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aling Life of a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60
60 조금은 먼 곳
* * *
“안 돼! 안 돼! 안 돼! 오빠! 어딜 가려고!”
수연이가 거실에 드러누웠다. 가려면 자길 밟고 지나가란다. 으음. 수연이 팔을 살짝 잡아끌어 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떼쓰는 아이는 생각보다 힘이 세다.
“지금 바로 간다는 게 아니라······”
“알아! 겨울 방학 때 간다며! 그런데 저번처럼 또 그러면 어쩌려고 그래!”
아예 눈물까지 글썽거리는 수연이.
나를 노려보다가 괜히 고개를 획 돌린다.
‘아이고.’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반발이 거세다.
하나밖에 없는 오빠가 여름에 그 난리를 겪고, 겨울에 다시 비행기를 타겠다?
내가 수연이 입장이라도 저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얄팍한 설득을 몇 번 해보다가 냅다 수연이 옆에 누워버렸다.
에라 모르겠다.
“그럼 안 가지 뭐. 겨울엔 그냥 수연이랑 놀아야겠다.”
“······?”
내 순순한 항복 때문인지 슬쩍 돌아누워 나를 빼꼼 쳐다본다. 의심의 눈초리. 나는 솔직히 이야기했다.
“내게는 기회라고 해도, 네가 그렇게 힘들다면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 한국에서 할 일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냥 여기 있을게.”
“지, 진짜? 진짜?”
“응.”
수연이는 눈을 몇 번이나 비비다가 자리에 앉았다. 나를 빤히 내려다보며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오빠는 유럽 가고 싶은 거 아녔어? 교수님 공연도 보고··· 오빠도 피아노를 치고···”
“그래도 그게 가족보단 중요하지 않으니까.”
“······.”
“맞지?”
눈을 몇 번이나 껌뻑거리던 수연이는 갑자기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깜짝 놀라서 수연이를 달래기 시작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오빠 안 간다니까?”
“킇. 그래도 오빠는 가고 싶긴 한 거잖아! 그런데 나는 싫어! 그니까 이런 선택은··· 나한테는 너무 어려운 거 같아··· 으아앙!”
내 품에 안겨서 한참 동안 울던 수연이는 결국엔 지쳐서 잠들고 말았다.
잠시 후, 저녁 장을 보고 오신 부모님이 돌아오셨다. 나와 수연이를 보고 상황을 물어보신다.
나는 강유한 교수님에게 제안받은 내용을 부모님께 상세히 설명해 드렸다.
“그러면 당연히 가야지! 수연이는 아빠가 설득해 볼게.”
“서진아, 너 사고 난 지 얼마나 됐다고? 좋은 기회라는 건 알겠는데··· 엄마는 마음이 좀 그러네.”
가족마다 생각이 다른 유럽행.
그런데 해결책은 의외의 곳에 있었다.
* * *
“그러면 다 같이 가면 되는 거잖아. 널 따라가면 부모님도 마음이 편하실 거고. 맞지?”
“그렇긴 한데······”
“가족들 경비가 걱정이라고? 그 정도는 충분히 더 가불해줄 수 있어. 아무것도 아니야.”
“······ 네?”
“너 지금 ⌜TEST⌟로 1위 찍고 있잖아. 그거 정산되면 그 정도 여행 경비보다는 훨씬 큰돈이 들어올걸? 물론 네가 그 돈을 다른 곳에 쓸 데가 있다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연습실을 만든다든가. 비싼 장비를 지른다든가.”
“······.”
박훈 과장님은 피식 웃었다.
“강유한 교수님도 가족들 따라오는 건 괜찮다고 하셨다면서. 네가 아직 어리다 보니까 당연히 그런 생각도 하고 계셨겠지. 그러면 대체 뭐가 걱정이야? 나름 대한민국 1위 곡 만든 작곡가인데 돈이 걱정이었어?”
“어··· 그런가요?”
“이참에 가족들하고 머리 좀 식히고 와. 일정이 빡빡한 건 아니라면서.”
“그렇죠. 교수님 연주가 세 번 있고. 제 연주가 한 번 있다고 들었어요.”
“17일 동안?”
“네.”
“널널하네.”
“그런 편이죠. 교수님께서 연세가 있으시다 보니 무리는 못 하신다고 하셨거든요.”
“그런데 무슨 고민이야? 동생 귀엽다며. 맛있는 것도 사주고. 그러는 김에 영감도 좀 많이 받아 오고.”
“······ 훌륭하네요?”
“문제 해결. 간단하지?”
박훈 과장님은 괜히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중에 이 사실을 수연이에게 알려주면 어떻게 될까. 좋아해 주려나. 그랬으면 좋겠다.
자동차에 있는 동안, 잠깐의 짬을 이용해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그리고 박훈 과장님과 이야기했던 내용을 전달해 드렸다.
처음에는 조금 부담을 느끼시는 듯했다. 아들 돈을 쓰는 게 편치 않으신 모양. 차라리 어머니가 가지고 있던 비상금을 쓰시겠다고 하신다.
나는 그러지 말라고 계속해서 설득했고, 결국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는 걸로 결론을 내렸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데 말이다.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좋은 부모님이신 것 같네. 꼭 효도해라.”
“당연히 그래야죠.”
주차장에 차를 세운 뒤.
나는 박훈 과장님을 따라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홀이 없고, 전부 룸으로만 운영이 되는 일식당.
우리는 기다란 복도를 한참 걸어갔다.
대부분 원목으로 이루어진 인테리어가 제법 근사해 보인다.
“여기 꽤 좋은 곳인가 봐요.”
“신경을 좀 썼나 봐. 저쪽에서 예약을 잡은 거거든.”
“오늘은 감독님 한 분만 나오신다고 그랬죠?”
“어. 우리도 조심스럽긴 한데, 저쪽도 대본 유출을 신경 쓰고 있나 보더라고. 그래서 오늘은 소수 인원끼리만 만나자고 했지.”
아직 내가 이 일을 하기로 100% 결정한 것은 아니었다.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일인지를 먼저 판단하고 싶었다.
그래서 대본을 받고 싶다고 먼저 부탁을 했던 거였는데···.
그럴 거면 아예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자는 말이 나와버렸다.
그 덕분에 오늘 내가 이곳에 온 것이다.
종업원의 안내에 따라 도착한 방.
노크를 하고 얼마간 기다리자 문이 열렸다.
우리는 방에 들어갔다.
박훈 과장님과 감독님은 꽤 살갑게 인사를 나눴다. 여기 오기 전에 박훈 과장님께 들은 이야기로는 예전에 프로젝트를 같이 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조금 믿기지는 않겠지만······”
박훈 과장님은 나를 소개해주셨다.
감독님은 처음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이내 차분해지시더니 내게 손을 내미신다.
“이번에 ⌜TEST⌟ 듣고 느낀 게 많아서 이렇게 염치 불고하고 만나자고 했습니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감독님.”
나는 흔쾌히 그의 손을 맞잡았다.
50대 중반의 나이.
거의 30년이라는 세월 동안 영화계에 몸을 담고 계신 분.
3년 전, 영화 ⌜세종⌟으로 천만 관객을 달성하신 뒤에 차기작을 준비하고 있는 저분은.
영화감독 천희태였다.
* * *
박훈 과장이 미리 말하길, 꽤 놀랄 일이 있을 거라고는 했지만···.
‘이렇게 어릴 줄이야······.’
무척이나 놀라운 일이었다.
⌜TEST⌟ 정도 되는 노래를 작곡한 사람이라면 최소 30대는 될 줄 알았다.
지나간 세월의 그리움과 한 인간의 결심.
그 미묘한 감정선 위에서 사람들에게 위로를 전하는 노래.
‘이 노래를··· 저 아이가 작곡했다니···’
쉽게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박훈 과장의 표정으로 보아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이래서 비밀 유지를 해달라고 했던 건가?’
MJ의 신상에 대해서 외부에 이야기하지 말라는 계약서를 ⌜월광⌟과 썼었다.
그래서 처음엔 진짜로 대형 기획사의 CEO 급 프로듀서가 나오나 했다.
부캐(부캐릭터).
요즘 그런 걸 많이 하니까 말이다.
“혹시··· 대본을 지금 볼 수 있을까요?”
“아, 물론이죠.”
그 대답을 들은 한서진이 살짝 미소를 짓는다.
“감독님 말씀 편하게 해주세요. 그게 훨씬 나을 것 같아서요.”
“······.”
“진짜로요.”
“······ 그래.”
천희태는 한서진에게 대본을 넘겼다. 한서진은 말도 없이 대본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중간중간 꽤 날카로운 질문을 던져왔다.
코스 요리가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다.
음식을 먹으면서도 대화는 멈추지 않았다. ⌜월광⌟에 보냈던 건 분명 시놉시스가 전부였는데. 한서진은 벌써 작품 분위기를 전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게 신기했다.
이 영화는 이별과 슬픔, 그리고 상실에 관한 이야기였다.
겉으로 보기엔 즐거워만 보이는 청년들이 대학을 다니며 겪게 되는 아픔을 풀어낸 영화.
천희태가 이 작품을 쓴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내 젊은 시절을 필름에 담고 싶었으니까.’
이제는 이런 영화를 만들 때가 됐다고 생각했었다.
다만,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마지막 씬이었다.
7분 45초가량의 하이라이트 씬.
이 파트에서 감정을 최대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음악이 필요했다.
영화 전반에 쓰일 OST가 아닌 한 장면을 위한 노래가 있어야 했다.
그래서 ⌜TEST⌟의 작곡가에게 의뢰했던 것이다. 그런 감정을 잘 살릴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이별을 알기엔··· 너무 어리지 않나?’
그래서 천희태는 대본을 읽고 있는 한서진을 보면서도 내심 걱정하고 있었다.
식사가 마무리되고, 한서진이 대본을 다 읽었을 무렵.
“이건······ 작품이 너무 좋네요.”
천희태는 아이에게 칭찬을 듣게 됐다. 그래서 웃음이 나왔다. 자. 그러면 어떤 노래를 만들어 줄 수 있겠니. 진짜로 할 수 있겠니. 그런 질문이 목 끝까지 올라왔다.
한서진은 대본의 마지막 페이지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자기 가방을 뒤적거렸다. 그리고 노트북을 하나 꺼낸다.
“만들어 온 곡이 있긴 한데, 수정을 많이 해야 할 것 같긴 해요.”
“벌써··· 작곡을 해왔다고?”
“겨우 16마디긴 하지만요.”
천희태는 금방 호기심이 생겼다.
“혹시 들어볼 수 있을까?”
“그러려고 꺼낸 거예요. 솔직히 평가해주시면 돼요.”
아이는 거침이 없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노트북에서 음원을 하나 재생한다.
작곡 의뢰서에 쓴 것처럼 오직 피아노만으로 연주되는 곡.
주인공이 슬픔과 아픔을 이겨내고,
결국 이 사회에 적응을 하게 되는,
약간 희망적이면서도 따뜻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작품을 정확히 이해했다고 봐도 무방할 수준.
‘이걸··· 시놉시스만 보고 만들었다고?’
이것만으로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짧은 데모 버전의 음원이 종료된 뒤, 천희태는 솔직한 감상평을 말해줬다.
주인공의 심정을 잘 드러내는 제시부였다고.
이 느낌을 잘 살려서 마무리하면 될 것 같다고 말이다.
하지만 한서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주인공은 희망적이기만 한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이 부분은 전부 바꿔야 해요.”
“희망적이기만 한 게 아니라고?”
“네.”
“그렇게 느꼈다?”
“대본에는 그렇게 쓰여 있던데요.”
“······.”
천희태는 갑자기 뛰기 시작한 심장을 겨우 억눌렀다. 그리고 한서진에게 물어봤다.
“그럼. 이 영화의 피날레에서는 무슨 느낌이 나야 하는데?”
“그건······”
한서진의 고민.
그리고 그가 대답하려는 찰나.
천희태도 동시에 대답했다.
“그리움이겠죠.”
“그리움이지.”
절대로 돌이킬 수 없는 지난날을 그리워하는 주인공.
그걸 한서진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겨우··· 대본을 한 번 봤을 뿐인데 말이다.
* * *
계약은 그날 이루어졌다.
3월에서 4월 사이에 개봉 예정 중인 천희태 감독의 영화.
몇몇 씬들은 벌써 촬영을 마친 상태였고, 마지막 씬은 내년 초에 촬영할 예정이라고 한다.
천희태 감독님은 마지막 촬영이 끝난 뒤, 한 번 더 음악을 듣고 조율하고 싶다고 하셨다.
그러니까 내가 초고를 완성해야 하는 시기는 내년 1월에서 2월 사이.
그때까지 나는 7분 45초가량의 피아노곡을 작곡해야 한다.
일단, 내가 만들어 갔던 멜로디는 그대로 살리기로 했다. 하지만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조를 바꿨다. 템포도 많이 늦췄다. 약간의 그리움이 묻어나오게끔. 거기에서 한 땀씩 멜로디를 확장시켜 나갔다.
강유한 교수님에게 레슨을 받는 날도 더 많아졌다. 유럽에서 연주할 곡을 완성해놓아야 했기에 꽤 빠듯했다. 가끔씩 강유한 교수님의 연습을 지켜볼 기회도 얻었는데, 연주를 앞둔 피아니스트의 모습을 옆에서 본다는 건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한참 남아 있다고 생각한 내 새봄 초등학교 생활은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나버렸다.
하은이랑은 맥도날드에서 아쉬움을 풀었고,
⌜대성하자⌟ 형들이랑은 다시 한번 홍대 무대에 섰었다.
그리고 권설하 누나는 때아닌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TEST⌟는 무려 한 달 넘게 음원 차트 1위를 유지했고, 그 기세로 지금까지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여름의 더위를 완전히 잊어버릴 것만 같은 어느 겨울날, 우리 가족은 이른 아침에 인천 공항을 찾아갔다.
잠시 후, 공항에서 반가운 분을 만날 수 있었다.
강유한 교수님.
내 손을 잡고 있던 수연이가 도도도 걸어가더니 배꼽 인사부터 한다.
“안녕하세요! 한수연이라고 합니다. 저희 오빠한테 큰 기회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희 가족들이 따라갈 수 있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허허. 서진이 동생이니?”
“네!”
“똘똘해 보이는구나. 그런데 기회는 오빠가 열심히 해온 덕분에 생긴 거지, 내가 준 게 아니란다.”
“······ 그런가요?”
“그래. 세상에 ‘그냥’ 되는 일들은 없거든.”
“음···.”
수연이는 그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주머니에서 레몬 사탕을 하나 꺼내 교수님께 드렸다. 다시 한번 껄껄 웃으시는 교수님. 수연이는 만족하는 표정이었다.
수연이는 내게 돌아와 폴짝폴짝 뛰며 공항을 구경했고,
나는 지난번에 출국했던 때를 떠올리며 이곳저곳을 설명해줬다.
조금은 왁자지껄한 분위기.
무의식 속에 있던 내 그리움은 가족들 덕분에 한결 옅어져 있었다.
지난번 비행 때와는 전혀 다른 감정.
그 따뜻함을 느끼며 나는 마침내 비행기에 올랐다.
* * *
독일 베를린.
“강유한 피아니스트님, 방금 도착하셨답니다.”
“그래요?”
“네. 이곳까지 오시는데 대략 16시간 정도 걸리신 것 같습니다. 바로 호텔로 가신답니다.”
“한국이 멀긴 멀군요. 알겠습니다.”
남자는 창문 밖을 바라봤다.
‘강유한 피아니스트가 추천하는 아이라···.’
절대로 흔치 않은 일.
콩쿠르용 테이프를 촬영해서 보내는 대신, 아이를 직접 보여주겠다고 한 강유한 피아니스트를 떠올리며.
그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