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gnity of the Chaebol RAW novel - chapter (39)
“갑자기 정엽이 소식은 왜?”
들고 있던 젓가락을 한쪽으로 가지런히 내려놓고 여정이와 남 사장을 차례대로 쳐다본 뒤 말했다.
“궁금한데, 정엽이 형 소식을 물어볼 사람이 마땅히 없네요.”
“…….”
여정이에게 물어봤다.
“고모.”
“응?”
“저희 아버지… 미우시죠?”
여정이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셨다가, 소리 소문 없이 그 숨을 빼어 낸 뒤 식사를 도와주고 있던 가사 도우미를 쳐다봤다.
“식사 끝나면 부를 테니까, 잠깐 방에 들어가서 쉬고 있어요.”
“네, 사모님.”
여정이는 가사 도우미가 거실을 통과해 어딘가로 아예 모습을 감춘 뒤에야 입을 열었다.
“갑자기 왜 그래? 평소 안 찾아오던 집을 다 찾아오지를 않나, 정엽이 소식을 묻고… 왜 그러는지 고모가 물어봐도 될까?”
진심 어린 걱정이었다.
저 걱정이 정훈이를 향한 걱정인 것인지, 아니면 정엽이를 향한 걱정인지는 알 방법이 없었지만, 분명 지금 여정이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형수 지금 친정에 가 있어요.”
“……?”
“다음 주가 예정일이잖아요. 정태 형 다음 주면 애 아빠 돼요. 저는 삼촌이 되고요. 기분이 참 묘해요.”
남 사장은 깊은 눈으로 마치 내 폐부를 훑기라도 하듯, 내가 하는 말에서 진심을 찾아내기 위해 실눈을 뜨기 시작했다.
“다음 주에 태어날 조카가 아들이라고 하니까 생각이 더 많아지는 거 같아요. 꼭 다음 주에 태어날 제 조카가… 제 아버지 입장에선 정엽이 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요.”
“…….”
“저는 큰아버지와 아버지 두 분 사이에 있었던 그런 갈등을 정태 형이랑은 만들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을 할 거예요. 하지만, 정말 만약에 혹시라도 갈등이 생긴다고 하면… 과연 저는 제 아버지처럼 할 수 있을까 하고 스스로한테 물어봤어요. 저는 절대 못 그럴 거 같아요.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더 이상 여정이와 남 사장의 눈을 쳐다보지 않았다.
누워서 침 뱉기라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거지.
내가 내 입으로, 내 자식 앞에서 또 다른 내 자식 욕을 한다?
이것만큼 누워서 침 뱉기를 하는 게 어디에 있으랴….
“아까 고모 말처럼 저도 이제 나이가 드니까 어릴 땐 안 보이던 게 하나둘 보이기 시작하나 봐요. 궁금하네요. 어쨌든 정엽이 형도 가족이잖아요. 어떻게 살고 있는지, 잘살고 있는지… 궁금한데… 그걸 마땅히 물어볼 곳이 없네요.”
“정훈아.”
여정이가 말했다.
“때로는 그냥 모르고 살아가는 게 약일 때도 있어.”
“…….”
“알고도 모르는 척 살아가야 할 때도 많고. 네가 철이 들고 있는 거 같아서 고모가 기쁘긴 한데, 고모 생각은 그래.”
“어떤….”
“정훈이 너는 정엽이 소식이 궁금할지 몰라도, 입장을 바꿔서 정엽이는 네가 자기 소식을 궁금해한다는 거 자체가 불편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 정도예요?”
“응? 뭐가?”
“그 정도로… 저희 가족이 큰아버지, 그리고 정엽이 형을 내몰았던 거예요?”
“…….”
“전 몰라요. 정말 몰라요. 그 일에 대해서 자세하게 물어볼 수 있는 사람도 없을뿐더러, 제가 물어본다고 해도 객관적으로 이야기를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제 주위, 지금의 재경 그룹 안에는 아무도 없어요.”
“그렇겠네. 고모가 네 입장은 전혀 생각을 못 해 봤네. 하긴, 그때 넌 너무 어렸네.”
“그냥 고모라면 알고 있지 않을까, 어쩌면 가끔 연락 정도는 하고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물어본 거예요.”
여정이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이로써 최소한 여정이는 어떤 식으로든 정엽이를 보살피고 있다는 내 심증이 확인되었다.
“정엽이 형은 만약에 제가 만나자고 하면 싫다고 할까요?”
그 말에도 여정이와 남 사장은 아무런 대답을 내놓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더 충분한 답이기도 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내가 정훈이 놈의 몸에서 다시 살고 있다는 게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에이, 알겠어요. 제가 괜히 서로 어색해질 주제를 꺼냈네요. 그런데 고모.”
“응?”
“저 오늘처럼 일 마치고 고모부랑 같이 고모 밥 얻어먹으러 자주 와도 돼요?”
그 질문은 엄밀히 말해 여정이가 아닌 남 사장을 겨냥해서 한 질문이었다.
“그럼, 고모 집에 밥 먹으러 오면서 뭘 그런 걸 묻고 그래? 오면 오는 거지.”
남 사장을 쳐다봤다.
남 사장 역시 여정이가 짓고 있는 표정처럼, 회사에서의 관계를 떠나 오로지 정훈이 녀석의 고모부 입장에서 내게 싱긋이 웃어 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 * *
그게 진짜 인사의 역할 아니겠습니까?
“부장님, 제가 가서 한마디 할까요?”
하반기 공채 요강 공지를 올린 지 이틀째.
다른 공채 때와는 비교조차 안 될 만큼 여유로운 사무실 분위기에 결국 김원호 차장이 나섰다.
서류 심사가 실시간으로 이뤄져야 할 지금이 HRM 입장에선 가장 정신이 없어야 할 때이다.
하지만 김 차장 눈에 지금의 HRM은 여유를 부려도 너무 여유를 부리고 있다.
“있어 봐. 각 부서 인원을 호출해서 함께할 거라고 하잖아.”
“그건 손 과장 자기 계산인 거고요. 지금까지 끌고 온 건 대단하지만, 실제 공채를 한 번도 안 해 본 건 사실 아닙니까.”
김원호 차장은 애가 탔다.
인사 채용.
그중에서도 공개 채용은 워낙에 많은 지원자가 몰리기 때문에 전자 이력서가 들어오는 대로 실시간 확인을 하고 분류를 해 놓아야 한다.
지난 상반기 공채의 경우 서류 심사부터 계산을 한다면 총 경쟁률이 132 대 1이었다.
178명을 선발하는 데 2만 3천 부가 넘는 지원서가 들어왔고, 그걸 HRM에서 꾸린 채용팀에서 사흘 밤낮으로 확인을 하고 비교, 분석을 해 서류 합격자 명단을 만들어 냈다.
2만 3천 장이 아니라 자소서까지 포함된 2만 3천 부.
결코 적지 않은 분량이다.
2만 3천 장이라고 해도 이걸 종이책으로 묶어서 만들어 버리면 70권 가까이가 되는 거다.
그렇다고 그걸 그냥 스윽 하고 읽어 보기만 한다고 끝인가?
분석이라는 걸 해야 한다.
거기에 비교라는 걸 해야 하고, 다른 채용팀 사람들과 의견까지 주고받아야 된다.
괜히 채용을 인사의 꽃이면서도 그와 동시에 노가다라고 하는 게 아니다.
아무리 통합 리크루팅에서 부서별 리크루팅으로 바뀌어, 각 부서 인원이 서류 심사에도 참여한다고 하지만 이렇게 모든 지원서가 다 모일 때까지 기다린다는 건 김원호 차장의 눈엔 효율적이지 못했다.
어차피 손 과장은 과장일 뿐이다.
그가 비록 회장님의 아들일지라도, 이번 하반기 공채의 리크루팅 방식을 바꾼 주인공일지라도 만약 그 채용에 실수나 문제나 발생하게 되면 그 책임은 부서장인 고성표 부장이 져야 한다.
“가만히 놔둬 봐.”
“부장님!”
“생각이 있겠지. 지난 한 달간 해 온 거 봐. 그게 어디 생각이 없는 사람이 벌일 일들이야? 그냥 벌이기만 했어? 수습까지 깔끔하게 다 해내잖아.”
“그러니까 그 생각을 왜 밑에 애들하고만 공유하고 저랑 부장님한테는 전달을 안 하냐고요.”
“…….”
“제가 지금 다른 내용을 가지고 이러는 게 아니잖아요. 이거 지금 공채예요, 공채. 안 되겠어요, 부장님께서 못 하겠다고 하시면 저라도 한마디 해야겠어요. 회장님 아들이고 나발이고 아닌 건 아닌 거지.”
결국 김원호 차장은 고성표 부장이 말리기도 전에 HRM팀 쪽으로 걸어갔고, 손정훈 과장 자리 파티션을 노크했다.
노크 소리에 고개를 든 손 과장은 힘든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내려다보는 김 차장의 모습에 보던 걸 잠시 덮어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차장님.”
“과장님, 괜찮으시면 저랑 자판기 커피에 담배 한 대 같이 피우러 안 가실래요?”
“오! 저 안 그래도 화장실 갔다가 담배 한 대 피우러 갈 생각이었는데.”
“그러세요? 잘됐네. 그럼 천천히 화장실부터 다녀오세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김원호 차장은 손 과장이 화장실을 간 사이 심호흡을 했다.
일단 도저히 이건 아닌 거 같아서 자리를 마련하긴 했는데, 막상 커피 이야기를 꺼내 놓고 보니 역시나 김원호 차장의 눈에 손 과장은 거인이었다.
꼭 신입 시절 부장을 대하는 것처럼, 벌써부터 손에 땀이 잡히는 느낌이었다.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흡연실까지 올라가는 동안에도 김원호 차장은 이야기를 어떤 식으로 꺼내야 할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흡연실에서 담배를 함께 입에 물며 불을 붙인 뒤 김원호 차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과장님, 공채 요강 공지 올리고 마감일까지 4일밖에 시간이 없습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원래라면 공채 요강을 올리기 전에 HRM은 채용팀을 따로 꾸려야 합니다.”
“네,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팀도 안 꾸리셨지요?”
“네, 딱히 서류 분류만을 위한 채용팀은 필요가 없을 거 같아서요. 그 부분은 지난주 미팅 때 부장님 계신 자리에서 확인을 받은 내용인데요.”
“네, 저도 알고는 있는데… 채용팀까지 안 꾸린 상황에서 공채 요강 올린 지 벌써 이틀째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는 겁니까?”
김원호 차장은 뜬금없이 의미 모를 미소를 짓고 있는 손 과장의 모습에 절로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손 과장이 말했다.
“처음인 거 같네요.”
“뭐가 처음인 거 같단 말씀이세요?”
“차장님이 지금처럼 이렇게 절 따로 불러서 업무 지시, 업무 진행 상황을 직접 물어보신 게요.”
“…….”
“처음 맞죠? 저는 처음인 거 같은데, 혹시 또 제가 기억을 못 하는 있는 게 있을 수도 있잖아요.”
“…네, 이렇게 따로 자리를 마련해서 물어보는 건 이번이 처음인 거 같네요.”
손 과장은 갑자기 몇 걸음 난간 쪽으로 걸어가, 그 난간에 기대어 건물 밖 세상을 쳐다봤다.
김원호 차장은 어쩔 수 없이 그쪽으로 함께 걸어가 손 과장 옆으로 섰다.
“회장 아들이 부하 직원으로 있는 게 많이 불편하시죠?”
“…….”
“저 같아도 불편할 거 같아요. 그것도 엄청. 불편하긴 엄청 불편한데, 그렇다고 그 불편한 걸 내색하기도 애매하고, 참고 계속하자니 지금처럼 도저히 참기 힘든 상황들도 나와 버리고….”
고개를 살짝 돌려 김 차장을 쳐다보며 손 과장이 물었다.
“제가 얼른 그룹 본사로 올라가든, 다른 부서로 트랜스퍼가 되든 딴 데로 갔음 좋겠죠?”
“…아닙니다.”
“그럼 계속 인사부에 남아서 차장님이랑 같이 근무해도 괜찮을까요?”
“…….”
“저도 어디에서 들었는데, 사람들이 제가 이 회사 인사부에서 1년 정도만 하고 그룹 본사로 올라가는 줄 알고 있더라고요. 어디에서 나온 말인지는 모르겠는데, 저는 모르는 이야기거든요.”
김원호 차장은 자기가 왜 이곳 흡연실로 손 과장을 데리고 왔는지조차 잊어버린 채 속으로 타들어 가는 가슴만 진정시키고 있었다.
“저 여기 계속 있을 거예요.”
“네, 그건 어디까지나 회장님, 사장님, 아님 본사 상무님과 과장님의 선택이기 때문에 저희가 거기에 대해 왈가왈부할 입장은 아닌 거죠.”
“저 같은 부하 직원하고 계속 같이 근무하실 수 있으시겠어요?”
“하, 하하, 하하하… 그, 그럼요. 당연하죠.”
“조금 속이 타시더라도 그냥 제가 차장님 위로 올라가는 게 여러모로 차장님 입장에서는 속이 편하지 않을까요?”
“네, 저도 과장님께서 이번 공채 건을 발판으로 빠르게 회사 임원분들께 인정을 받고 위로 올라가시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아뇨, 우리 인사부 안에서요.”
“네?”
“우리 인사부 안에서 제가 그냥 차장님 상급자로 함께 근무를 하는 게 차장님 입장에서는 더 속이 편하시지 않겠느냐고 여쭤보는 거예요.”
“인사부 안에서 제 윗자리라면 부장 자리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부장님은 현재 계시고….”
몸을 아예 돌려, 난간에 등을 기대고 선 손 과장.
그는 담배 연기를 아래로 내뿜은 후 김 차장에게 말했다.
“과장 시절 땐 대단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박종근 과장이 가장 무서워하면서도 배울 게 많고, 의지가 되는 선배가 바로 차장님이었다고 하더라고요.”
“…….”
“솔직히 저는 상상이 잘 안 되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박 과장이 그랬다고 하는데, 그게 맞는 거겠죠.”
김원호 차장의 고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아래로 숙여져 있었다.
“지금의 차장님 모습은 저 때문인 겁니까, 아님 앉아 계신 자리의 무게 때문인 겁니까?”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김원호 차장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내용이었으니까.
“저는 차장님이 앞으로도 지금 절 이곳까지 부르신 것처럼… 제게 용기를 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손 과장이 김 차장 앞으로 한 발 다가가며 말했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차장으로서 과장에게 지시할 건 지시를 하고, 또 저한테 물어볼 게 있음 지금처럼 다른 사람 거치지 말고 저한테 직접 물어봐 주세요. 차장님이 저한테 거리를 두시니까, 제가 박 과장이나 다른 직원들한테 하는 것처럼 먼저 다가가기가 어렵네요.”
“…….”
“저는 박 과장이 경험해 봤다던, 차장님이 가지고 계신 선배로서의 카리스마가 어떤 건지 경험을 해 보고 싶거든요. 그 모습이 궁금해서라도 저는 그 모습을 보기 전에는 인사부도 안 떠날 거고, 또 차장님 위로 올라가지도 않을 겁니다. 그리고 저 더 이상 예전의 망 과장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