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uble engraving RAW novel - Chapter 22
외전
1. 15 weeks
먹구름은 전화 한통과 함께 몰려왔다. 막 샤워기를 잠근 순간이었다.
유하.
이안과 식까지 올렸던 알파 여자였다. 익숙한 이름에 도우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그녀는 샤워 중이었고 줄곧 쏟아지는 요란한 물소리에 이긴이 부주의했는지 몰랐다. 어쨌거나 회장의 호통소리는 고요하고 습한 욕실의 공기를 뚫고 가감 없이 도우의 귀에 꽂혀들었다.
―약속은 약속이다!
이안을 대신해 유하라는 알파 여성과 다시 식을 올리라는 소리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정작 당사자인 이긴은 태연했지만.
“족보 꼬일 일 있습니까? 형제끼리 동서하게.”
―동서라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구멍동서요.”
―뭐, 뭐라?
“노망난 취급 받고 싶은 게 아니면 그만 하시죠.”
뒤는 더 들을 수 없었다. 이긴이 건성건성 대답하며 욕실 근처에서 멀어졌기 때문이었다. 조마조마하게 가슴을 졸이며 도우는 그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뒤를 따라가 귀를 기울였다.
―못 지키겠으면 당장 회사에서 손 떼!
간담이 서늘해지는 호통이었다.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몸이 굳어버린 도우와 달리, 이긴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렇습니까.”
시종일관 심드렁한 태도로 조부의 의사를 재확인 하곤 확답을 받았을 뿐이다.
“나중에 무르기 없습니다.”
말을 맺기가 무섭게 노성이 터져 나왔다. 그래도 길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긴이 그대로 통화 종료를 눌렀기 때문이었다.
“노인네 짱짱하기는. 백년은 거뜬하겠네.”
중얼거린 후 도우가 목욕을 마쳤는지 확인하기 위해 이긴이 몸을 틀었다.
‘핫!’
화들짝 놀란 도우는 종종거리며 도로 욕실로 돌아갔다. 문을 살며시 닫고 나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고도 터질 것처럼 두근거리는 심장이 가라앉기까지는 한참이었다.
겨우 진정하고 나니 이제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나설 일이 걱정이었다. 거짓말엔 영 젬병이었다. 표정을 숨기는 데도 능하지 못하고. 도우는 거울을 보며 애써 웃어보였지만 울상인 눈매에 입꼬리만 올라가니 더 서글퍼보였다. 그냥 웃지 말고 최대한 덤덤하게 나가는 게 낫겠다고 결심했다.
‘그래도 안 들켜서 다행이다.’
제가 통화를 엿들은 걸 이긴이 모른다는 사실을 위안삼아 슬쩍 문을 열었다. 표정이 어두운 거야 몸이 안 좋다는 핑계를 대면 대강 넘어갈 것도 같다. 그를 걱정시키는 건 싫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도우의 야무진 계획은 바로 어긋나버렸다. 언제부터 와있던 건지, 한 발 떼기도 전에 욕실 문에 비딱하게 기대서있던 이긴과 딱 마주치고 말았다.
“어…….”
이런 상황은 예상에 없었는데. 멍하니 눈만 깜박이는 도우에게 이긴이 고개를 바짝 들이밀었다. 간만에 보는 심술궂은 표정에 도우는 심히 당황했다.
“아주 신뢰가 바닥이지.”
“뭐가요…….”
“회사 안 나간다고 내가 굶기기라도 할까봐?”
“……알고 있었어요?”
일부러 엿들으려고 그런 건 아니었다는 변명이 웅얼웅얼 따라붙었다. 그러면서도 대체 언제 들킨 것인지 궁금해 하는 그녀더러 보라는 듯 이긴이 바닥을 눈짓했다. 뭔가 싶어 그를 따라 시선을 돌리던 도우는 그녀가 걸어온 대로 남은 발바닥 모양의 물기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너 하나도 건사 못하면 죽어야지. 아, 이젠 둘인가.”
죽는다는 말에 도우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그런 뜻이 아님에도 이미 앞뒤 말은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싹 잘라진 뒤였다. 임신 후 가장 큰 변화 중 하나였다. 감정이 극단으로 치닫는 것.
“그런 말……!”
하지 마요, 덧붙이기 전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발갛게 달아오른 도우의 눈가에 뾰족했던 이긴의 눈매가 조금 누그러졌다. 자신을 피해 도로 욕실로 처박혀선 한참을 나오지 않아 슬슬 짜증이 일던 참이었다.저를 뭐로 보나 싶어서 그녀를 기다리는 동안 별별 생각을 다 했다. 제 소유의 부동산 목록이라도 뽑아다 줄까, 유치한 생각까지 해버린 마당에 빼꼼 문이 열렸다.
“뭐가 문제야.”
동그랗게 말린 어깨를 힘주어 당겨 안았다. 일을 못하게 되어서 어떻게 하냐는 걱정을 들었지만 이해할 수 없는 건 매한가지였다.답답한 사무실에 틀어박혀서 서류에 파묻혀 사는 건 원래부터 성미에 안 맞았다. 이미 3대가 평생 흥청망청 놀고먹어도 될 재산도 단단히 챙겨 놓은 바, 생계와도 하등 상관이 없건만 조부의 얼굴을 봐서 억지로 하던 일이었다. 그러던 차에 그만두라니 이 핑계로 실컷 늘어질 참이었는데.
“우리 둘이 재미있게 놀면 되지.”
오히려 잘됐다는 그의 반응에도 세상 근심은 혼자 다 끌어안은 도우의 눈빛에 이긴은 조금 웃음이 났다. 오메가치고 좋은 직장에 다녔던 그녀의 지난 자부심을 생각하면 조금은, 아주 티끌만큼은 그 속을 알 것도 같긴 했지만.
“정말…… 괜찮겠어요?”
“그래봤자.”
이긴은 대수롭지 않게 툭 뱉었다.
“어차피 노인네 죽으면 도로 다 내 차진데 뭐.”
“…….”
패륜도 이런 패륜이 없었다. 안색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하게 지껄이는 이긴에게 질려 그만 도우의 말문이 딱 막혀버렸다. 아무리 그와 함께한 세월이 길어진다 한들 독한 말본새에는 도무지 적응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눈만 끔벅이는 도우의 동그란 이마를 검지로 가볍게 밀며 이긴이 눈살을 좁혔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잘 먹고 잘 자고, 그것 말곤 신경 쓸 거 없어.”
“알았어요.”
제 몸을 집요하게 살피는 이긴의 시선에 도우가 어깨를 움츠렸다. 입덧이 지겹게 이어지고 있었다. 토덧 지나고 나면 먹덧이 오는 경우도 많다던데, 도우는 그 두 개가 동시에 왔다.덕분에 식욕은 폭발하고 정작 음식물은 위장을 통과하지 못하고 도로 입으로 나오니 고생도 이런 생고생이 없었다. 덕분에 배 속 아이의 영양을 핑계 삼아 어떻게든 도우를 살 찌워보겠다는 이긴의 원대한 포부는 입덧과 함께 수포로 돌아갔다.
찌우기는커녕 살 내리는 게 눈에 보일 정도라, 그런 도우를 보며 속을 태우는 이긴도 같이 말라가는 중이었다. 이 와중에 배는 착실하게 부풀어 또 안쓰럽고. 부푸는 건 배만이 아니었다. 본래 탐스럽던 가슴 또한 터질 것처럼 물이 올랐다.
하여간.
“뭐든 성실한 게 탈이라니까.”
가벼운 핀잔에 도우는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노골적으로 가슴을 쳐다보는 이긴의 눈빛이 한층 포악해졌다는 걸 눈치 챘지만,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는 걱정 말라고 했지만, 대노한 회장의 음성이 끊임없이 귓가에 왕왕 울렸다.
처음 만났을 때 저를 원숭이라고 조롱했던 이긴을 떠올리면, 그의 조부라고 오메가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다를 것 같지 않았다. 당연히 억장이 무너질 일이었다. 그러니 그에게 준 것들을 도로 앗아가려는 걸 테고. 그녀를 위해 아무렇지 않게 모든 걸 버려버리는 이긴을 생각하면 제 존재 자체가 죄스럽다. 그에게 줄 것도 없고 버릴 건 더더욱 없어서 도우는 한껏 초라해졌다.
“아, 앗!”
잔뜩 풀죽은 차에 갑자기 젖꼭지에서 느껴지는 따끔한 감각에 도우는 화들짝 놀랐다. 슬금슬금 셔츠 속으로 들어온 이긴의 큼지막한 손이 양 가슴을 만족스럽게 주물럭거리고 있었다. 한데 그녀가 익히 알고 있던 방식과 달랐다. 무언가를 모으듯이 한 방향으로 문지르기도 하고, 부푼 유방의 둘레를 부드럽게 굴리며 쥐어짜기도 했다. 마치 목적이 있는 듯한 손짓에 얼떨떨하게 물었다.
“뭐, 하는 거예요?”
“젖몸살, 미리미리 풀어줘야지.”
“…….”
생기지도 않은 젖몸살을 미리 풀어준다는 건 금시초문이었다. 유륜의 색이 짙어진다거나 하는 건 익히 들어 알지만 아직 눈에 띌만한 변화는 없었다. 가슴이 조금 묵직해진 느낌이 들긴 했지만.
“분명 달 거야. 한쪽은 내 거라고.”
나오지도 않는 젖을 탐하는 눈빛이 욕심 사납게 번들거렸다. 기가 찰 일이었다. 아기는 젖이 없으면 굶어야 하지만 어른은 젖 말고도 먹을 게 넘쳐나는데……. 설마 제가 잘못 들은 거냐고 되묻고 싶었지만 의미 없는 질문 같아서 그만 두었다.
그보다 당장 내일이 걱정이었다. 이긴은 신경 쓰지 말라지만, 도우의 입장에서는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았다. 신경 쓰지 않으려한다고 신경이 안 쓰인다면 세상에 걱정할 일이 뭐가 있을까. 열악한 환경에서 자라며 안 해도 될 걱정까지 사서 해온 도우로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립.
이긴이 야멸차게 자신의 조부와의 통화를 마쳤을 때 가장 먼저 도우의 머리에 떠오른 단어였다.저야 사정이 있어 가족과 연을 끊고 살고 있다지만, 이긴은 경우가 다르지 않나. 회장이 쌍둥이 중에서도 유난히 이긴을 아꼈다는 얘기는 그를 알기 전부터 익히 들었던 사실이었다. 그러던 게 저로 인해 하나 뿐인 조부와 사이가 틀어지게 생겼으니 여간 마음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저도 모르게 한숨을 폭 쉬던 도우는 문득 유두를 저릿하게 울리는 강렬한 느낌에 가늘게 몸을 떨었다.
“하흣!”
쪽 소리가 나도록 가슴의 정점을 빨아 당겼다 놓은 이긴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나올 것도 같았는데.”
“무슨, 젖 먹을 아기도 없는데!”
출산 후에야 젖이 돈다는 뜻이었는데 이긴은 더욱 모를 표정이 되었다.
“젖 먹을 사람은 있잖아.”
이건 상태가 심각하다.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던 도우는 제 가슴에 매달려있는 이긴을 불안한 눈길로 내려다보았다.
“진심, 이에요?”
“아닌 것 같아?”
너무 당연하다는 듯 되묻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말이 더듬더듬 나갔다.
“아기, 밥이잖아요. 아기가 먹으라고, 나오는 건데, 그, 젖이요…….”
자신은 어째서 지극히 마땅한 사실을 설명하고 있어야하는 걸까. 그것도 이미 알만한 건 다 아는 성인 남자에게. 기가 막혀서 더 무어라 할 기분도 들지 않았지만, 태어날 아이를 위해 억지로 입을 뗐다.
“그러니까 안,”
“아이는 하나인데 가슴이 둘인 데는 이유가 있을 거야.”
글쎄. 당연히 조물주의 뜻이 있겠지만, 적어도 아빠까지 들러붙어서 먹으라고 두 쪽이 아니라는 건 잘 알겠다.
“그야, 하나로 부족하니까 그렇겠죠. 많이 먹고 무럭무럭 크라고.”
도우가 기껏 떠올려낸 이유를 이긴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애초에 도우가 뭐라 하건 제멋대로 탐할 요량이었으니까. 갓 쪄낸 찰떡처럼 말랑말랑한 유방에서 달콤한 유즙이 나온다고 생각하니 주체할 수 없는 흥분으로 흉곽이 벅차게 부풀어 올랐다.
“애한테는 분유도 있고. 음?”
“읏!”
다시금 보동보동한 살덩이를 덥석 베어 문 이긴이 다른 쪽 유방을 움켜쥐며 욕심 사납게 중얼거렸다. 다 제 거라고. 이제는 하나도 양보하지 않겠다는 이긴을 보며 도우는 애매하게 웃었다. 그마저도 고조되는 흥분에 묻혀버렸지만. 원래도 그녀의 가슴을 좋아하긴 했지만 임신 후 유난히 더 집착하는 이긴이 집요하게 눈을 빛냈다.
“봐, 나오는 것 같은데.”
“무슨, 그럴 리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확신하면서도 가슴을 내려다 본 도우는 한쪽만 달라진 젖꼭지의 색깔에 민망해져 바로 시선을 돌렸다. 선홍색으로 도드라진 유두 주위를 따라 동그랗게 번진 울혈자국들은 분명 이긴의 입술 모양을 닮았다.
“나올 리 없, 흣…….”
이긴의 고개가 다른 쪽으로 옮겨갔다. 기어이 양쪽의 색을 맞출 모양이었다. 가슴 끝을 물고 보채듯 압박하는 혀에 정작 찌릿하며 따스한 액을 흘려보낸 건 다른 구멍이었다.한층 달콤해진 음부의 냄새를 맡은 이긴이 무심결에 웃었다. 그 바람에 유두가 잇새에 납작하게 물렸다. 예리한 자극에 새된 신음이 도우에게서 옅게 흘러나왔다. 그게 신호가 된 듯, 이긴의 길쭉한 손가락이 속옷 위를 더듬었다. 축축하게 젖은 천을 슬쩍 집어 올리는 이긴의 눈빛이 음욕으로 붉었다.
“4개월 차니까 해도 된다고 하긴 했는데…….”
이긴의 의중을 파악한 도우가 수줍게 의사의 의견을 전했다. 말끝이 흐려진 건 뱃속의 아기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갑작스레 몽둥이가 짓쳐들면 아기가 놀라진 않을까, 하는 염려에. 도우의 순진한 걱정을 익히 알고 있는 이긴이 애원조로 그녀를 달랬다.
“살살, 아주 살살 할게, 응?”
끄덕, 조심스레, 도우의 동그란 머리통이 작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입으로 살살, 하고 말할 때마다 이긴이 은근히 페로몬을 풀었으니까.
“정말 살살, 하으……!”
“후으…….”
둘의 고개가 동시에 꺾였다. 간만의 삽입이 주는 자극이 너무 컸다. 느릿한 진입에 내벽을 천천히 문지르는 굵은 기둥이, 부드럽고 습한 안쪽이 온전히 느껴졌다. 울퉁불퉁한 성기의 표피가 느껴질 정도로.
“아……, 몰라…….”
마침내 선단이 자궁구에 꽉 맞물리자 도우가 중얼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괴로운 건 멋대로 허리를 놀리지 못하는 이긴일 거라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그가 시원하게 내벽을 긁어내리는 순간의 쾌감을, 단박에 처박힐 때의 짜릿함을 그녀의 몸, 세포 하나하나가 기억하고 있었다.
“조금, 조금만 더…….”
차마 세게 해달라 요구하지 못하고 욕구를 어쩌지 못해 칭얼거리는 도우를, 이긴이 안타까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애가 닳는 건 도우만이 아니었다. 고작 몇 개월 참았기로서니 습윤하고 따스한 도우의 안이 이렇게까지 황홀할 줄은 몰랐다. 그냥 묻고 있는 것만으로도 눈알이 돌았다. 조금만 움직여도 쌀 것 같아, 이긴은 겨우 호흡을 골랐다.
“으, 어떡해…….”
다시 천천히 몸을 물리는 이긴의 허리를 다리로 감싸며 도우가 느껴 울었다. 쑤욱 빠져나가는 살기둥이 못내 아쉬웠다. 그냥, 그냥 하면 안 돼요? 목구멍 끝까지 간절함이 솟구쳤다.고심 끝에 이긴이 제 가슴을 발판삼아 그녀의 양 발을 올려두었다. 여차하면 밀어내라는 의미로. 도우의 가느다란 발목을 만지작거리는 그의 음성에 결연함이 깃들었다.
“너무 깊으면 차버려. 알았지?”
열렬히 끄덕였지만, 도우의 머릿속엔 거센 추삽질에 대한 기대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다소 조심성이 사라진 움직임으로, 단단한 기둥이 젖은 틈새를 벌리며 파고들었다.
“아! 으응…….”
한결 만족스러워진 신음에 이긴이 빠르게 아래를 놀렸다. 가장 안쪽, 가로막힌 벽에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한 움직임이 이어지는 동안 둥글게 부푼 배 위로 밭은 숨이 뜨겁게 떨어졌다. 절정까지는 금방이었다. 수천만 개의 별이 혈관을 반짝이며 내달리는 것 같은 짜릿함에 어질어질해진 도우의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그 바람에 활짝 벌어진 다리 사이로 흉흉한 물건이 곧장 내리꽂혔다.
“아학!”
어디고 터질 것 같은 쾌감에 도우가 교성을 지른 것과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온 건 동시였다. 여운에 잠겨 축 늘어진 도우와 달리, 재빨리 몸을 뺀 이긴이 그녀의 몸을 살폈다.
“괜찮아? 뭉치진 않았고?”
“좋았……어요.”
눈꺼풀 깜박일 힘도 없어 그대로 눈을 감은 채 도우가 중얼거렸다. 겨우 기운을 차렸을 때는 이긴이 따스하게 적신 수건으로 그녀의 몸을 정성스레 닦아주고 있었다. 자못 심각한 그의 표정에 도우가 조심스레 물었다. 혹 언짢았던 거냐고. 겨우 한번, 그것도 조심하며 가진 관게였으니 이긴의 성에 차지 않았을 법 했다.
“음.”
이긴은 그녀의 의문에 쉬이 수긍했다.
“그래서 말인데 링 같은 걸 주문제작해볼까 해. 일종의 안전장치로.”
“링……이요.”
“어쩔 수 없잖아. 내 게 너무 크니까.”
“…….”
본인의 장대한 물건을 보며 은근 뿌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이긴이 도우의 이해를 도왔다. 링을 끼워둔 위치까지만 삽입할 수 있다나. 마치 방지 턱처럼 깊은 진입을 막아준다고.
그의 설명대로 도넛처럼 생긴 링을 끼운 성기의 모양새를 떠올려보다가, 도우는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대신 배를 조심히 어루만졌다. 종종 관계 후 배가 뭉치는 경우가 있다는데 다행히 별 징후가 없었다. 막판에 지나치게 깊었던 삽입을 염려하는 이긴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도우가 슬쩍 농담을 던졌다.
“아기가 뭐래요? 만나서 반가웠을까?”
이런, 아빠의 성기를 보고 반가워하는 아기라니, 농담이랍시고 뱉어놓고 나니 꼭 변태 같아 도우가 몰래 혀를 깨물었다. 붉어질 대로 붉어진 도우의 뺨을 보는 이긴의 눈이 가느스름해지는 것도 모르고.
“어땠을 것 같은데.”
“몰, 몰라요, 그런 거.”
농담을 해도 하필 저질스런 농담을 했담. 자책하는 도우의 귀에 이긴의 능청스런 대꾸가 들려왔다.
“반갑다고 하이파이브 해주던데.”
“뭐라고요?”
황당한 나머지 도우는 그만 웃어버리고 말았다. 급기야는 눈가에 눈물마저 훔칠 정도로 웃는 사랑스러운 도우를 품에 그러안은 이긴의 입에 뿌듯한 미소가 걸렸다.***도우와 노닥거리며 다정다감한 시간을 보내겠다는 이긴의 야심찬 계획은 채 나흘을 가지 못했다.
늦은 오후, 도우는 다소 생소한 광경을 보고 있었다. 바로 앞치마를 두른 이긴이었다. 이긴은 회사의 명운이 달린 서류라도 검토하는 양 레시피를 들여다보았다. 들기름과 참기름의 발화점까지 꼼꼼하게 비교해가면서.
“소고기가 좋겠지?”
“네.”
“질리면 홍합이나 바지락으로 바꿔도 되고. 그건 나중에 정하자.”
“다 맛있을 거예요.”
미역국 정도는 직접 끓여주고 싶다는 이긴의 열정을, 도우는 즐거운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이긴의 계획에 차질을 가져온 문제의 전화는 국이 다 끓어갈 때쯤에 왔다.
“이런.”
이긴은 발신인을 보고 짧게 혀를 찼다.
“무슨 일입니까? 평생 연 끊자 하실 땐 언제고.”
세상에 네놈이 그럴 줄 몰랐다는 노성이 도우가 앉은 자리까지 귀 따갑게 울려 퍼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번호를 스팸 등록해둘 걸 그랬다는 그의 태연한 중얼거림에 그나마도 금세 잦아들었지만.
“싫습니다. 지금 바빠요. 연락도 없이 갑자기 만나자니, 그게 무슨 매너입니까.”
어쩐지 기가 죽어 얌전히 듣고 있던 도우는 화들짝 놀랐다. 그러지 말아요, 입모양으로 말하며 이긴의 등을 떠밀었다.
“가서 뵙고 와요, 얼른요.”
이긴은 못이기는 척 등 떠밀려 나갔다. 어차피 한 번은 불려갈 거라 예상했다. 아예 끝장을 보든지, 다신 잡음이 생기지 않게 담판을 짓든.
“다녀올게.”
도장 찍듯이 도우의 이마에 입술을 꾹 누른 이긴이 차키를 집어 들었다.
“잘 다녀와요.”
고작 며칠 같이 있었다고 배웅이 어색하다. 고소한 냄새가 배어있는 주방에 홀로 있던 도우는 배를 쓰다듬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우리 둘만 남았네. 엄마랑 한숨 잘까?”
하품을 쏟아내며 침실로 향했다. 간만에 단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집에서 둘이 붙어있는 동안, 이긴은 말 그대로 그녀의 몸 어딘가에 꼭 자신의 신체 일부를 붙여놓곤 했다. 으레 그녀를 허벅지 위에 앉혀두고선 엉덩이, 가슴, 배, 머리카락에 얹은 손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쉴 새 없이 주무르거나 어루만졌다.
간혹 과하다 싶어 밀어내면 박을 엎어놓은 것처럼 둥근 배에 키스를 퍼부었다. 그녀가 아닌 아기를 만지는 거니 참견하지 말라는 요상한 논리와 함께.
애정표현이라 저도 기꺼이 응할 때가 많았는데 며칠을 연속으로 그러니 시달린 감이 없지 않았다. 하니 이런 고요한 시간도 나쁘지 않다.
“아으읏!”
도우는 기지개를 쭉 켜고 바디필로우를 껴안고 눈을 감았다. 모처럼 혼자만의 시간인데 청한 잠은 오지 않고 금세 이긴이 보고 싶어졌다.
‘잘 도착했을까.’
다정한 키스를 떠올리며 얼굴을 붉히던 도우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앉았다. 기억 속 이긴의 모습에 이질적인 무언가가 잡혔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허겁지겁 주방으로 나가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역시나 없었다.
“어떡해!”
앞치마를 그대로 하고 나가다니. 짧게 비명을 지른 도우는 얼른 전화를 걸었다. 나름 중요한 자리인데 이긴이 우스꽝스럽게 보일까 애가 탔다. 서둘러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신호음이 꽤 길게 이어지도록 이긴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왜 안 받아.”
입술이 바짝 마를 즈음에야 이긴은 전화를 받았다.―앞치마!
다짜고짜 꽥 소리 지르는 도우의 목소리에 이긴은 피식 웃었다.
“하면 좀 어때.”
이긴의 태연한 대꾸에 전화기 너머로 숨 들이키는 소리가 났다. 경악하고 있을 도우의 표정이 절로 그려졌다. 상상만 했는데도 갈비뼈가 뻐근하게 벌어졌다. 씨발, 대체 어디까지 귀여워질 건데. 가슴 한 구석을 깃털로 간질이는 것 같은 기분을 만끽하며 이긴은 한 술 더 떴다.
“잘 어울리잖아.”
이번에는 그야말로 할 말을 잃은 듯 했다. 그래도, 그래도, 만 연발하는 도우가 너무 사랑스러워 깨물어주고 싶다. 그럼 분명 혀가 녹도록 단맛이 날 텐데. 이왕 깨무는 김에 다른 데도 싹 발라먹음 더할 나위 없고. 보동보동한 가슴을 입에 넣고 굴리고픈 욕구에 사타구니로 피가 내달렸다.
“이런.”
터질 것처럼 팽팽하게 부푼 아래를 의식하며 이긴은 혀를 찼다. 저를 위해서라도 도우를 이쯤에서 다독여줘야 할 듯하다. 도우의 걱정은 기우였다. 차에 오르자마자 앞치마를 확인하고 뒷좌석으로 툭 던져놓았기 때문이었다. 설령 앞치마 좀 하고 돌아다닌들 면전에서 지적할 얼간이도 없었다.
“걱정할 거 없어.”
대답대신 얕은 한숨이 고막을 간질였다. 따스하고 촉촉한 숨결을 받아먹고 싶어 갈증이 일었다. 임신으로 인해 금욕기간이 너무 길어지고 있었다.밤마다 허벅지나 가슴을 모으고 사이로 오가는 좆 기둥을 고스란히 받아주는 도우가 들으면 황당해하겠지만, 삽입 섹스에 댈 게 아니었다. 아무리 문지르고 사정해도 채워지지 않는 음욕에 이긴은 둘째 계획을 저만치 날려버렸다.
임신하면 호르몬이 널을 뛴다더니 도우의 페로몬도 함께 널을 뛰었다. 온 집안이 도우의 향긋한 살내음으로 가득한 건 좋지만, 24시간 그의 성감을 자극하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그런데 이 짓거리를 또 하라고?
‘절대.’
사납게 앞을 쏘아보면서도 혓바닥만큼은 부드럽게 놀렸다.
“기다리지 말고 먼저 밥 먹어.”
겨우 안심했는지 조심해서 다녀오라는 당부가 이어졌다. 꼭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를 대하는 듯한 걱정스런 말투에 이긴은 또 웃었다. 입매를 주체 못하고 실실 쪼개는 이긴을 보고 맞은편에 앉은 그의 조부가 끝내 역정을 냈다.
“정신 빠진 놈.”
“그러게 정신 빠진 미친놈 뭐 예쁘다고 부르셨습니까.”
거침없이 쏘아붙이는 이긴이 진심으로 못마땅한 듯, 조부가 미간을 좁혔다. 그러나 이안도 죽고 없는 마당에 마땅한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이긴을 향한 노기는 신음과 함께 사그라들었다. 이안이 살아있대도 그만큼의 몫을 할 수 있을 리도 없지만.
나 말고 할 사람이 누가 있다고.
이긴은 느긋하게 뻗댔다. 그러자 면전의 손자 놈은 어차피 글렀다고 생각했는지 조부가 엉뚱한 관심을 보였다.
“알파겠지?”
이렇게 나오시겠다. 뱃속 태아에게 기대를 걸어보려는 빤한 속셈을 간파한 이긴은 짐짓 진지하게 얼굴을 굳혔다.
“오메가입니다.”
“허.”
예상한 대로 탐탁찮은 반응이 돌아왔다. 더더욱 아기가 알파라는 사실은 알려주지 말아야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대체 앞으로 어쩔 셈이야?”
“어쩌긴요. 잘 먹고 잘 살 예정입니다.”
속이 타는지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키는 조부를, 이긴은 감흥 없이 바라봤다. 이리 정정한데 정 급하면 본인이 아이를 낳으면 될 것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다만 제가 생각해도 꽤 기괴한 모양새라 굳이 입 밖에 내진 않았다. 요지경으로 돌아가는 손자의 머릿속을 모르는 조부는 이긴의 침묵을 죄스러움으로 받아들이곤 제법 봐주는 것처럼 운을 뗐다.
“그래, 오메가 쯤, 몇이든 거두는 거야 네 마음이지. 대신 유하와 혼인은 예정대로 진행 하거라.”
회사가 마비되어 무슨 큰 결단이라도 하셨나 했더니 도돌이표였다. 소득 없는 짓거리에 짜증이 난 이긴은 셔츠 단추를 몇 개 풀었다.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한 낌새를 챈 조부의 눈썹 또한 심상찮게 꿈틀거렸다.
“이제 하나 남은 핏줄마저 보내버리려 하시나.”
“네가 기어코……!”
“됐습니다. 앞으로 회장님께 저는 없는 사람입니다.”
“앉아라!”
미련 없이 자리를 박차는 이긴을, 조부가 침통한 표정으로 잡아 세웠다. 앞선 권유는 이미 이럴 것을 예상하고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심정으로 던져본 모양이었다.
“너 하고 싶은 대로 하거라.”
“…….”
“네가 이럴 줄이야……, 허!”
믿을 수 없어하는 조부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당장에 도우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오메가는 그에게 세상의 먼지 같은 존재였으니까. 그것도 아주 자잘한 먼지. 눈에 띄지도 않는 미미한 존재감으로 이리저리 부유하다가 그마저도 지쳐 내려앉으면 신경을 거슬리는 성가신 존재.
솔직히 지금도 다른 오메가에 대한 인상은 하찮고 볼품없는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오직 도우만이 희부연 먼지 속 빛나는 사금파리처럼 유의미했다. 하니 조부의 반응 쯤, 여유롭게 웃어넘길 수 있다. 별개로 다른 알파와 결혼이니 뭐니, 자꾸 얼토당토않은 헛소리가 귀에 들려오는 건 문제지만.
좀처럼 스스로에게 박하게 굴지 않는 그지만 이번에는 쉽게 제 탓으로 돌렸다. 이건 제가 여지를 줬기 때문이라고. 하면 다신 이런 일이 없게 해야겠지.
“앞으로는 이런 얘기 안 나오게 해주십시오. 제가 드릴 수 있는 기회는 여기까지입니다.”
끝까지 냉랭한 손자의 모습에 그렇잖아도 어두웠던 조부의 낯에 그림자가 덧씌워졌건만, 이긴은 조금의 가책도 느끼지 못했다.어쩌란 말인가. 낯빛이 칠흑이 되어도 물릴 마음이 없는데. 사이렌을 삶아 드셨나,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노인네 목소리에 기죽은 도우의 강아지 같은 얼굴만 떠올리면 마구 퍼부어도 모자랐다. 부글부글 끓는 속을 끄집어내면 이만큼도 많이 참은 터였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회사 복귀 등을 간단히 지시한 후 더 무어라 할 힘도 없는 듯 손을 휘휘 내젓는 조부에게 이긴은 그래도 태도만은 정중히 인사하고 물러났다.2. 36 weeks
이제는 언제 아기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다는 의사의 말에 도우는 정후와 출산 전 마지막 플라워 수업을 가졌다. 임신 초기부터 그녀의 집으로 직접 강습 와주었던 정후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당분간 못 볼 거란 얘기를 하자 그는 내심 서운한 얼굴이 되었다.
“아기 낳으면 사진 보여주기에요?”
“그럼요.”
“누구 닮았을지 정말 궁금하다.”
“초음파 사진 보면 아빠랑 판박이에요.”
“그래도요. 애들 얼굴은 또 자주 바뀌니까.”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풍성한 꽃바구니가 완성됐다.
“아기 낳고 몸조리 잘 해요, 도우씨.”
“네. 고마워요.”
약속이 있다며 서둘러 나서는 정후를 배웅한 도우는 진한 꽃향기 속에 홀로 남아 아쉬운 마음으로 가만가만 배를 쓰다듬었다. 갓난아기를 돌보느라 정신없을 테지만, 그래도 이대로 놓아버리면 감각이 굳을까 걱정이 들었다.
‘혼자서라도 틈틈이 연습할까?’
몇 가지 재료만 갖춰두면 가능할 것도 같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생각났을 때 바로 준비해두고 싶었다. 산책도 할 겸 가벼운 차림으로 나섰다. 볕이 따사로워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정후한테 갓 내린 커피보단 시원한 주스를 들려주는 게 더 나았을 거란 생각을 하며 천천히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저기…….”
아주 조심스러운 부름이었는데 머리털이 쭈뼛 섰다. 뒤돌아보고 싶지 않고 그대로 걸음을 옮기려 했으나 진창에 빠진 것처럼 발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땅으로 툭 떨어진 시선 끝에 둥글게 튀어나온 배가 보였다. 제가 봐도 복스럽고 둥그런 모양에 눈을 깜박였다.
행복한데.
나 지금 행복한데. 엄청 행복한데. 그런데 왜. 당신들이 또 왜.
“맞네, 도우, 우리 도우네!”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감격한 목소리에 눈앞이 어질해졌다. 동시에 신물이 올라왔다. 입덧 증상은 아니었다.
‘우리? 우리라고?’
어째서 우리야? 언제부터 그렇게 저를 살뜰히 챙겼다고. 솟구치는 구역질을 간신히 참으며 천천히 뒤돌았다. 기대 섞인 비굴한 웃음이 부모의 얼굴에 걸려있었다. 도우는 떨떠름한 낯으로 그들과 마주했다. 머리가 하얗게 바래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새로 이사한 곳은 회사에서나 오메가들의 주거지에서 멀 뿐만 아니라 거리 자체가 한적했다. 때문에 이 만남은 우연이 아닐 가능성이 컸다.
‘누구일까?’
문득 이긴이 후원해주고 있는 둘째가 떠올랐지만, 순순히 털어놨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부모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건 피차 마찬가지였기에. 그러고 보니 둘째와 연락을 주고받지 않은지도 꽤 되어, 이사했다는 소식도 아직 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도우야, 봐라. 네 엄마도 지금 힘들어.”
여전히 입 한 번 벙긋하지 못한 채, 도우는 마디가 굵은 손가락이 가리키는 지점으로 시선을 옮겼다.깡마른 몸에 유일하게 도독하게 부른 배가 눈에 들어왔다. 시간이 지나면 곧 저처럼 부풀겠지. 안쓰러움보다 분노가 치밀었다. 줄곧 침묵을 유지하고 있던 스스로가 신기할 정도로 노성이 터졌다.
“또…… 아이를 가졌어요? 책임지지도 못할 거면서? 대체 어쩌려고!”
대책 없이 지르는 행태가 지긋지긋하다. 대물림할 건 가난과 불행뿐이면서.
“크게 도와달라는 건 아니고, 아기 용품 좀 나눠받을까 해서. 너 안 쓰는 것 좀 있으면,”
염치없는 소릴 하면서 무언가를 의식하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낌새가 수상했다. 탐욕이 그득하게 밴 저 눈빛을 안다. 조금의 틈이라도 내어주면 어김없이 파고들어 욕심껏 비집고는 끝내 원하는 걸 뜯어내고야 마는.
“그런 거 없어. 나한테 아무 것도 바라지 마요. 아니, 아무 얘기도 하지 마. 듣고 싶지 않으니까.”
뒷걸음치며 고개를 저었다. 벗어나는 것 말곤 방법을 모르겠다. 다급히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대개 그렇듯 지나가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도로 들어갈까. 뒤를 흘긋 거리다가 그만두었다. 충분히 집까지 쫓아 들어올 위인들이었다. 보란 듯이 자리를 잡고 구구절절 우는 소리로 혼을 쏙 빼놓고. 이긴이 돌아오면 얘기는 좀 달라지겠지만, 그런 꼴 보이고 싶은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가세요. 다신 찾아오지도 말고. 그땐 정말 신고할 거니까.”
다시 한 번 단호하게 쳐냈지만, 역시나 그녀의 부모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누가 나타날까 불안하게 눈알을 굴리면서도 고급 주택들의 높은 담벼락을 올려다보며 입맛을 다셨다. 구미가 당기는 게 분명한 표정에 소름이 쭉 끼쳤다.
“난, 난 아무것도 없어. 정말이에요. 내건 아무것도 없다고요.”
“도우야, 부부는 그런 게 아니지. 서로 온전히 내어주는 게 부부인 거지.”
타이르는 어투에 비릿한 웃음이 곁들여졌다. 부부라니. 이긴의 아기를 갖고 그의 집에서 생활하면서도 그런 식으로는 생각해본 적 없었다.알파와 오메가는 애초에 대등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니까. 결국 또 기생충처럼 그의 살을 파먹으라는 거다. 그 와중에 떨어지는 부스러기 쯤 자기들에게 던져주고.
이긴을 떠올리자 도리어 차분해졌다. 이들을 원망하며 몸부림치던 때가 있었다. 치미는 분노를 삭이지 못해서 가슴을 쥐어뜯던 때가. 활활 불타오르던 울화도 이젠 다 소각되어 재가 된 모양이었다. 정말, 놀랍도록 아무 감정도 남아있지 않았다.
남이었다. 남보다 못하지도, 더하지도 않은 그냥 남.
해서 도우는 저를 가장 괴롭혔던 질문을 덤덤하게 던질 수 있었다.
“나한테 대체 왜 이래요.”
그토록 힘들었는데 막상 입 밖에 내고나니 하등 쓸모없는 질문이었다. 이유가 뭐든, 그게 무슨 상관인데. 전부 부질없다. 심히 대단한 이유가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냥, 됨됨이가 글러먹었던 거지. 스스로 답을 찾아내자 불현듯 속이 후련해졌다. 도우는 전처럼 그녀를 설득하려는 부모를 향해 고개를 저어보였다.
“아빠 말이 맞아요.”
지금껏 스스로를 증명하고 상대를 이해시키는 데에만 너무 급급했다. 방패만 들고 전장에 나간 사람처럼 적의 공격을 막아내느라 벅찼다. 그럴 일이 아니었는데도. 처음부터 들을 귀가 있지 않았는데 허공에 떠든 격 아닌가?
“그 사람, 나한테 정말 잘 해줘요. 다 달라면, 정말 남김없이 다 줄 거고.”
그녀가 말을 알아들었다고 생각했는지, 부부의 표정이 훤히 밝아졌다. 조금은 서글픈 기분으로 둘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봤다. 이제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그런데 그거 알아요? 나, 정말 행복해서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거든. 그러니까 줄 건 없어요.”
빈손을 내밀자 귀를 기울이며 눈을 빛내던 낯들이 벌레라도 씹은 것처럼 일그러졌다. 이어 위협하듯 그녀에게 성큼성큼 걸어왔다. 손찌검 하려면 하라지. 끝장을 볼 각오였으나, 본능적으로 배를 감싸는 것까진 어찌하지 못했다.
“도우, 너……!”
악귀같이 부릅뜬 부친의 두 눈이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 다급한 고함 소리가 들렸다.
“어엇! 뭐하는 겁니까!”
정후였다.
“아니, 이분들 여기까지 쫓아 왔네.”
고함에 놀랐는지, 급히 달려온 정후의 표정이 꽤 사나웠던 탓인지, 그녀의 부모는 잽싸게 도망쳐버렸다.
“하아…….”
안심이 되자마자 그대로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딴엔 단단하게 대처했다고 생각했는데 알게 모르게 엄청 긴장했던 모양이었다. 정후가 그런 그녀를 부축하며 허겁지겁 내빼는 둘을 험악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도우씨, 괜찮아요? 묘하게 자꾸 마주치는 것 같아서 이상했는데 뒤를 밟았나 봐요.”
“전 괜찮아요.”
간신히 웃으며 끄덕였다. 괜찮다, 정말 괜찮다. 아주 끝나버렸으니까, 다신 찾아오지 않겠지. 설령 찾아오더라도 지금처럼 버틸 수 있으니, 그럼 된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는 동안 정후가 연신 사과했다. 괜히 제가 끌어들인 것 같다며. 그의 잘못도 아닌데 사과하는 게, 도리어 이쪽이 미안해졌다.
“뭐가 미안해요. 아니에요, 정말……. 저렇게 미행할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래도…….”
말끝을 흐리는 정후에게 도우는 다른 다짐을 받아냈다. 이긴에게는 절대로 말하지 말아달라고.
“그 사람 귀에 들어가는 거, 무슨 일이 있어도 안 돼요. 아셨죠?”
신신당부하는 도우를 안심시키기 위해 정후는 최대한 진지하게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입술에 지퍼 채우는 시늉을 몇 번이나 하고나서야 도우는 겨우 마음을 놓았다.
“그런데 어쩐 일이세요?”
“아, 카드를 빠트린 것 같아서.”
정후는 입구가 조금 헐거워진 카드지갑을 내보였다. 사업자 카드인데 하필 결제할 일이 있어 부득이하게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에 도우는 얼른 찾으러 가자고 앞섰다.
‘다행이지 뭐야.’
카드를 잃어버린 걸 알았을 땐 귀찮기만 했는데, 어쩌면 불미스러운 일을 막기 위한 전조가 아니었나 싶어 정후는 가슴을 쓸어내렸다.***“여기요, 이거 맞죠?”
“맞아요. 혹시나 길에 떨어졌음 어쩌나 했는데.”
“다행이다. 이번엔 잃어버리지 말고 조심히 들어가세요.”
“네, 저, 그리고…….”
“네?”
“아까 그 일,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요. 아기 생각해서라도.”
조심스레 당부하는 정후에게 도우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럴게요. 대신 약속은 꼭 지키셔야 해요?”
“네, 입 딱 닫을게요.”
아무렇지 않은 척 배웅도 했지만, 홀로 남게 되자 누가 재생버튼을 누른 것처럼 부모를 맞닥뜨렸던 상황이 눈앞에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어쩌지.’
막상 한 번 맞서고 나니 더 이상 부모의 존재는 위협이 되지 못했다. 대신 이제는 다른 이유로 의기소침해졌다. 제대로 사랑받아본 적 없는 자신이 사랑을 퍼부어줄 수 있을지. 도우는 궁금했다. 태어나서 무조건적으로 퍼부어지는 태초의 사랑, 그게 한 순간이라도 제게 주어졌었을까.
그녀의 동생들이 태어났을 때를 떠올려보면 아마도 아니었을 것 같다. 동생들 중 셋은 생부가 달랐다. 불임인 알파들에게 얼마간의 돈을 받고 임신한 아이들이었다. 알파인 아이는 데려가고 오메가인 아이는 버려졌다. 갓난쟁이들을 돌보는 건 대부분 도우 차지였고.
둘째가 어느 정도 자라서는 조금 짐을 덜었지만, 힘든 건 매한가지였다. 아기는 우는 게 당연한데, 울음소리에 불같이 화를 내던 부모의 아귀 같은 표정이 씁쓸하게 눈앞을 스쳐갔다. 이번에 새로이 가진 아이도 생부는 어느 알파일 가능성이 컸다.
“하아.”
부모의 묘한 공생관계를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려 도우는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괜히 속만 시끄러워졌다.한편으론 의문이었다. 저를 낳아준 부모도 주지 않는 애정을 이긴은 어째서 한없이 퍼부어주는지.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그걸 알면 저도 아기에게 남김없이 사랑을 쏟아 부을 수 있는 엄마가 되지 않을까?
‘정말?’
사랑도 받은 게 있어야 주는 거라고 들었는데, 마치 가득 찬 샘에서 물을 퍼주듯이. 잠시 우울해졌다가, 그에게서 받은 사랑이 떠올라 또 희망을 가졌다가. 이 생각, 저 생각, 다소 싱숭생숭한 기분으로 도우는 이긴의 퇴근만을 기다렸다.이미 정후로부터 낮의 소식을 들은 이긴은 예상보다 괜찮아 보이는 도우의 얼굴에 일단 안심했다. 반갑게 맞이하며 달려든 도우를 안자 불룩 나온 배가 먼저 그를 환영했다. 아름다운 변화였다. 마냥 가냘프기만 하던 도우의 몸 선이 사뭇 달라진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가장 괄목할만한 부분은 역시 무르익은 박처럼 부푼 배였다.
새 생명의 잉태, 경이로움, 모체의 신비, 숭고함, 고귀함.
여기까지 떠올리고 나서 이긴은 스스로를 재평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둥글고 사랑스러운 배가 문질러지자마자 중심부가 난감할 정도로 성성하게 일어선 탓이었다. 게걸스럽게 침까지 뚝뚝 흘리는 녀석을 의식하며 이긴은 이를 악물었다.
씨발, 진짜 변태 새낀가.
제 새끼를 밴 도우를 난잡하게 흐트러뜨리고 싶은 욕망은 초기부터 꾸준했다. 배가 부풀수록 더욱 뚜렷하게 구체화되는 중이고. 어쩌다 한 번 조심하며 살을 섞는 걸론 털끝만큼도 충족되지 않는 음험함. 제 머릿속을 들여다 볼 수 있다면, 하여 도우가 보기라도 한다면 단박에 도망갈 음흉한 짓거리들이 다채롭게 가득했다.어디까지나 생각만 그랬다. 그러니 이렇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건 위험하다.
씹, 망할.
이긴은 눈치도 없이 빳빳하게 고개를 치켜든 제 좆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이 와중에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꼼지락거리는 도우에게서 시선을 못 떼며.눈치를 살피는 게 몸에 배선 좀처럼 웃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그녀다. 물론 예전보단 훨씬 자주, 길게 웃는 도우지만. 눈매를 곱게 접어가며 생긋이 짓는 웃음을 보면 그야말로 애간장이 녹아내렸다. 바로 지금처럼.
“뭔데.”
말은 무뚝뚝하게 나가도 도우가 원하는 건 뭐든 다 들어줘야지, 단단히 결심한 차였다. 아주 심장이라도 꺼내서 보여 달라면 가슴을 쪼갤 심산으로 재촉했다.
“얼마나 대단한 부탁이기에 이리 뜸을 들이실까.”
“그게…….”
어쩐지 눈가에 물기가 보인다고 생각한 순간, 도우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 왜 사랑해요?”
“…….”
언뜻 제가 뭘 들은 건지 알 수 없어 이긴은 침묵을 지켰다. 왜 사랑하냐니. 그가 그녀를 사랑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명제였다. 마치 아침에 해가 뜨는 것처럼.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이었고 때문에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도리어 그가 궁금해졌다. 어째서 그런 의문을 품게 됐는지.
“왜 사랑하는 것 같은데.”
“어…….”
그가 반문할 줄은 몰랐는지, 눈꺼풀이 느릿하게 깜박였다. 한참을 고민하는 눈치에 속이 조금씩 답답해졌다. 이긴에게 그녀의 매력을 대라고 하면 당장에 셀 수 없이 쏟아낼 텐데. 논문이라도 쓰라면 쓸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이긴은 도우의 말간 눈을 지그시 들여다보았다.
“음? 아무 거라도 좋으니 말해봐.”
숫제 애원하는 투다. 아닌 게 아니라 안달복달 애가 탔다. 닳을까봐서 보는 것도 아까운데 그녀에게서 눈을 떼고는 견딜 수 없어, 애를 끓이면서 눈에 담았다.
“그게…….”
계속 주저하던 도우가 그나마도 우물우물 입 안에서만 굴리다 끝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질문을 잘못한 것 같아요.”
“원래 궁금했던 건 뭔데.”
“그냥, 음, 아이에게 좋은 엄마가 되지 못할까봐, 무서워서요.”
이건 또 의외여서 이긴은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그의 두 발 위에 그녀의 발을 얹고 침대로 천천히 걸음을 떼면서.
“표본이라고 해야 하나, 바람직한, 그런 걸 못 봤으니까. 사랑을 못 주면 어쩌나, 자꾸 겁이 나요. 그래서 궁금했어요. 그러니까, 내가 사랑을, 잘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서…….”
한 번 입을 열자 둑 터진 듯 혼란한 심정이 두서없이 쏟아졌다. 벌겋게 벌어진 상처처럼, 생채기난 도우의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고백이었다. 그마저도 가슴이 저미도록 사랑스러워, 이긴은 안은 팔에 힘을 주고 이마와 머리카락의 사이의 경계, 솜털처럼 보송보송한 잔머리에 가볍게 코를 비볐다.
“걱정할 것 없어.”
“정말 그럴까요?”
“물론. 넌 이미 나를 사랑하잖아. 그거면 충분해.”
“아…….”
미처 그것까진 생각 못했다는 듯 젖어있던 눈이 순하게 깜박였다. 깨물어주고 싶게 귀여운 모습임에도 이긴은 심술궂어졌다. 눈망울에 물기가 가셨다는, 지극히 불량한 이유 때문이었다.
”왜 대답이 없지. 내 착각인가?”
부러 얼굴을 굳힌 이긴의 입가에 슬그머니 떠오른 짓궂은 장난기를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도우가 고개를 열렬히 흔들었다.
“아니요. 맞아요.”
“구체적으로 뭐가 맞는지 궁금한데.”
이상하다. 도우를 놀려대는 건 저인데, 속이 타는 것도 이긴 자신이니. 유난히 사랑을 고백하는 데 쑥스러운 도우여서 그런지 몰랐다.
“음? 뭔데.”
“사…….”
그게 뭐라고, 고백 한 번 듣겠다는 것뿐인데, 고작 그것뿐이면서 도우의 질끈 깨문 입술에 가슴이 조마조마하게 뛰고 입 안이 말랐다. 잔뜩 긴장한 이긴의 귀를 달콤한 속삭임이 간질였다.
“사랑한다고요.”
“…….”
도우의 수줍은 고백에 이긴은 심한 양가감정에 휩싸였다. 이대로 그녀를 갈아 마시고 싶은 비정상적인 소유욕과 볼에 난 솜털 하나라도 다칠까 가벼운 입맞춤조차 차마 할 수 없는 애틋함. 그의 갈등은 부끄러움에 황급히 화제를 전환한 도우 때문에 잠시 미뤄졌다. 자기 전이면 으레 하는 행사기도 했다.
가장 최근에 찍은 초음파 사진을 꺼내든 도우가 마치 처음 본 사람처럼 감탄했다. 벌써 닳도록 봐놓고도 매번 새로운 모양이었다.
“와, 어쩜 이렇게 닮았지? 정말 신기하다, 그렇죠?”
도우의 말대로 아기는 윤곽이 그다지 뚜렷하지 않은 초음파 사진마저 이긴의 이목구비를 빼닮아있었다.
“음.”
건성으로 대답하면서도 도우가 실망하지 않도록 싱긋 웃어주는 걸 잊지 않았다. 저와 닮은 사내아이라니, 조금도 흥미롭지 않았다. 이미 쌍둥이로 태어난 그로써는 신기할 턱이 없었다. 지겹게 되풀이 될 앞날이 조금 막막하기까지 했다. 그래도 나이차이가 있으니 동일인으로 착각하는 일은 없겠지만.
“만날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니, 믿기지가 않아요.”
“나도 그래.”
이불을 도우의 목까지 올려주며 동의했다. 빼빼 마른 몸에 배만 여문 박처럼 둥근 게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이런 몸으로 아이를 낳는다니, 그게 가능한 일인가 싶어 솔직히 의심스러웠다. 이긴은 의학과 과학이 이렇게 발달한 시대에 어째서 고통을 대신 느끼는 기계는 발명되지 않는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그런 게 있다면 도우가 겪을 아픔을 제가 모조리 가져올 텐데.
어쩌겠는가. 지금으로선 어느새 잠든 도우를 다독이는 것 말곤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잘 자.”
이마에 조심스레 입술을 눌러 뒤늦은 입맞춤을 한 후 그도 눈을 붙였다. 부디 오늘은 그녀가 깨지 않고 푹 자길 바라며.***으음…….
도우의 작은 뒤척임에도 이긴은 바로 눈을 떴다. 산달이 가까워올수록 도우는 자는 것을 힘들어했다. 아기가 장기를 밀어 올리는 바람에 똑바로 누우면 식도로 쓴물이 역류해서 괴로워했다. 쿠션을 넉넉히 대고 앉은 자세를 취했으나 허리가 아파 그것도 잠깐이었다. 결국 옆으로 비스듬히 누운 자세로 이리저리 뒤척이다 아침을 맞기 일쑤였다.
예민한 편인 이긴은 그럴 때마다 함께 잠을 깼다. 깨서는 안쓰러움에 쉬이 잠들지 못했다. 다행히 이번엔 단순한 뒤척임인 듯했다. 허리 아래로 내려간 이불을 끌어 덮어주면서 이긴은 부푼 배에 가만히 눈길을 주었다. 푸른 새벽빛을 받아 한층 탐스러워 보였다. 살포시 손을 얹자 툭, 제법 힘 있는 태동이 느껴져 이긴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너도 안자는구나.”
아기에게 제 목소리가 들릴 거라 확신하며 낮게 속삭였다. 알아들은 것처럼 몇 번 더 손바닥에 태동이 느껴졌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만족감이 피어올랐다. 제 아이를 임신한 오메가가 제 침대위에 있다는 사실이, 벌써 몇 개월이나 지났는데도 이따금 낯설었다.
가장 낯선 건 이긴, 제 자신이었다. 도우를 알기 전에는 저 말고는 소중한 게 없었다. 당연했다. 저보다 잘난 게 없으니 놀라울 일도 특별할 일도 없어 만사 심드렁했다.
정처 없는 생.
어쩌다 스스로의 삶을 돌아볼 땐 추를 잃은 부표가 떠올랐다. 일정한 방향으로 나아갈 일도, 그렇다고 가라앉을 일도 없는, 그저 무사한 일생.
하여 이리 애틋한 존재가 제 속에 파고들 줄 조금도 몰랐다.
도우를 만나기 이전에 이긴은 기다림을 무척 싫어하는 인간이었다. 제가 상대를 기다리게 만드는 건 얼마든지 상관없다는 안하무인도 서슴지 않으면서, 남이 저를 기다리게 만드는 건 성질머리에 맞지 않아 못 견뎠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기다림의 기쁨을 알게 됐다. 마냥 지루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그 증거로 착실하게 불러가는 배가 제 눈앞에 있었다.
“엄마 그만 고생 시켜야지?”
부드럽게 타이르는 끝에 으득, 이가 갈렸다. 분명 알아듣게 경고를 했는데도 도우의 부모는 기어이 그녀의 주변을 얼쩡거렸다. 도우는 저에게 알리지 말라고 말렸다지만, 이긴은 그냥 넘어갈 마음이 없었다. 도우를 세상에 있게 한 것, 그 단 하나만으로도 그동안 뒤를 봐줬다. 굶어죽지 않을 만큼만, 숨통을 잡고 쥐락펴락.
이제 보니 그들에게는 그마저도 과분한 처사였다. 감히 어딜 기웃거린단 말인가. 몰랐으면 모를까, 이참에 아예 끊어버릴 작정이었다. 단순히 물질적 지원만 끊는 게 아니라 적당히, 겨우 사람 구실 할 정도로만 망가뜨려놓으면 겁에 질려서라도 다신 어쭙잖은 짓거린 못할 테지.
어둠 속에서 요요히 눈을 빛내고 있던 이긴은 이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예사로 전화할 시간이 아닌데도 상대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자신 대신 수치를 모르는 오메가 부부를 손봐줄 누군가였다. 이안에게 했던 것처럼 직접 손을 볼 생각은 없었다. 명색이 아버지가 될 터인데 그런 하찮은 인간들 때문에 손을 더럽힐 이유는 없잖은가.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습니다.”
원하는 바를 지시한 이긴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통화를 종료했다.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끝장 내놓을 생각을 하니 기분이 조금은 산뜻해져, 기쁜 마음으로 다시 잠을 청했다.3. Infancy
이건 뭔가 잘못됐다.
이긴은 대체 어디서부터 틀어진 건지 지난 시간을 곰곰이 짚어보았으나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놀라울 정도로 자신과 똑같이 생긴 아기는 도우의 장담대로 아들이었다. 바라던 딸이 아니어서 실망은 했지만, 어쨌거나 도우와 그의 아기였다. 사랑스럽지 않을 턱이 없었다.
하지만 아기의 마음은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일단 제 엄마가 어를 때는 천사처럼 자다가도 그가 안아들기만 하면 자지러지게 우는 것부터 그랬다. 출산 후 영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는 도우가 안쓰러워 손을 덜어주려던 이긴은 숨넘어가도록 우는 아기를 머쓱한 기분으로 도우에게 안겨주었다.
“아가, 괜찮아, 엄마야.”
도우가 안고 몇 번 어르자 언제 울었냐는 듯 울음이 뚝 그쳤다. 거기다 방긋방긋 웃기까지 하니, 분내 나는 정수리를 보는 그의 눈초리가 길게 찢어졌다. 아기인데, 더군다나 제 자식인데, 뱉으면 안 될 말이 나올 것만 같아 이긴은 혀를 짓씹었다.
“아, 애기 냄새. 너무 좋아요.”
이긴은 아기의 정수리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도우의 코끝을 원망스럽게 쳐다봤다. 알파인 자신의 피를 이은 아기에게선 저와 꼭 같은 페로몬 냄새가 났다. 도우가 속이 뻥 뚫리는 것 같다고 했던 바로 그 겨울 숲 냄새. 제 체취는 오메가의 본능을 일깨워 이따금 두려우니 어쩌니 하며 멀리해 놓고선 지금은 아주 고개를 박고 있는 모습을 보니 속이 박박 긁히는 듯했다.
하여 소식을 전하는 이긴의 음성은 다소 삐딱하게 흘러나갔다.
“도우미 다시 오라고 연락해놨어.”
“아……, 정말 괜찮은데. 필요 없다고 했잖아요.”
“필요 없기는. 하루에 한 시간도 제대로 못자면서. 그러다 쓰러져서 입원이라도 하면 결국 아기한테도 손해야. 엄마 품이 얼마나 그립겠어.”
치사한 건 알지만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물고 늘어지자 도우는 마지못해 수긍했다.
“그러니 넌 네 몸만 생각해.”
부러 평판 좋은 산후도우미를 구했는데, 도우는 영 마음을 놓지 못하고 촉각을 곤두세웠다. 도우미의 증언으로는 침대에 누워있다가도 아기 울음소리만 나면 벌떡 일어나 달려온다고 했다.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지 못한 덕분에 도우의 몸조리는 아주 엉망이었다.
가뜩이나 약하면서 새벽에도 비실비실 일어나 젖을 먹이느라 오도카니 앉은 뒷모습에 속을 끓인 게 하루 이틀이 아니다. 수유양이 작으니 이만 모유 수유를 포기하자는 이긴의 꼬임에 도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꿋꿋하게 아이에게 젖을 물렸다.
“맘마 먹을까? 맘마, 맘마! 옳지, 착하다.”
탐스러운 가슴이 출렁이며 쏟아졌다. 이긴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도우와 눈을 맞추며 야무지게 젖을 빠는 아기를, 이긴은 부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제가 노팅했고, 저로 인해 임신한, 그리하여 태어난 제 아기가 제 여자에게 안겨있는 장면이 이긴의 눈에 고스란히 담겼다. 분명 무척 흐뭇한 광경인데, 입맛이 쓴 건 왜일까.
“내일은 밤만이라도 꼭 도우미에게 맡겨.”
경고하듯이 말하고 이긴은 시선을 맞춘 채 자기들만의 세상에 빠져있는 두 모자의 곁을 벗어났다. 모유만으로는 양이 차지 않는 아기를 위해 분유를 타기 위함이었다. 분유는 이제 눈감고도 탔다.
우선 알맞게 물을 데우고 분유를 타서 거품이 생기지 않도록 젖병을 잘 흔든다. 아기가 꼭지를 물었을 때 부드럽게 흘러나오도록 한 김을 뺀 후 뚜껑을 닫아 손등에 두어 방울 떨어트려 다시 한 번 온도를 확인하면 끝이었다.
능숙한 솜씨로 임무를 완수하여 도우의 곁으로 돌아가자 그렇지 않아도 빨아도 더 이상 나오지 않는 젖에 아기가 이마를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울음이 터지기 직전, 일촉즉발의 위기에 젖병을 물리자 다시 시원하게 쭉쭉 들이켜는 아기를 보며 도우는 몹시도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미역국 많이 먹는데……. 돼지 족도 삶아먹었는데…….”
도우의 노력은 이긴도 익히 알고 있는 부분이었다. 한 방울이라도 더 짜내지 못해 안달이라는 것도. 해서 이긴이 혀끝이라도 댈라치면 제법 매섭게 눈을 치뜨며 밀어내는 것도. 생각해보면 의아한 일이기도 했다.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걸 봐선 아주 수도꼭지처럼 콸콸 쏟아내게 생겼는데.
달콤한 젖을 배가 부르도록 포식하는 상상을 하며 막 입맛을 다셨을 때, 도우의 엄격한 음성이 이긴의 환상을 깨트렸다.
“안 돼요.”
“하.”
이긴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뭘 한다고?”
“아무튼 안 돼요, 그…… 눈독 들이는 거 다 안다고요.”
먹음직스러운 살코기를 코앞에 둔 늑대처럼 눈을 빛냈으면서 모른 척 어깨를 으쓱하는 이긴을 보며 도우는 미간을 좁혔다. 아기를 낳고 나서 이틀 정도가 지나서야 젖이 돌았다. 유두 끝에 뚝뚝 맺히는 진한 젖 방울에 이긴은 눈을 번득이며 달려들었다.
때마침 간호사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소중한 초유를 홀랑 앗길 뻔했다. 다른 건 다 몰라도 아이랑 직결되는 건 참을 수 없어 저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었다. 날카롭게 저를 막아서는 도우를 보며 이긴의 얼굴도 험상궂게 구겨졌다. 어지간한 건 모두 그녀에게 맞춰주는 그였지만, 이 건에 관해서만큼은 물러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웃기는 일이었다. 모유는 원래 아기 것 아닌가.
그러던 게 젖양도 충분치 않으니 이긴이 아무리 우겨대도 그의 몫으로 돌아갈 모유가 없었다. 아쉬운 대로 아기가 빨고 난 자리에 붙어 슬쩍슬쩍 혀를 대보는 것 외에는. 그나마도 허락이 떨어질 때가 손에 꼽았다. 이따금 울분이 치솟기도 했지만, 아쉬운 쪽은 그였기에 이긴은 잠자코 받아들였다. 몇 번 안 되는 기회마저 앗길까봐.
흥.
사람을 이렇게 애태워도 되나. 조금은 고까운 마음에 이긴은 도끼눈을 뜬 도우더러 시위하듯 고개를 홱 돌렸다.
“……화, 났어요?”
조심스런 도우의 물음에 양 끝이 히죽 올라가는 입술을 앙 다물며 이긴은 스스로에게 욕을 퍼부었다.
씨발, 모자란 새끼.
금세 풀려서 실실대는 꼴이라니. 이미 속으로는 마음껏 휘둘려줄 생각이면서도 말만은 딱딱하게 나갔다.
“났으면 어쩌게.”
“…….”
“응? 났다고, 화.”
어린아이처럼 구는 이긴이 마냥 싫지 않아 도우는 설핏 웃었다.
‘귀엽다.’
그에게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라는 건 알지만, 귀엽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철없는 아이를 달래듯 도우가 조곤조곤 설명했다.
“지금은 아이 먹을 것도 부족하니까……. 어쩔 수 없잖아요.”
“펑펑 솟아도 줄 생각 없었으면서.”
정확히 옳게 보았지만 도우는 가만가만 고개를 저어보였다. 고분한 태도에 이긴은 더 추궁하지 않고 아기를 안아들곤 슬슬 등을 문질렀다. 다 먹었다고 젖병을 톡 뱉어놓는 성질머리는 누굴 닮았을까 궁금해 하면서.
갸악.
제법 우렁찬 트림소리와 함께 달콤한 젖비린내가 물씬 풍겼다. 배가 부르니 졸린지 이내 칭얼거리는 아기를 얼른 다시 도우에게 안겨주었다. 제 엄마가 안아드니 울 준비라도 한 것처럼 새빨갛게 달아오른 아기의 피부가 금세 뽀얗게 가라앉았다. 어지간히 손을 타는 아기였다.
한편으론 제가 아기여도 그렇겠다 싶었다. 달콤한 솜사탕 냄새와 싸늘한 숲 냄새 중 고르라면 단연 전자 아니겠나. 엄마의 포근한 살내음을 맡으며 아기는 이내 색색 잠들었다. 조심조심 아기 침대에 아기를 내려놓은 도우가 겨우 침대에 등을 댔다.
“아…….”
고단한 한숨을 내쉬는 도우를 안아 품에 가뒀다. 임신하기 전에도 원체 가벼운 몸이었지만, 아이를 낳고나서 더 깃털 같아졌다. 불어난 가슴을 제외하고는 손대기 무서울 정도로 말랐다. 이대로 사라지는 건 아닐까. 왈칵 몰려온 두려움에 이마에 대고 뺨을 비볐다.
“제발, 내일부터는 도우미에게 맡겨. 내 말 듣는 거야, 알았지?”
그새 깜박 졸았는지 도우가 멍하니 고개를 들고 힘없이 끄덕였다.
“알았어요.”
“나한텐 아기보다 네가 더 소중해.”
“무슨 그런 말을…….”
“진심이야. 난 너 없으면 안 돼. 그러니 제발 네 몸부터 챙겨.”
“그렇게 할게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또 안절부절 애태울 도우를 안다. 다 때려치우고 들어앉을까. 다소 과격한 방안을 떠올리며 이긴은 제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아기는 요즘 한 시간 반 간격으로 젖을 먹었다. 그건 곧 겨우 눈을 붙인 도우가 한 시간 반 후에 일어나야한다는 뜻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내가 대신 젖을 물리고 싶어.”
괴상한 소리에 감겨있던 도우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하지만 이긴은 시종 진지했다. 그럴 수만 있다면 도우가 잠이라도 충분히 잘 수 있을 텐데.
“물론 난 쩨쩨하게 굴지 않고 너도 배불리 먹여줄 테고.”
으, 무슨 상상을 했는지 도우가 몸을 잘게 떨었다. 그예 이긴의 짓궂은 장난기가 발동했다.
“예행연습해볼까? 또 누가 알아? 내가 수유하게 될지.”
“말도 안 돼요.”
기가 막혀서 헛웃음을 터트리는 도우의 상체를 비스듬히 안아 제게 기대게 한 이긴이 눈을 빛내며 능청스럽게 상의를 걷어 올렸다.
“자, 맘마 먹어야지?”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예, 읍……!”
그저 장난인 줄 알았는데 혀를 꾹 누르는 단단한 유두에 도우가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그러면서도 혀끝으로 유륜을 둥글게 따라 그렸다. 한순간에 이긴의 눈빛이 홱 변했다. 다소 가라앉은 음성이 도우의 귓가에 눅진하게 감겨들었다.
“오늘 자기 싫은가본데.”
꿀꺽, 도우가 마른침을 삼켰다. 간절하기로는 그녀도 못지않았다. 출산 후 몸이 회복되는 동안 꽤 오래 관계를 가지지 못해 이긴의 품이 그리웠다. 귓가에 떨어지는 거친 숨소리와 잔뜩 달아올라 손닿는 곳이면 어디고 뜨거운 단단한 몸을, 몹시도 원했다. 따라주지 않는 체력이 문제지만, 지금이라면 괜찮을 것도 같았다.
“자기 싫으면요?”
예상 못한 도발에 움찔한 이긴의 표정이 착잡해졌다. 한 번 시작하면 제어할 자신이 없었다. 한없이 약해진 도우를 상대를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게다가 그들의 아기는 잠귀가 무척 밝은 편이었다.
“하…….”
이를 어쩐다. 갈등하는 이긴의 입술에 뜨겁고 가칠한 도우의 숨결이 닿았다. 생각의 흐름이 거기서 뚝 끊겼다. 이긴은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한 조각 사탕 같은 도우의 혀를 뿌리가 뽑히도록 얽고 빨아댔다. 그것만으로도 아래가 터질 듯이 성성해졌다.
미친.
불같은 제 물건의 반응에 이긴은 도리어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직 격렬한 행위는 무리인데 잠시 망각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별안간 멈추자 그를 멍하니 올려다보던 도우도 이내 상황을 파악했다.
“자둬. 피곤할 텐, 읏.”
이긴의 말보다 도우의 행동이 더 빨랐다. 날래게 그의 물건을 쥐고 올려다보는 눈빛이 대담했다. 그런 주제에 허락을 구하듯 시선을 맞춰오는 것도. 거기에 어떤 결연한 의지 같은 게 엿보여 이긴이 도우를 저지했다.
“이럴 거 없어.”
아니, 고개를 담담히 가로저은 도우가 선액이 맺힌 끝을 덥석 머금었다. 축축하게 젖은 점막이 부드럽게 미끄러지며 기둥을 감싸자, 억눌린 신음과 함께 이긴이 목울대가 크게 오르내렸다. 도우의 어깨를 붙잡은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않던 그녀가 이러니 더욱 달아오르는지도 몰랐다.
“으음…….”
한계까지 팽창한 성기가 숨도 못 쉬게 목구멍을 틀어막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뒤로 빼는 머리통을 꽉 잡아 고정시켰다. 내친김에 페로몬도 풀었다. 순간적으로 도우의 눈이 풀렸다. 그 상태로 연속적으로 침을 삼켰다. 꿀떡꿀떡, 더 깊은 구덩이 속으로 빠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한 감각에 하초를 중심으로 짜릿한 전류가 번졌다.
지그시 눈을 감고 고개를 젖힌 이긴의 두 귀에 우음, 음, 맛있게 빠는 소리가 질척하게 울렸다. 거기에 달큼한 젖비린내가 후각을 자극했다. 그러자 다른 촉감이 고파졌다. 습윤한 점막보다 부드럽고 말랑한, 보다 원초적인 감각을 자극하는.
도우의 입에서 자신의 성기를 뽑아낸 이긴은 흥분으로 벌게진 눈을 하고서 도우의 가슴을 모았다. 풍만하여 한손으로 모아지지 않는 가슴의 양옆에 도우의 손을 끌어다 붙였다. 좁은 가슴골 사이를 비집고 들어서자 야들야들한 살덩이가 차지게 달라붙었다. 그의 생각보다 뜨겁고 환상적이어서, 이긴은 다시 낮은 신음을 뱉으며 그 상태로 강하게 앙가슴을 문질렀다.
호두알 같은 귀두가 도우의 턱을 찌를 듯이 솟았다가 말랑한 가슴에 다시 묻히기를 반복하는 동안 도우의 새까만 두 눈을 줄곧 이긴을 향하고 있었다. 그의 페로몬에 취해 몽롱한 도우의 눈이 가득 차오른 애정으로 일렁였다. 짙은 복숭아 냄새가 그를 옭아맨 것과 동시였다. 명백히 그로 인한, 그만을 위한 반응.
몸도, 마음도, 그녀를 온전히 가지고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갈비뼈가 뻐근해지도록 충만한 기분이 됐다.
큿…….
고양감은 곧바로 사정으로 이어졌다. 이긴은 젖물처럼 뿌연 액체가 앙가슴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리는 모양을 멍하니 바라봤다. 아기가 울음을 터트린 것과 동시였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흘렀나. 시계를 확인한 이긴이 난감해하는 동안 서둘러 둘의 은밀한 흔적을 닦아낸 도우가 아기 침대로가 아기를 안아들었다. 그러나 평소와 다른 냄새가 나자 아기는 젖을 물지 않고 빽빽 울었다.
“곧 타올게, 기다려.”
분유를 타는 동안 고막이 찢어지도록 우는 아기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이긴은 이참에 완전히 분유로 갈아탔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바랐다. 그럼 도우에게서 나는 건 모두 제 차지가 될 텐데, 하는 다소 불량한 사심까지 섞어서.***“아……!”
가슴에 추를 달아놓은 것처럼 무거운 느낌에 도우는 잠을 깨버렸다. 벌써 유축 할 시간이 됐나. 곤히 잠든 아기와 이긴을 깨우지 않도록 조심조심 걸음을 옮겨 거실로 향한 도우는 익숙한 솜씨로 유축 준비를 마쳤다. 평소보다 유난히 유축기와 가슴의 아귀가 안 맞는 것 같은 느낌은 잠결이라 그러려니 했다. 그러나.
“어……?”
아무리 쥐어짜도 젖은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가뜩이나 젖양이 적은데 아예 나오지 않는다면 어떡하나 싶어서 잠이 확 달아났다. 그런다 해도 막힌 것처럼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건 여전했지만. 아플 정도로 늘어난 젖꼭지에 놀라 유축을 그만 둔 도우는 한동안 어둠속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갑자기 왜…….’
그동안 너무 이긴에게 박하게 굴어 벌이라도 받은 걸까. 벌이라니, 너무 나갔다. 아무래도 이긴의 페로몬 냄새 때문에 아기가 젖을 물어주지 않아서인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린 도우는 울상이 되어 땡땡하게 불어난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부푼 모양새만 봐선 콸콸 쏟아져도 이상하지 않은데. 설상가상으로 뜨끈뜨끈 열이 나고 아프기까지 했다. 말로만 듣던 젖몸살이었다.
“어떡해, 으…….”
통증은 점점 심해져 이젠 제 팔이 스치기만 해도 눈물이 찔끔 나도록 아팠다. 돌처럼 딱딱해진 가슴을 아이가 물어줄 리 없으니 풀길도 요원했다. 아이스 팩이라도 대야하나. 어쩔 줄 모르고 마음만 바쁘게 허둥거리고 있을 때, 도우의 빈자리를 확인한 이긴이 그녀를 찾아 거실로 나왔다.
“자지 않고.”
“그게……”
막막하던 차에 이긴이 곁에 있다고 생각하자 목이 콱 메었다. 어두운 탓에 잔뜩 가라앉은 분위기는 살피지 못하고 뒤늦게 유축기를 발견한 이긴이 이맛살을 찡그렸다.
“그러게 내가 분유로,”
“흑……!”
다짜고짜 울음이 터졌다. 손도 댈 수 없게 딱딱해져선 불덩이처럼 타오르는 가슴이 아파도 너무 아팠다. 단순히 가슴만 달군 바위를 매단 것 같은 게 아니라, 어깨, 등허리마저 당기고 아팠다. 경직된 상체가 흡사 갈고리처럼 굽어들었다. 당혹감과 서러움은 덤이었다.
“무슨…….”
예상 못한 반응에 얼어있던 이긴은 행여 아기가 깰까봐 숨을 참아가며 우는 도우를 품에 안았다. 단단한 가슴팍에 고개를 묻은 도우가 실컷 흐느꼈다. 순식간에 축축하게 젖어버린 앞섶에 이긴은 자책했다.
‘이렇게 스트레스 받고 있는 줄은 몰랐는데.’
저는 순전히 고생하는 도우를 위해 하는 말이었는데 그 조차도 부담으로 다가온 모양이었다. 앞으로는 분유건 모유건 절대 왈가왈부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앙상한 등을 가만가만 쓸었다. 호시탐탐 모유를 노리는 것도 그만 둬야겠다고 제법 기특한 마음까지 먹었을 즈음, 겨우 감정을 추스른 도우가 울먹이며 말했다.
“너무, 너무 아픈데, 아픈 것보다 젖이 끊길까봐,”
“뭐?”
도우가 아프다는 말에 머리가 하얗게 탈색된 후라 뒤에 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벌써 두 번이나 도우를 잃을 뻔한 충격의 여파가 이긴의 가슴을 세차게 뛰게 만들었다. 당장에 그녀를 업고라도 뛸 태세인 이긴을 도우가 서둘러 말렸다.
“젖몸살인 것 같은데…….”
도우미가 있으면 마사지라도 부탁해볼 법한데 일이 어그러지려고 그랬는지 하필 오늘 도우미가 일이 있어 양해를 구하고 하루 휴가를 낸 상황이었다. 이러는 사이에도 가슴의 상태는 더욱 악화되어갔다. 가슴이 아니라 불에 달군 쇳덩이를 얹어놓은 듯 했다. 이제는 스치는 건 고사하고 자세를 틀기만 해도 격렬한 통증에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아파…….”
눈물이 줄줄 흘렀다. 젖몸살이라는 단어를 겨우 알아들은 이긴이 묘한 눈빛으로 여미고 있던 도우의 앞섶을 활짝 펼쳤다. 옷자락의 펄럭임에도 자극이 심해 흐으, 얕은 신음이 애처롭게 흘렀다.
“내가 해결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지나치게 꽉 잠긴 음성이었지만, 젖몸살에 시달리는 도우는 그저 해결해준다는 말에만 귀가 번쩍 뜨였다.
“진짜요?”
질문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긴은 신속히 움직였다. 따뜻하게 데운 수건을 가슴에 덮는 것부터 시작이었다. 가뜩이나 가슴이 활활 타는데 저걸 올려놓겠다고? 바위덩어리 같았던 가슴이 차츰 부드럽게 풀어지면서 도우의 미심쩍은 시선은 자연스레 걷혔다.
타는 것 같은 열감이 한풀 꺾이고 난 후, 이긴이 수건의 한쪽을 들췄다. 숙련된 솜씨는 아니지만 침착하고 신중한 손길로 젖가슴의 아래부터 위까지를 넓은 손바닥으로 쓸어올렸다. 마치 젖을 모으듯이. 하으으으, 연신 앓으면서도 어쩐지 시원한 기분에 저지하지 않는 도우에게 이긴이 다정하게 물었다.
“견딜 만해?”
도우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의외로 고통스럽지 않았다. 초반에 이긴이 가슴을 쥐었을 땐 몹시도 괴로웠으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리듬감 있는 손놀림에 유두를 향해 찌릿찌릿 전류가 내달렸다. 꼭지 끝에서 찡, 하는 울림을 감지한 순간.
“어……?”
거짓말처럼 젖이 퐁퐁 솟아올랐다. 일부는 격렬하게 쏘아져 이긴의 쭉 뻗은 콧날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후각이 마비될 정도로 달콤한 젖비린내가 훅 끼쳤다. 줄곧 자상하던 이긴의 눈빛이 변한 건 한 순간이었다.
“아, 응……, 읏!”
뽀얀 젖가슴을 유륜이 보이지 않도록 함빡 베어 문 이긴이 그 상태로 고개도 떼지 않고 볼이 홀쭉해지도록 쭉쭉 빨아들였다. 막혔던 유선이 뚫리면서 둥근 젖가슴에 고여 있던 모유가 힘차게 뿜어져 나와 이긴의 목젖을 사정없이 때렸다.
“으음…….”
딱 예상한 그대로의 단맛에 이긴은 황홀한 신음을 흘렸다. 따스한 젖이 목구멍으로 넘어갈 때마다 향긋한 복숭아 냄새가 진한 여운을 남겼다. 이렇게 끝내주는 걸 그 동안 입도 못 대게 했단 말이지. 제게는 그렇게 아껴놓고 아기에게는 남김없이 주고도 부족해 한 방울까지 쥐어짜내려 했던 게 떠올라 이긴은 부러 입 안에 물린 말랑한 살점을 잘게 씹었다.
“읏, 아…….”
당황한 기색으로 저를 내려다보는 도우의 야속한 눈길에 이긴은 도리어 서러워졌다. 지금 정말 야속한 게 누군데. 물론 최소한의 이성이 남아있었기에 속엣말을 끄집어내는 어리석은 짓은 벌이지 않았다. 대신 보다 집착적으로 젖을 빨아댔다. 꿀떡꿀떡, 적지 않은 양이 목을 넘어가는 소리만이 거실의 정적을 깼다.
“하으, 흐…….”
이긴의 뺨이 움푹 파일 때마다 몰아치는 짜릿한 쾌감에 도우는 절절 앓았다. 열기와 함께 꽉 틀어박혀있던 유즙이 힘 있게 빨려나가면서 후련한 기분을 안겼다. 무언가 텅 비어버린 것 같은 허전함을 느낄 때 쯤, 이긴이 부러 야한 마찰음을 내며 입술을 뗐다.
“아…….”
싱긋 웃는 입가에 살짝 번진 유백색 액체를 확인한 도우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아기도 아닌데, 다 큰 성인 남성에게 실컷 젖을 빨렸다는 자각이 뒤늦게 들어 민망했다.
“이제 그만, 그만 해요…….”
“부부끼리 뭐가 그렇게 부끄러워.”
“그래도요.”
언짢아할 이긴을 안다. 그래도 도우의 입장에서 이긴에게 젖을 물리는 건 떠올리는 것조차 부끄러운 일이었다. 아기의 전용 맘마라는 생각이 강한 탓이겠지만. 아무튼 그런 이유로 이제는 떨어져주었음 했다. 임신 때부터 그렇게 젖몸살 풀어준다고 노래를 부르더니 기어코 이리 도와준 건 고맙지만.
“이제 그만…….”
다행히 이긴은 그다지 서운한 표정이 아니었다. 한결 마음 편히 제게 들러붙어있는 이긴의 어깨를 밀다가 도우는 어떤 사실 하나를 불현 듯 기억해냈다. 제 가슴이 두 쪽이라는 것. 그를 밀어내느라 자세가 바뀌어 아직 땡땡하게 부푼 한쪽 가슴을 인지한 도우는 이긴이 얄궂게 웃고만 있는 이유를 비로소 깨달았다. 이미 심기가 틀어졌다는 것도. 그렇다는 건 쉽게 남은 젖몸살을 풀어주지 않을 거란 뜻이었다.
“아니…….”
어디 한 번 해보라는 듯 눈빛만 빛내고 있는 이긴을 보자 억울해서 말랐던 눈물이 다시 고일지경이었다. 이게 그럴 일인가? 고통을 덜어주진 못할망정, 반응을 즐기고 있다니. 끝내 눈물이 그렁그렁해졌을 때, 이긴이 나머지 가슴에 얹혀있던 수건을 풀었다. 그러곤 달래듯이 부드럽게 가슴둘레를 둥글게 굴려 뭉친 부분을 풀기 시작했다.
“너무해요.”
“너무한 건 너야. 휘둘리는 건 늘 나라고.”
휘둘리다니, 언제? 반박하고 싶었지만, 어쩐지 투정의 이유를 알 것도 같아 입을 다물었다. 조금 전 그녀의 가슴에서 떨어졌을 때 흠뻑 취한 듯한 얼굴만 떠올려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 동안 철저히 모유를 단속한 그녀를 향한 희미한 원망을. 아니나 다를까, 한층 농밀해진 손길로 막힌 유선을 뚫어내면서 이긴이 심술궂게 중얼거렸다.
“내가 설마 아파하도록 그냥 내버려둘까 봐? 쓸데없는 걱정을.”
고마운 마음이 들 찰나.
“난 아직 배고프거든.”
사심 가득한 속셈에 밀려오던 감동은 곧장 도로 밀려나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긴은 착실하게 손을 놀렸다. 양손으로 유방의 아래쪽 둘레를 감싼 후 젖꼭지 방향을 따라 부드럽게 압박을 가하며 문질렀다. 떡 반죽을 치대듯 손바닥을 대고 둥글게 둘리기도 했다.
염주 알처럼 땡글땡글하게 응어리져있던 것들이 차차 풀리는 느낌이 나, 도우는 또 한 번 전율했다. 먼젓번처럼, 유두 주위로 젖줄기가 짜릿하게 내달리는 느낌이 나더니 이내 정점에 뽀얀 젖이 맺혔다. 이제 그가 빨아주기만 하면 불덩이 같은 열기가 일시에 시원해질 테지. 기대에 젖어 얌전히 가슴을 내맡긴 도우의 무릎에, 별안간 묵직한 것이 얹혔다.
“뭐하는…….”
통통하게 부풀어있는 가슴 아래에 얌전히 누운 이긴이 아기처럼 도우의 보드라운 배에 이마를 문질렀다. 그러곤 조르듯 입술을 뻐끔거렸다. 아이처럼 안고 수유해 달라는 뜻인가. 기가차서 도우의 말문이 턱 막혔다. 상상만으로도 민망해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어서요, 이러지 말고.”
젖몸살이 완전히 풀리기까지 한 끗이었다. 그 한 끗을 남겨놓고 이긴은 잘도 어깃장을 놓았다.
“제발…….”
애타게 빌어봤지만 이긴은 못들은 척했다. 어차피 승자는 정해져있었다. 아쉬운 쪽이 지게 마련이니까. 망설임 끝에, 도우가 천천히 그의 뒷목을 안아들었다. 질끈 감은 눈이 현실을 부정하고 있었지만 어쩌겠는가. 그녀의 고통을 단박에 거둬갈 천국의 문이 입을 쩍 벌리고 있는데.
유방의 아래쪽을 받치고 이긴의 고개를 제게 향하게 한 도우가 아이에게 그러하듯 젖을 물렸다. 젖이 작게 방울져 몽글몽글 맺힌 유두가 이긴의 아랫입술을 쓱 문지르고 넘어가 혀에 닿았다.
쪽, 얕게 빠는 소리가 야살스레 울리는가 싶더니 이내 함빡 먹혔다. 줄기차게 뿜어져나가는 달콤한 액체를 이긴은 욕심 사납게 빨아들였다. 배가 부를 때까지 놓아주지 않을 작정이었다. 달짝지근한 복숭아 향이 나는 유백색 진액이 목구멍을 따스하게 적시며 넘어가는 부드러움이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두 눈까지 지그시 감고서, 이긴은 젖가슴이 가진 본연의 목적을 충실히 즐겼다.
묵직하게 들어차있던 열기가 고여 있던 모유와 함께 빠져나가 겨우 살만해진 도우는 슬쩍 아래를 내려다보았다가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어두운 거실, 수면 등의 은은한 조명아래 정적인 수유. 언뜻 보면 평화로운 장면이었다. 도우의 품에 안긴 게 다 자라다 못해 건장한 남자가 아니라 작은 아기였다면 말이다. 기분이 너무 이상했다. 저릿저릿하게 울리는 쾌감은 별개로 치더라도.
“으응…….”
결국 야트막한 신음을 저도 모르게 뱉고 말았다. 이상해, 도우는 입술을 꾹 깨물며 도리질 쳤다. 물론 이긴은 이전에도 이런 식으로 가슴을 빤 적이 종종 있었다. 그녀의 큰 가슴을 무척이나 기특해하는 그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 때는 이긴이 떼어먹을 듯 굴었어도 젖은커녕 맹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그 간극이 도우의 기분을 묘하게 만들었다.
죄책감을 동반한 은밀한 흥분.
가슴에 뭉쳐있던 열기가 아래로 흘러내린 듯 따스한 음액이 축축하게 고여 버린 가랑이 사이를 의식한 도우가 마른 침을 삼켰다. 젖몸살이 어지간히 풀어지자 통증은 가시고 어느덧 유희만 남았다. 이긴은 더는 나오지 않는 모유를 아쉬워하며 정점을 할짝할짝 핥아댔다. 선연한 자극에 놀란 도우가 이긴을 그러안았던 팔을 놓아버렸다. 별안간 무릎 위로 뚝 떨어진 이긴이 눈썹을 찡그렸다.
“이제 필요 없다, 이건가? 매정한데.”
“그게 아니라, 그만…… 해도 될 것 같아요.”
마개로 목구멍을 틀어막은 것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안에 은은하게 일렁이는 욕구를 이긴은 기민하게 감지해냈다.
“어, 어어? 뭐하려고……?”
잽싸게 반대로 자세를 바꾼 이긴이 허기진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포식까진 아니어도 어느 정도는 배를 채웠을 텐데 어째서 저리도 주린 눈빛인지 알 수 없었다. 영문 모를 불안으로 새카맣게 가라앉은 눈동자를 응시하던 도우는 저 밑바닥에 들끓는 음욕을 눈치 챘다.
“안 돼요.”
곤히 자고 있는 아기가 깰까봐 두려웠다. 저를 향해 단호히 고개 젓는 도우를 향해 이긴이 험상궂게 뇌까렸다.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아니…….”
“왜, 이젠 이것도 아끼려고?”
그렇게 아끼더니 결국 젖몸살이 난 가슴을 상기시킨 이긴이 손가락을 넣어 젖은 음부를 확인하고 씩 웃었다. 늘 보는 미소인데도 어쩐지 가슴이 설렜다. 잠시 넋을 놓고 있는 사이 미처 막을 새도 없이 이긴이 그녀의 양다리를 잡아 벌렸다. 그러곤 젖은 팬티 위로 혀를 눌렀다. 얇은 천을 사이에 두고 혀의 두터운 질감이 그대로 전해졌다.
“안, 이러지 말, 응……!”
팬티의 천이 혀의 놀림대로 움직여 민감한 정점을 부드럽게 자극했다. 음부에 가해지는 직접적인 애무가 너무 오랜만이어서 도우는 속절없이 앓았다. 쾌감을 가누지 못하고 멍하니 벌어진 입과 코로 청량한 겨울 숲 향이 밀려들었다. 이제는 있으나마나한 속옷 겉으로 배어나온 음액이 주르륵, 다리 사이로 흘러내렸다.
이건 반칙이다.
다소 억울한 감이 없지 않으나 도우는 체념하고 돌돌 말린 속옷을 끄집어 내리는 이긴에게 순순히 협조했다. 몸이 어디고 달아오른 탓이었다. 닥쳐올 격정을 예감이라도 한 양 욱신거리는 아랫배를, 묵직하게 채우고 싶은 욕구가 솟구쳤다.
무의식적으로 무릎을 활짝 연 도우의 앞에 꿇어앉은 이긴이 눈앞의 예쁜 속살을 즐겁게 감상했다. 세로로 접힌 입구 아래 맺혔다가 뚝뚝 떨어지는 애액을 혀끝으로 쓸어 올리며 감상평까지 내놓았다.
“줄줄 흘려대면서 뭘 이러지 말라고. 아깝게.”
버드키스처럼, 촉촉, 아랫입술과의 가벼운 입맞춤이 이어졌다. 사랑받는 느낌에 기분이 좋았다. 좋은데, 좋기는 한데…….
“……허전해요.”
그의 손을 힘주어 당긴 도우가 배꼽 언저리를 꾹 눌렀다. 이만하면 알아들으리라 믿었다. 당연히, 이긴은 알아들었다. 녹진하게 풀어진 그녀의 안에 누구보다 파고들고 싶은 게 그였으니까. 당장이라도 박고 싶어 눈이 돌아갔지만, 그보다 도우가 먼저였다. 해산한지 채 백일도 지나지 않은 여자를 안을 정도로 정신이 나가진 않았다.
“열 달 동안 품고 있던 걸론 부족해?”
초조한 마음에 나간 실없는 농담에 도우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그게 사랑스러워 피식 웃다가 예고 없이 벌어진 틈을 비집고 코를 묻었다. 짙은 체향을 흉곽이 부풀도록 들이마시고 혀를 넓게 펼쳐 음부 전체를 문질렀다.
“으, 응!”
우뚝 솟은 코가 정점을 짓누르자 도우의 입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울렸다. 침실을 곁눈질한 도우가 서둘러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겨루기처럼, 이긴의 혀 놀림이 더욱 농밀해졌다. 내벽을 진득하게 채운 꿀을 샅샅이 발라먹고도 모자라 게걸스레 안을 쑤셨다. 그럴 때마다 깎아지른 듯한 콧날이 민감한 살점을 묵직하게 긁었다.
“아…….”
자극이 차곡차곡 쌓여가자 도우가 허리를 뒤틀었다. 자꾸만, 자꾸만 무언가가 터지려고 했다. 요의를 참듯이 허벅지를 모았으나 이긴의 머리를 더욱 가까이 끌어들이는 꼴만 됐다. 덕분에 높은 콧대가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정점을 사정없이 짓이긴 순간, 눈앞이 새하얗게 바랬다.
“하읏, 읏!”
절정으로 끌어올려져선 결국 높은 교성을 지르고야 말았다. 동시에 억지로 누르고 있던 아슬아슬한 감각이 일시에 분출했다. 정점을 기점으로 따스하고 맑은 액체가 잇따라 쏘아졌다. 앙, 아앙! 도무지 제 것 같지 않은 흥분 섞인 신음이 먹먹하게 울려 퍼졌다.
“흐으……, 아…….”
육안으로도 허벅지가 파들파들 떨리는 게 보였다. 그 사이에 놓인 이긴의 얼굴이 제가 쏘아낸 액체에 흠뻑 젖어있는 것도.
어떡해.
한차례 절정을 겪고 나자 겨우 정신이 든 도우가 부끄러움에 뒤늦게 얼굴을 가렸다. 제 애액으로 온통 번들거리는 그를 마주하기가 그렇게 민망했다. 시야가 가려진 도우의 귀로 할짝할짝, 달게 핥는 소리가 들렸다. 도우는 슬그머니 손가락을 벌렸다. 그녀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손가락 틈으로 눈을 마주친 이긴이 능청스레 웃었다.
“난 아무래도 이 쪽이 더 맛있는데.”
“무슨, 그러지 마요…….”
위고 아래고 남김없이 털어먹은 이긴이 미련 없이 일어났다. 아직도 후들거리는 도우의 매무새를 다듬어주고 번쩍 안아들어 침실로 향해선, 침대에 그녀를 조심스레 눕혔다. 기특하게도 아기는 여전히 색색 잠들어있었다.
“같이 안 자요?”
따라 눕지 않는 이긴을 보며 도우의 눈이 동그래졌다. 팽팽하게 부풀어있는 가운의 앞섶을 확인한 건 묻고 난 직후였다. 아, 작게 탄식하며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녀의 마음을 안다는 듯 이마를 몇 번 쓰다듬은 이긴은 욕실로 향했다.
아직 도우가 달콤한 체액을 쏘아 올리던 순간의 기억과 그 부산물이 그의 머릿속과 얼굴에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그 정도면 충분히 성난 녀석을 달랠 수 있을 것 같았다.4. 5 years old
이긴은 라이벌 의식이라는 걸 모르고 살았다. 당연하지 않은가. 워낙 잘나신 몸이니. 경쟁도 대적할만한 상대가 있어야 하는 거다. 원래도 남 신경 쓰지 않는 성격이기도 하고. 때문에 가정을 이루고 사업도 승승장구하여 인생의 황금기에 들어선 이때, 뒤늦은 라이벌의 등장에 대해서는 조금도 예측하지 못했다.
그의 라이벌은 작은 체구와 빈약한 논리를 지녔다. 솔직히 말해서 라이벌이라고 칭하기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글쎄, 그나마 그와 견줄만한 건 빛나는 눈빛 정도? 꼼꼼히 라이벌을 살펴보던 이긴이 한 가지를 더 발견하고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인정.’
그의 라이벌답게 벌써부터 인물이 출중하긴 했다.
‘그야 나를 빼닮았으니까.’
이 또한 자신의 공으로 돌리며 이긴이 인상을 굳혔다. 상대도 지지 않고 눈썹을 모았다. 둘은 아까부터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대치 중이었다.
“우린 결혼도 했어.”
이긴이 어깨를 한껏 넓게 벌리며 으스댔다.
“넌 아니잖아.”
“나두우, 나두 할 거야, 결혼! 엄마랑 할래!”
“그건 법적으로 안 돼. 넌 하고 싶어도 못 해.”
도우가 고작 만 다섯 살짜리랑 진지하게 겨루고 있는 그에게 어이없다는 시선을 던졌다. 그랬다. 그의 라이벌은 다름 아닌 제 아들이었다. 최근에는 제 증조부의 지지까지 등에 업고 아주 기세 등등이었다. 이긴의 조부는 이현만 보면 껌벅 죽었다. 이긴에게 쏟았다가 갈 곳 없어진 집착이 제자리를 찾은 거다. 그렇다고 물러설 마음은 없었다.
“그러니까 알겠지. 네 엄마는 내 거야.”
“아니고든! 엄마는 내 거야! 나랑 뽀뽀도 했어!”
“흥. 네 엄마랑 나랑 얼마나 깊은 사이인 줄 알면 깜짝 놀랄걸. 우리는, 읍, 읍!”
어디까지 갈 셈인가. 이긴의 입에서 어린아이가 듣기에 적절하지 못한 말이 튀어나올 것만 같아 도우는 서둘러 손을 뻗어 그의 입술을 막았다. 그러자 능청을 떨며 그녀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갠 이긴이 도우의 손바닥에 입술을 꾹꾹 눌렀다. 지그시 눈까지 감은 채.
“하지 마! 내 엄마란 말이야! 하지 마아!”
으아아앙! 기어이 울음이 터졌다. 라이벌을 굴복시킨 이긴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도우의 손에 뺨을 비볐다. 봤지? 의미심장한 미소는 분명 상대를 도발하고 있었다.
“정말! 왜 이러는 거예요!”
보다 못한 도우가 이긴에게 눈총을 쏘았다. 질겁하며 잡힌 손을 뿌리친 후였다. 제 엄마에게 뛰어들어 답삭 안긴 이현이 이제는 입으로만 흐앙, 하고 울었다. 이미 승기를 잡았다는 걸 알고 의기양양한 거다. 자그마한 녀석이 그의 맞수가 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여기에 있었다.
도우. 그의 아내.
이긴은 저를 매정하게 뿌리치고 이현을 택한 도우를 서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뚫어지게 바라보는 만큼 시선이 느껴질 만도 한데 도우는 아이를 달래기에 여념이 없었다. 엄마의 품을 차지한 이현이 방긋방긋 웃으며 재롱을 부렸다. 영역 표시를 하듯 제 엄마의 볼에 뽀뽀를 퍼부었다. 침 범벅인 볼을 한 도우가 눈동자가 보이지 않도록 눈매를 휘어가며 웃었다.
도우가 행복에 겨워 어쩔 줄 모르는 동안 이현이 이긴을 슬쩍 곁눈질 했다. 눈이 마주치자 뻐기듯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저게.’
분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상대는 어린애니까 더 맞붙어봐야 비난의 화살은 무조건 그에게 쏟아지게 되어있으니. 이겨도 지는 싸움임을 절감하자 이긴은 형용할 수 없는 패배감에 깊이 빠졌다. 패배감이라니. 난생 처음 겪는 감정이었다.
그래도 아직 희망은 있었다. 자그마치 우성 알파인 그 아닌가. 이긴은 도우가 모르게 페로몬을 조금씩, 아주 조금씩 풀었다. 이현에게 못 박힌 도우의 시선을 기어이 앗아 올 심산이었다. 차차, 도우의 목덜미가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상기된 얼굴, 이따금 가슴이 들썩일 정도로 크게 마셨다 내쉬는 호흡에 회심의 미소를 지은 것도 잠시.
“…….”
“…….”
그의 술수를 눈치 챈 도우가 힐난하듯 째진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얼른 고개를 돌려 모른 척했지만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했다. 그의 완패라는 것을.
이긴은 패배자답게 쓸쓸히 물러났다. 서재로 들어가기 전에 들려온 까르륵 소리에 슬쩍 뒤를 돌아보자 두 모자가 서로를 간질이며 흐드러지게 웃고 있었다. 그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둘만의 세계에 푹 빠진 모습이었다. 마음이 스산했다.서재에 틀어박혀서도 썩 유쾌하지 못한 기분에 시간을 죽이다가 따분한 서류에 겨우 집중할 수 있게 되었을 때쯤, 도우가 살며시 문을 열고 다가왔다. 저녁임을 고려해 옅게 내린 커피와 함께였다. 물론 그의 후각을 자극하는 건 커피향보다 달콤한 도우의 체취였지만.
빠르게 스캔을 끝냈으면서도 이긴은 짐짓 제게로 향하는 도우를 모른 척했다. 아직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는 표시였다.
“바빠요? 이현이는 지금 잠들었는데.”
커피를 내려놓으며 은근슬쩍 그의 손등을 부드럽게 긁어내리는 검지의 느낌이 농밀하다. 그와 사랑을 나누고 싶다는 신호였다. 굳이 이현이 잔다는 정보를 제공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문틈으로 도우의 체향이 흘러들어왔을 때부터 몸의 중심이 바짝 기립한 상태였지만 이긴은 태연하게 커피만 마셨다.
“그럼 깨기 전에 옆에 있어주지 그래.”
잠결에 도우의 자리를 더듬어 엄마가 없으면 일어나 앉아 엉엉 우는 이현의 잠버릇을 꼬집는 목소리가 사뭇 심술궂다. 이긴의 심통을 눈치 챈 도우가 곱게 눈을 접어보이며 나긋하게 감겼다.
“낮에 놀이터에서 실컷 뛰어놀아서 아주 푹 잠들었어요. 천둥이 쳐도 안 일어날걸요.”
흥. 속으로만 코웃음 치며 이긴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도우가 오늘따라 유난히 적극적인 이유를 이미 간파한 까닭이었다. 이현의 나이가 한 살씩 늘어날수록 도우는 둘째를 갖지 못해 안달이었다. 때마침 발정기가 가까워오기도 했으니 이긴의 짐작은 틀림없었다.
“아…… 더워.”
초조해진 도우가 급기야 않던 짓까지 했다. 장서들을 관리하기 위해 충분히 낮은 온도를 유지하고 있는 서재에서 덥다고 중얼거리며 자꾸만 티셔츠를 펄럭였다.얇은 티셔츠가 팔랑팔랑 치솟을 때마다 슬쩍슬쩍 보이는 맨살에 이긴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무겁게 정체되어있던 공기가 산란하며 달콤한 솜사탕냄새가 진하게 퍼졌다. 유혹을 참는 것도 고역이었다. 이긴은 목이 타서 커피 잔을 쥐었다. 그러나 잔은 이미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젠장, 욕설을 삼키며 다시 시선을 든 이긴의 두 눈이 어느 한 곳에 고정됐다. 탐스럽게 주렁주렁 열린 가슴이었다. 수유가 끝나고 나서 색이 짙어진 유두와 둘레가 넓어진 유륜은 도로 출산 전처럼 돌아왔지만, 풍만해진 크기는 그대로였다. 그게 이긴을 미치게 했다. 한손에 잡히지 않는 뿌듯한 느낌이. 마찰 때문에 여린 피부가 다치지만 않는다면 종일이라도 주무를 수 있었다.
“머리카락이 들어갔나 봐요. 자꾸 간지러운데 한 번 봐줄래요?”
“…….”
너무 나갔나. 뚫어져라 미동도 않는 이긴을 보며 도우는 민망한 기분에 휩싸였다. 머리카락이 들어갔다는 건 거짓이었다. 빤한 핑계를 이긴이 모를 리 없으니 반응이 없는 것도 당연하다. 도우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 다른 핑계를 떠올렸다.
“머리카락이 아니고 땀, 인가? 너무 더워서…… 닦아 줄래요?”
“…….”
덥기는커녕 살갗이 서늘했다. 그 증거로 유두까지 뾰족하게 얼어있었다. 도우는 유혹도 하던 사람이 해야지, 참 어렵다고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이 방법은 글렀나보다. 제 짐작보다 많이 서운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어설프게 몸으로 부딪히는 것보다 진심으로 마음을 풀어주는 편이 나았다. 아쉽지만 둘째 계획은 다음으로 미뤄야겠다고 스스로를 달래며 당기고 있던 티셔츠를 내리려는 찰나, 이긴이 번개처럼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아, 응! 뭐하는……!”
“닦아달라며.”
이긴이 그녀의 앙가슴을 게걸스레 핥으며 중얼거렸다. 혀끝이 아릿할 정도로 달았다. 어쩌면 마비된 건 혀가 아니라 이성인지도 모른다. 달뜬 건 그만이 아니었다. 도우의 눈도 복숭아처럼 붉게 달아올라있었다. 그러고 보니 체취가 조금 달라지긴 했다. 보다 농밀한, 수밀도 과즙에 코를 박은 것처럼 단내가 진동했다.
“안아줘요.”
발정에 오른 도우가 허둥대며 그의 머리를 안았다. 이긴은 사양 않고 빨아달라고 돋은 듯한 젖꼭지를 물었다. 흣! 발정으로 한껏 민감해진 도우의 허리가 크게 튀었다. 그대로 도우를 안아 책상에 앉힌 이긴이 혀로 그녀의 유륜을 살살 쓸면서 손으로는 느긋하게 아래를 확인했다. 이미 애액이 흥건했다. 손가락으로 입구를 꾹 누르자 안쪽에 고여 있던 것이 울컥 쏟아졌다.
“아응…….”
어서 박아달라는 듯 도우가 가랑이를 넓게 벌렸다. 이미 발정열로 머릿속이 꽉 찬 듯 했다. 이긴은 잠시 상체를 띄우고 발정한 제 오메가를 감상했다. 그를 홀리기 위해 빚어놓은 것만 같은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목덜미, 유혹하듯 오르내리는 봉긋한 가슴, 낭창하게 이어지는 허리, 그의 것을 빠끔빠끔 조르는 예쁜 속살까지.
“어서…… 응? 제발…….”
그가 바라만 보고 있자 애가 닳은 도우가 팔을 뻗었다. 기둥을 쥔 보드라운 손가락이 가냘프게 움직거렸다. 그게 뭐라고 머리가 뜨거워졌다.활짝 벌어지도록 도우의 무릎을 누르자 기대감에 납작한 배가 움칠거렸다. 예고하듯 입구를 꾹 누른 후, 그대로 밀어 넣자 평평하기만 하던 배에 새로운 길이 났다. 끝의 끝까지, 욕심껏 허리를 쳐올리자 도우가 허리를 뒤채며 깊게 앓았다.
“아흐윽!”
너무 깊어서 복부가 온통 얼얼했다. 끊임없는 삽입, 꼭 그만큼의 물러남에 도우가 진저리쳤다. 그러면서도 잘도 버거운 것을 오물오물 씹고 삼켰다. 제가 만든 길을 따라 윤곽이 오르내리는 걸 보며 이긴은 출납을 반복했다. 좁고 습한 안쪽이 끈덕지게 엉겨 붙는 느낌이 환장하게 좋았다. 그가 콱콱 박을 때마다 제멋대로 출렁거리는 가슴을 움켜쥐고 터트릴 것처럼 주물러댔다.
“아……, 좋아, 좋아요, 너무, 흑…….”
쾌감을 감당하지 못한 도우가 마구 흐느꼈다. 그녀를 이토록 흥분시켰다는 사실에 뿌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도 찰나, 이긴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아무리 물고 빨고 그녀의 안을 파고들어도 갈급증이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 실제로 목이 너무 마른 듯해 이긴은 한껏 페로몬을 풀었다.
“하흐……, 학……!”
진해진 겨울 숲 냄새에 황홀해하던 도우의 호흡이 점차 가팔라졌다. 페로몬에 못 이겨 호흡이 밀리자 혀를 길게 빼물고 학학 댔다. 채 갈무리하지 못한 타액이 입가로 흘러 넘쳤다. 순간 아래를 처덕처덕 치대던 이긴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주저 없이 상체를 숙여 입술을 맞추고 입 안에 고인 침을 달게 거둬갔다. 겨우 숨통이 트인 도우의 눈가에 눈물이 진하게 맺혀있었다. 그것마저 핥아먹고 나서야 겨우, 만족한 기분이 들었다.
고약하기도 하지.
발정기의 오메가를, 이미 제 여자인데도 이렇게까지 몰아세운 제 성질머리가 꽤 더럽다고 생각하며 이긴은 턱턱 허리를 놀렸다. 도우의 신음이 점점 가늘고 높아졌다. 곧 절정을 맞이할 거란 신호에 책상 모서리에 걸쳐있던 그녀의 엉덩이를 잡아 올렸다. 더 깊어진 자세에 교성을 내지르면서도 도우가 그의 허리에 다리를 감아 매달렸다.
쑤욱, 단박에 틀어박히는 살덩이에 끝내 도우가 자지러졌다. 넘치는 애액이 접 붙은 틈으로 배어나와 주르륵 미끄러져 내렸다. 만족스런 반응에 이긴이 허리를 재게 놀리자 야스런 소리가 질컥질컥 울렸다. 안이 온통 뜨거운 열기로 휘저어지는 것 같았다.
“아아……!
급기야 도우의 눈앞이 희게 바랬다. 짜릿한 희열에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굵은 살덩이가 안을 찧을 때마다 묵직하게 울림이 있었다. 배꼽을 중심으로 피어난 쾌감이 동심원을 이루며 손끝 발끝으로 번져갔다. 사납게 파고드는 성기를 조금이라도 더 받기 위해 등허리에 힘을 주었을 때, 성난 물건을 바짝 들이민 이긴의 치골이 그녀의 둔덕을 거세게 압박했다.
“하읏.”
자극이 너무 심했다. 통통하게 부푼 정점을 기점으로 통렬한 쾌감이 솟구쳐, 한순간에 도우를 절정으로 올려놓았다. 희열에 들떠선 저도 못 알아들을 소리를 무어라고 지르며 엉엉 울었다.
“아아아!”
안쪽의 가장 깊은 곳부터 시작된 자잘한 경련이 연이었다. 탈력감에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파들파들 떨면서도 도우는 억지로 근력을 그러모아 이긴의 허리를 감은 다리를 풀지 않았다. 끝내 제 안 깊숙이 파정하게 만들 작정이었다.
아주 작정을 했구나.
세찬 허리놀림 중에도 이긴은 혀를 찼다. 제 허리를 꽉 얽어 안은 도우의 다리가 힘껏 조여들어서였다. 페로몬에 취해 정신도 흐릿한 주제에 잘도 앙큼하게 군다. 어떻게든 노팅을 끌어내려는 도우의 깜찍한 속내를 간파하고 있는 이상 쉽게 넘어갈 마음은 없었기에 이긴은 적당히 허리를 털고 물러났다. 실망한 도우의 표정을 보고 모른 척하는 건 기꺼이 감수해야할 일이라 생각하며.
역시나, 뒤늦게 이성을 되찾은 도우가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 또한 예상한 반응이었기에 그에게도 다 계획이 있었다. 살살 달래 따스한 물에 몸을 녹이고 나면 기분도 풀어지겠지. 다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던 게, 그 동안 은근히 몸으로 밀어붙이다 말던 도우가 한 발 더 나아가 직접적으로 요구하고 나섰다.
“그거…… 하면 안 돼요? 나, 아기 갖고 싶어.”
혀 위에 올려놓으면 그대로 녹아내릴 것 같은 도우의 보드라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이긴이 슬쩍 눈웃음쳤다. 이제는 등허리 중간까지 내려오도록 긴 머리카락이 마음에 들었다. 도우에게서 나는 거라면 뭐든 좋았다. 좋은 걸 넘어서 집착하는 수준까지 간지는 한참이었다. 며칠 전, 헬퍼의 떨떠름한 반응이 떠올라서 이긴은 지그시 어금니를 물었다.“그거, 버릴 겁니까?”
“예?”헬퍼는 다소 황당해하며 바닥에 모인 머리카락과 그것들을 아까운 눈으로 쳐다보는 이긴을 번갈아 확인했다. 미친 사람 보듯 하는 시선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됐습니다.”할 수만 있으면 갈아 마시고 싶었다. 분명 솜사탕 맛이 날 테지. 음모도 나지 않는 도우에게서 나는 유일한 털이라고 생각하면 엄청 귀한 머리카락임에 분명하지만, 그걸 입 밖에 내면 정신이상자로 신고 당할 것 같아서 꾹 참았다. 안다. 제가 생각해도 정상을 한참 벗어났다는 걸. 그래도 인지하는 건 인지하는 거고, 아쉬운 건 별개였다.
‘정말 미친놈이 따로 없지.’
자조하며 다시 한 번 제게 아기를 조르는 도우를 물끄러미 내려다 봤다. 그렇게나 도우에게서 나는 건 전부 좋건만, 아기만은 사양이었다. 터울이 더 지기 전에 둘째를 낳고 싶은 도우 역시 물러서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네? 우리 이현이 동생 만들어줘요. 좋아할 거예요.”
퍽이나.
제 엄마에 대한 독점욕이 하늘을 뚫을 기세인 아들을 떠올리며 이긴은 속으로 코웃음 쳤다. 저를 쏙 빼닮았기에 장담컨대 이현이 동생을 원할 확률은 제로에 수렴했다. 그와 별개로 둘째는 반대지만. 하여 이긴은 최대한 부드럽게 도우에게 제 의사를 전달했다.
“싫어.”
“…….”
웃으면서 거절하는 게 도우에게는 더 상처였다. 싫다고까지 말할 게 있나? 육아가 힘든 건 알지만, 현이 정도면 난이도가 높지 않은 편인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더는 아이를 원하지 않는 심리를 모르겠다.
“딸 원했잖아요.”
이긴이 딸을 바랐던 것을 알기에 꼭 둘째를 갖고 싶었다. 그를 닮은 딸이라면 얼마나 서늘한 미인일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물론 둘째가 꼭 딸이라는 법은 없지만, 그래도. 더 터울지기 전에 낳고 싶은 마음을 비추며 조바심 내는 도우의 모습에 이긴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또 아들이면?”
“그래도 좋고요.”
둘이 고물고물 어울리면 또 얼마나 흐뭇할까 싶었다. 아직도 현이의 오도카니 앉아있는 뒷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동글동글한 뒤통수와 통통한 볼, 자그마한 등, 토닥여주고 싶은 엉덩이 같은…….
“내가 원한 건 널 닮은 딸이지. 날 닮은 딸이 아니라.”
“그건,”
“알다시피 내 유전자는 천하무적이고.”
“…….”
증거로 이긴을 쏙 빼닮은 아들이 있었기에 더는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그래도 도우는 최대한 우겨보기로 했다.
“하지만 확률이란 게 있잖아요.”
유전에 대한 각종 전공지식을 뽐내려는 도우의 시도를 이긴은 단번에 일축했다.
“더 이상 수절은 사양이야. 매일 물고 빨기도 바쁜데 어떻게 참으라고.”
“…….”
임신 기간과 출산 후 완전히 몸이 회복될 동안 그녀를 안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는 게 고역이었다며 진저리 치는 이긴을, 도우는 말문이 막혀 빤히 바라보았다. 그런 어이없는 이유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고작 그런 이유임에도 그의 뜻이 확고해 또 어이가 없어져버렸고.
잠시 망연히 있던 도우가 겨우 타협안을 내놓았다.
“그럼 이현이랑 잘 지내요. 하나 밖에 없는 우리 아이잖아요.”
내가 이현이랑 잘 못 지내는 게 아니라 이현이가 나를 경계하는 거라고. 부정하고 싶었지만 쾌감에 여운에 푹 잠긴 이긴은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어렴풋이 이현이와 제가 친해질 날이 있을까, 궁금해 하면서.
물론 어린 아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제 피를 물려받았으니 오죽 제 어미에게 끌릴까. 임신 중에 서로의 페로몬에 푹 절여지다시피 했으니 무리는 아니었다.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지. 유치해도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하면서, 이긴은 태연하게 도우와 눈을 맞췄다.
“노력할게.”
“이현이도 속으론 아빠를 엄청 좋아하는데 표현이 서툴러서 그런 걸 거예요.”
“그렇겠지.”
“주말에 둘이 야구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와요. 네?”
“응.”
제 엄마 껌 딱지인 이현은 절대 제 아빠와 단둘이 나서려 하지 않았다. 무조건 도우를 끼워야지만 나들이가 가능했지만, 이긴은 순순히 알겠다고 약속했다. 어차피 제가 나가자고 해도 현관에서 도우의 다리를 붙잡고 늘어질 이현을 알아서였다. 까짓 공수표쯤이야, 도우가 기분 좋아한다면 얼마든지 날릴 수 있었다. 내친김에 호언장담까지 했다.
“이현이가 치기 쉽게 소프트볼을 준비할게.”
“좋아요.”
와락 달려드는 도우의 목덜미에 그의 페로몬과 뒤섞인 체향이 달콤하게 눌러 붙어있었다. 이긴은 기꺼이 그것들을 핥고 빨았다.
“아…….”
열기가 채 가라앉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 쌓이기 시작한 자극에 도우가 고개를 홱 젖혔다. 신음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이긴이 거세게 안을 파고들었다. 되풀이될 격정을 예감한 도우가 깊이 앓았다.***약속대로 이긴은 토요일 오후에 소프트볼과 배트를 사왔다. 어린아이가 휘두를 수 있도록 사이즈를 조절한 세트였다. 도우는 크게 기뻐하며 그것들을 이현의 앞에 늘어놓았다. 어디까지나 보여주기 식이었으므로 이긴은 도우가 기뻐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때문에 저와 둘이 플레이하겠다는 이현의 말은 매우 의외였다.
“아빠랑 둘이?”
믿을 수 없어 재차 묻자 이현이 비장하게 끄덕였다.
“응. 둘이.”
뭘까. 함께 놀자면서 전혀 신나 보이지 않는 저 표정은. 언뜻 우울한 기색까지 비쳤다. 조금 수상하긴 하지만 이긴은 흔쾌히 승낙했다.
“좋아. 둘이 맛있는 것도 먹자. 이현이 햄버거 좋아하지?”
“으응.”
역시 시원찮은 반응이 돌아왔다. 암만 봐도 탐탁치 않아하는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둘이 나가자는 이유를 모르겠다. 도우는 이현의 미지근한 반응을 쑥스러움으로 해석했다.
“우리 이현이, 아빠랑 단둘이만 나가려니까 긴장되는 구나? 재미있게 놀다 와?”
“응, 엄마!”
확실히 데면데면 이긴을 대했던 것과는 다른 호응이 있었다. 뿐인가. 운동장이 가까워지기도 전에 제 자리에 우뚝 멈춰서 고개를 젓는 이현 덕에 둘만의 외출은 점점 미궁으로 흘렀다.
“왜, 놀기 싫어?”
“응.”
아무리 아이라지만 정말 속을 모르겠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구만. 혀를 차려다 잘 놀아주라는 도우의 신신당부를 떠올린 이긴이 애써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럼 햄버거는?”
“싫어.”
“…….”
한숨이 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참았다. 지난 밤 간절히 노팅을 바라던 도우가 스쳐지나갔다. 이런데 아이를 또 갖겠다고? 저와 똑같은 얼굴을 한 아이 둘이서 고집피우는 걸 생각하자 골이 다 아파왔다. 끊었던 담배 생각이 간절해질 무렵, 이현이 어른이 되어서 휘둘리는 이긴을 한심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손가락을 들어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
“응.”
“그래, 가자.”
알록달록한 아이스크림을 앞에 놓고 이긴은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가 고민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현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스푼을 놀렸다. 아직 며칠 전의 앙금이 남아있던 터라 딱히 서로에게 말을 걸지도 않으면서 둘은 묵묵히 아이스크림을 해치웠다. 이긴은 이현이 제 아들이 맞긴 맞나보다고 한탄했다. 이토록 하는 짓이 닮은 부자라니.
마지막에 입가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닦아주려 하자 이현이 냅킨을 가로채 제 입술을 꾹꾹 닦았다. 제 엄마가 할 땐 가만히 내밀고 있더니. 제 입술을 노려보는 이긴을, 이현의 가감 없는 시선이 뚫어져라 응시했다. 아무리 봐도 여섯 살의 눈빛이 아니다. 도우에게 안겨 응석부릴 때완 딴판인 모습에 이긴은 잠시 헷갈렸다. 인생 2회차, 뭐 그런 건가. 통통한 뱃살과 보드라운 뺨을 보면 영락없는 아이인데.
“다 먹었으면 이제 들어갈까.”
“할 말이 있어.”
“…….”
기분이 묘해지려는 찰나, 이현이 어른스러운 말투로 이긴을 제지했다. 지금껏 도우의 꿈을 믿은 적 없는 이긴이었으나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의식을 잃은 도우의 꿈에 나타난 이현이 그녀를 이끈 게 사실인 듯 했다. 어느새 심각한 표정으로 눈썹까지 모으고 있는 이현을 보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뭔데.”
“월요일에 유치원 끝나면 아빠가 데리러 와.”
“뭐?”
“엄마한테는 비밀이야.”
유치원 하원 때 도우 말고 제가 오라니. 엉뚱한 주문이었다.
“누가 괴롭혀?”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뭐 때문에?”
다닌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말 못할 사정이 생긴 건지. 도우가 말하길 분명 이현이 적응을 잘하다 못해 유치원 가는 걸 엄청 좋아한다고 했었는데. 이유가 궁금해 물었지만, 이현은 굳은 표정으로 입술을 꾹 닫고 있을 뿐이었다.괜히 몇 번 더 캐물었다가 도우에게는 비밀로 하라는 입단속만 한 번 더 받았다. 뾰로통하게 부푼 볼에 영 그를 못미더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어쩐지 발끈해 이긴은 큰소리를 탕탕 쳤다.
“걱정 마. 네 엄마 걱정시키는 건 내가 더 싫으니.”
“으응.”
차마 그것까지 부정하지는 못하겠는지 이현이 새침하게 답했다.월요일에 그가 이현을 데려오겠다는 말에 도우는 의아해했다. 이긴이 이현에게 그랬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왜요? 하고 물어왔다. 이긴이 묻고 싶은 말이었다. 그래도 천연덕스럽게 핑계를 대는 데 성공했다.
“이현이하고 더 친해지고 싶어서.”
좋아할만한 대답을 골라 들려주자 눈에 띄게 도우의 얼굴이 밝아졌다. 둘이서만 나갔다오더니 꽤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보다고 짐작한 모양이었다.
“거 봐요. 이현이가 좋아할 거라고 했잖아요.”
말 한 마디 없이 아이스크림만 퍼먹다가 들어온 걸 알면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지을까 궁금했지만, 굳이 입 밖에 내진 않을 생각이었다. 대신 도우의 동그란 이마에 입술을 맞추며 능청스레 굴었다.
“그러게. 내 것만 탐내지 않으면 좋을 텐데 말이야.”
“아이, 참.”
간지러워하며 도우가 쿡쿡 웃었다.
“이현이는 한참 엄마가 필요한 나이라고요.”
“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게 하원을 부탁한 이현의 속사정이 뭘까 골몰하느라 이긴은 대강 대꾸하고 말았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겠지. 월요일이 기다려지는 건 또 오랜만이라고 생각하며 이긴은 도우를 품에 안았다. 제 엄마랑 유치원 하원에 대해 얘기하는 동안 동화책에 심취한 척 온 신경을 이쪽에 기울이고 있던 자그마한 등에 미소 지으며.***평소 하원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이긴은 곰돌이와 튤립 모양 스티커로 장식된 문 앞에 서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벌써부터 가방까지 야무지게 매고 문 밖만 살피던 이현이 장신의 그림자를 발견하고 벌떡 일어났다.
“아빠! 아빠아!”
이현이 태어난 후로 처음 보여주는 환대에 이긴은 조금 얼떨떨해졌다. 곧 이현의 주위로 또래 친구들이 몰려왔다. 아이들은 우성 알파 특유의 위압적인 분위기에 차마 말도 못 걸고 신기한 듯 눈만 깜박이며 그를 바라봤다. 누군가 작게 ‘우와, 멋있다.’ 중얼거리자 우쭐해진 이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유치원에 오면 의문을 풀 수 있을 거라 여겼던 이긴은 더욱 아리송해지고 말았다. 이제 아빠가 왔으니 집에 가자고 할 법도 한데 이현은 친구들의 선망을 즐기는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영문 몰라 하는 사이 이현의 선생님이 다가와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이현이 선생님이에요.”
“처음 뵙겠습니다.”
“우와, 이현이는 아빠 닮았구나.”
“네.”
이긴은 귀를 의심했다. 아빠 닮았다는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이현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걸 믿을 수 없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현이 아주 소중한 비밀이라도 말하듯 선생님에게 귓속말하는 시늉을 했다. 그러곤 순순히 고개를 기울여주는 선생님의 청력은 아랑곳 않고 큰소리로 또박또박 외쳤다.
“우리 아빠는 엄마를 엄청 사랑해요! 제가 엄마를 사랑하는 것 처럼요!”
“어머, 그렇구나. 이현이네 가족은 아주 화목하구나. 이현이는 좋겠다, 그치?”
“네!”
대답 한 번 우렁찼다. 뽐내면서, 그러면서도 마치 경고하듯 친구들을 둘러보는 이현의 고갯짓에서 이긴은 비로소 대강 어찌된 일인지 눈치 챘다.
이현이 다니고 있는 유치원은 알파들이 아이들을 보내는 사립 유치원이었다. 알파들은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알파끼리 결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이현을 데리러 오는 도우는 쉽게 관심을 끌었을 거다. 오메가니 멸시는 기본으로 깔렸을 거고.
알파 중에서도 우성인 저를 끌어들여 엄마를 무시하는 이들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주고 싶었던 이현의 속마음을, 이긴은 십분 이해했다. 부러 현관에서 시간을 끌던 것도, 뜬금없이 제 부모의 사이가 좋다고 들으란 듯 외쳤던 것도.
“아들, 이리와.”
이긴은 이현을 번쩍 안아들고 보란 듯 목말을 태웠다. 그러곤 자동적으로 이현을 우러러보는 자세가 된 이들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그럼, 또 뵙겠습니다.”
당분간은 그가 계속 하원을 담당할 생각이었다. 적어도 유치원의 모든 원생, 학부모, 선생들에게 눈도장을 찍을 때 까지. 뭐, 그러다 이현과 친해져서 아예 그의 일이 되어도 좋고. 유치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지자 정수리에서 작은 중얼거림이 들렸다.
“……엄마가 부끄러운 게 아니야.”
“알아.”
다소 침울해진 이현을, 이긴은 부드럽게 위로했다.
“잘했어. 앞으로도 그런 식으로 하면 돼.”
약육강식의 논리가 그대로 적용되는 그들의 세계에서 찍어 누르는 건 아주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이니까, 이현이 제법 영리한 수를 쓴 셈이었다.
제 편을 들어주자 이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긴의 목덜미를 그러안은 자그마한 손이 다정해지는가 싶더니 정수리에 말랑한 턱이 얹혔다. 완벽한 신뢰의 표현에 이긴의 가슴이 뿌듯해졌다. 앳된 중얼거림이 이긴의 머리카락을 간질였다.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아빠도.”
그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완전 동감이었다. 아들과 첫 의견일치를 이룬 이긴은 기분 좋게 아이스크림 가게로 향했다. 오후의 햇살이 돈독해진 둘의 사이를 더욱 따스하게 물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