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razy Villain Regains His Sanity RAW novel - Chapter 94
94화
시켜 놓은 치킨이 식어 버렸다. 하지만 김태현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땀을 훔치는 정다현의 모습이 미치도록 아름다웠다. 열심히 하는 여자가 이렇게 아름답다니.
무엇 때문에 저렇게 열심히 하는 걸까.
김태현이 생각하는 정다현은 모든 걸 다 가진 여자였다. 아름다운 미모, 천재적인 재능, 신의 선물이라 불리는 기프트까지.
신성길드 소속으로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국가수호국으로 옮긴 후에도 최연소 기록을 갈아 치우며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그러면 이쯤에서 만족하고 안주해도 되는 거 아닐까?
“설마, 인터뷰 때 얘기한 게 사실인가······.”
시민 모두가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게 목표라고 밝히던 정다현.
당시에 가식이라 비웃고 넘어갔지만 진지하게 대련에 임하는 모습을 보면 진심이라 믿고 싶었다.
영상에서 본 정다현이 거짓말을 할 것 같지 않았으니.
오히려 자기를 내세운 성격이 아닌 듯했다. 대련이 시작한 뒤 정다현의 시선은 단 한 번도 카메라로 향한 적이 없다.
“···인정할 수밖에 없네.”
정다현은 진짜배기였다. 부정적인 마음이 가득했던 게 완전히 사라진 걸 느꼈다.
자신이 게으르다고 세상 모든 사람이 게으른 게 아니다.
모두 저마다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으며, 자신의 기준으로 부족한 게 없다고 생각한 정다현마저도 확고한 목표를 갖고 정진하고 있었다.
“최준호도 마찬가지겠지.”
노력이 없다면 초인이 되지도 않았을 테니.
세상을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결국 자신만 멈춰 선 채 다른 사람은 묵묵히 걸어 나갔다.
악플 달 의욕도 사라져서 채팅을 멈추고 영상을 바라보았다. 혹독한 대련으로 스타일이 엉망이 되었지만 정다현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차라리 최준호가 아니라 정다현이 방송하면 더 좋을 텐데.
아쉬움을 느낄 무렵이었다.
“이놈은 뭐야?”
눈에 거슬리는 댓글이 눈을 잡아끌었다.
바사칸-크크, 꽤 성장했군. 하지만 아직 모자라다. 움직임에 군더더기가 남아있어. 생각하고 움직인다는 의미겠지. 좀 더 본능에 의지해서 움직임을 빨리할 필요가 있다. 최준호가 손속에 사정을 둔 게 아쉬운 부분이군. 평소대로 좀 더 굴렸어야 했는데.
“이 새끼가!”
저렇게 열심히 하는 정다현을 비난하다니!
바사칸은 김태현도 아는 네임드 유저였다.
평소 함께 최준호에 대한 악플을 달아서 동지라 생각했는데 결정적인 순간 이렇게 엇갈리다니.
눈에 불을 켠 김태현이 채팅 쳤다.
빨래빨아-네가 뭐라고 판단하냐? 딱 봐도 방구석 찐따같은데 평가질하지 말고 현생을 살아라.
바사칸-지금 나한테 한 말이냐? 평소에는 내 말에 동조하더니, 어린놈이 버르장머리가 없군.
빨래빨아-그런 아저씨는 버릇 있고요? 그냥 감사하다고 남기면 됩니다.
바사칸-난 지금 정다현이 더 성장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녀석은 뒤에 빠져 있어라.
어이가 없는 소리였다. 정다현에게 조언을 해 주려면 최소 레벨 7이거나 초인이어야 할 텐데 그런 고레벨 실력자가 한가하게 채팅이나 치고 있다?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다.
“아주 그냥 개나소나 초인이지.”
빨래빨아-뉘예뉘예, 누구나 방구석에선 초인입죠. 축하드립니다, 어르신.
바사칸-내가 초인인 건 어떻게 알았지? 설마 내 정체가 드러난 건가. 정체는 철저하게 감추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날 추적한 거냐? 넌 누구냐?
“아주 가관이네, 가관.”
보다보니 어이가 사라질 지경이었다.
이 정도면 컨셉에 먹혀 버린 게 아닐까.
측은함은 곧 조롱으로 바뀌었다.
빨래빨아-어르신, 제발 방구석에 나와 세상과 마주하세요. 초인은 무슨 ㅋㅋ 얼른 나가야 일 안 짤리죠. 아, 설마 일자리도 없어서 이렇게 한가하게 노는 건가?
바사칸-어린놈의 버르장머리가.
빨래빨아-버릇없으면 어쩌려고? 함 만나서 혼내주시게? 근데 만나면 한 주먹거리도 안될걸? 아조씨, 내가 바쁜 걸 다행으로 여겨요. 딱 봐도 만나면 한 주먹거린데 ㅋㅋ 함 뜰까요?
바사칸-······.
“별것도 아닌 게 까불기는.”
방구석 초인을 제압한 김태현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인터넷에는 이렇듯 수많은 방구석 초인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영락없는 패배자였다.
“······.”
그게 자신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어서 잠깐 절망했지만 그마저도 오래가지 않았다.
탁월한 자기 합리화가 없다면 이런 생활도 못 하니까.
잠시 후 방송이 끝나자 김태현은 인터넷을 돌아다니며 정다현의 자료를 찾아다녔다.
그러다 팬 카페까지 가입하고 나서야 만족의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얻고자 했던 정다현에 대한 정보가 아주 많았다.
“국가수호국 빌런전담팀장. 엄청난 엘리트네. 하긴, 그러니 저만한 실력을 갖고 있는 거겠지.”
이날, 최준호와 정다현의 대련은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키며 각성자들이 얼마나 열심히 수련하는지 재조명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에 따라 각성자들을 무분별하게 옥죄려는 평등적용법에 대한 비판 수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 * *
“고생하셨습니다!”
방송의 성공과 실패를 가늠하는 것은 진세정의 얼굴을 보고 판단할 수 있다.
싱글벙글 웃고 있는 모습에서 오늘 방송이 성공임을 깨달았다.
대체 어느 부분이 먹힌 걸까. 평소보다 대련 강도도 낮았는데. 좀 더 굴려야 제대로 효율이 나올 텐데 적당히 한 게 아쉬웠다.
그런 것치고 대련이 이어지는 내내 진세정의 표정에 경악이 가득했지만. 내가 볼 때 이 정도 대련은 보여 주기에 불과한 수준이었다.
그 사이 진세정은 정다현에게 다가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진짜 이렇게 대련하시는 거예요?”
“평소보다 약했어요. 보통 팔다리가 부러지거든요.”
“세상에나! 정말 그렇게 하는 거군요. 정말 대단하세요.”
“아직 많이 부족해요. 그러니 상처를 입는 거고요. 대련할 때마다 제가 얼마나 모자란지 깨닫곤 해요.”
“이걸 모자라다고 하면··· 어휴! 진짜 각성자들이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다른 사람들이 알아줘야 할 텐데.”
진세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하긴, 정다현은 나도 인정하는 근성녀니까.
그게 없었다면 오늘의 성취를 이뤄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근데 오늘 방송, 괜찮았던 걸까요?”
이건 나도 궁금한 부분이었다.
“네! 완전 대성공이에요! 아니, 최준호 초인님의 방송 역사상 최대 성공이에요! 모두 정다현 팀장님 덕분이에요!”
“······.”
내 공은 없는 건가? 진세정이 내 눈을 피한다. 내가 아니라 정다현 덕분이라니, 뭔가 섭섭하군.
잘됐다니 다행이다만.
다만 걱정이 되는 것도 하나 있다.
요즘 인터넷 방송에서 조작은 심각한 화두에 오르고 있던데.
나와 정다현의 대결은 평소와 다르니 이것도 조작이 아닐까?
좀 더 리얼리티가 넘쳐야 할 텐데. 나중에 진세정에게 물어봐야겠다.
“뒤풀이해요, 뒤풀이!”
진세정의 말에 모든 팀원들이 고개를 든다. 근데 내가 아닌 정다현을 보는 거지? 근처에 맛있는 된장찌개 집을 알고 있는데.
설마 정다현더러 정하라는 건가.
그런다고 달라지려나.
이런 진세정의 속내를 모르는 정다현이 미소 지었다.
“제가 좋은 곳으로 모실게요.”
“아싸!”
정다현의 말에 진세정이 환호했다.
그리고 30분 뒤.
“······.”
능이된장전골 전문집에 도착한 진세정은 침묵했다.
그래도 된장찌개에서 된장전골로 업그레이드 됐다.
그에 반해 정다현은 방송 때도 보여 주지 않은 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곳이에요!”
“···나 입에서 된장 냄새 날 거 같아.”
한탄하는 진세정을 보며 난 감탄했다.
그거 참 부러운 능력이군.
말만 그랬을 뿐, 맛있게 먹더라.
“오늘 방송이 시작되기 전에 여러 곳에서 압박이 들어왔어요.”
한참 먹던 중, 진세정이 그리 말해 왔다. 이번에 제정되려고 하는 평등적용법에 대해서 상당한 논란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번에 정다현과 대련하는 컨텐츠를 놓고 태클이 들어왔단다.
이게 이상하게 여겨질 이유가 있나?
보니까 다른 곳에서도 하던 건데?
이미 다큐멘터리로 각성자들이 얼마나 노력하는지 보여 주는 내용은 많고 많았다.
예전에는 상당한 반향이 일어나기도 했고.
“파급력이 다르거든요.”
진세정은 내 채널이 갖는 파급력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현직 초인이면서 가장 혁혁한 성과를 거두고 있기에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외국 시청자도 어마어마하게 많다고 한다.
여기에서 고레벨 각성자가 평소에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면 법률 제정에 방해가 될 거라고 생각했단다.
“웃긴 인간들이네. 나한테 직접 말도 못할 거면서.”
“곧 초인님에게도 몰려갈 거예요. 기자들이 직접 초인님의 생각을 들으려 하겠죠.”
내 생각을 알고 싶다는 건가.
이 법안이 각성자의 목을 옭아매려 하는 법이란 걸 알고 있다.
프란츠 영감이 들었다면 노발대발했을 법이다. 아, 실제로 기자들의 태도를 보고 난리치긴 했었지.
난 솔직히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법 하나가 세상을 드라마틱하게 바꿀 리가 없어서. 다만 이게 날 노린 거라면 굳이 장단에 맞춰 줄 생각은 없었다.
이 법을 통과시켜서 각성자들에게 목줄을 걸고 싶다면 본인들도 그만한 것을 내놓아야지.
세상의 이치란 게 그런 거 아니겠는가. 내가 하나를 내놓으면 다른 사람도 하나를 내놓고. 가끔 사기를 쳐서 내가 100개를 내놓기도 하고 상대가 100개를 내놓기도 하지만.
내가 협상한 이상 공정한 거래가 이뤄져야 할 것이다. 아니면 목을 내놓으면 되고.
어차피 청와대에서 거부권을 행사했다는 말이 있으니 별걱정은 없다.
“좋지 않은 법이에요.”
묵묵히 먹던 정다현이 말을 보탰다.
각성자의 행동을 크게 위축시켜서 빌런이 활개 치게 만들 수 있다며 우려를 드러냈다.
전력을 다해도 모자랄 판에 위축시키게 만들다니,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강하게 주장했다.
“이번 컨텐츠가 그 법안 제정에 방해가 된다는 겁니까?”
“네, 찬성 측이 그동안 각성자들이 무도하다고 한 걸 정면으로 반박하게 되니까요.”
고레벨인 정다현도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걸 보면 감동 코드가 있긴 하지.
나로는 안 되냐는 말에 진세정이 냉큼 대답했다.
“네, 초인님이 고전하는 모습은 전혀 안 그려지던데요. 그러려면 최소 초인을 데려와야 하는데 현실성이 없기도 하고요.”
버서커가 있긴 한데, 녀석도 날 고전하게 만들 수는 없지.
순간 녀석을 방송에 내보낼까 생각이 들었지만 포기했다.
붉은 뱀 김영환을 죽이면서 빌런 이미지는 벗어던질 수 없게 되었다.
“아! 근데 초인님의 생각도 모르고 나댄 감이 있네요.”
진세정이 한 발자국 물러나자 정다현이 날 보며 물었다.
“오빠는 어떤 생각이세요?”
“나?”
별생각 없는데.
“원하는 게 있다면 그만한 노력을 보여 줘야겠지.”
* * *
아니나 다를까, 고예진은 평등적용법을 놓고 내게 인터뷰를 청해 왔다.
길게 할 것도 없어서 나는 생방송에서 이뤄진 인터뷰로 간단하게 내 생각을 밝혔다.
“법이 더 많은 약자를 보호한다는 걸로 옳은 것처럼 들리지만 현장의 의견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럼 초인님은 반대하시는?”
“좀 더 다듬으면 현장에 맞는 법안이 마련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고예진은 알쏭달쏭한 표정이었다.
하긴, 이 법은 각성자들이라면 치를 떠니 나도 반대할 줄 알았나 보다.
“그래서 제안합니다. 처음 초안을 낸 14명의 국회의원분들이 직접 마물 사냥과 빌런 체포 현장에 동행해 보시길 권합니다. 그래도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지지를 보내죠.”
방구석에서는 나도 같은 책을 쓸 수 있다.
현실에서 그게 안 돼서 문제지.
내 말의 의미를 알아차린 고예진은 표정을 굳히며 내게 물었다.
“저, 그 현장이 굉장히 위험하지 않나요?”
“위험합니다.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가 보라는 건······.”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야 깨닫는 바가 많지 않겠습니까?”
설마 현장 체험도 해 보지 않고 날림으로 법안을 만들었을까.
죽으면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고.
근데 내가 볼 때 반 정도 죽어야 정신을 차릴 거 같은데.
고예진이 침을 꿀꺽 삼켰다.
“사고가 날 수도 있다는 말로 들리는데요.”
“현장에서 불의의 사고는 언제든 일어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