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471)
나의 악당들 4기화
66. 은왕자(26)
“흐하하! 과연 기백이 대단하군! 다들 들으셨소?”
루일릭스 2세는 잔뜩 신이 나서는 아이처럼 손뼉을 쳐댔다. 제국의 귀 족들은 어색한 표정으로 맞장구를 치면서도 한쪽을 흘긋거렸다. 그들 이 눈치를 살피는 자는 ‘오로라의 창’ 파비오였다.
그 시선의 흐름을 알아차린 것인 지, 황제는 휙 고개를 돌려 수호경 을 바라보았다.
“그래, 내 수호경이여. 장군의 생각 은 어떤가?”
검게 그은 얼굴을 무표정하게 유지 하고 있던 파비오가 담담한 답을 내 놓았다.
“폐하의 말씀대로 대단한 기백입니 다.”
“아니, 아니. 내 질문은 그게 아닐 세. 적기사를 꺾을 자신이 있느냐고 물은 것이지.”
“있습니다, 폐하.”
즉각적이고, 간결하며, 담담한 대답 이었다. 군더더기가 없기에 오히려 그의 위명에 어울리는 반응이라고 할까.
“흥미롭군. 아주 흥미로워. 대륙에 서 무명을 떨치는 두 맹자가 모두 저의 승리를 자신하니.”
그리 말하며 엉덩이를 들썩이는 본 새를 보아하니, 루일릭스 2세는 이 미 싸움을 붙이고 싶어 안달이 난 것 같았다. 속마음이 훤히 보여서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내가 눈치챈 바를 제국의 귀족들이 라고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제국 기사들의 정점인 파비 오와, 엄연히 백작이 된 나더러 만 찬의 눈요깃거리가 되어달라 요구할 수 있는 자는 이 자리에 없었다.
“그렇다면 폐하.”
……아니. 한 명도 없진 않았다.
“지금 여기서 실력을 겨루어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루일릭스 2세를 대신해 그의 의중 을 입 밖으로 꺼낸 건 아냐넬 자작 이었다. 일명 ‘을포바오의 재녀’라 불리는 황제의 심복이자, 항간에서 는 황제의 애첩이라는 소문까지 도 는 여인이었다.
“지금 이곳에서 실력을 겨룬다?”
“예, 폐하. 수호경과 방백은 실력이 절정에 달한 무인인바, 서로 검을 나누면 분명 각자 배우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또한 홍의주교를 비롯해 강력한 권능을 지닌 성직자들이 여 럿 배석 중이니, 설령 부상자가 생 기더라도 대처가 어렵지 않을 것입 니다.”
또박또박 설명을 이어가던 자작은 수호경과 나를 번갈아 살피더니 말 을 덧붙였다.
“물론, 마도구나 마력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전제조건이 되어야겠 지만 말입니다.”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로고. 재미 있어. 당사자들의 생각은 어떤가?”
루일릭스 2세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했다.
슬쩍 미간을 좁힌 채 고개를 저어 보이는 울카르 왕자를 무시하며, 나 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좋습니다. 재미있겠네요.”
왕자가 어떤 판단을 했는지는 모르 겠지만, 나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 는 제안이다. 제국을 대표하는 무인 인 수호경, 그것도 현역과 붙어볼 기회가 언제 또 생기겠냐고.
이기면 위세를 떨칠 수 있어서 좋 고,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 지더 라도 그만큼 경험을 쌓을 수 있다. 승패가 어떻든 손해 보는 장사는 아 니라는 것이다.
내가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이자 기 대감으로 부풀어 오르던 황제는,
“수호경은 황위를 수호하는 자입니 다.”
파비오의 단호한 말에 바람 빠진 풍선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따라서 대련과 같은 일을 위하여 무기를 들 수는 없습니다.”
“그, 너무 과하게 의미부여할 필요 없네, 장군. 그저 간단한 대련일 뿐 이니,”
“송구합니다, 폐하. 원칙에 예외를 둘 수는 없습니다. 다만 황명이시라 면 기꺼이 나서겠습니다.”
“……끙, 됐네.”
수호경의 진지한 얼굴을 마주한 루 일릭스 2세는, 김이 샜다는 듯 금박 을 입힌 떡갈나무 옥좌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렇게 상황이 마무리되려던 찰나. 내 건너편에 앉아있던 중년의 귀족 이 불쑥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다면 주군 폐하. 제가 수호경 을 대신해 적기사와 검을 겨뤄봐도 되겠습니까?”
“……투아셀로 경이?”
나와 겨루겠다며 나선 검백을 바라 보며, 황제는 베일이 무용해질 만큼 두 눈을 반짝였다.
“저는 황실에 속한 기사들의 검술 을 교련하는 자로, 기예를 갈고닦는 것이야말로 주된 임무입니다. 적기 사는 천한 태생과 어린 나이에도 불 구하고 제국의 달인을 넷이나 꺾은 신성이니, 그와 검을 맞부딪치면 필 시 얻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과연. 옳은 말일세.”
루일릭스 2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재차 나를 돌아보았다.
꿩 대신 닭이라고, 수호경만은 못 해도 검백 역시 제국에서 이름을 날 리는 소드마스터이니 겨뤄볼 가치는 차고 넘쳤다.
이에 나는 제안을 받아들였고, 황 제는 곧장 연단 아래에 대련장을 마 련하라 명했다.
대련장이라 칭하긴 했지만 뭐 대단 히 거창한 시설을 마련한 건 아니었 다. 그저 경계를 서던 중장병들 일 부가 물러서고, 근처의 잡동사니를 치워 공터를 마련한 정도였다.
하긴, 칼싸움을 하는데 이거면 됐 지 뭐가 더 필요하겠어.
다만, 황제의 궁정마법사 하나가 나서서 반마력장을 설치하긴 했다. 상대와 칼을 겨루며 마력을 억제하 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 아 예 반마력장을 이용해 마력과 마도 구를 억제하는 것이다.
물론 대련을 위하여 설치한 것인 만큼 그리 공들여 만든 것은 아니라 그 효과가 대단치는 않았다. 마소 (魔素)를 완전히 얼어붙게 하지는 못하므로 작정하고 마력을 끌어올리 면 반마력장이 먼저 깨질 거라나.
분명 결함이라면 결함이지만, 대련 을 위한 것임을 감안하면 오히려 장 점이라 할 수 있었다. 누군가 마력 을 끌어올려 반마력장이 깨지는 순 간 요란한 소리가 울릴 테고, 누가 반마력장을 깨뜨렸는지도 곧장 알 수 있을 테니.
후우웅.
묵직하게 깔린 반마력장의 영향으 로 ‘검은 얼음’이 뿜는 냉기는 전과 달리 미약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깨진 유리를 닮은 예리함만큼은 여 전했다.
피뢰의 호부나 아엘로포스처럼 비 교적 격이 낮은 마도구는 물론이고 용살자의 인장이나 사왕의 장갑과 허리띠마저 힘을 잃었지만 무력감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난 어째 들뜬 기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연신 칼자루를 고쳐 쥐었다.
“다시금 당부하건대.”
그런 나에게, 울카르 왕자가 썩 엄 한 얼굴로 경고를 해왔다.
“절대로 패해선 안 되오.”
“그럴 일 없습니다.”
“아이스보발트의 존망이 걸린 일이 될지도 모르니 명심하시오.”
“아, 정말. 걱정 마시라니까요.”
“검백을 죽여서도 안 되오. 되도록 너무 큰 부상을 입히지도 말고.”
“예, 예, 전하. 좋은 분위기에 찬물 을 뿌리지 않도록 조심하겠습니다.”
‘됐죠?’ 하고 어깨를 으쓱이자, 울 카르 왕자는 가만히 이마를 감싸 쥐 었다.
“하. 황제 앞에서 검백과 대련을 벌이다니. 전부터 느꼈지만, 경은 당 최 종잡을 수가 없는 사람이오.”
“전하께서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 은데요.”
“무슨 뜻이오?”
“뜬금없는 일을 벌이는 걸로 따지 면 전하도 만만치 않다는 뜻입니 다.”
나는 연단 위에 앉아 느긋이 포도 주를 홀짝이고 있는 루얀 남작-아 니, 제국후 루얀을 턱짓했다.
“죽을 때까지 저 애새끼 옆에 붙어 서 원수 노릇을 하라면서요.”
“그게 어디 평범한 원수 노릇이오? 인구 도합 40만에, 한때 소왕국이 세 개나 번성할 만큼 드넓은 영지의 병무를 통할하는 무관직이지. 기사 라면 마땅히 영광으로 여길 명예로 운 직위란 말이오.”
“아시다시피 제가 그런 쪽으로는 욕심이 없거든요. 지금이라도 물러 주시고 대신 금화로-”
“됐소. 채비되었으면 가시오.”
왕자의 단호한 말에, 막 내 흉갑의 옆 끈을 조인 초장의 골만이 얼른 투구를 내밀었다.
“됐어. 새삼스럽게 투구는 무슨.”
판금갑옷만으로도 충분히 거추장스 러웠기에, 난 손을 저어 골만을 물 렸다. 그리고 장검을 어깨에 턱 걸 친 채 앞으로 나섰다.
그즈음 검백 투아셀로 역시 종자와 하인들의 시중을 받아 준비를 마치 고 앞으로 걸어 나왔다. 코트를 벗 어던져 수수하지만 고급스러운 판금 갑옷을 훤히 드러낸 채였고, 멋들어 진 샤프롱 대신 예스러운 투구를 쓰 고 있었다.
투아셀로와 내가 걸친 판금갑옷은 얼핏 닮아 있었는데, 어깨와 팔꿈치 그리고 무릎 등의 관절부가 뾰족하 게 각진 모양새였다.
뭐,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내가 걸친 갑옷은 아빌람버스 공작의 선 봉장에게서 빼앗은 물건이니까.
그 작자 역시 어딘가의 백작인가 뭔가 하는 고위급 인사였으니, 그의 갑옷이 검백의 것과 수준이나 모양 새 따위가 비슷한 건 당연하다면 당 연한 일이었다.
갑옷이야 어쨌든, 검백은 구리로 장식한 면갑을 밀어 올리며 황제에 게 예를 표했다.
“빛의 주, 그리고 주군 폐하의 영 광을 위하여.”
대련을 가까이에서 구경하기 위해 연단 가장자리로 옥좌를 옮긴 루일 릭스 2세는, 제 봉신의 검례에 손을 들어 답했다. 황제의 주변을 채운 귀족들은 점잖은 박수로 응원을 보 냈다.
철컥.
검백은 면갑을 굳게 닫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자세를 잡기는커녕 칼 을 축 늘어뜨린 채 나를 마주 바라 보는 걸 보니, ‘이제 네가 인사할 차례다’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흠.”
나는 검은 얼음으로 견갑을 툭툭 두드리다가 황제 쪽으로 몸을 돌렸 다.
그러다가, 기습적으로 옆으로 땅을 박차며 칼을 휘둘렀다.
쌔앵-
“흠,”
사나운 파공성에 기겁한 검백이 재 빨리 장검을 들어 올렸다.
카각!
경황 중에 취한 방어 자세임에도 칼날의 각도가 썩 절묘해서, 내가 휘두른 검은 얼음은 부드럽게 미끄 러져 내려가 십자막이에 덜컥 걸리 고 말았다.
“이, 시정잡배 같은 놈-”
투아셀로는 그렇게 으르렁거리며 칼자루를 휘돌리듯 끌어당겼다. 십 자막이를 지렛대 삼아 내 장검을 빼 앗아 버릴 태세였다.
나는 저항하는 대신, 그대로 끌려 가듯 몸을 날렸다.
쾅!
“컥,”
흉갑 한가운데 발이 틀어박히자, 검백은 뒷걸음질을 치며 균형을 잡 았다. 그사이 난 그의 십자막이에 끌려가던 검은 얼음을 뽑아냈고, 동 시에 검백은 장검을 횡으로 휘둘러 내 눈을 노렸다.
“흡,”
나는 슬쩍 고개를 젖히며 반격을 간단히 피해냈고, 멈춰선 검백은 검 세를 취하며 나를 노려보았다.
“비겁한 놈. 네놈이 그러고도 명예 를 아는 기사라고 할 수 있느냐?”
“아, 죄송해요. 제가 원래 연습은 실전처럼, 실전은 연습처럼 하는 스 타일이라서.”
“……뭐라고?”
어이가 없다는 듯 헛숨을 흘리는 검백을 향해 난 환히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렇게 입을 달싹이는 시늉 을 하다가, 다시금 몸을 날리며 검 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