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ounts gone crazy RAW novel - Chapter 107
107화
아렌의 한 마디에 잉그리드를 비롯한 모두의 움직임이 멈췄다.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한 마디가 퍼트린 파장은 그만큼 컸고, 모두가 쉬쉬하던 것을 정확히 건드린 것이다.
“아직 기억이 완전치는 않다만.”
그런 이들을 지나쳐 잉그리드의 맞은편에 걸터앉은 아렌이 잉그리드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나와 로렌 형에게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한 적이 있느냐? 나는 없다만.”
태연히 찻잔에 차를 따라 마시는 모습이 우아하기 그지없었지만, 아렌의 그 모습을 직시하는 이는 없었다.
“……너. 너!”
푸들푸들 떨리기 시작한 잉그리드의 얼굴과 대조되는 차분한 표정의 아렌이 인상을 찡그렸다.
“차 우리는 솜씨가 엉망이군. 찻잎이 아깝구나.”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혹평에 시녀가 움찔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난 네 어머니다. 어떤 귀족가에서도 안주인에게 이런 폭언을 하는 경우는 없어!”
잉그리드의 입에서 뒤틀린 음성이 튀어나왔지만, 아렌은 표정하나 변하지 않았다.
“틀린 말은 아니지.”
의외로 순순히 인정하는 모습에 엘렌을 시녀에게 넘기고 아렌의 뒤에 선 에드워드마저도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어지는 아렌의 말에 입을 쩍 벌렸다.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 이제 와서 양어머니로 대접해 달라고? 내가 길을 나서던 날 내 신변을 위협하기 위해서 기사단을 보내고, 유피테르에 있는 별장을 팔아서 내 명예를 떨어트리려고 한 너를 말이냐?”
아렌의 몸에서 피어나기 시작한 기세에 기사들의 안색이 변했다.
“병을 앓고 있는 로렌을 불쌍히 여기는 것도 아니고, 아예 죽으라고 저주 마법진에 독까지 투여하는 널?”
잉그리드가 창백한 안색으로 뒤로 물러났고, 다렌의 눈이 커졌다.
“어머니!”
“아. 아니야! 로렌에게는 손대지 않았어!”
발작하듯 외치는 잉그리드의 말에 다렌의 안색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제아무리 배가 다르고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해도 피를 나눈 형제다.
그런 형제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어떤 처우를 받고 있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난 이 순간, 다렌의 심정은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로렌에게 손을 쓰지 않았다는 것은 진심인 것 같지만, 반대로 이야기하면 아렌에게 손을 쓴 것은 맞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잉그리드의 교육으로 조숙한 정신을 가진 다렌의 머릿속을 엉망으로 흐트러트리기에는 충분한 이야기였다.
‘훌리오의 독단인가? 아니면 게하르 자작가의?’
지금 이 순간 그 어느 때보다 예민해진 에드워드의 감각은 잉그리드와 다렌, 시녀들과 기사들의 움직임을 낱낱이 살피고 있었다.
사소한 행동, 숨소리, 무의식적으로 발현되는 몸동작 하나하나가 정보를 전달해 주고 있었고, 에드워드의 머릿속에 차곡차곡 정리가 되었다.
‘일단 둘째부인은 아닌 거 같군.’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이내 앞으로 펼쳐질 일을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그나마 핏줄이라도 이어져 있다면 천륜을 어떻게 할 수는 없으니 어떻게든 참았을 거다. 형과 함께 조용히 은거를 택했을 수도 있었겠지.”
나직한 독백이었지만, 아렌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듣는 사람의 심장을 송곳처럼 찔렀다.
“그런데 넌 아니지 않느냐?”
냉엄한 한 마디에 잉그리드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사람이 자신의 목숨을 지키는 것은 본능이다.”
순진무구하게 잠든 엘렌과 참혹하게 일그러진 표정을 하고 있는 다렌을 슬쩍 본 아렌이 말을 이었다.
“당연히 나도 내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본능을 다해야겠지. 아예 적극적으로 움직여 볼 판이다.”
아렌의 선언에 에드워드를 비롯한 기사들의 안색이 굳어졌다.
“입맛만 버렸군.”
모두를 굳어 버리게 만든 아렌이 찻잔을 테이블에 놓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시 한번 말하지.”
옷 가짐을 가다듬은 아렌이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게하르의 잉그리드.”
준엄하기까지 한 아렌의 말에 잉그리드의 몸이 떨렸다.
“너는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없다.”
초인의 말에 담긴 의지가 세상을 자극했고, 그 순간 묵직한 기운이 퍼져나갔다.
마나를 느낄 줄 아는 자들의 안색이 변했다.
방금 아렌의 한 마디가 한없이 무거운 의미를 담은 맹세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너에게는 미안한 일이 될지도 모르겠구나.”
뭐라 말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다렌과 시선을 맞춘 아렌이 말을 이었다.
“그래도 일이 이렇게 되어 버렸으니 어쩔 수 없지.”
몸을 돌리는 아렌의 뒷모습에 모두의 시선이 박혔다.
“내가 시작한 일이 아니라는 것만 기억해라.”
다렌의 표정이 일그러졌지만, 아렌은 그 모습을 보지 못한 채 걸음을 옮겼다.
황망한 표정의 잉그리드와 무거운 표정의 기사들의 시선이 아렌과 에드워드의 등에 박혀들었다.
“아. 그렇지.”
말과 함께 걸음을 멈춘 아렌이 몸을 돌린 채로 손을 들어 올려 가볍게 허공을 눌렀다.
콰드드득!
“으아악!”
“커억!”
“카아악!”
끔찍한 소리와 함께 잉그리드와 다렌을 호위하던 기사들의 사지가 비틀리더니만,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쿵!
“히익!”
“흡!”
잉그리드와 시녀들의 입에서 새된 비명소리가 흘러나왔고, 다렌이 눈을 크게 뜨며 숨을 들이마셨다.
“으어어어…….”
마치 누군가 비틀어 쥐어짜 버린 듯한 형상의 팔다리가 몸에 붙어 덜렁거렸고, 바닥에 흘러내리기 시작한 선혈을 흙바닥이 탐욕스럽게 흡수하기 시작했다.
사지가 몸통에 붙어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처참한 모습으로 바닥에 널브러진 기사들의 모습에 시녀 하나는 정신을 놓았고, 엘렌을 안고 있던 시녀는 필사적으로 몸에 힘을 주며 엘렌을 지탱하고 있었다.
잉그리드의 체면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무도한 폭력이 벌어졌지만, 잉그리드는 물론 다렌도 아렌에게 감히 뭐라고 할 수 없었다.
끔찍한 광경에 눈을 감은 에드워드의 귓가에 아렌의 목소리가 울렸다.
“주인을 몰라보는 개라면 필요 없겠지. 그게 비록 남의 집에서 온 개라도 말이야.”
찬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잉그리드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죽이지 않는 것도 손이 많이 가는구나. 그래도 백작님의 체면을 깎을 수는 없으니 어쩔 수 없지.”
“……배려심이 깊으십니다. 도련님.”
느릿하기 걷기 시작하는 아렌의 입에서 나온 소리가 말도 안 되는 궤변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았지만, 차마 아렌에게 뭐라고 하는 자는 없었다.
그렇게 아렌과 에드워드가 사라지고, 가을의 정취가 가득했던 정원은 기사들의 신음소리와 올라오는 피 냄새에 그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이 와중에도 천사처럼 고롱거리고 있는 엘렌의 표정만이 편안할 뿐, 이 자리에 남아 있는 모두의 얼굴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다양한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훌리오를 불러와.”
“네. 네?”
“훌리오를 불러오라고!”
잉그리드의 외침소리가 후원을 가득 채웠다.
* * *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가는 법이다.
하물며 오랜 기간 동안 대를 이어가며 봉직해온 신하들이 있는 귀족 가문이라면 사실상 비밀 같은 것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에드워드가 필사적으로 시종들의 입을 막으려 노력했지만, 2시간도 채 되지 않아서 아렌에 대한 이야기는 최소한 백작가에서 일하는 사람 중에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어 버렸다.
원칙적이라면 알코르가 아렌에게 징계를 내려야 하는 상황이겠지만, 알코르는 침묵했고 알코르가 침묵한 이상 아렌을 어찌할 수 있는 자는 없다고 할 수 있다.
둘째부인이 세력을 넓혀 감에 따라 조금은 느슨했던 백작가의 분위기가 바짝 조여졌고, 모두의 눈은 아렌의 방을 주시하며 긴장을 놓지 않게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잔인하시군.”
관료의 복장을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중년인이 입을 열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렌 도련님이 능력을 개화하시고 가공할 무력을 손에 넣은 것은 가문의 홍복이지만. 그 성정이 걱정되는 것은 나뿐이요?”
무언의 동의를 얻어낸 중년인의 입에서 말이 이어져 나왔고, 몇몇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래서 어쩌자는 건가. 아인. 자네처럼 다렌 도련님을 후계자로 밀자는 건가?”
내심 분위기를 조성하며 미소 짓던 아인이 미간을 좁히고, 목소리가 주인공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루갈경.”
묵직한 기세를 풍기는 기사가 굳은 얼굴로 아인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가문의 미래를 걱정하는 것은 신하된 도리로 당연한 것이지만, 후계자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네.”
묵직한 기세만큼이나 무게가 실린 목소리에 방안에 모인 대부분의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대가 지나면서 자손이 늘어나고, 그 늘어난 자손들이 가문의 높은 자리를 장악하는 것과는 달리 그라인드는 애초에 손이 귀한 가문이다.
때문에 신하들을 귀하게 대했고, 그런 신하들의 자손이 대대손손 복직하며 각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곳이 그라인드다.
이쯤 되면 세력을 키운 신하가 딴 생각을 할만도 하건만 가끔씩 나타나는 그라인드의 혈계능력은 가문을 결속시켰고 그라인드는 지금의 성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다만 시대가 지나면서 가문 곳곳에 자리 잡은 가신들의 힘은 절대로 만만한 것이 아니었으니, 때때로 중요한 일이 있으면 이렇게 유력한 가신들이 모여서 의견을 주고받는 일이 잦았다.
“……그런 생각은 당연히 아닙니다. 다만 그라인드의 안정을 위해서는 아렌 도련님에 대해서 충분히 주의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은 겁니다.”
“으음.”
“……확실히 그런 부분은 있지.”
조금은 기세가 죽은 아인의 말이었지만, 가신들의 입에서 동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가신단이 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라인드의 번영과 안정이다.
그라인드는 부족한 게 없었다.
수 대 동안 쌓아올린 천문학적인 자금은 어지간한 실수 정도는 웃으면서 무마할 수 있는 수준이었고, 착실히 전승되어 온 마나연공법과 각종 무술은 그라인드 기사들의 평균 능력치를 높여주었다.
자금이 뒷받침되니 기사와 군사, 마법사에 대한 투자도 아끼지 않아서 8대 가문의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 무력도 지니고 있었다.
유일하게 부족했던 것이 절대적인 강자였는데, 그것도 이번에 드웨인이 마스터에 올라섰으니 충족되었다.
주변에 그라인드에 버금가는 힘을 가진 영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가끔 가다 황제가 요구하는 것이 조금 골치가 아플 뿐이지만, 그것도 돈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들이 대부분이었으니, 지금의 그라인드는 반석위에 올라가 있다고 할 수 있었다.
딱히 거창한 명예를 원하는 것도 아니고, 야망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그라인드의 현 상황에서 아렌의 등장은 작금의 평화를 위협할 만한 것이었으니, 가신들의 엉덩이가 들썩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웅성거리며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는 가신들 사이로 냉랭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개소리죠.”
“……말이 심하군. 에드워드.”
“말이 심한 건 당신입니다. 아인경.”
한쪽 구석에서 냉랭한 기운을 풀풀 풍기는 에드워드가 아인을 노려보며 일어서고 있었다.
“다른 가문의 세력이 스며 들어와서 적자를 죽이려고 했는데 그딴 게 무슨 상관입니까!”
에드워드의 말에 모두의 입이 닫혔다.
“제 아무리 병약하다고 해도 로렌님은 그라인드의 장자입니다. 첫째 후계자란 말입니다! 그런데 로렌님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아렌님의 성정을 대비해야 한다고요? 제정신입니까?”
에드워드의 무시무시한 눈이 아인을 노려보았다.
“당신. 그라인드의 가신이 맞습니까?”
에드워드의 기백에 눌린 아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