미간에 깊이 주름을 새기더 니 쯧, 혀를 찼다.
“반면에 루얀, 그 아인 눈동자 빼 곤 아비를 하나도 안 닮았더군. 나 이답지 않게 독하고, 나서길 좋아하 고, 거짓말도 곧잘 해.”
“그렇군요.”
“그러면서 제 속내를 숨길 줄도 모 르지. 홍, 앙증맞은 발톱을 드러내는 꼴이라니.” 가래가 끓는 목소리로 낮게 웃던 대영주는 헛기침을 하곤 잔을 기울 였다.
“루얀은 제 아비가 처형당하고 가 문이 몰락한 게 나 때문이라고 믿고 있네. 사실, 트럼 웰이나 델리로드의 영민들은 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 더군.”
“아닙니까?”
“……지금 아니냐고 물은 겐가?”
“예.”
“하, 물론 아닐세!”
그는 억울하다는 듯 양 손바닥을 내보였다.
“알더를 꾀어내 그와 어스기치 가 문을 멸망으로 이끈 건 내가 아니라 북방의 여우라네. 내 잘못이라곤 그 바보가 출병하는 걸 빨리 알아차리 지 못했다는 것, 그거 하나 뿐이지.”
“……그,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좀 공교롭긴 하잖습니까.”
“공교롭다고?”
“알더 백작에게서 박탈한 작위와 영지를 모두 손자에게 주셨으니까 요. 결과적으로 가장 이득을 본 게 아리아가 가문이니 세간의 오해를 사는 것도 당연하죠.”
“다들 모르고 떠드는 소리야. 난 불가피한 선택을 한 걸세.”
후작은 단호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앤트럼의 3할이 알더의 영지였네. 그 넓은 땅을 다 어찌 처리한단 말 인가? 공훈 하나 없는 남작들 중 하나를 뽑아 맡길까? 아니면, 갈가 리 찢어 봉분이라도 해야 하나? 하, 난 그런 멍청한 짓거리 못하네. 미 래에 재앙이 될 짓거리는, 절대로 못 한다고.”
그는 계속해서 차가운 어조로 말을 늘어놓았다.
“게다가 그 땅을 영원히 쥐고 있겠
다는 것도 아닐세. 어차피 오스가 내 자리를 이으면 적당히 나눠줘야 해. 아무리 뛰어난 자라도 팔십만에 달하는 영민을 홀로 다스릴 순 없으 니까.”
열을 내던 에아본은 이내 눈을 감 고 심호흡했다. 날숨 두어 번에 화 를 흩어낸 노인은 다시 인자한 표정 으로 포도주를 홀짝였다.
“문제는 이런 사정을, 멍청한 봉신 들은 좀처럼 이해하지 못한다는 거 지.”
“설득하면 되잖습니까? 방금 하신 것처럼요.”
“진심인가? 대영주씩이나 된 자가 봉신들에게 구구절절 변명이나 주워 섬기라고?”
“……예. 안될 건 뭡니까?”
후작은 조금 성이 난 눈빛으로 날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얼굴을 일그 러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제기랄, 진심이구먼. 허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하카르가 그런 말 을 할 줄이야.”
“자하카르가, 말입니까?”
“그렇네. 자네들이 그런 평화롭고 자비로운 대화를 즐기는 줄은 미처 몰랐단 뜻일세. 봉신들이 고개만 들 어도 가문 전체를 지워버리는 게 자 하카르와 발루인의 방식인 줄 알았 거든. 응?” 이 해적 같은 새끼들이 또…….
내가 뻘쭘함에 입을 다물자, 후작 은 만족스러운 기색으로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뭐, 사실 루얀이 오해를 하든 말 든 별 상관은 없네. 고작 열두 살짜 리 애송이가 뭘 하겠나.”
“고작 열두 살■짜리 애송이라.”
나는 눈썹을 긁적였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물론일세.”
“흐음, 의외군요.”
말끝을 흐리며 후작을 빤히 바라보 자, 그는 이내 포도주잔을 탁 내려 놓았다.
“아, 그래. 나도 아네. 루얀이 평범 한 애새끼가 아니라는 것 정돈 나도 안단 말일세.”
다행히 눈은 멀쩡한 모양이군.
“언젠가 제 아비보다 훨씬 위험한 놈이 되겠지. 그래도 아직은 어린 애야. 내가 평판 상의 손해만 약간 감수하면 그깟 어린애쯤 얼마든지 처리할 수 있다고.”
“근데 왜 그렇게 하지 않으시죠?”
“왜냐면……
늙은 대영주는 주름진 이마를 문질 렀다.
“젠장. 오스보다 뛰어나다고 해서 암살자를 보낸다면, 내 봉신들 중 태반은 후계자를 잃어야 할 걸세. 빌어먹을 일이지.”
“……오스 백작이 그 정도는 아니 지 않습니까? 충분히 똘똘하고 착해 보이던데,”
“똘똘하고 착하지만 계집애 같은 녀석이지. 칼보다 붓을 좋아하고, 기 사보다 시인을 아끼는 머저리란 말 일세.”
……거 할배, 손자한테 말씀이 좀 심하시네.
“오스를 지휘관으로 삼는 이유가 루얀 때문이냐고 물었던가?”
“아, 예.”
“영향이 없다고는 못하겠군. 하지 만 앞서 말했다시피, 그까짓 애송이 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 처리할 수 있다네……. 거기 포도주 좀 주겠 나?” 내가 잔을 채워주자, 후작은 포도 주를 입 안 가득 머금었다가 천천히 삼켰다.
“……으음. 하지만 결국 내가 루얀 을 치워버리지 않는 건, 그게 근본 적인 해결책이 아니기 때문일세.”
“근본적인 해결책이라. 따로 염두 에 두신 게 있습니까?”
“뭘 염두씩이나. 손자를 더 나은 사내로, 대영주 자리에 어울리는 인 간으로 만드는 것 말고 달리 무슨 해결책이 있겠나.”
“오스 백작을 전쟁터에 내보내는 것도, 대학에 보내는 것도 그것 때 문이군요.”
“그래, 맞네. 전투를 겪으며 용기를 배우고, 또래 귀족들과 어울리며 야 망을 품길 바라는 거지.”
늙은 대영주는 잔을 만지작거리며 초점을 흐렸다.
“……내가 늙은 건지, 아니면 시절 이 하 수상한 탓인지 걱정이 도통 끊이질 않아. 요즘은 밤마다 죽은 자식들이 떠오른다네……
붉은 포도주를 빤히 내려다보는 에 아본 후작은, 드넓은 영지와 으리으 리한 궁전의 주인이라기엔 너무나 왜소하고 초라해 보였다. 평소의 유 쾌하고 당당한 모습이 떠오르지 않 을 지경이었다.
……아이고. 이 할아버지, 왜 이렇 게 안쓰럽냐.
“혹시,”
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 도움을 바라시는 겁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나?”
“전 각하를 잘 모르지만, 이렇게 쉽게 남에게 속을 털어놓으실 분 같 지가 않아서 말입니다.”
후작은 숨을 크게 마시더니 기지개 를 켰다. 그리고 주름진 미소를 짓 는데, 방금까지의 안쓰러운 노인네 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위풍당당한 대영주만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었 다.
“사실 그렇네. 난 경의 도움이 필 요해.”
“……음, 저는-”
“하지만, 지금 생각하고 있는 그런 도움은 아닐세.”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후 작은 손을 휘저었다.
“오스를 부탁한다느니, 녀석을 보 호해달라느니, 그따위 한심한 요청 을 하진 않을 거란 뜻이네. 내 숨이 끊기기 직전에도 그딴 소린 안 할걸
세.”
“경이 불쌍한 날 봐서 앞으로 일이 년쯤, 아니, 넉넉잡아 오년쯤 오스를 도와준다고 해서 뭐가 그리 달라지 겠나. 난 그까짓 실체 없는 도움 따 윈 애당초 바라지도 않아. 그리고 난 아직 팔팔해. 경에게 당장 후계 자를 부탁할 정도로 급하지도 않다 는 거지.”
“그러면 뭘 원하십니까?”
“거래.”
“거래요?”
“경의 즉각적이고 구체적인 도움을 사고 싶네. 내가 가진 것을 대가로 말일세.”
좀처럼 이해하지 못 할 소리에 가 만히 미간을 좁히자, 후작은 마른침 을 삼키며 눈을 빛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제안은,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게. 절대 비밀 로 해야 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고 이러 는 거지?
그런 의문과는 별개로, 난 본능적 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지금부터 할 이야기야말로 후작이 날 전시실 로 끌어들인 진정한 이유라는 사실 을 말이다.
“제안을 받아들이든 그렇지 않든 절대로 비밀로 해야 한단 소릴세. 이해가 되나?”
“……뭐, 알겠습니다.”
후작은 몇 번이나 내 다짐을 받아 낸 뒤에야 본론을 꺼냈다.
“먼저, 경에게 줄 수 있는 대가부 터 몇 가지 제시해보도록 하지.”
그는 의자 끝에 걸터앉은 채 손깍 지를 꼈다.
“첫 번째는 군대일세.”
“군대요?”
“지금 준비 중인 천오백 명의 군대 말일세. 경이 내 제안을 받아들인다 면 그 병력을 십 년간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맡기겠네.”
……10년? 사실상 군대를 넘기겠 단 소리잖아? 이게 무슨.
“군대가 싫다면 두 번째 선택지도 있네.”
“……뭡니까?”
“자작위와 피올을 주겠네.”
“피올? 도시 말입니까?”
“맞네. 이 궁전에서 일해도 되고, 원한다면 오스 옆에서 부백작 노릇 을 해도 되네.”
상상치 못한 어마어마한 대가에 혼 란스러워 하는 人}이, 후작은 계속해 서 말을 이었다.
“깔끔하게 재물로 처리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겠지. 금화 2천 장 정 도면 어떤가?”
“금화, 2천 장이요?”
“그렇네. 일단 내가 생각해둔 건 여기까지일세. 혹시 다른 걸 원하면 편히 말해보게. 한번 조율해보자고.”
난 어안이 벙벙해져서 입을 반쯤 벌리고 있다가, 얼른 정신을 수습했 다.
“잠깐, 잠깐만, 각하.”
“ o 으
“뭘 원하시는지부터 듣고 싶습니 다. 대체 어떤 ‘즉각적이고 구체적 인 도움’을 원하기에 그런 어마어마 한 대가를 거시는 겁니까?”
거침없이 말을 이어나가던 후작은, 내 물음에 입을 다물고 등받이에 몸 을 묻었다. 그러길 잠시, 툭 한마디 말을 던졌다.
“아들을 주게.”
“••••••예?”
“아들 말일세.”
이건 또 무슨 병신 같은 소리야?
난 미간을 좁히며 후작에게 되물었 다.
“아들을 달라요? 그게 무슨 뜻입니 까?”
“말 그대로일세.”
늙은 대영주는 팔걸이를 툭툭 두드 렸다.
“20일 아침이 출정이니 당장 주어 진 기회는 사흘 뿐이군. 오늘, 내일, 모레. 마침 파나벨도 알맞은 시기이 니 가능성은 충분할 걸세.”
“대체 무슨 소릴 하시는 겁니까?
후작부인께서 알맞은 시기라됴?”
“뭐겠나? 아이를 갖기 알맞은 시기 말일세.”
……와, 이런 미친 놈이.
난 그제야 후작의 뜻을 깨닫고는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지금 제정신이십니까? 술을 너무 많이 드신 것 같은데.”
“하하, 난 멀쩡하다네. 이까짓 포도 주 몇 잔에 판단이 흐려질 만큼 늙 진 않았어.”
“그럼 더 문젠데……
늙은 대영주는 껄껄 웃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내 사정을 충분히 설명한 것 같네 만, 아직도 부족했나?”
“저 몰래 뭐 딴소리 하셨습니까? 아니, 그건 둘째치고, 자기 부인이랑 – 그런 짓을 하라는 제안에 충분한 설명이란 게 있을 수나 있습니까?”
“모자란 손자 이야기를 쭉 해주지 않았나.”
“그래서, 새 후계자를 키우시겠다 고요? 그 나이에, 남의 씨를 받아서 요?”
나도 모르게 거칠게 말을 쏘아붙였 지만, 후작은 개의치 않는 듯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말하지 않았나, 아직 팔팔하다니 까. 내후년 정도까지 아들을 얻는다 면 성인식까진 어떻게 버틸 수 있을 걸세.”
“그렇게 팔팔하시면 직접 하시면 되잖습니까.”
“자식 셋은 요절했고, 하나 남은 손자라곤 오스 녀석 뿐일세.”
노인네는 웃는 낯으로 정신이 혼미 해질 만한 이야기를 찍찍 뱉어댔다.
“젊을 때 뿌린 씨가 이 정도야. 늙 은 몸으로 씨를 뿌려봤자 뭐 대단한 걸 얻겠나.”
“그럼 오스 백작은 어쩌려고요? 이 미 후계자로 지정까지 해둔 판인데, 설마 죽여서 치우실 속셈이십니까?”
“허, 설마. 내가 악마로 보이나?”
노망난 늙은이로 보이는데요.
“오스 입장에서도 썩 나쁜 일은 아 닐 거야. 가뜩이나 후계자로서의 짐 을 버거워하던 녀석이니, 자유롭게 풀어주면 좋아하겠지. 바라마지않던 문학과 예술을 배울 기회도 얻게 될 테고.”
후작은 포도주로 목을 축이며 어깨 를 으쓱였다.
“사실 이거야말로 내 걱정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 아니겠나? 그대의 피를 이은 아이라면 아무리 못해도 오스보단 훨씬 낫겠지.”
“솔직히, 그냥 멍청하고 미친 소리 로 들립니다.”
“경이 그리 생각하는 이유를 알고 싶구먼.”
난 관자놀이를 누르며 찬찬히 설명 했다.
“제가 파나벨 후작부인과- 음, 아 들을 얻고 그 아이가 각하의 후계자 로 자란다고 칩시다. 그리고 각하께 서 돌아가신 뒤 그 아이가 후작이 되면, 정말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
까?”
“어떤 문제가 있겠나‘?”
“어, 뭐……. 갑자기 제가 나타나 서, 앤트럼의 후작이 된 제 아들에 게 ‘내가 니 애비다’하며 영지를 집 어삼킬지도 모르잖습니까.”
“그렇지. 그럴 수도 있겠지.”
후작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되 물었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는 어떨까?”
“……반대의 경우요?”
“경은 아일란트의 차기 공작을 낳 을 잉태자일세.”
“그런데요?”
“그런 경이 파나벨을 통해 낳은 내 후계자가 앤트럼의 후작이 되면. 그 리고 그 아이에게 자네의 피가 흐른 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어찌 될까?”
난 미간을 좁혔다.
“뭐, 후작 자리에서 쫓겨나겠죠.”
“하하, 날 너무 만만히 봤군. 난 그깟 문제가 생겨도 권위가 흔들리 지 않을 만큼 자리를 다져서 아이에 게 물려줄 걸세.”
후작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자하카르의 피가 흐르는 아리아가 의 당주라. 어찌어찌 기회만 잘 닿 는다면 앤트럼과 아일란트를 아우르 는 군주가 탄생할 수도 있겠군.”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가능성으로만 따지자면, 자네가 앤트럼을 집어삼키는 것보단 훨씬 높을 걸세. 국왕과 다른 대영주들은 아일란트가 대륙에 진출하는 걸 목 숨 걸고 막을 테니까.”
……그렇게 될 수도 있겠군.
내가 가만히 눈썹을 긁적이자, 후 작은 턱을 괴며 말했다.
“그러니 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순순히 비밀을 지키는 편이 나을 걸 세. 아일란트에 득 될 일이 하나도 없어.”
“……그건 그렇다고 쳐도, 제일 중 요한 문제가 남아있지 않습니까?”
“제일 중요한 문제?”
진짜 모르고 묻는 건가, 이 미친 노인네가?
난 답답함에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 다.
“아니, 각하. 제가 후작부인을 통해 각하의 후계자를 낳으면, 아리아가 가문의 피라곤 전혀 없는 아이가 후 작이 되는 겁니다.”
“으흠?”
“사실상 뻐꾸기 당해서 혈통이 끊 겨버리는 건데, 결국 본말전도 아닙 니까? 가문을 지키지 못하는 거라고 요.”
“……뭐, 그런 문제야 경이 신경 쓸 바가 아니네만.”
늙은 대영주는 잠시 수염을 매만지 다가 툭 말을 뱉었다.
“그 아이는 오스와 똑같을 걸세.”
“똑같다뇨? 뭐가 말입니까?”
“혈통의, 으음, 구성 내지는 비율 말일세.”
“네? 그게 무슨 소리-”
난 말을 하다 말고 입을 쩍 벌렸 다. 후작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후작부인이, 설마.”
“파나벨은 조비언 백작의 딸일세.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 알려졌지.”
“어미를 쏙 빼닮았다니까……. 그 래, 지긴 부인도 아름다웠지. 젊은 시절, 충동을 도저히 참지 못할 정 도로 말이야.”
세테니오라 수도원의 막벽에서 에 아본 후작과 파나벨 부인, 그리고 오스 백작을 처음 봤을 때의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그때 난 파나벨 부인이 후작의 딸 인 줄 알았다. 나이 차이 때문에 착 각한 걸로 여겼는데, 다시 생각해보 니 후작과 부인은 이목구비가 묘하 게 닮아 있었다…….
난 에아본과 파나벨의 나이 차이를 가늠하곤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리 젊은 시절은 아니었을 것 같은데요.”
“딱 마흔이었네. 그 정도면 젊은이 지.” “ 하.”
“그런 표정 짓지 말게. 나도 나름 벌을 받았으니.”
“……벌?”
후작은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리 힘을 써도 아이가 생기지 않더란 말이지. 참 희한한 일이야.”
정신이 아득해지는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