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247)
벨브로크 토벌전 (15)
무대 아래의 사람들이 어떻든 간에, 무대 위의 이야기는 흘러간다.
에드 로스테일러와 실베니아가 공간 장막 안으로 사라져 버린 순간, 전투는 순식간에 소강 상태가 되었다.
완전히 빈사 상태가 된 예니카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버리고, 하늘을 뒤덮던 정령들도 하나둘씩 사라져 간다.
루시 또한 마찬가지다. 손에 끼고 있던 반지는 천문학적인 마력의 양을 버티지 못한 채 산산조각나버린다. 비틀거리며 에드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나아가다가, 이윽고 바닥에 쓰러져 버린다.
하늘을 뒤덮는 마물족을 막아낼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없다.
다시금 벨브로크의 마물족이 아켄섬의 상공을 뒤덮는다.
끝이라는 게 없는 것 같다. 그렇게 죽여댔는데도 계속해서 밀려온다.
그러나, 인간의 저항 역시 끝나지 않는다.
빈사 상태가 된 예니카와 루시만 남은 광장에, 새로운 세력들이 들이닥친다.
클라리스 성녀를 필두로 한 성당 기사단이, 회주대리 로르텔을 중심으로한 상단 용병대가…
피에 미친 검귀 클레비어스가, 다이크를 따라오는 전투부 학생 무리들이, 타냐 로스테일러가 이끄는 학생회원들이…
하나둘씩 도착해, 전투에 참전한다.
몰아드는 마물족들을 제압해나가며, 광장의 중심으로 전진한다.
이따금씩 날아드는 벨브로크의 마력도 버텨내고, 마물족들이 날려대는 마법도 무력화 시키면서… 그들은 전장의 중심을 향했다.
가장 먼저 도달한 사람은, 엘테 상회의 회주 대리 로르텔 케헬른이다.
로르텔은 무너진 첨탑 아래에 펼쳐진 핏자국들과, 에드의 마력이 남은 정령술의 기운, 그리고 쓰러진 예니카와 루시를 발견한다.
그대로 상회 용병대에게 지시를 내려서 두 사람을 수습하도록 하고, 침착하게 상황을 판단한다.
방금 전 보였던 수많은 정령들과 성위 마법의 흔적들은, 격렬한 전투가 치러졌음을 의미한다.
이곳에서, 예니카와 루시 두 사람은 죽음 직전까지 에드를 도와 혈투를 벌였던 것이다.
그것은,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펼쳐지는 혈투는 아니었다.
아는 사람들끼리만 아는, 무대 아래에서의 싸움. 허나, 처절함만큼은 그 어떤 전투와 비할 바도 없었을 정도로 강렬한 싸움이었을 것이다.
로르텔은 빛나는 주인공 세대다.
따라서 그곳은, 로르텔의 무대가 아니다.
로르텔은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 본다.
쇠사슬에 묶인 벨브로크가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아마도 저 거대한 성창룡이야 말로, 모두의 기대를 받는 영웅이 물리쳐야할 마지막 숙적일 터다.
그 영웅의 길을 따라 걷는 것이 정도(定道)다. 펼쳐진 길을 따라 착실히 걷는다면, 밝고 아리따운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에드 로스테일러의 곁에 서있는 자들은 결국 무대 아래의 존재들이다.
만신창이가 된 예니카와 루시를 가만히 바라본다.
둘은 처절하고 고된 싸움을 이어왔을지언정, 결국 그 남자의 옆에서 싸웠다.
로르텔과 두 사람의 결정적인 차이다.
서있는 무대가 다르다는 것은, 결국 중요한 시점에서 묘한 간극이 생기게 만든다.
그 거리감이 익숙치 않아, 마음 속에 고독 비스무리한 감정이 올라오려 하지만…
─이윽고 천천히 웃음 지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한 번도 정답대로 살아본 적이 없어요.”
졸업에 집착하며, 그 전까지는 생존에만 정신을 집중해왔던 에드 로스테일러의 모습이 생각난다. 요염한 웃음을 지으며, 그 때가 되면 당신을 잡아 끌겠다 선언했던 로르텔 아니던가.
자산가가 될 수 있으리란 꿈은 접으라고 말하던 빈민들의 무리에서 시작해, 부의 정점까지 왔다. 로르텔 케헬른은 숙명이니 운명이니 하는 것에 저항하는 것에는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거기다가, 무대의 마지막이 코앞이다. 여기서 좌절할 거라 생각했는가.
다친 예니카와 루시를 수습하면서, 로르텔은 로브 아래에 고개를 숙인 채 웃었다.
성창룡 벨브로크.
에드 로스테일러와 자신의 무대 사이에서 길을 막고 있는 존재가 저 거대한 괴물이라면, 그 조차도 치워버리면 될 뿐이다.
막이 내리면 무대는 끝이 난다.
무대가 끝이나면, 빛나던 주연들도 그 아래로 내려오기 마련이다.
무대 아래로 향하는 계단을 바라보다가, 로르텔은 요염하게 웃는다.
에드 로스테일러가 마련해준 무대는 막바지다.
모든 일이 끝나면, 계단을 따라 내려가, 그 사내가 사는 세상으로 천천히 스며드는 것이다.
이윽고, 광장에 테일리를 필두로 한 벨브로크 토벌대가 들이닥치면서, 드디어 모든 인원이 한 자리에 모였다.
테일리 맥로어, 아일라 트리스, 페니아 엘리어스 클로엘, 로르텔 케헬른, 직스 에펠슈타인, 클레비어스 노튼데일, 엘비라 에니스턴.
각자의 사정을 품에 안은 주인공 세대가 한 자리에 모여, 포효하는 벨브로크를 올려다 본다.
무대의 막은 천천히 올라간다.
테일리 맥로어는 승리할 것이다.
그는 주인공이었다.
*희미해진 시야를 겨우 다잡으며 눈을 뜨니, 새하얀 공간 속이었다.
완전히 의식을 잃었던 것인가. 잠깐 정신을 못차린 상태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갑작스럽게 올라오는 몸의 격통에 잠시 인상을 찌푸렸지만, 어떻게든 버텨볼 수는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별 거 없었다.
나는 조촐한 나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이 새하얀 공간에는 그게 전부였다.
그리고 반대편 의자에는, 낯이 익은 소녀가 앉아 있었다.
나처럼 피를 많이 흘렸으며, 호화로워 보이는 마법사 로브에도 붉은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새하얀 머리를 단정하게 내리고 있는 소녀는, 대현자 실베니아 로베스테르다.
내가 눈을 뜬 걸 확인하자, 실베니아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뭐라 이야기할까 고민하는 것 같았다.
말문을 먼저 튼 건 나였다.
“언제부터 정신 차렸냐.”
억겁의 시간 속에서 그 끝을 알 수 없는 심연 속의 공포와 마주하는 것은, 예상보다도 더 힘든 일이었을 테다.
그래서 굳이 왈가왈부를 따지지는 않았다.
“글라스칸을 봤을 때 즈음부터.”
실베니아의 목소리는 예상보다도 더 가냘펐다.
광기에 잡아먹혀 이성을 잃었을 때와는 사뭇 다르다. 다만, 시선을 내리깔고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은 썩 당당해 보이진 않았다.
“그 전부터 위화감은 느끼고 있었어. 심연 속에서 천천히 잡아먹혀 들어가면서, 내 삶은 부질 없는 발버둥의 연속일 뿐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나봐.”
“그럴만 해.”
동감은 해주었지만, 굳이 위로는 해주지 않았다.
실베니아 로베스테르를 위로할 수 있는 건, 그녀 자신 뿐이다.
나는 더 이상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음을 느끼면서, 의자의 등받이에 무게를 받쳤다.
“여기는…”
“공간의 틈새야. 공간장막 안으로 숨어들면, 외부 세계와는 완전히 동떨어져서 모든 피해와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거든.”
“신기한 경험을 다 해보네.”
천천히 허리에 힘을 주면서, 고개를 앞으로 뺐다. 그러다가 허리의 힘이 훅 빠지기에, 양 팔을 무릎에 받치고 겨우 고개를 내리깐 채로 이야기 할 수 있었다.
“네 삶은 무의미하진 않았다. 내가 여기에 있으니까.”
위로도 뭣도 아닌, 그냥 사실만을 이야기 했다.
“내가 그 증거야.”
지켜야할 의리가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 정도는 이야기 해준다.
세기의 대현자라고 해도, 결국 한낱 인간일 뿐이다.
그녀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고작 그게 다였던 것이다.
실베니아는 지팡이를 천천히 내려놓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 딴에는 참아보려 했던 것 같지만, 머금은 눈물이 이윽고 천천히 새어나온다.
그녀는 세상을 구하려 살았다. 그러다 실패도 많이 하고, 광기에도 휩싸이고, 실수도 잔뜩 했다.
그러나, 끝끝내 도달했다. 아득한 절벽 지대를 벗어나 나아갈 수 있는 미래의 한 갈래를 찾아낸 것이다.
여정의 끝에 도달한 것은 내가 아니라 바로 너다. 실베니아 로베스테르.
그런 뜻을 담아, 나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럼 이제, 마무리 해야할 시기네. 사실… 슬슬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거든. 네가 이 세계에 와줘서 정말 다행이야.”
“때가 되었다고?”
“세상의 섭리라는 게 그리 간단하지는 않더라고. 세계에 허락된 영혼의 총량은 결국 정해져있어. 다른 세계의 영혼을 불러들였으면, 그 무게만큼 이 세계에서 영혼이 사라져 줘야겠지. 섭리를 비트는 데에도 한계라는 게 있으니까.”
성위 마법을 통한 영구 소멸. 그것은, 섭리 자체를 비틀어 버려서 아예 없던 것이 되어버리게 만드는 마법이다.
실베니아는 성위 마력을 끌어모으며 이야기 한다.
“내가 미숙한 탓에 사람이 많이 죽었어.”
목적은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다.
그 숭고한 목적을 위해 평생을 살았지만, 그렇다고해서 자기 탓에 희생된 목숨을 정당화하진 않는다. 실베니아는 그런 인간이었다.
“내가 벨브로크를 없애고, 이 세계에서 물러나도록 할게. 내가 비워 둔 자리는, 네 자리야.”
실베니아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내게 이야기 한다.
“고마워, 와 줘서. 그리고 살아남아 줘서.”
“…”
“남은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 그저, 그 말이 하고 싶었어. 살아남아 줘서 고맙다고. 끝까지 이를 악물고 버텨줘서… 그래서… 그냥 고맙다고…”
실베니아는 그리 이야기하고, 천천히 몸을 돌린다.
아마도 이 재앙을 마무리할 생각이겠지. 그렇게 벨브로크는 실베니아에 의해 제압당하고, 세계는 절벽지대를 넘어설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은 채 나아간다.
그곳에 실베니아의 자리는 없지만, 세상을 구했다는 결과는 남는다.
그거면 됐다. 평생을 몸담아 온 자신의 숙명이, 무의미한 발버둥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실베니아는 웃을 수 있었다.
“야.”
물론, 내가 그 말에 납득하는 일은 없었다.
힘이 거의 들어 가지 않는 몸을 내버려 둔 채, 나는 목청에 힘을 가득 담아 실베니아를 불렀다.
“…?”
“네 입장 다 이해해. 네 세계를 구하려고 발버둥을 쳐야만 했으니까… 갑자기 날 불러들인 것도, 내가 이렇게 온갖 위기에서 버텨내야만 했던 것도… 난 다 이해해줄 수 있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세계를 구하기 위한 발버둥이었을테니까.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의 일환이기도 했을테니까.
백 번 양보해서, 전부 이해해 준다고 쳐두자.
하지만, 절대로 이해해줄 수 없는 부분이 남아있다.
“그럼, 내가 있었던 세계는?”
“응?”
“영혼의 총량이 균형이 맞질 않으면, 섭리는 비틀린다고 네 입으로 말했잖아. 그럼 내가 떠나온 세계의 균형은 누가 유지해주는데? 내가 비워버린 자리는 어떻게 채울거냐고.”
눈을 감는다.
아직도 기억이 나는 것은, 이전 세계에 두고 온 인연들이다.
“남아 있는 지인도 거의 없고, 참 각박한 세상이었지만… 내 고향 같았던 곳이야. 나름대로 많이 정 붙였던 곳이기도 해. 그럼… 네 세계를 내가 지켜줬으면, 너도 내 세계를 책임져줘야 될 거 아니야.”
“그… 건…”
“내가 변수로서 이 세계에 존재해야한다면, 최소한 내 원래 세계가 무너지지 않게는 해주는 게 예의에 맞는 게 아니냐고.”
제 영혼을 소멸시켜가면서까지 날 이 세계에 남겨두려는 희생정신은 잘 알았다.
하지만, 그런 희생은 나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만 내가 이야기 할만한 것은 하나 뿐이다.
“네 세계를 책임져 줄테니까, 너도 내가 떠나온 세계를 책임져라. 죽음 같은 걸로 도망치려 하지말고, 책임을 지라고.”
“나보고 그 쪽 세계로 넘어가라고? 네 대신해서?”
“날 여기에 불렀으면, 네가 거기로 가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을 거 아니야.”
“한 번도… 해본 적 없어…”
“그럼 시도라도 해봐야지.”
내 반응을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인지, 실베니아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허나, 논리에 틀린 부분은 없다.
이 세계에 와서 나는 많은 일을 겪었다. 고생도 많이 했지만, 나름대로 보람있고 즐거운 일도 꽤 있었다. 그래도 내가 떠나온 세계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다.
그곳이 이상한 일에 휩싸이는 것은, 결코 원하지 않는다.
“그럼… 벨브로크는…”
“넌 세상을 좀 믿어라. 내가 알고 있는 테일리는, 아예 봉인이 완전히 풀려버린 벨브로크를 상대로도 어떻게든 이겨냈어. 하물며 그 때보다 더 많은 동료를 끌고 있는데, 봉인도 덜 풀린 벨브로크를 상대로 질 리가 없지.”
무대는 이미 마련해두었다.
내가 발로 뛰면서 온갖 고생이란 고생은 다했지만, 어쨌든 그 결과가 좋았다면 전부 상관없다.
“성위 마력 낭비하지 말고, 내 세상이나 살려. 나는 네 세상을 살려줄 거니까.”
단순한 거래 아닌가.
더 깊게 생각할 여지도 없다. 나는 두고온 것들에 남은 정을 떼어버릴 맘이 없다.
실베니아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웃음을 짓는다. 눈을 지그시 감고서는, 한동안 계속 웃다가 이윽고 천천히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래, 네 말이 맞네.”
실베니아는 고개를 끄덕이고선, 온 몸의 성위 마력을 끌어올렸다.
검붉은 마력의 기운이 거대한 공간을 가득 채워나간다. 밝고 새하얗던 공간은 어느샌가 묵직한 성위 마력으로 가득해져, 거대한 지하공간 같은 모습이 된다.
최고위 성위 마법을 쓸 때보다도 더 막대한 양의 마력이 무한한 공간을 뒤덮는다.
그 마력의 양은 보고 있기만 해도 아찔해질 지경이다.
세계의 섭리를 넘어, 별 저 너머의 세상까지 닿는 마력의 힘은 그 정도로 아득한 양이다.
이미 수 백 번도 넘게 구현해본 마법이다. 에드 로스테일러를 불러내기 위해서.
이번엔 누군가를 불러내기 위함이 아닌, 자신이 스스로 세상을 뜨기 위한 마법이다.
이윽고, 거대한 마력의 틈바구니에서… 거대한 철문 같은 것이 솟아오른다.
“사실 잘 모르겠어. 널 불러내고 나서, 네가 이 세계에 온 건 한참 뒤인 것처럼… 모든 것이 불안정해.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흐름 사이에서 한참을 유영해야할지도 몰라. 예상했던 것보다 미래로 갈수도, 아예 한참 과거로 갈 수도 있겠는걸.”
“그래도, 여기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지도 모르지.”
“맞아. 그리고 네 말처럼 나도 네가 책임져준만큼 책임을 져야할테니까.”
실베니아는 아련한 미소를 지으며 뒤로 돌아보았다.
그리고 뭐라 이야기하려는 듯, 입을 움직여보지만… 휘몰아치는 마력의 여파 탓에 잘 들리지는 않았다.
어쨌든 감사 인사를 남긴 것 같아, 나는 손을 휘저어서 아무래도 좋다고 이야기 해주었다.
사실 내가 한 일은, 매 순간 살아남기 위해서 난리를 피운 것 밖에 없었다. 딱히 세상을 구하겠다느니 하는 거창하고 숭고한 목표 따위는 없었다.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살아남았다. 그 사실을 확인했다면, 그거면 됐다.
실베니아의 성위 마법 ‘공간 장막’이 사라져 간다.
천천히 열리는 문 너머로 나아가는 실베니아를 바라보며,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굳이 작별 인사는 하지 않았다.
일단 살아있다면, 또 만날 기회는 올테니까.
*밤이 아무리 길어도 아침 해는 반드시 뜬다.
비오는 숲 속에서 내 머리에 총구를 들이밀었던 그 날의 밤조차도, 긴 어둠을 버텨내고 나니 보란 듯이 동이 트기 시작하더라.
마물족과 벨브로크가 날뛰던 아켄섬에도 그 사실은 변함이 없다.
벨브로크 토벌대가 모여들고, 공간을 베어내며 상공을 향해 날아드는 테일리를 배경으로 아침 해는 떠오른다.
하늘을 뒤덮는 마물족 무리는, 대륙 쪽으로 나아가 학살을 자행하려고 하지만, 이윽고 도착한 황실의 군세에 의해 막혀서 제압당하기 시작한다.
페르시카 황녀가 진두지휘 하는 황실군은 대륙으로 인명 피해가 퍼져나가지 못하도록 해안지대에 넓게 포진해 끊임없이 마물족의 무리를 막고 있었다.
테일리를 호위하며 세력들을 지휘하는 페니아 황녀도, 테일리가 벨브로크의 심장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함께 길을 뚫어주는 직스도, 벨브로크의 공격을 온힘을 다 해 튕겨내버리는 클레비어스도, 벨브로크의 마력의 여파에 의한 피해를 최소화 하기 위해 시약을 꺼내드는 엘비라도, 좀 더 이성적으로 벨브로크에게 접근할 방법론을 고민하는 로르텔도, 그리고 그 모든 중심에서 용기를 잃지 않고 전의를 불태우는 테일리와 아일라도.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친다.
비오는 날, 전쟁터의 숲 속에서… 나무 등걸에 기대어 앉아 총구를 내려놓았을 때의 기억이 난다.
그 앞을 쫄래 쫄래 뛰어다니던 다람쥐 무리나, 흙 속을 기는 개미들, 침엽수 꼭대기에 앉아 있는 참새들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던 기억이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다들 어쨌든 살아가고 있구나.
그 사실이 가슴에 박혀, 죽는 그 날까지 사라지지 않으리라 확신했던 것이다.
눈을 떴을 땐, 건물의 잔해 속에 누워있었다.
만신창이가 된 예니카와 루시가 그 옆에 딱 붙어 누워있었다. 두 사람 다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닐텐데, 어쨌든 꾹 붙어서 양 팔을 휘감고 있는 모습이 꼭 새끼 고양이 같아서 헛웃음이 튀어나올 뻔 했다.
둘 다 의식은 없었다. 의식을 잃기 직전까지 내 옆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하늘은 드높고도 맑았다. 어느샌가 날이 밝은 것일까.
무너진 건물 잔해의 위로 아침의 태양빛이 쏟아져 내려오고 있다.
창공을 뒤덮은 벨브로크의 모습은 없었다.
반쯤은 폐허가 되어버린 학사 건물 사이에서 몸을 일으키려다가 말았다. 다시금 격통이 밀려오려고 했기 때문이다.
“좋은 꿈 꾸셨어요?”
예니카와 루시를 끼고 누워있던 나를 보고 있다가, 이윽고 목소리를 낸 건 로르텔이다.
그 옆의 건물 잔해에 가만히 앉아 있던 로르텔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온 몸에 피를 뒤집어 쓰고 있었다.
격렬한 전투의 흔적이었다. 허나, 로르텔은 모든 것이 끝났다는 듯… 허심탄회하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무대는 막이 내렸답니다.”
간밤의 목숨을 건 긴 전투를, 로르텔은 거창하게 설명하지는 않는다.
다만, 광장에 모여든 사람들이 모두 폐허에 몸을 뉘이고 쉬고 있는 모습을 보며 이야기 한다. 토벌대 멤버들과 생존자들이 모여서, 구조대를 기다리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하나 같이 상처가 가득한 사람들이었다.
그곳에는 하늘을 뒤덮은 공포스러운 성창룡도, 세상을 멸망시키겠다는 듯이 날뛰는 마물족들도 남아 있지 않았다.
따스한 산들바람만이 머리칼을 훑고 지나갈 뿐이다.
무대에서 내려온 로르텔은, 고단한 몸을 이끌며 가만히 웃고 있었다. 그렇게 잔해에 몸을 뉘이고 있는 우리를 보다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러고선 이야기한다.
“고생하셨습니다.”
그 짧은 한 마디가 괜시리 가슴을 찌르는 기분이 들어서…
나는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 본 채로 누워 있었다.
문득 책을 읽다가 창 밖을 보면 펼쳐져 있던…
언제나처럼 드넓고도 푸른, 아침의 하늘이었다.
*뚝- 뚝-
싱크대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에 소녀는 눈을 뜬다.
어두컴컴한 방. 정리되지 않은 이불. 널브러져 있는 옷. 불이 들어와 있는 컴퓨터의 화면.
창밖에서 이따금씩 들리는 기차가 지나가는 소리. 웨엥 웨엥 하고 매미가 우는 소리. 열려진 창문으로 조금 들어온 산들바람이 좌식 책상 위에 펼쳐져 있던 노트를 촤라락 넘겨버린다.
눈을 뜬 소녀는 휙 하고 몸을 일으킨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변을 바라본다. 바닥에 날붙이 같은 것이 흩어져 있다. 뭔가에 비관해서 이대로 삶을 마감하려 했던 것이다. 마치 그 날 목을 메려 하던 에드 로스테일러처럼.
주변을 두리번 거려보니 좌식 책상에 세워진 작은 거울이 보인다. 검은 머리칼에 안경을 쓴 왜소한 체구의 소녀가 어리둥절해하는 모습이 선명하게 비춰진다.
소녀는 지끈 거리는 머리를 꾹 누르며, 펼쳐진 노트를 슥슥 넘겨 본다. 그림이 잔뜩 그려져있다.
여러 멋진 인물들이 가득한 일러스트들. 필시 소녀가 직접 그린 것이다.
일부는 그럴싸하게, 게임 컨셉아트 같은 느낌으로 진심을 다해 그려져 있다. 소녀의 꿈 혹은 목표인 것일까. 갖가지 컨셉아트에 관련한 책들이 서가에 가득하다. 그 외에 시나리오 작법, 게임 프로그래밍 같은 것에 관련된 서적도 잔뜩 쌓여있다.
마법 같은 것은 없는 세상이다. 구태여 마력을 끌어모으려 해봐야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머리 속에 남은 단편적인 기억들이 스스로를 더 어지럽게 만든다. 어쨌든 이 소녀는 뭔가를 꿈꿨고, 좌절했고, 생을 마감하려 한 듯 하다. 지금 시점에서 알 수 있는 것 이래봐야 그 정도였다.
알 수 없는 게 가득한 세상이다.
그럼에도, 일단 소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웅-웅- 컴퓨터의 쿨러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모니터 화면을 멍하니 쳐다본다. 한참을 눈싸움 하듯이 응시해보지만 아직 뭐가 뭔지 알 수 없다.
일단 배가 너무 고프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며칠 정도 굶은 것일까. 일단 아사하고 싶지 않으면 뭐라도 챙겨먹어야 할 것 같다.
소녀는 어떻게든 몸을 일으켜서 주방으로 나간다. 비틀비틀 거리는 걸음걸이가 위태롭다.
소녀가 남겨놓고 간 컴퓨터의 화면은 잠시 켜져 있다가, 이윽고 암전된다. 암전되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소녀가 설정한 사용자명이 잠시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페페로페페’
소녀가 자주 사먹던 초콜릿 과자의 이름이었다.
그렇게 컴퓨터의 화면은 완전히 암전되고, 방 안에는 소녀가 어렵사리 냉장고 문을 여는 소리만 새어들어왔다.
일단 살려면 뭘 먹어야 했다.
그리고 살아있는 한 인생은 계속된다. 늘 그랬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