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52)
나의 악당들 052화
14. 광전사(3)
“Aqun-ta!”
이 세상에 온 뒤로 나-포이닉스-보 다 키가 큰 사람을 본 건 이걸로 두 번짼가.
첫 번째는 ‘거대한’ 안키르 경이었 다. 그는 나보다 반 뼘쯤 큰, 그러 니까, 2미터를 조금 넘길 만한 키의 장사였다.
여기 사람들의 덩치가 중세 수준인 것을 감안하면 ‘거대한(the giant)’이 라는 별명은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두 번째가 바로 저 사내였다.
220은 넘지 않을까 싶은 키에, 몸 무게는… 예상조차 안 된다.
스트롱맨 대회에서나 볼 법한 어마 어마한 상체를 훤히 드러낸 사내가 재차 고함을 질렀다.
“Braak t’yaccet!”
이해할 수 없는 외침이었지만, 거 기에 담긴 감정만은 선명하게 느껴 졌다.
그것은 분노였다.
불그스름한 피부, 지구의 동양인을 닮은 이목구비, 길게 땋은 머리.
통이 큰 가죽바지와 짐승의 뼈를 엮어 만든 목걸이.
팔과 어깨에 새겨진 기하학적인 문 신들, 어지간한 아이의 몸통보다 큰 바윗돌을 머리로 삼은 육중한 메 (stone maul).
수염은 기르지 않았지만 대충 30 대 중후반 정도는 되어 보이는 사내 였다.
그 이국적인 거구가 달려드는 모습 은- 낯설고도 친숙한 것이었다.
반면 다른 일행들은.
“…저거 뭐야, 사람이야?”
“저, 저런 건 나도 처음 보는군.”
멍하니 중얼거리는 아르날과 루크 씨를 포함하여, 다들 패닉 상태였다.
“아이보! 화살을 쏴!”
“으어, 네, 네!”
란델 씨의 명령에 젊은 척후병 아 이보는 경황 중에 시위를 당겼다.
거구의 사내는 빠르게 가까워지는 중이었고, 상체는 맨살을 훤히 드러 낸 채라 노리기 좋은 표적이었다.
그러나. 쐐애액!
정확히 가슴을 노리고 날아간 화살 이 살갗을 꿰뚫기 직전, 사내의 어 깨에 새겨진 문신이 검게 빛났다.
그러자 화살은 홱 꺾이더니 허무하 게 바닥에 처박혀 버리는 것이었다.
“바람의 장막 문신….”
비녕日마법적 투사체를 막아내는 사기적인 스킬이다.
5포인트쯤 투자했을 테니 어지간한 위력의 활이 아니면 절대 저 가호를 뚫을 수 없을 터였다.
멍하니 사내의 돌진을 바라보던 나 는, 엘렌이 불꽃화살을 쏠 즘에야 정신을 차렸다.
“잠깐, 멈춰!”
그러나 불꽃화살은 이미 엘렌의 손 을 떠나간 뒤였다.
젠장, 저 문신은 마법은 못 막는 데!
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사내는 마 울을 휘둘러 불꽃화살을 후려쳤다.
후와악!
화살에서 터져 나온 불꽃이 사내를 휘감았다. 강렬한 열기가 피부를 불 태우는 와중에도 사내는 짐승 같은 으르렁거림과 함께 코앞까지 쇄도했 다.
“어, 잠깐—”
난 그제야 사내의 프로필을 떠올렸 다.
캐릭터 명, ‘Deep公DarkSFantasy’.
문신 계열 스킬을 주로 찍은 16레 벨의 광전사.
“이게 뭔 개 같은.”
뒷걸음치는 일행들과는 반대로, 나 는 사내를 향해 몸을 날렸다.
내가 아니면 저 무시무시한 돌진을 막을 수 없으리라는 걸 깨달았기 때 문이다.
“우워어어!”
그리고, 거센 포효와 함께 휘둘러 진 마울이 방패를 후려친 순간 또다 시 깨달았다.
내 육성법에 따르면, 16레벨의 광 전사의 근력은-
“이런 씨표-”
콰앙!
30이 조금 안 된다.
어마어마한 힘과 무게가 실린 일격 에 방패가 산산이 터져나갔다.
그와 동시에, 나는 밤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단상(斷想).
다크월드에서 가장 선호하는 플레 이어블 캐릭터를 고르라고 한다면, 곧바로 대답할 수 있다.
당연히 혈기사거든. 고민할 것도 없지.
그럼 두 번째로 선호하는 캐릭터를 고르라고 한다면?
글쎄….
한 5초쯤 망설인 뒤에 버서커, 그 러니까, 광전사를 고를 거다.
진짜 재밌긴 한데, 혈기사
플레이타임이 긴 광전사를 버릴 수는 없거든.
광전사는 스킬이 단조로워서 노잼 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던데- 난 잘 모르겠더라.
힘을 60 넘게 찍은 광전사로 땅을 내리찍으면 모니터가 박살 나는 것 같은 타격감이 느껴지는데 말이지.
PvP를 할 때도 얄밉게 도망치는 캐스터 캐릭터를 악착같이 쫓아가 한방에 터뜨려 버리면 얼마나 기분 이 상쾌한데.
뭐, 광전사가 PvP에서 상성을 심하 게 탄다는 건 어느 정도 사실이다. 유틸기나 생존기가 은근히 적어서 컨트롤로 극복할 여지가 적다는 것 도 사실이고.
그래도 캐릭터를 스무 개쯤 갈아 넣으니 PvP도 나름 괜찮던데….
쿠당탕!
광전사의 마울에 처맞은 직후부터 잡생각을 시작했는데, 이제야 바닥 에 떨어졌다. 대충 십 미터는 넘게 튕겨 나간 것 같다.
X팔, 내가 야구공도 아니고.
“크으,”
낙법을 치며 재빨리 일어난 뒤, 피 맛이 감도는 침을 탁 뱉었다.
마울이 작렬한 순간 힘을 흘린다고 흘렸는데- 방패는 작살났고 손목과 팔꿈치는 비명을 지르는 중이다.
끄응, 아무래도 금이 간 것 같은 데. 광전사랑 정면으로 붙은 내가 등신이지.
그렇게 생각하며 광전사를 돌아보 는데.
후웅, 퍽!
놈은 그라니아와 란델 씨와 대치한 상태로, 엘렌이 전개한 바람주먹에 얻어맞고 있었다.
펑, 펑- 공기가 터질 때마다 광전 사는 짜증스럽다는 듯 손을 휘저어 댔다.
•••저거 꽤 아플 텐데. 모기를 쫓아 내는 것 같은 표정은 뭐야.
그러던 중 광전사는 쉴 새 없이 무어라 떠들어대는 엘렌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귀찮은 마술이 녀석에게 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눈 치였다.
놈은 앞을 가로막은 그라니아와 란 델 씨에게 마울을 휘두르려 했지만, 곧장 달려든 내가 조금 더 빨랐다.
무릎을 노리고 낮게 그어진 펄션에 광전사는 미간을 찌푸리며 슬쩍 물 러섰다.
“Gua lune’te.”
“뭐라는 거야, 이 새끼가!”
곧장 스킬을 전개한 내가 사납게 쏘아붙이자, 광전사는 놀란 눈으로 핏빛으로 물든 칼날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Arh- Darran kel…!”
하고 신음하듯 중얼거리곤 별안간 덤벼들었다.
후우웅!
상체를 비틀어 마울을 피하는데, 엄청난 풍압이 목덜미를 스쳤다.
어지간한 장사가 아니고선 절대 실 전에서 쓰지 못할 마울이었지만, 광 전사는 이 무식한 무기를 자유자재 로 다루었다.
육중한 무게 때문에 언뜻 굼떠 보 였지만, 큰 궤적을 그리며 가속도가 붙었을 땐 그야말로 벼락같은 기세 를 뿜는 것이었다.
“ O ” 어、•
그래도, 못 피할 정도는 아니었다.
광전사의 파상 공세를 흘려내 다가 빈틈을 발견하고 잽싸게 몸을 날렸다.
“흐읍.”
슬라이딩하듯 바닥을 쓸며 마울을 피한 뒤, 광전사를 향해 개구리처럼 펄쩍 뛰어올랐다.
근력은 놈이 훨씬 높겠지만, 민첩 과 건강은 분명 내가 높을 것이다.
레벨이 낮긴 해도, 나는 ‘용살자의 반지’라는 최상급 스탯 뻥튀기 아이 템이 있거든.
“크으!”
과연, 광전사는 내 민활한 움직임 을 제대로 따라오지 못했다.
급하게 마울을 당기며 두툼한 자루 를 내질렀지만, 팔뚝 안쪽을 노린 찌르기를 막아낼 수는 없었다.
그렇게 펄션의 선홍빛 검첨이 살갗 을 찢어발기려는 찰나.
번쩍!
순간 광전사의 등에서 뿜어진 검은 오라가 날 밀어내었다.
“어 억.”
같은 극을 마주한 자석이 밀려나 듯, 난 멀찍이 튕겨 나가 땅을 굴렀 다.
“크억 _w 뭐야, 이거? 설마 ‘밤하늘 문신’ 효 과인가?
위기 상황에서 무기를 튕 겨내는 정도가 다였는데, 현실에선 아 예 패대기를 쳐버리네?
끄응, 발동 쿨타임은- 한 40초 정 도 되려나. 얼른 후속타를 넣어 야…!
“포이닉스 군!”
이를 갈며 재차 광전사에게 덤벼들 려는데, 뒤에서 루크 씨의 급한 목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광전사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목청을 돋워 대답했다.
“해적입니까?”
“아니, 그게 아니네! 싸움을 멈추 게! 저 야만인은 지금 오해를 하고 있어!”
“저도 아는데- 이 새끼, 말이 안 통합니다!”
목소리가 가까워지자, 으르렁거리 며 대치하고 있던 광전사가 내 어깨 너머로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그러 곤 눈에 띄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Utequais! A th’ol en qun-ta!”
“Hatanka?”
“Th’ol en ar-kara, Orrendae!”
쉰 목소리로 광전사에게 호통을 치 는 이는, 스스로를 ‘리쿠와의 하탄 카’라고 소개한 노인이었다.
그는 루크 씨의 부축을 받아 이쪽 으로 걸어오고 있었는데, 옆구리의 상처 때문인지 눈이 반쯤 풀려 있었 다.
광전사는 노인과 나를 곁눈질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후우.”
그 모습에, 나는 머리를 달구던 열 기를 식히며 펄션을 칼집에 집어넣 었다.
그러자 내 뒤편에서 불꽃화살을 쏘 아내기 직전이던 엘렌은 불안한 목 소리로 속닥거렸다.
“포이? 괜찮은 거야?”
“아마. 일단 다들 물러나.”
“하지만, 저놈-”
“ 얼른.”
내가 그렇게 말하며 슬쩍 길을 터 주자, 광전사를 둘러싸고 있던 일행 들 역시 일제히 물러섰다.
다들 잔뜩 경계하는 눈치로 무기를 치켜든 채였지만, 애당초 광전사는 다른 일행들에겐 시선도 주지 않고 있었다.
광전사는 나를 잠시간 지긋이 바라 보더니, 이내 노인을 향해 달려갔다.
“Hatanka!”
“Utequais.”
긴장으로 몸을 굳히고 있던 것도 잠시.
광전사는 노인의 최후가 다가왔음 을 깨달은 듯했다.
내 귀에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노인이 무어라 말하자, 광 전사는 그의 곁에서 무릎을 꿇은 채 어깨를 잘게 떨었다.
가만히 모습을 지켜보다 문득 광전 사 캐릭터의 디폴트 네임을 떠올렸 다.
‘하탄카 우테콰이’라는 이름이었지. 그러고 보니 노인이 광전사를 ‘우테 콰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혹시 ‘하탄카’가 성 같은 건가? 그 럼 노인과 광전사는 가족관계일 수 도….
“우린 지금 이럴 시간이.”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란델 씨가 남쪽을 흘긋거리며 길을 재촉했지만, 나는 잠자코 고개를 저 었다.
또 다른 서브 캐릭터와 만난 운명 의 순간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봐야 했다.
짧은 대화가 끝나고, 노인은 떨리 는 손으로 워바닛을 벗어들었다.
그러곤 그 화려한 예장모(禮裝帽) 를 우테콰이에게 씌워준 뒤 숨을 거 두었다.
우테콰이는 노인과 이마를 맞댄 채 무어라 중얼거리더니 벌떡 일어났 다.
그러곤 특이한 복장을 한 여인-아 마도 주술사인 것 같다-의 시체에 다가가더니 손가락에서 붉은 뼈 반 지를 회수했다.
일련의 행동을 마친 광전사는 이쪽 을 휙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고맙다. 죽음 봤다.”
•••이놈, 밀라놀 어를 알잖아?
어색한 발음에 짧은 어휘였으나, 그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그리 어렵 지 않았다.
나는 욱신거리는 왼팔을 주무르며 질문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지?”
“너와 싸우지 않는다. 떠난다.”
“짐작하고 있겠지만, 주변엔 도적 들 천지야.”
가만 보니 우테콰이는 상반신 일부 에 화상을 입어 피부가 벌겋게 짓물 러 있었다.
엘렌의 불꽃화살이 남긴 상흔이겠 지. 꽤 따가울 텐데 우테콰이는 아 무런 내색도 보이지 않았다.
“상관없다. 두려움 없다.”
“그러다 사냥당하는 멧돼지 신세가 될걸? 놈들은 천 명도 넘어.” 그는 잠시 얼굴을 굳히더니 나와 눈을 맞췄다.
“그래서?”
“날 따라와. 개죽음당하지 않게 해 줄 테니까.”
밤하늘을 닮은 새까만 눈동자는 아 무런 흔들림도 없었다.
덕분에 그가 지금 고민을 하는 중 인지, 아니면 알아듣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나를 의심하는 중인지 판단 할 수가 없었다.
“잠깐, 지금 저놈의 뭘 믿고.”
“좀 닥치고 있어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초조한 기색의 란델 씨에게 단호한 투로 쏘아붙이면서도 광전사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짦은 침묵 끝에 우테콰이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탄카라고 불러라.”
“난 포이닉스. 바로 움직여야 하는 데, 괜찮나?”
우테콰이는 잠시 주변의 시신들을 돌아보더니 대답했다.
“가지.”
“좋아. 가죠, 다들.” 몸을 돌려 비밀통로를 향해 달리기 시작하니, 우테콰이가 곧장 내 뒤로 따라붙었다.
“미친, 이게 대체 뭔 일이야?”
“갑자기 야만인과 동행하다니….”
“일단 가세.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지 않나.”
아르날과 란델 씨, 그리고 루크 씨 의 목소리가 차례로 들려왔다.
이내 다른 일행들도 약간의 거리를 둔 채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