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497)
나의 악당들 497화
막간. 왕자의 유산(1)
밀라놀의 왕자이자 대륙 최대의 군 벌 중 하나인 울카르는 앙스트의 어 느 작은 강변마을에서 까만 연기에 휩싸여 사라졌다.
덩그러니 남겨진 은왕자의 부하들 은 주군이 자취를 감춘 바로 그 지 점을 떠나지 못했다. 장교와 하사관 들은 생존한 영민들을 돕고 부상자 들을 치료하고 시신을 수습하는데 집중했고, 귀족과 기사들은 주군의 실종에 대해 면밀히 조사했다.
울카르에게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 난 것인지, 전이였다면 그 목적지는 어디인지, 특이한 흔적이나 징후는 느껴지지 않는지.
또한, 혹시라도, 그가 다시 돌아올 가능성은 없는지…….
은왕자가 신뢰해 마지않던 전투마 법사들은 물론이고, 라오 가문의 석 학과 라-팔라이스 궁전의 고위마법 사들 역시 고개를 저었다.
칼란다리 교단의 가장 고귀한 성기 사와 은왕자의 군종사제들도, 노리 크회의 수도사들과 초원의 영혼주술 사도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그저 정황상, 마기의 작용에 의해 암흑계로 전송되었으리라 추측하는 게 전부였다.
닷새가 지날 무렵 은왕자의 부하들 대부분은 그들의 주군이 영영 사라 지고 말았음을 받아들였다.
포이닉스는 노리크회 성직자들에게 책임을 물었다. 그들이 데려온 동방 의 무승이 울카르 실종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일행을 대표해 젊은 수도사가 나서 ‘은왕자에게 일어난 흉사에 대해서 는 유감스러우나, 우리는 늘 그렇듯 주의 뜻대로 행동했을 뿐’이라는 논 지로 답했다.
다른 이들이 수도사를 성토하며 고 함을 지르는 사이, 적기사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는 노리 크회의 성직자들을 벌거벗겨 매질한 뒤 영지에서 추방했다.
포이닉스는 적 앞에서 그랬듯 악귀 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지도, 죽음 을 몰고 다니며 광소를 터뜨리지도, 온몸에 피칠갑을 하지도 않았다. 하 지만 그가 극도로 분노했음을, 주변 의 모든 이들은 명백히 알 수 있었 다.
물론 그 외 기사들 역시 별반 다 르지 않았다. 군대는 이글대는 침묵 에 휩싸여 아이스보발트로 귀환했 다.
다만 눈물마저 메마른 새매기사와 오래간 은왕자를 따른 몇몇 병사들 은 끝내 강변마을을 떠나지 못했다.
은왕자의 군대가 주인 없이 아이스 보발트에 돌아온 직후, 적기사는 늘 숙소로 삼던 도시경비대의 본부에 틀어박혔다.
그는 별명에 어울리지 않게도 며칠 전 백작위를 얻었다. 은왕자군의 수 뇌 중 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아이 스보발트의 주인이고 오브도르프 지 방의 절반을 차지한 영주이며, 제국 동쪽 변경의 종신 원수이기도 한 것 이다. 그런 포이닉스가 두문불출하 니 당혹스러워하는 자들이 속출했 다.
당장 처리해야 할 현안이 산더미처 럼 쌓인 탓에 도시의 관료와 조합장 들, 지휘관과 장교들이 적기사의 처 소로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적기사의 친병들 그리고 사 병이나 다름 없는 경비대원들은 본 부를 철통같이 지켰다. 제 우두머리 를 닮아 포악하기 짝이 없는 친병들 은 당장 꺼지지 않으면 지하 감옥에 처넣어주겠다 으르렁댔고, 잠시 모 여든 군중은 얌전히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사실은, 포이닉 스 대신 그의 사촌이자 약혼녀라 알 려진 헤일라가 하루에 두어 시간씩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적기사가 아이스보발트를 점령한 직후에 그랬던 것처럼, 그녀는 상설 재판소의 집무실에서 가장 급하고 중요한 업무들을 처결했다.
헤일라는 다른 모든 것들에 앞서, 사방으로 전령을 보냈다.
새로운 영주의 등극을 선포하는 동 시에 일곱 성채의 성주들과 그 외 군사 거점을 지키는 소규모 부대의 지휘관들, 각 장원의 하급 귀족과 지주들, 직할 정착지의 대관과 촌장 등등을 모조리 불러오기 위한 것이 었다.
그 소환령을 받아든 자가 누구든, 현재 지위를 유지하고 싶다면 즉시 아이스보발트로 달려와 충성을 맹세 해야 할 것이다.
그녀는 의도적으로 첫 번째 명령을 아이스보발트 전체에 퍼뜨렸다.
눈치 빠른 인사들은 상설재판소로 달려와 포이닉스의 지위와 그에 따 른 지배권을 존중함을 정확한 문장 으로 선언했다. 그리고 시급하고 핵 심적인, 주로 자신들의 기득권과 관 련된 논의를 시작했다.
헤일라는 조직과 재무 등 행정사무 는 군말 없이 처리했지만, 외교와 군사에 관련된 일에는 거의 손을 대 지 않았다.
영지에 속한 하급 귀족이나 지휘관 들을 소집하고 주변 영주들에게 방 백의 등극을 알리긴 했지만 그것들 은 통치권 확립을 위한 행위였다. 스스로 선을 그은 듯 그 이상의 일 은 신경도 쓰지 않았고, 관련 사안 을 들고 온 이는 대면조차 해주지 않았다.
군무 중 일부는 적기사의 사병들 사이에서 대장 역할을 하는 30대 후반의 베테랑, 컨휘어가 맡았다.
그는 이전부터 하던 대로 도시에 비축된 물자를 분배해 보급을 유지 하고, 망루와 성벽을 보수하고, 성문 수비대와 도시경비대를 지휘했다. 그렇게 치안을 유지하려 노력하긴 했지만, 아이스보발트는 여전히 어 수선했다. 도시에 주둔하고 있는 대 군 중 컨휘어의 통제를 받는 건 한 줌에 불과했던 탓이다.
은왕자의 직속 병력, 은왕자를 도 와 참전한 여러 영주의 군대, 각지 에서 고용되어 이곳에 이른 용병들, 거기에 누데인족 전사들까지 무장한 인원만 삼천오백 이상이었다. 전령 이니 칙사니 하며 알음알음 도시로 흘러든 자들이 호위랍시고 끌고 온 게 수백에 이르렀고, 감옥이 꽉 차 는 바람에 대충 헛간이나 울타리를 두르고 방치한 전쟁포로도 수천이었 다.
거기에 더해, 수만의 병력을 몰고 국경 근처를 기웃대는 왕태자 자카 리스가 보낸 일행까지 컨휘어가 관 리해야 했다. 그야말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으나, 그에게 도움의 손 길을 내미는 이는 극히 소수였다.
사흘에 한 번 꼴로 경비대 본부를 나서 누데인족 전사들의 방종을 단 속하는 아탈란테나, 다른 친병들이 게으름을 부릴 때 엉덩이를 걷어차 주는 우테콰이, 불만에 찬 참사회의 사제들을 상대해 주는 테오도라 정 도가 전부였다.
은왕자군의 수뇌인 주요 기사들은 그들의 주군이 설치해 둔 천막에 모 여앉아 의미 없는 언쟁과 토론만 연 일 이어갔다. 여러 영주들을 포함한 승전의 조력자들은 자신의 몫을 확 인받거나 조금이라도 더 얻어내기 위해 회의장을 기웃거렸다.
그렇게 도시의 혼란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즈음. 적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경비대 본부의 중정에 나선 포이닉 스는 피로로 얼룩진 얼굴로 기지개 를 켰다.
“끄으응……
제아무리 초인적인 육신의 소유자 라도 보름 넘게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으니 지치고 쳐지는 건 당연했 다. 게다가 경비대 본부에 틀어박힌 동안에는 하루의 절반 이상을 성교 와 음주로, 나머지는 깊은 고민으로 채웠으니 몸이 축나지 않는 게 오히 려 이상할 지경이었다.
“마실 것 좀 줘봐. 술 말고.”
“옙, 여기 있습니다.”
커다란 주석잔을 단숨에 비우는 포 이닉스의 눈치를 살피며, 초장이 골 만은 슬쩍 질문을 건넸다.
“나리. 오늘은……
“오늘은, 뭐?”
“그게- 아시다시피, 나리를 기다리 는 분들이 많습니다.”
덩치만 큰 소년에 이어 스티드먼이 말을 덧붙였다.
“컨휘어야 말할 것도 없고, 헤일라 아가씨도 슬슬 한계이신 것 같던데 요.” “그래?”
“다른 군영들도 분위기가 영 흉흉 하고……. 1왕자군 때문에 별별 헛 소문도 돕니다.”
“자카리스가 왜?”
웬일로 그가 귀를 기울이는 모습을 보이자, 야경꾼 딜런도 한마디를 보 탰다.
“최후통첩을 하러 전령을 보냈다니 뭐라니 하는 거죠. 오든록에서 온 놈들은 자기가 왜 여기 죽치고 있어 야 하느냐고, 얼른 보상을 받고 떠 나고 싶은 티를 팍팍 냅니다. 루얀 후작님은 당장 불푸르트로 전군이 이동해야 어쩐다 날뛰시고, 하여튼 다들 난리도 아닙니다.” 덩굴무늬가 새겨진 석재 울타리에 걸터앉은 채, 포이닉스는 말없이 눈 썹을 긁적였다. 그가 침묵을 지키자, 말총머리 프리츠가 답답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거, 대체 언제까지 이러고 계실 겁니까? 앞날을 구상하니 어쩌니 하 며 처박혀만 있으면 뭐가 나오긴 합 니까?”
그는 디렌츠에서의 전투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닷새 만에 정신을 차 렸다. 눈동자를 반쯤 덮은 녹내장과 고장 난 신경을 모두 회복하려면 사 제의 치료를 두어 달은 더 받아야 했으나, 프리츠는 아무런 일도 없었 던 것처럼 팔팔했다.
“이렇게 궁상떠는 이유를 모르겠 네. 뭐, 슬퍼서 그러는 겁니까? 적 병 모가지는 무슨 포도알처럼 따시 던 분이, 주변 사람 몇 명 죽으니까 못 견디겠습니까?”
“……말이 왜 이렇게 많아. 깝죽거 리지 말고 좀 꺼지면 안 되냐? 교 회 안 가?”
“교회는 나리부터 가셔야 될 것 같 은데요.”
“이 미친 새끼가, 끝까지.”
적기사의 얼굴이 한껏 일그러진 다 음에야 프리츠는 툴툴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하아, 씨발.”
포이닉스는 굵은 수염에 뒤덮인 턱 을 벅벅 긁었다.
사실 결정은 진즉에 내렸다. 그저 아무 것도 하기 싫어서, 극심한 스 트레스를 견뎌내기 위하여 주어진 결론을 애써 무시했던 것이었다.
“좋아.”
그는 눈을 쓱 비비더니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그 순간 친병들은 주인이 다음으로 꺼낼 말을 알아챌 수 있었다. 아름 다운 흑색 눈동자가 밝고 뚜렷한 빛 을 흘렸기 때문이다.
“미뤄둔 일을 처리해야지.”
친병들 사이에서 화색 어린 눈길이 오갔다. 골만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 다.
“예, 나리! 갑주를 준비하겠습니 다.”
“갑옷은 됐어.”
포이닉스는 기다리라는 말을 남긴 뒤 2층의 내실로 돌아갔고, 잠시 후 깔끔한 행색으로 다시 나타났다. 황 금 단추가 달린 검은색 튜닉에 같은 색상의 바지, 윤기가 감도는 허리띠 와 장갑을 갖춘 멋들어진 차림새였 다.
“남는 칼 있는 사람?”
포이닉스가 빈 검대를 툭툭 두드리 며 말하자, 그의 마도구와 장비들을 관리하는 에손이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섰다. 그는 조금 어두운 얼굴이었 다.
“일단, 한동안은 이걸 쓰시겠습니 까? 이보다 쓸 만한 물건이 없어서 요.”
……으 »
에손이 내민 것은 어지간한 양손검 보다도 길고 커다란 중검이었다. 무 게가 가볍고 무게중심도 잘 잡혀있 는, 보기 드문 명검.
죽음의 왕이 거느린 해골기사에게 서 빼앗아, 중검사 움베르타에게 맡 긴 ‘성자의 파멸’이었다.
“그래.”
적기사는 담담한 얼굴로 칼을 받아 검대에 걸었다. 얼마 전 떠나보낸 부하들을 떠올리는 듯, 그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가만히 칼자루를 쥐어보는 포이닉 스의 뒤로, 아탈란테가 모습을 드러 냈다. 혼자 나타난 그녀를 보고 골 만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분들은요?”
“아직 자. 둘 다 아무것도 안 입고 있으니 깨울 생각은 말고.”
“예? 어, 아니, 저는-”
당황한 골만이 무어라 답하기도 전 에, 아탈란테는 포이닉스의 손을 이 끌고 경비대 본부를 나섰다.
적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는 소식 에, 시장 관저가 있던 자리에 위치 한 은왕자군 주둔지는 금세 시끌벅 적해 졌다.
줄곧 자리를 지키고 있던 기사들은 물론이고, 지지부진한 상황에 지쳐 사태를 관망하던 영주들과 그 외 관 련자들이 모두 모여든 것이다.
“나리, 잘 오셨습니다.”
“포이닉스 경.”
군영에 들어서자마자 익숙한 얼굴 들이 포이닉스를 맞이했다. 울카르 의 부관 노릇을 하던 길버트를 필두 로 한 장교와 하사관들, 기사의 종 자들 등 여러 전투를 함께한 동료들 이었다.
그 모든 이들이 자신을 기다렸다 생각하니 포이닉스는 가슴이 조금 뜨끔하졌다. 그로서는 다행스럽게도, 악수하거나 눈인사를 나누는 동안 그 누구도 책망하거나 탓하는 기색 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었다.
장교와 하사관, 종자와 병사들 구 분할 것 없이 그들의 시선에는 경외 와 신뢰가 가득했다. 주군의 일곱 번째 기사이자, 전설적인 무용으로 모든 전투를 승리로 이끈 사내에게 마땅히 보일 태도였다. 주군을 잃은 슬픔에 고작 며칠간 방황한 정도로 는 적기사의 명성에 어떠한 홈도 남 길 수 없었다.
나름 절제된 환대에 일일이 감사를 표하던 포이닉스는, 주둔지 한가운 데에 이르러 슬쩍 미간을 좁혔다. 울카르가 쓰던 커다란 군막 앞에 선 그는 살짝 헛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이건?”
울카르의 군막은 속이 훤히 들여다 보였다. 여덟 면의 천을 모두 위로 젖혀둔 탓이다. 전면을 개방한 군막 은 꼭 커다란 캐노피처럼 보였다.
“어서 오시오, 포이닉스 경.”
“랭볼트 경.”
그리 크지 않은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수십 명이 빼곡히 모여 앉아 있었다. 개중 신분이 높은 자들은 앞줄에, 그보다 뒤처지는 자들은 뒷 줄에 앉는 식이라 좌석은 세 겹짜리 타원형으로 깔려 있었다.
그중 가장 상석, 즉 울카르가 즐겨 앉던 자리는 당연하다는 듯 비어 있 었다. 그 옆자리에 앉아 있던 랭볼 트가 입을 열었다.
“일부러 열어두었소. 소수의 인원 들이 수군덕대는 대신 주군을 모시 던 모든 이들이 함께하길 바랐거 드 ”
“그렇군요.”
포이닉스는 천천히 군막에 들어섰 다. 자리에 앉은 수십 명에 더해, 근처에 모여든 수백 명의 병사들의 시선이 그에게 몰려드는 것만 같았 다. 아니, 실제로 그랬다.
“좋은 생각 같습니다.”
“그리 말할 줄 알았소.”
평소의 당당함은 어디 갔는지, 무 기력하게 몸을 늘어뜨린 랭볼트가 한편을 가리켰다. 그를 위해 비워둔 좌석에 앉으며, 포이닉스는 모여든 면면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은 테이블 좌우로 나뉘어 자 리를 잡았는데, 오른편은 울카르 왕 자의 부하들이고 왼편은 조력자들이 었다.
울카르의 기사들은 에드버트, 솔튼, 스티에드 등 전사한 자들과 디렌츠 에 남은 지젤라를 제외하고 총 열여 섯 명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은왕자의 지휘관인 해럴드와 고위 장교들이 그 옆에, 마법사인 리몬드 와 에포즈, 군종사제인 고스패트릭 신부가 또 그 옆자리를 채웠다. 가 장 말석에는 용병대장인 ‘방패처녀’ 그라니아가 앉아 있었다.
반대편에는 ‘어린 나가’ 아이네스 백작과 그녀의 당숙인 ‘인색한’ 시 릴로 자작이 여러 가신들을 거느리 고 착석해 있었다.
‘오든록의 챔피언’ 데일레시드와 향사 브랜, 마도사 오그슐리조 등이 또 한 덩어리를 차지했다.
왼편의 말석에는 고원의 대영주인 액소드브룩 가문과 운파스트, 파스 트 일대의 대영주인 드리시르 가문 이 임시로 보낸 사절들이 앉아 있었 다.
“이리 모습을 드러낸 것을 보니 고 민은 끝난 모양이군. 맞소?”
“예, 맞습니다.”
“그럼 어서 시작하시오. 다들 경의 의견을 궁금해하고 있으니.”
랭볼트가 의욕 없는 목소리로 권하 자, 포이닉스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 다.
“그 전에……
“그 전에?”
“여기 모인 분들이 내리신 결론을 먼저 듣고 싶습니다.”
“유감이지만, 그럴 수가 없소.”
안키르가 조금 성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못했기 때 문이지. 한심하게도.”
그는 부리부리한 눈으로 건너편에 앉은 영주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몇 몇 장사들이 거인 기사의 시선을 맞 받았고, 장내의 분위기는 금세 싸늘 히 식어갔다.
“그럼 어떤 고견을 가지고 계신지 먼저 듣고 싶습니다. 뒤늦게 나타나 이런 말을 하는 게 조금 염치없지 만, 지금 어떤 부분이 문제가 되고 있는지 전혀 모르겠거든요.”
적기사가 위명에 걸맞지 않는 정중 한 태도로 말하자, 테이블에 모여 앉은 이들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 다. 랭볼트가 무어라 입을 꺼내려던 찰나 상석의 반대편, 그러니까, 좌우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자리에 앉 은 소년이 입을 열었다.
“그럼 사양하지 않고, 나부터 의견 을 말하겠소.”
오브도르프와 앙스트의 대영주이 자, 반쪽짜리 투표권을 가진 선제후 인 루얀이었다. 그는 잘생긴 얼굴 가득 자신감을 채운 채 자리를 박차 고 일어났다.
이 자리에 모여든 이들 중 가장 작위가 높으니 당연히 먼저 발언하 겠다는 태도가 훤히 엿보였으나, 그 게 영 억지는 아니라 대놓고 불만을 표하는 자는 없었다.
“일단 지금 시점에서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앉으십시오.”
“-므, 뭐요?”
“앉으시라 했습니다.”
그렇게 말한 건 방금까지 나긋한 태도로 양해를 구하던 포이닉스였 다. 예상치 못한 요구에, 루얀은 슬 쩍 미간을 좁혔다.
“의견을 듣고 싶다더니, 난데없이 앉으라고? 지금 의견을 밝히고 있는 게 보이지 않소?”
“제가 듣고 싶은 건 각하의 의견이 아닙니다.”
“하. 그게 대체-”
“그만.”
막 언성을 높이려던 소년이 얼어붙 듯 몸을 굳혔다. 적기사의 고요한 시선이 그를 향한 직후였다.
“바지사장에게는 발언권이 없어.”
“그, 그……
“입 다물고 앉아. 지하 감옥에서 알첸버그의 노예병들과 살 비비고 싶지 않으면.”
루얀은 몸을 벌벌 떨면서도 포이닉 스를 마주 노려보았다. 이를 악문 소년은 버티려 안간힘을 썼으나, 적 기사의 기세는 끝내 그를 주저앉혔 다.
“자, 다음.”
포이닉스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여상스러운 얼굴로, 하지만 조금 가라앉은 눈빛으로 좌중을 돌아보았 다.
“말씀하실 분?”
수십 명이 둘러앉은 테이블에 침묵 에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