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470)
나의 악당들 470화
66. 은왕자(25)
작위 수여식이 마무리된 뒤, 루일 릭스 2세는 새로이 제국의 봉신이 된 이들을 위하여 만찬을 베풀었다. 군영에서 열린 연회임에도 갖춤새는 훌륭했다.
아니, 솔직히, 훌륭하다 못해 입이 절로 벌어질 정도였다.
흰 목재를 깎아 만든 커다란 식탁 이 단상 위로 연달아 올라왔고, 높 은 등받이에 화려한 장식을 새긴 의 자도 쉰 명이 넘는 귀빈들의 수에 맞추어 배치되었다. 식탁의 하얀 상 판은 이내 고급스러운 식탁보에 가 려졌다. 질 좋은 아마천을 두껍게 겹쳐 보랏빛 염료로 물들인 것이었 다.
야외에서 식사를 할 때는 넓적하고 딱딱한 빵으로 앞접시를 대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어지간한 귀족 들이라도 식기를 쓰기 어려운 야외 에서는 그렇게 했고, 맨손으로 음식 을 집어먹는 것 역시 당연하게 여겨
졌다.
그러나 대륙에서 가장 부유한 자가 베푸는 만찬은 일반적인 것과는 궤 를 달리했다. 번쩍거리는 은제 접시 와 식기가 깔리고, 뒤이어 온갖 음 식을 실은 손수레가 줄지어 나타났 다.
난 벨벳 방석이 깔린 의자에 앉으 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골 때리네. 원정 나가는데 뭐 이런 걸 다 싸 들고 다니냐.”
“그게 시종부의 존재의의 아니겠습 니까?”
내 혼잣말에 답한 건 궁중백 루피 르투스였다. ‘투투’라는 귀여운 별명 이나 투실투실한 얼굴 때문에 일견 만만한 인상이지만, 이래 봬도 황제 의 측근 중 하나이자 궁정관리들의 총책임자다.
“황제의 위엄이란 해와 달 같은 것 이라, 그 언제든 빛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시종장이 세밀히 대비 를 해둔 덕에 귀한 분들을 잘 대접 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아, 예.”
이미 설명했다시피, 이 연회는 새 로 제국의 귀족이 된 자들을 환영하 기 위한 자리였다. 덕분에 우리는 황제가 데려온 온갖 귀족, 제국기人E 고위장교들과 불편하고 어색한 합석 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자리 배치 역시 결국 급을 따라가는지라, 작위나 계급이 비슷 한 이들끼리 모일 수밖에 없었다.
“황실의 요리사가 넷이나 따라왔으 니 운이 좋으시다면 제국 최고 수준 의 음식을 맛보실 수 있을 겁니다. 아, 왜 운이 좋아야 하느냐면, 이 자들이 워낙 환경 탓을 해대서 말이 지요……
가장 급이 높은 자들은 당연히 황 제의 식탁에 앉았다. 루일릭스 2세 는 장정 서넛이 앉아도 넉넉할 듯한 커다란 옥좌에 앉아있었는데, 그의 좌우는 각각 수호경 파비오와 아냐 넬 자작이 차지했다. 그들 옆에는 울카르 왕자와 제국후가 된 루얀이, 또 그 옆에는 제국원수 나딤과 홍의 주교 아라모스 등이 앉아있었다. 황 제가 누데인족 영주와 대화를 나누 고 싶어했기에, 아탈란테 역시 어색 한 얼굴로 말석 즈음에 앉아있었다.
“그럴싸한 시설이 갖춰져 있지 않 으니 제 실력을 발휘 못하는 거라고 아주 엄살을, 엄살을……
아이스보발트의 방백이 된 나도 저 식탁 어딘가에 앉는 게 맞지만, 저 런 자리에서 밥을 먹었다간 금방 체 해 버릴 것 같아서 얼른 옆 식탁으 로 도망쳤다.
물론 왕자를 호위하는 것도 중요하 지만…… 뭐, 황제군의 주둔지에 제 발로 들어온 시점부터 그런 건 별로 의미가 없어졌다. 수천 명의 제국군 이 바글거리는 상황인데 칼 꼭 쥐고 왕자 옆에 붙어 있어봤자 그게 무슨 소용이 겠냐고.
어쨌든, 불편한 자리를 피해 옆 식 탁으로 도망쳤더니 황제의 측근 몇 이 나를 따라왔다.
“그런데 사실, 황궁에서의 식사와 그렇게까지 극적인 차이가 나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잘 모르겠다고밖 에……
개중 하나가 바로 내 대각선 자리 에 앉아 쉬지 않고 수다를 떨어대는 투투 였다.
“물론 취향 까다로운 몇몇 분들께 서는 맛이 영 다르다 말씀하시기 도……
일주일 전에 봤을 때는 몰랐는데, 이 아저씨 말이 진-짜 많다. 수십 명의 하인들이 손수레를 오가며 식 탁보를 채우는 내내 떠벌거리는데, 말 못해서 죽은 귀신이라도 씌였나 싶을 정도다.
마음 같아서는 닥치라고 욕이라도 한마디 쏘아붙이고 싶지만……. 아니, 참자. 내가 무슨 사회 부적 웅자도 아니고, 이렇게 중요한 자리 에서 괜히 문제를 일으킬 수는 없 지.
한편, 나를 따라온 건 이 말 많은 궁중백 하나가 아니었다.
“귀리죽 있나?”
“아, 금방 대령하겠습니다.”
“소금 없이, 후추만 조금 쳐서 준 비해주게.”
“예, 각하.”
온갖 산해진미를 앞에 두고 하인에 게 귀리죽 따위를 주문한 건, 검백 투아셀로였다.
짧은 코트와 멋들어진 샤프롱을 등 받이에 걸어둔 이 중년의 귀족은 건 너편에 앉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 었다. 그 시선에서는 색채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래서 오히려 거슬렸다. 검의 달인이 보란 듯이 보내오는 감시의 눈빛이니, 불편하 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또한 식탁의 끝자리에는 반투명한 암석질 피부의 여인이 앉아있었다. ‘아링겐의 수정골렘’이라 불리는 이 마법사는, 언뜻 보기엔 그저 수정조 각상 같아서 음식을 먹는 모습을 상 상하기 어려웠다. 덕분에 식탁 앞에 앉아있는 것부터가 어색하기 짝이 없었으나, 기분 나쁘니 꺼지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애써 시선을 돌 렸다.
물론 식탁이 온통 불편한 사람들로 만 채워진 건 아니었다.
“오리다.”
들뜬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뭉치였다. 녀석은 막 식탁에 올라온 구운 오리를 보고 눈을 반짝이더니 나를 휙 돌아보았다.
“……뭐. 왜‘?”
“잘라줘요.”
“네가 해서 먹어.”
“잘라줘요.”
“네가 하라니까.”
단호한 거절에, 뭉치는 떼를 쓰는 대신 입술을 비죽거리며 통째로 구 운 오리를 향해 포크와 나이프를 가 져갔다. 그리고 서툴기 짝이 없는 솜씨로 오리의 날갯죽지를 난도질하 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으휴. 이리 줘봐.”
“헤헤.”
여럿이 둘러앉은 식탁에서 광란의 해체폭발쇼를 벌일 수는 없었기에 날개와 다리, 가슴살을 적당히 잘라 주었다.
“느끼하게 고기로 시작하지 말고 채소부터 좀 먹어.”
“ 네.”
대답만 그렇게 한 뭉치는 촉촉한 가슴살과 바삭한 껍질을 겹쳐 와앙 입에 집어넣었다.
“……그래. 손으로 안 집어먹는 것 만 해도 다행이다.”
거추장스러운 꽃장식이 잔뜩 올라 간 샐러드에서 로메인과 버터헤드, 무화과 따위를 한 움큼 덜어 접시에 올려주자 녀석은 또다시 히히 웃어 보였다.
“오, 여기 이 아가씨께서 바로 그 유명한 암……
눈을 반짝이던 궁중백은 흠, 헛기 침을 하더니 말을 고쳤다.
“포이닉스 경, 아니, 백작 각하의 부하 중에 동방대륙 출신의 여검사 가 있다고 들었는데, 바로 여기 계 신 분이겠군요.”
“부하는 아닌데……. 뭐, 동방에서 온 건 얘 하나뿐이긴 하죠.”
“과연.”
뭉치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자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 여겼 는지, 루피르투스는 유창한 밀라놀 어로 녀석에게 말을 건넸다.
“평소 동방의 문화를 흠모해 왔는 데, 상인이 아닌 동방인을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소. 아름다운 아가씨. 내가 그대의 이름을 물어봐 도 되겠소?”
“••••••아니.”
“……어. 으음, 아니, 라고?”
뭉치는 ‘뭐야, 이 병신은?’하는 눈 빛으로 궁중백을 흘긋거리더니 도로 오리에 집중했다.
“애가 말이 좀 서툴러서. 너무 신 경 쓰지 마십쇼.”
“아, 그렇습니까……
루피르투스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내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나저나, 아이스보발트의 영주가 되시다니 정말 축복받으셨군요. 이 미 아실지도 모르겠지만, 각하의 영 지가 된 장원들 중 ‘오드리스’라는 곳이 있습니다. 목재가 좋기로 널리 알려진 고장인데, 제가 가장 아끼는 가구가 바로 오드리스 산 장미목으 로 만든 책장입니다. 장미목의 그 우아한 향기가 스며드는 덕에 독서 의 홍취가 한결…… 난 무의식중에 앞에 놓인 술잔을 어루만졌다. 사자와 용 등 온갖 동 물이 양각된 주석잔이었는데, 이걸 로 머리통을 후려치면 사람 하나쯤 은 쉽게 닥치게 할 수 있을 것 같 았다.
“아, 이런. 잔이 비었군요.”
그의 호출을 받고 달려온 하인에게 냉수를 부탁하자, 루피르투스는 의 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술은 안 드십니까? 미텔탕에서 가 져온 포도주부터 한 번 맛보시지 요.” “아뇨, 괜찮습니다. 아이스보발트까 지는 한참이라.”
“예에? 만찬이 끝나면 돌아갈 셈이 십니까?”
“그래야죠. 황제가, 음, 황제 폐하 께서 베푸신 환대가 감사하긴 하지 만, 아시다시피 온 영지가 개판이라 할 일이 쌓여있거든요.”
당연히 핑계다.
아이스보발트는 물론이고, 프로스 하펜과 불푸르트 등 주요 점령지에 서는 이미 기사와 장교, 관리들이 한창 일을 하고 있다. 울카르 왕자 를 포함한 협상단이 잠시 자리를 비 운다고 해서 문제가 생길 일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 놓고 놀아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연단 주변을 지키고 선 병사들이 보이는 눈빛만 봐도 황제군이 우리를 어떻 게 생각하고 있는지 뻔히 보이는데, 어떻게 긴장을 놓고 술이나 퍼마시 겠는가.
딸그락.
문득 오른편을 돌아보니, 헤일라가 바닷가 방향을 바라보며 크림이 발 린 빵을 오물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앞에 놓인 주석잔은 깨끗이 비어 있 었지만, 붉게 남은 자국을 보아 포 도주가 가득 담겨있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내 빤한 시선을 느꼈는지, 헤일라 는 태연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며 빵 을 내밀어 보였다.
“……커스터드?”
“……아니, 됐어.”
내가 작게 한숨을 내쉴 즈음, 상석 쪽에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 다.
“으-하하하! 그래, 그렇단 말이지! 과연 자신감이 대단하군!” 울카르 왕자를 바라보며 손뼉까지 쳐가며 웃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루 일릭스 2세였다.
황금 가면을 벗은 대신 웬 베일을 두른 황제는 술잔을 크게 꺾더니 벌 떡 일어났다.
“우리의 적기사, 젤른트리를 달리 는 광소의 기수는 어디에 있나! 포 이닉스 폰 드펠켄 경!”
아이스보발트의 방백 작위를 얻은 직후, 황제는 내게 ‘드펠켄’이라는 성을 선물했다. 고대 슈파흐트어로 ‘두 뿔이 달린’이라는 뜻으로, 내가 바이콘을 타고 다니는 것에 착안하 여 만든 성이다.
원래 황제는 내 별명에서 딴 성을 주려고 했단다. 그런데 피투성이 검 사나 광소의 기수 등은 광명교도의 눈으로 봤을 때 불길하기 짝이 없 고, 적기사나 참수자 같은 별명에서 따자니 흔한 성씨밖에 떠오르지 않 아 드펠켄으로 골랐다고 한다.
……그런데, 마수인 바이콘에게서 딴 거면 그거대로 불길한 성 아닌 가?
내 새로운 성이야 어쨌든, 신이 난 듯한 황제가 계속해서 나를 찾고 있 었기에 눈썹을 긁적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 거기에 있었군!”
루일릭스 2세는 술잔을 쥔 손으로 나를 가리키며 유쾌한 목소리로 말 했다.
“내가 경을 찾은 건, 묻고 싶은 것 이 있어서일세.”
“말씀하십시오, 폐하.”
“만약에 말일세. 만-약에.”
베일 너머로 흐릿하게 보이는 황제 의 얼굴은 짓궂은 미소를 머금고 있 었다.
“나의 수호경인 파비오 장군과 경 이 겨룬다면, 그 승자는 누가 될 것 같나?”
무슨 상황인지 대충 짐작이 간다. ‘과연 누가 더 싸움을 잘 할까?’하 며 VS놀이라도 했겠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나는 망설 임 없이 대답했다.
“저 요.”
황제는 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