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146
146화. 바토르
“……멧돼지는 돌려보내야 하지 않아? 상처가 심해 보이는데. 아, 길을 못 찾으려나?”
“뭐라는 거지!? 돼지가 늑대보다 훨씬 똑똑하다, 흥! 더구나 우리 야랄타이는 더욱!”
정말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볼드는 그 사실보다는 다른 것이 더 신경 쓰였다.
“보통 형제한테 야랄타이(йделведкашв, 비상식량)라고 이름 붙이지는 않지 않…….”
“뭐!?”
“……흠, 흠. 아니다. 미안하다. 그거야 전사의 자유지.”
나른의 살벌한 눈빛에 볼드가 찌그러지는 순간.
“……그리고 생명력도 강인하다. 타이니 경이 좀만 도와준다면, 천천히 달릴 수는 있을 정도로 회복될 거다.”
나른이 그리 말하며 타이니를 열의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짐작한 타이니가 쓴웃음을 지으며 나섰다.
“도와는 주겠지만 무리는 하지 마라. 괜히 그러다 네가 쓰러지면 곤란하다.”
“……물론.”
왜인지 살짝 얼굴을 붉히는 나른을 보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린 타이니는, 주변의 마나를 최대한 순수한 상태로 정제하여 나른에게 밀어 넣었다.
그러자 자연스레 나른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역시……!”
쓰러졌던 그녀를 회복시킨 압도적인 마나 장악력이 착각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체내에 밀려 들어오는 순도 높은 마나는 당장 그녀가 동원할 수 있는 마나의 총량보다 많았다.
그것은 나른의 예상을 넘어서는 수준이었다.
타인의 몸에서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 자신의 고유 마나를 배제하고 순수한 마나만 다루는 것.
그런 일이 어찌 가능한 것인지, 몸소 체험하지 않고서는 믿지 못할 정도였다.
‘이 정도면 충분해.’
우우우우웅.
나른의 피부 위로 붉은 문신이 빛을 발하기 시작하더니, 이내 전신에서 떠오른 붉은 멧돼지의 환영이 조금씩 선명해지며 그녀의 멧돼지 야랄타이에게 덧씌워졌다.
마치 꼭 닮은 두 마리의 거대 멧돼지가 겹쳐지는 듯한 광경.
그리고 이내.
“꾸에에엑!”
비명 같은 괴성과 함께 야랄타이가 몸을 뒤트는 것도 잠시.
파리하던 녀석의 얼굴에 혈색이 돌아오고 옅은 피를 흘리던 상처가 서서히 아물기 시작하는 장면이 모두의 눈에 확실히 들어왔다.
자연히 그 광경을 보는 볼드도 놀란 듯 눈이 커졌다.
“일체화(Intergration)를 저 단계까지 활용할 수 있는 전사는 오랜만에 보는군. 대단해…….”
볼드의 감탄은 전혀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오크족 전사가 그들의 형제이자 기수(騎獸)에게 사용하는 기술. 일명 일체화는 문신 마력회로 공법의 한 갈래로서, 인간 기사가 사용하는 마력 질주와 같은 계열인 동시에 그보다 한 차원 높은 전투 기술로 취급받고 있었다.
물론 같은 계열인 만큼 사용자의 경지보다는 자질과 재능에 따라 효용성이 천차만별로 달라진다는 점은 비슷했다.
그런 의미로 봐서도.
“완전 동기화에 상처 치료까지 가능한 건 오크 중에서도 정말로 축복받은 재능인 거지.”
타이니가 그렇게 평가하자 볼드가 어이없어하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나른의 어깨 위에 올린 손 위로 몰려드는 순수한 푸른 마나의 움직임과 타이니의 얼굴을 번갈아 본 것이었다.
“그렇게 순수한 마나를 주입해 주면서 태연히 입까지 여는 괴물이 지금 누구를 칭찬하는 건가?”
“……뭐, 나야 나고.”
타이니가 어깨를 으쓱하고 볼드가 피식 웃으며 다시 나른에게 시선을 돌릴 때, 붉은 멧돼지의 심각한 상처는 어느 정도 아물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후.
천천히 달리기 시작한 붉은 멧돼지 옆으로 은빛 늑대가 따라붙었고, 일행은 만 하루의 시간이 지난 뒤 바토르를 앞두게 되었다.
동이 터 오는 새벽.
이제는 타이니에게도 익숙하게 느껴지는 거대한 뼈 장벽이 햇빛을 받아 번쩍이는 광경은 분명 멋들어졌지만, 그보다 더 눈길을 끄는 장면은 따로 있었다.
지평선을 틀어막는 거대 도시 바토르의 남문에는, 여태 보아 온 오크의 대도시와는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져 있기 때문이었다.
“뭐, 뭐야! 새치기하지 마!”
“무슨! 네놈이나 하지 마!”
“거기 조용!”
“줄을 서라고, 인간들!”
“이곳은 오크의 성지다. 소란 피우지 마라!”
오크어가 아닌 공용어가 난무하는 뼈의 성채 입구.
그곳에는 오크가 아니라 수많은 인간이 저마다 크고 작은 짐마차들을 대동한 채 북적거리고 있었다.
“……뭐야 저건?”
“동부에서부터 벌어진 전쟁 때문에 인간 상인들이 바토르로 피신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기는 했는데?…….”
어이없어하는 타이니의 혼잣말에 볼드가 반응해 주었지만, 그와 나른 역시 길게 늘어선 인간의 행렬에 황당한 눈길을 보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뼈나 가죽으로 만든 오크의 공예품이 인간의 나라에서 인기가 많다 해도, 이곳 오크의 성지에 저렇게 많은 인간이 모이는 것은 그들도 상상해 본 적이 없는 것이다.
‘오크들의 성지가 전쟁에 휘말리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거야…… 그럴 수 있지.’
하지만 덕분에 문제가 생겼다.
“……이거 생각 외로 시간이 좀 걸리겠군.”
“오크족의 존망이 걸린 일이다. 우리가 먼저 가면 된다.”
“아니, 그러지 마라. 그랬다간 대전사에게 용건을 말할 기회도 잃을 수 있으니.”
“뭐?”
“내 말대로 해라. 그게 워로드 저릭이 세운 원칙이니.”
“오! 나도 들어 본 적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친구.”
……넌 당연히 알아야 하지 않냐? 네 외삼촌인데.
“그런데 어째 대전사를 잘 아는 것처럼 말한다, 타이니 경?”
타이니가 어이없는 눈으로 보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는지, 볼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당연히 잘 알지.
일행의 의아한 시선을 타이니는 한숨으로 받았다.
‘저릭…….’
급하다는 이유만으로 정당한 절차를 무시하고 바토르에 들어서려 한다면, 그 고집쟁이는 이쪽의 말을 아예 들으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다 보니 알게 된 것이 있지. 그러니 줄이나 서자고.”
“그러지.”
“따르겠다.”
또다시 긴 한숨과 함께 나온 타이니의 말에, 일행은 주춤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들은 동쪽에서 떠오른 해가 서쪽으로 뉘엿뉘엿 넘어갈 즈음에나 바토르로 들어설 수 있었다.
바토르(Bator).
초대 오크 대전사이자 오크를 통합했던 영웅, 오크로드 바토르의 탄생지이자 오크 최초의 도시.
그들의 언어로 바토르(вгввтв)라는 단어는 영웅이라는 뜻이고, 여담을 덧붙이자면 오크들은 같은 언어를 공유하는 수인족이 바토르라는 이름을 쓰면 매우 싫어한다.
정작 자기들은 가장 흔하게 쓰는 이름이면서도 말이다.
그리고 사실 그런 잡지식보다 당장 중요한 것은.
‘전생에는 오크 내전으로 완전히 파괴된 도시라는 거지…….’
그 일에 대한 소문은 무성했지만, 무엇이 진실인지는 타이니 역시 몰랐다.
전생에 오크 내전 시기, 막 떠돌이 용병으로 경험을 쌓기 시작할 무렵의 그는 동부의 자유 도시들을 중심으로 활동했었으니까.
게다가.
– ……길게 얘기하고 싶지는 않아.
저릭은 그와 관련된 얘기가 나오기만 하면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기에, 이후에도 그 사연을 들을 수가 없었다.
타이니가 복잡한 심경으로 주위를 둘러보는데, 두 오크는 황홀한 표정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기 바빴다.
“이곳이 성지…….”
“멋지다…….”
타이니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감상.
기기묘묘한 뼈 구조물에 올려진 가죽 천막들. 거대한 오크 건축물은 분명 웅장하기는 했지만, 붉은 멧돼지족의 도시 자밍우드와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였으니까.
굳이 차이를 꼽자면, 거리 중간중간 놓여 있는 탑 모양의 뼈 건축물들뿐이었다.
자재가 생물, 특히나 익숙한 형태의 뼈가 많이 쓰였다는 것만 아니라면 얼핏 멋들어지게도 보이는 탑.
볼드와 나른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주된 대상이 바로 그 탑들이었다.
“……저 탑들은 뭐지?”
그래서인지 타이니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번개 같았다.
“역대 대전사들의 업적을 기리는 탑이다, 친구.”
“숙적들을 쓰러트리고 그 뼈로 만든 탑. 오크 최강자들의 역사이자 자랑스러운 상징이다, 타이니 경.”
아…….
‘굳이 그딴 걸 왜 만드는데!?’
오크의 숙적 대다수가 그와 같은 인류라는 것은 너무도 자명했으니, 인간족의 눈으로 보면 바토르는 길 한가운데에 시체로 만든 장식물들을 세워 놓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타이니로서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 탑을 다시 보게 되는 정도였지만.
오크의 성지에 바글바글한 상인과 용병 중에는 눈치가 없는 이들도 있었다.
“살육의 탑…….”
“쉿, 조용히 해.”
“여기 오크들은 거의 다 공용어를 할 줄 안다고. 일 망치기 전에 닥쳐.”
“안다고, 알지만…….”
“영웅의 탑이라고 하라고, 오크들 듣기 좋게. 오크어로 바트루딘 트삼칵(вгввтввьд члй)이라고 하든가.”
“바트, 뭐?”
“……모르면 제발 그냥 닥쳐.”
그들 사이에서 들려오는 말들은 보통 인간들이 저 탑들을 어찌 보는지 정확히 대변해 주고 있었다.
‘살육의 탑이라…… 하…….’
자기들 딴에는 안 들리게 속삭인다고 하는 것 같았지만, 타이니 못지않게 청력이 좋은 오크들 일부는 이미 그들에게 사나운 눈길을 던지고 있었다.
“거기 인간들, 지금 뭐라고 했지?”
2m에 달하는 덩치에 어깨도 인간과는 차원이 다르게 넓은 녹색 피부의 거한이 도끼를 겨누는 순간, 속닥거리던 상인들의 얼굴이 일순간 새파랗게 변했다.
“우, 우리요?”
“우, 우리가 무슨 말을?”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긍지가 강한 오크들 앞에서 그들이 숭앙하는 문화를 모욕한 꼴이니.
‘차라리 솔직히 고백하고 사과하는 게 나을 텐데.’
쯧.
타이니가 혀를 차며 지켜보는데, 그 오크 전사가 살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영웅의 탑, 모독하는 거, 들었다. 나 바토르의 전사, 바토르. 그대들에게 모욕의 대가를 받겠다.”
하필 이름도 바토르냐.
평범한 1, 2단계 수준의 오크 전사라 해도 일반 인간들에게는 괴물이나 다름없는 존재.
자연히 그의 도끼를 마주한 인간 상인들은 사색이 되어 바로 땅바닥에 엎드렸다.
“사, 살려 주십시오.”
“말실수, 예. 실수입니다.”
“죄송합니다!”
한심하다는 생각에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데, 그 의중을 오해했는지 볼드가 불쑥 끼어들었다.
“신경 쓰지 마라, 친구. 저리 말해도, 성지 안에서 피를 보지는 않을 테니.”
……성지가 아니라면 진짜 피 볼 수준의 모욕이라는 거냐, 그게?
타이니로서는 더욱 황당할 뿐이었지만, 굳이 저런 사사로운 일에 더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다.
그로선 지금 해야 할 일이 더 중요하니까.
타이니의 시선이 다시금 원래 가려고 하던 방향, 바토르의 중심부에 있는 거대한 천막으로 향했다.
굳이 누가 알려 주지 않아도 이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산다는 걸 알 것 같은 거대한 건축물.
‘저곳에 저릭이 있다. 그리고 성물도…….’
오크족의 성물 코르(Cor)가 뿜어내는 결계가 멀리서도 아스라이 느껴지고 있었다.
정령술사로서도 4단계에 오르면서 영혼의 힘이 한층 강화된 까닭.
이제는 어느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도 투명한 성물의 힘이 구별되고 있었다.
스스로의 성취에 고양된 마음과 옛, 아니 미래의 친구(?)에 대한 그리움이 그의 발걸음을 한층 빠르게 만들었다.
“가지, 대전사를 만나러. 아, 그런데 혹시 다른 절차는 없나?”
“우리는 부족을 대표하는 사절이다. 대전사께서 만나 주실 거다, 친구.”
“……원래는 다른 절차가 있다는 걸로 들리는데?”
“어중이떠중이가 접근 못 하게 ‘대전사의 제자들’의 시험을 겪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볼드의 말대로 우리는 예외일 것이다.”
두 오크가 타이니의 걱정을 일축하는데.
– клфпд ылаьа фрвнкпщ!!(감히 나를 모욕해!!)
멀리, 그들이 목표로 한 천막에서 엄청난 고함과 함께 몇 명의 오크가 천막을 뚫고 허공으로 솟구치는 것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