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reat Surgeon RAW novel - Chapter (725)
9화. 풀린 매듭을 조이자. Ⅱ (2)
뜻밖의 말에 조성민이 깜짝 놀랐지만 이 말 한마디로 깨끗이 정리됐다. 강한 자극을 받았는지 조성민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진우 니가 이렇게 열정적인 놈이었냐? 알았어. 그럼 둘씩 서. 자식이 일을 사서 만드네. 하루 종일 책만 볼 수도 없고 당직 날 뭐하지? 진우야, 그냥 한 명씩 서면 안 될까?”
나태해진 생활 속에 숨은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선생님, 뒷일은 책임 못 집니다. 김지훈 선생님이 어떤 분이신지 얘기 못 들으셨어요? 만에 하나 문제라도 생기면 우리 다 죽었다고 복창해야 할 겁니다.”
입맛 다시는 소리만 들렸다.
여기까지였다.
하루아침에 생활 패턴이 바뀌긴 어렵다.
없던 환자가 갑자기 올 리도 만무했다.
아직도 해가 쨍쨍한데 침대에 누워 자료를 읽던 조성민이 어느새 코를 골았다. 김현철 역시 끄덕끄덕 열심히 인사를 하고 있었다.
송진우가 눈가에 힘을 팍 주었다.
“김현철, 일어나. 빨리 세수하고 와.”
아직도 졸음에 겨운 눈에 자료 몇 장을 흔들었다.
“이따 밤 9시에 확인할 거니까 그때까지 확실하게 머릿속에 담아. 일도 없는 1년차가 오전부터 졸면 어떻게 해? 정신 차려.”
“죄송합니다.”
혼내는 놈과 혼나는 놈의 얼굴색이 똑같았다.
그나마 치프인 조성민과 말이 통해 다행이었다.
첫날이지만 자칫 엉덩이에 곰팡이 필 상황이었다. 넋 놓고 환자만 기다려서는 해결될 일이 하나도 없었다. 김지훈이 진료 이외의 일로 바쁘게 뛰어 다녔다.
‘한동안 일석이처럼.’
잠시 여유를 찾은 과가 보일 때마다 득달처럼 달려가 커피 한 잔하며 안면을 익혔다. 특히 정성호 과장을 만날 때 최대한 오래 엉덩이를 붙였다.
“선생님, 혹시 컨설트 보낼 환자는 없습니까?”
“지금 당장은 없어.”
“아쉽네요. 환자도 무척 많으시던데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보내만 주십시오.”
점심시간에도 과장들과 함께 식사하며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병원과 상관없는 말이 대부분이었지만 심각하게 고민할 가치가 있는 말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흉부외과 과장은 예전 변상훈 과장과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고경아는 잘 적응하고 있었다. 수술 방, 마취과 간호사들과 활짝 웃으며 식사하는 모습에 김지훈이 한시름 놓았다.
외래로 올라가자마자 한동안 생각에 잠겼던 김지훈이 또 전공의들을 불렀다. 일반외과는 말 그대로 모든 과 환자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성민아, 점심시간에 얘기 들으니까 흉부외과는 전공의가 아예 없더라.”
“예. 우리 과보다 더 심각합니다.”
“응급실 환자가 많지 않다고 하시면서도 은근히 힘드신 모양이야. 애매모호한 외상 환자는 흉부외과로 입원시키니까 혼자 근무하시는 게 정말 힘든 일이지. 나 인턴 때도 흉부외과 전공의가 없어서 내가 환자를 봤잖아.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네. 그 덕에 많이 배우긴 했어.”
창밖을 보는 김지훈의 눈에 이젠 아련해진 추억이 서려 있었다. 가장 먼저 감을 잡은 송진우의 얼굴이 벌게졌다. 조성민과 김현철은 움찔거렸다.
“어느 과 수술을 들어가도 배울 게 있고 특히 흉부외과는 우리 과와 함께 바이탈의 쌍벽을 이루잖아. 난 도움 많이 받았는데 너희들 생각은 어때?”
말이 없다.
송진우가 눈치를 보았지만 치프 앞에서 먼저 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김지훈의 묘한 눈빛을 받은 조성민이 어색한 웃음을 터뜨렸다.
“선생님, 혹시 응급실로 오는 흉부외과 환자도 우리가 보라는 말씀이십니까?”
“꼭 그런 말은 아니야. 흉부외과 과장님과 얘기도 안 됐어. 하지만 굳이 우리 치프가 하겠다고 하면 내가 바로 말씀은 드릴 수 있지. 좋아하실 거야.”
형식이지만 조성민에게 공이 넘겨졌다.
‘어이구! 응급실 보고에 자료에 흉부외과까지?’
한 달에 불과한 시한부라고 해도 과장은 과장이다. 학생 때부터 군대만큼 엄한 위계질서 속에서 살아왔다. 김지훈은 하늘 같은 선배이자 생사를 좌우할 과장이었다.
사실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솔직히 일은 늘겠지만 김지훈 말대로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는 과가 바로 흉부외과이기도 했다.
조성민의 입이 서서히 열렸다.
“알겠습니다. 흉부외과 과장님께서 허락하시면 저희가 보겠습니다. 응급실과 수술만 들어가는 거면 크게 힘들지 않을 것 같습니다.그러면······.”
“그래? 자식들! 안 그래도 되는데.”
말을 채 끝내지도 않고 김지훈이 벌떡 일어났다.
“어디 가십니까?”
“흉부외과. 참! 이왕 환자 보기로 했으면 회진도 돌아야지. 달랑 응급실 환자나 수술만 들어가고 손 떼면 우리 과라고 할 수 없잖아. 30분 일찍 일어나면 충분하지 않겠어? 하여튼 고맙다.”
김지훈이 휘리릭 사라졌다.
김현철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 어째 분위기가 심상치 않네요.”
“그러게. 싸하다 못해 등짝이 다 서늘해지네. 진우야, 김지훈 선생님 일복 많은 건 이미 들었고 무지하게 열심히 하신다는 말까지 들었는데 어느 정도였어?”
정신이 번쩍 드는 모양이었다.
“1년차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어젯밤처럼 오랫동안 편하게 잔 적이 없습니다.”
“정말이야? 그래도 오프는 제대로 갔지?”
송진우가 눈을 치켜뜨며 서울 병원 생활을 떠올렸다.
“오프 날도 일찍 간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특히 김지훈 선생님 당직 때는 오프나 당직이나 차이가 없는 날이 태반이었습니다. 일과 끝나면 자기 바빴네요.”
순간 조용해졌다.
생각이 많아지는 모양이었다.
지금처럼 생활하면 가장 기본적인 수술마저 제대로 배우지 못할 것이란 불안감에 시달리긴 했다. 어느 순간 적응이 됐는지 그마저도 사라졌다.
자극받을 만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쉬어도 좋건만 첫날부터 일거리를 만드는 김지훈.
아무 말도 없이 당연하게 따르는 송진우.
열정과 자부심이 가득한 눈빛.
생각지도 못한 자극이었다.
조성민과 김현철은 우물 안 개구리였다.
“어후! 안 되겠다. 현철아. 삼겹살은 뒤로 미루자. 배보다 머리에 먼저 기름칠해야 할 것 같다. 일단 당분의 보고 사이다하고 주스부터 깔자. 진우야, 뭐부터 준비하는 게 좋겠어?”
확실히 손일석 과다.
송진우가 곰곰이 생각하며 신중하게 말했다.
“라파로를 먼저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지? 내 생각과 일치하네. 혈관 수술이 벌써 뜰 수는 없잖아. 아예 없을지도 몰라. 라파로 좋다. 가자.”
복강경 자료를 살피며 토론하던 조성민과 김현철이 내심 크게 놀라고 말았다. 복강경 수술조차 본 적이 없지만 조성민은 치프다. 그런데 2년차가 3년차의 지식을 압도하고 있었다. 복강경에 관한 내용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었다.
자존심 팍팍 상한 조성민이 눈가에 힘을 주었다.
‘후배 앞에서 이게 무슨 창피야. 도대체 그동안 난 뭘 했던 거지?’
이것이야말로 진짜 살아 있는 자극이었다.
송진우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더욱 강한 의욕까지 느꼈다. 조성민과 김현철의 가슴속에 잠재돼 있던 열정이 서서히 불씨를 틔우고 시작했다.
김지훈과 송진우가 정식 근무를 시작한 첫날이었다.
일복의 제왕 김지훈도 구미를 이기진 못했다.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내리 사흘 한가한 시간이 흘렀다.
응급실은 그야말로 잔잔한 호수였다. 일반외과 환자는 말 그대로 전멸이었다. 스스로 탓할 일이 아니었지만 민혁기 원장은 물론 전공의 볼 낯도 없었다.
기존에 입원했던 환자까지 다 퇴원했다. 달랑 하나 남은 차트에 병동 간호사 얼굴 보기 민망할 지경이었다. 회진 도는 시간보다 병동 오르내리는 시간이 더 걸렸다.
헛웃음만 나왔다.
‘어후!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지? 몸은 편한데 편하다는 생각이 하나도 안 드네. 여기까지 따라온 진우는 또 어떻게 하지?’
걱정이 태산이었지만 다행히 일거리를 주었다.
조성민과 김현철이 첫날부터 주어진 세 가지 짐에 헐떡거렸다. 새벽에 일어나 응급실 보고하고, 아침저녁으로 일반외과와 흉부외과 회진 돌고, 하루 종일 자료와 씨름하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헤이해진 머리와 나태해진 몸, 뻣뻣하게 굳은 관절에 기름칠할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외과는 수술로 말하는 법이다. 오전 일과를 마친 한 조성민이 팔베개를 하며 중얼거렸다.
“진우야, 머릿속하고 팔다리는 부산한데 실속이 없다. 일복 넘친다는 소문이 소문으로 끝나면 어떻게 하지? 이러다 손 녹슬겠다. 제길! 당직 둘이 설 필요 없었잖아?”
“그러게요. 아뻬 하나 안 뜨네요.”
김현철까지 맞장구를 치자 송진우의 얼굴이 벌게졌다. 사실 송진우도 내심 당황하고 있었다. 잔뜩 기대하고 왔는데 일요일 밤에 맡은 수술실 냄새로 끝이었다.
‘이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분명 터진다.’
“선생님, 이제 수요일입니다. 라파로 준비 시작하시죠. 시간 남는 김에 응급실에 올 환자 예상해서 공부도 더했으면 좋겠습니다.”
“에휴! 그래. 조금 더 쉬고 그거라도 하자. 피곤하다.”
강력한 각오와 믿음에도 불구하고 외래는 평온하기 짝이 없었다. 김지훈이 어깨를 주무르며 입맛만 다셨다.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도 탈이네. 죽겠다. 하윤호는 뭐하고 지냈을까? 징계 절차 진행 중인데 설마 수술하지는 않겠지? 에이! 그 인간 생각은 왜 자꾸 나는 거야?’
불과 사흘 만에 별별 부작용이 다 생겼다. 마음잡고 기회라 여기며 진료 시간 내내 석사 논문을 준비했지만 좀이 쑤셔 온몸이 뻐근할 지경이었다.
‘아! 피곤하다. 역시 난 필드 체질이야. 외래는 고사하고 어떻게 응급 수술 하나 안 뜨지? 이용철 선생님 말대로 전공의 때 너무 뗐나?’
실밥 뽑으며 환자와 몇 마디 나눈 것이 이렇게 즐거운 일일 줄 몰랐다. 가뜩이나 최선을 다하는 김지훈이다. 덕분에 환자들의 만족도가 상당했다.
“이번에 새로 오신 과장님은 참 친절하시네. 궁금했던 거 싹 말씀해 주시니까 속이 다 후련하네.”
그럼 뭐할까?
이러다 과장노릇은커녕 월급값도 못할 판이었다. 현재로서는 정성호 과장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이미 시간 날 때마다 찾고 있었지만 더욱 박차를 가해야 했다.
“선생님, 혹시 컨설트 봐야 할 환자 없나요?”
“없다고 했잖아. 김 과장, 오전에만 벌써 세 번째야. 이제 그만 와도 돼. 올 때마다 커피 먹어서 속이 다 울렁거려.”
“그럼 다음엔 녹차를 준비할까요? 명색이 외과인데 수술이 하루에 서너 건은 있어야······.”
“김 과장. 나 바쁘다.”
“지금은 환자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죄송합니다. 일 보십시오.”
매서운 눈빛이 약간의 효과를 발휘했지만 온전히 통하진 않았다. 김지훈이 꿋꿋하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정성호 과장이 입술을 모았다.
‘의욕은 있어서 좋은데 얼마나 갈까? 환자들에게 신뢰를 얻는 것이 급선무야. 믿음이 없는데 컨설트 낸다고 환자가 무조건 수술 받겠어?’
어쨌든 고무적인 일이었다.
문득 이용철 과장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제 사흘째 근무에 수술은 달랑 아뻬 한 건이었다. 아직은 한참 더 두고 볼 일이었다.
머리 꼭대기에 걸렸던 해가 넘어갔다.
김지훈이 시계를 보며 기지개를 폈다.
‘어후! 이제 3시 넘은 거야? 시간 참 많이 남네. 경아 씨도 심심하겠다. 일은 일이고 오늘 저녁에 뭐하고 놀아야 잘 놀았다고 소문이 날까?’
고기도 먹던 놈이 먹을 줄 안다고 막상 시간이 팡팡 남아돌자 놀 거리가 떠오르질 않았다. 애꿎은 책상만 딱딱 두드리며 고민에 빠지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조성민이었다.
(68세 된 남자 환자입니다. 탈장으로 내원했는데 복원이 되지 않습니다.)
드디어 왔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두 번째 환자다.
김지훈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숨도 안 쉬고 응급실로 달려갔다.
탈장 주머니로 뛰쳐나온 장을 배 속으로 집어넣지 못하면 100퍼센트 응급 수술이다. 어떻게든 복원시켜 장을 잘라야 하는 일만 면하면 최상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갑자기 힘이 팍 솟았다.
‘복원이 되든 안 되든 수술은 당연히 받아야 하니까 드디어 두 번째 수술을 하게 되는구나. 복원이 돼서 라파로로 하면 효과가 더 크겠지? 아! 감동이다.’
흐릿했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전공의들도 간만에 온 환자에 기대를 감추지 못했다. 혹시 복강경을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까지 엿보였다.
“선생님, 수술하게 되면 라파로로 하실 겁니까?”
“장이 죽지 않았다는 확신이 있어야지.”
‘이런 경우에는 시도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진우 말이 맞겠지? 아직 준비가 다 안 됐는데 반드시 그래야 돼.’
조성민이 묘하게 숨을 내뱉으며 송진우를 보았다. 그 옆에 단발머리가 보였다. 기분이 끝 갈데없이 좋아졌다.
‘어이구! 오하석 요놈 봐라. 예쁜 짓만 골라서 하네.’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차트와 검사 결과를 확인하던 김지훈의 눈썹이 갑자기 꿈틀거렸다. 수술 환자가 왔다는 흥분이 단숨에 가라앉으며 표정까지 살벌해졌다.
스윽 고개를 돌려 조성민과 송진우를 보았다.
그동안 별 생각 없이 지나쳤던 일들이 김지훈 눈에는 팍팍 밟히고 있었다.
“김현철, 1년차 차트 작성이 이게 뭐야? 인턴하고 아무 차이도 없잖아? 이걸 보고 환자 파악할 수 있겠어? 송진우, 너 2년차 후반기다. 1년차 교육은 네 몫이야. 기본부터 다시 점검해. 똑바로 하자.”
김현철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입도 열지 못했다. 환자에게 신경 쓰느라 정신없었던 송진우는 아예 난로가 됐다. 치프로서 책임을 가진 조성민 역시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복원이 안 된다고?”
조성민이 자신도 모르게 자세를 똑바로 했다.
“예. 내원한 후 30분 정도 시도했는데 장이 들어가질 않습니다. 증상은 4시간 전부터 시작된 것 같습니다.”
“환자 보자.”
얼굴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환자가 짜증부터 냈다. 뛰쳐나온 장 때문에 가뜩이나 아파 죽겠는데 30분을 만져 댔으니 꽤 큰 통증에 시달렸을 것이다.
“일반외과 김지훈입니다. 힘드신 건 알지만 장을 집어넣지 못하면 최악의 경우 잘라야 할 수도 있습니다. 일단 다시 한 번 시도해 보고 안 되면 바로 수술을 해야 합니다.”
우측 서혜부가 탈장으로 봉긋하게 솟아 있다. 그 부분이 모두 장으로 채워져 있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장 괴사는 발생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됐다.
조심스럽게 손을 모아 탈장 입구를 향해 압력을 가했다. 살살 손을 움직여가며 장이 다시 들어갈 수 있도록 유도했지만 환자의 비명 소리만 울렸다.
몇 번 더 시도했다.
환자는 점점 더 큰 통증을 호소했다.
‘이쯤이면 들어가야 하는데.’
땀방울이 뚝뚝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