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aling life of a regressed top star RAW novel - Chapter 4
3. 시상식
매매 계약서에 나온 주소로 찾아가, 확인한 집은 생각보다 훨씬 더 좋았다. 침실이 두 개인 복층 오피스텔이었는데 공간이 꽤 넓어서 두 사람이 생활하기에 충분했다. 1층은 주방과 거실, 화장실이 있었고, 2층에는 비슷한 크기의 침실이 두 개 있었다.
“형. 진짜 어떻게 된 거야. 이런 집을 어떻게 얻었어?”
“어쩌다 보니 생겼어. 넌 어느 방 쓸래? 베란다 있는 방 쓸래?”
한쪽 방에는 작은 베란다가 있었다. 선인장을 여러 개 키우는 태우가 쓰기에 충분해 보였다.
“형이 먼저 골라. 난 아무 방이나 다 좋아.”
“그럼 네가 베란다 방 써. 네 화분 놓으려면 그 방이 나을 거야.”
“형. 그런데 나도 이사해? 형만 독립하는 거 아니었어?”
태주의 독립은 예정된 일이었다. 대학 입학과 동시에 독립할 거라고 누누이 얘기해왔기 때문에 각오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태주는 마치 자신도 당연히 같이 살 것처럼 얘기하고 있었다.
“어차피 남는 방인데 뭐. 집에서 나와도 되고, 아니면 왔다 갔다 하면서 써.”
“알았어. 나 없으면 형 굶어 죽을지도 모르니 내가 챙겨줄게.”
멋쩍은 듯 고개를 돌리고 말하는 태주를 보며 슬며시 웃는 태우였다. 둘은 이사할 날짜를 정하고 쇼핑을 하러 갔다.
이사할 집에 필요한 물건도 많았고, 부쩍 키가 큰 태우의 옷도 몇 벌 사줄 생각이었다. 뽑기 운이 나쁘다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물론 손거울이나 요리책 같은 건 쓸모 없었지만, 현실의 물건들은 아주 마음에 들었다. 특히 현금 일억이 든 통장은 볼 때마다 든든하고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
“우와. 사람 엄청 많다.”
“그러게. 연예대상도 엄청 많이 보러 오는구나.”
“헐, 형. 연예대상 차별해? 개그맨도 인기 많거든.”
태주는 이전 생에서 연예대상에 참가해 본 적이 없었다. 배우 외길이었고, 예능은 영화 홍보 목적 외에 나가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같은 연예계에 있었다고 얼굴이 익숙한 이들이 꽤 있었다. 물론 모두 과거의 일이라 그들은 자신을 알지 못하겠지만.
“윽. 앞에 가려서 하나도 안 보인다.”
“응? 아하.”
“뭐? 왜? 형 지금 나 키 작다고 비웃은 거지?”
“아냐. 너 진짜 많이 컸어.”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이미 180을 넘긴 태주와 다르게 키가 작은 태우였다. 태주 눈에는 꽤 많이 자란 것 같았는데, 본인이 느끼기에는 부족한 것 같았다. 아직 170cm는 안 되는 것 같았지만. 중학교 내내 160cm 밑이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정말 많이 큰 것 같았다.
어머니를 닮아 키가 크고 팔다리가 긴 체형인 태주와 달리, 아버지를 닮은 태우는 성장이 느렸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천천히 키가 컸는데 결국 174cm에서 성장이 멈춰 더 자라지 않았다. 태주가 187cm까지 자란 후 더 자라지 않길 바란 것과는 정반대였다.
“박경진이다. 오! 예쁘네.”
“형. 사진. 사진 찍어 줘.”
태우가 가장 좋아하는 코미디언 박경진이 레드카펫을 지나가고 있었다.
플래시 세례를 통과해 레드카펫을 밟고 지나가는 코미디언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며칠 전에는 자신도 저런 자리에 있었다. 자신도 저들처럼 눈이 부셔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플래시가 터지는 통로를 지나 포토라인에 섰었다.
팬들의 환호와 박수 소리가 주변을 감싸고 온갖 미디어의 카메라가 그 모습을 송출했었다. 지금은 안전선 밖에서 레드카펫을 밟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볼 뿐이지만.
상실감. 이런 단어로 쉽게 정의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한때 자신도 속했던 곳인데, 아니 정점이라 불릴 정도로 높은 위치에 서 있었는데, 지금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한순간에 무리에서 내쳐진 낙오자가 된 기분이었다.
영화시상식이었다면 조금 달랐을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연예대상이어서 다행이었다. 만약 같이 일했던 감독이나 동료 배우가 자신을 모르는 척 지나가는 것을 봤다면, 잃어버린 것들이 더 크게 느껴졌을 것이다.
“형? 괜찮아?”
“응?”
“아니. 아까부터 말도 없고. 얼굴도 창백하고 그래서. 아직 감기도 다 안 나았는데, 집에 갈래?”
“괜찮아. 시상식도 보고 가자.”
“그래도 돼? 그럼 안으로 들어가자.”
태주는 장갑 낀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까칠한 털실의 느낌에 정신이 들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로비를 지나 시상식장의 입구를 찾아 들어갔다. 좌석 번호를 찾아가는 동안에도 예전 생각이 계속 났다.
영화시상식에선 주로 같이 작업한 제작진이나 출연자들과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무대 바로 아래쪽에 준비된 자리였다. 카메라에 수시로 잡히는 자리여서 시상식 내내 긴장을 놓지 않고 있어야 했다.
“유지석이 사회 보네. 옆에는 숙녀시대 연아고.”
“예쁘네.”
“보면 형은 여자 연예인은 그냥 다 예쁘다고 하더라. 와, 우리 국조 누님 오늘 힘 엄청 줬네.”
화려한 드레스와 턱시도 차림의 연예인들이 앞자리에 앉아있었다. 연예대상은 영화시상식과는 확실히 달랐다. 아이와 함께 나오는 예능에 출연하는 출연진은 어린아이를 데리고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유명한 운동선수 출신 방송인도 있었다. 국가 대표 축구선수에서 지금은 아나운서로 활동하는 중인 사람이었다.
“아하하하.”
축하무대는 코미디언들이 아이돌 무대를 커버한 공연이었다. 수준급의 춤솜씨와 달리 헉헉대는 숨소리와 죽을 것 같은 표정이 그대로 나와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요란하게 박수 치고 호응하는 꽤 즐거운 시상식이었다.
태우가 좋아하는 박경진은 결국 상을 받지 못했다. 대신 그보다 경력이 오래된 여성 코미디언이 대상을 받았다. 구설수로 수년간 활동을 하지 않다, 얼마 전 재기한 코미디언이었는데 결국 대상을 받았다.
투박하게 생겼지만, 열정적으로 일하는 모습이 남달랐다고 기억한다. 활동 분야가 달라 따로 만난 적은 없었지만, 가난한 집안 환경과 친구의 자살, 기획사의 사기 등 힘든 일들을 많이 겪었다고 들었다. 그 모든 일을 거치고 재기한 그녀는 스포트라이트가 비추는 저 자리에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빛이 내리는 자리.’
태주는 무대 위 스포트라이트가 비추는 곳을 볼 때마다 그 자리에 서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 자리에 서기 위해서 바쳤던 16년 시간이었다. 이제는 모두 기억 속에만 남은 시간일 뿐이지만.
은퇴를 결심했을 정도로 지친 태주였지만, 저 멀리 빛나는 무대를 보자 새롭게 의욕이 생겨났다. 빛나는 그 자리에 다시 서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밝은 빛 아래에서 누구보다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수상자들을 보자, 예전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영화시상식에서 대상을 받은 배우를 보고 연기자가 될 결심을 했던 일. 등록금을 내기 위해 모았던 돈으로 연기학원을 등록한 일. 기획사와 계약하고 오디션을 보러 갔던 일. 독립 영화 주연에 발탁되어 밤새 연습했던 일 등. 오래전 일이라 잊고 있던 일들이 다시 떠올랐다.
아마 연기를 다시 시작한다면, 이번엔 이전과 같은 길을 걷지는 않을 것이었다. 지난 시간은 만족스러웠지만, 솔직히 너무 고되었다. 이번에는 천천히 주변도 돌아보고, 연애도 하면서 살 생각이다. 후회로 남았던 일들도 바로잡고, 도울 수 없어 안타까웠던 이들도 도울 생각이다.
*
새해가 밝았지만, 집안에 인기척이 전혀 없었다. 어머니는 주말에 신년휴일까지 넣어서 해외로 휴가를 가셨다.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말없이 외출하신 것 같았다.
“여보세요. 먹고 싶은 것? 갈비?”
– 갈비구이? 찜 말고?
“아니, 찜. 매운 갈비찜.”
– 알았어.
아침부터 장을 보러 간 태우가 안쓰러웠다. 예전에는 몰랐는데 고등학교 1학년인 아이가 가족을 위해서 아침부터 장을 보는 일이 정상은 아니었다. 태우는 제 나름대로 가족 관계를 회복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태주가 보기에는 헛된 노력이었지만.
태주는 하루라도 빨리 태우를 데리고 나갈 마음을 굳혔다. 다음 주에는 아버지의 혼외자가 올 것이다. 굳이 마주쳐서 좋을 것이 없었다.
“그쪽도 어린애이긴 한데. 이쪽은 친동생이라.”
어른의 사정에 상처를 받는 건 아이뿐이었다. 눈치 보고 참고 억누르고. 나이보다 빨리 커버린 동생이 안타까웠다.
“형. 이것 좀 받아봐.”
“뭘 이렇게 샀어. 둘이 먹는데.”
“세일 하더라고.”
사온 물건을 냉장고와 찬장에 채워 넣는 태우를 보며 통보하듯이 말했다.
“내일 오전에 이삿짐센터에서 올 거야. 물건 별로 없으니까, 견적도 바로 나올 거야. 날짜는 가능하면 빨리 잡을 거니까. 가져갈 짐들 추려놔.”
“졸업식하고 이사하지.”
“집 비워둬서 뭐해. 좀 이르지만, 근처 상가도 돌아보고 하려면 빨리 가는 게 낫지.”
“엄마, 아빠한테는 말했어?”
“문자 했어. 알았데.”
어머니에게서는 알았다는 답 문자가 왔지만, 아버지에게선 언제나처럼 답장이 오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그 애가 왔을 때, 온 가족이 다 집에 있었던 일이 더 신기한 일인데.’
어머니 마음을 이해 못 할 건 아니지만, 애꿎은 태우가 마음고생 할 필요는 없었다.
‘하필이면 어머니 친구랑 바람을 피우고, 아이까지 볼 건 뭐야. 나라도 용서 못 하겠다.’
이혼은 절대 해주지 않겠다고 버티는 어머니도, 혼외자라 손가락질당하는 아이도 모두 불쌍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껴서 상처받은 태우도 불쌍했다.
어머니가 이혼하고 바라는 대로 해외에서 살았으면 싶었다. 예전에 미국에 사는 이모가 가족을 모두 초대한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회사를 핑계로 가지 않았었다. 그곳에서 어머니는 드물게 행복해했었다.
호숫가에 커피숍을 열고 싶다고 저녁 식사자리에서 말을 꺼내기도 했었다. 지금 사는 아파트를 처분하면 아마도 어머니가 바라는 대로 하실 수 있을 것 같았다.
*
“어휴. 무지개 씨앗은 오늘도 싹이 트지 않았네. 100일짜리 농작물이라니. 잘못 심었어.”
태주가 최대한 정원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100일을 채우기에는 부족했다. 침대 위에 있는, 부화에 10일이 필요한 알은 곧 깨어날 것 같았다. 알 위의 타이머에 14시간 정도가 남았다고 표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정원에 드나든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오두막은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소파와 러그, 벽난로와 흔들의자, 커피 테이블에 티 세트까지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기에 충분할 정도로 꾸며져 있었다.
“오늘은 클래식을 들어볼까.”
엔티크 축음기에 레코드를 올려놓고, 차를 한잔 내렸다. 태주는 극악한 요리 솜씨와는 다르게 차를 우리는 솜씨는 아주 좋았다. 다기 모으는 것도 좋아해서 꽤 많은 종류를 모아 진열하기도 했었다.
“읏차. 좀 무거워진 것 같은데.”
담요로 감싼 알을 품에 안고 난로 앞 의자에 앉았다. 최근 태주는 밭일이 끝나고 나면 알을 품고 책을 읽곤 했다. 상점에는 신기한 책이 많이 있었다. 다른 차원의 영웅 이야기도 있었고, 신비로운 동물 사전 비슷한 책도 있었다. 오늘 태주는 ‘기초 약초학’이라는 책을 읽을 생각이었다.
랜덤박스에서 얻은 ‘무지개 씨앗’이 아주 귀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 산 책이다. ‘무지개 씨앗’에서 자라는 약초는 모두 희귀하고 효능이 좋은 것이라고 한다. 마나라는 기운을 늘려주는 약초가 자라기도 하고, 부활 주문서에 필요한 약초가 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자루 안에 있던 씨앗 스무 개를 모두 심었다. 벌써 열흘 가까이 되었는데 아직도 싹이 트지 않아 조바심이 일긴 했지만, 어떤 약초가 나올지 아주 기대되었다.
최근 태주는 오두막을 확장하는 일로 고민하고 있었다. 오두막은 지하와 2층으로 확장할 수 있었지만, 정원 자체의 등급이 낮아서 당장은 불가능했다.
꽃과 나무를 더 심고 장식도 추가로 놓아서 정원의 등급을 올려야 하는데, 어떤 방향으로 꾸며야 할지 아직 정하지 못했다.
“이 빵나무는 정말로 둥근 빵이 맺히는 건가?”
상점에 있는 묘목 중 특이한 것을 발견했다. 손바닥만 한 둥근 빵이 주렁주렁 맺힌 나무였다. 가격은 5,000 DP로 사과나무 묘목이 300 DP인 것에 비하면 엄청나게 비싼 것이었다. 오두막에서 매번 딸기와 사과만 먹어 물린 참이어서 혹하는 마음이 있었다.
“이걸 사서 오두막 앞에 심어두면 될 것 같은데.”
요리 스킬은 이미 배웠지만, 재료가 없어서 무언갈 요리해본 적이 없었다. 오두막에 오븐은 있었지만, 조리도구는커녕 제대로 된 냄비 하나 없었다. 오두막의 유일한 조리도구는 찻물을 끓이는 주전자가 다였다.
“차라리 랜덤박스를 뽑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눈 딱 감고 5,000 DP만 써볼까. 일전에 1만 DP를 썼을 땐 꽝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생각보다 아주 쓸모 있었다.
빵나무 가격만큼만 랜덤박스를 뽑아볼까 하는 유혹이 강했다.
[모종삽] [사과나무 묘목] [농부의 작업복] [초코체리 나무] [모발 영양제]다행히 아주 운이 없지는 않았다. 초코체리 나무가 나와서 모든 손해를 벌충해주었다.
초코체리 나무는 체리 모양의 초콜릿 열매가 자라는 나무였다. 기대했던 빵나무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초코체리는 숙성 기간에 따라 맛이 다르다고 한다. 잘 숙성된 초코체리는 진한 다크 초콜릿 맛이 난다고 한다. 박스당 가격도 제법 되어서 괜찮은 수입원이 되어줄 터였다. 선물용으로도 나쁘지 않고, 여러모로 쓸모가 많아 보였다.
빠지직.
밭 한쪽의 딸기를 수확한 후 비료를 주고 오자 알이 부화할 시간이 얼추 되었다.
빠직.
작은 파열음이 알에서 들렸다.
조심스럽게 들어 난로 빛에 비춰봤지만, 언제나처럼 알 안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빠직빠직.
슬슬 알의 균열이 겉으로 드러났다. 흰 알에 쩍하고 커다란 금이 갔다. 혹시 잘못되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알에 이상이 없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불안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부화하는 도중에 문제가 생겨서 제대로 태어나지 못하면 어떡해야 할지 걱정이었다.
책에선 스스로 알껍데기를 다 벗을 때까지 도와서는 안 된다고 했다. 하지만 인터넷에선 지친 새끼를 대신해서 어미가 알을 쪼개주기도 한다고 해서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직접 낳는 것도 아닌데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 같은 긴장이 느껴졌다.
뽁.
“발?”
상상하던 노란 부리가 아니고 하얀 털이 가득한 앞발이 알 조각 사이로 튀어나왔다.
뽀복, 뽁.
알이 커다랗게 쪼개지며 복슬복슬한 얼굴이 드러났다. 흰털에 검은 줄이 나 있는 새끼고양이였다.
뺙!
새끼라 그런지 울음소리가 병아리 소리처럼 높고 가늘었다. 태주는 미리 준비한 따뜻한 물수건으로 고양이 새끼를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그리고 담요로 둘둘 감아 놓은 채 오두막 밖으로 급하게 뛰어갔다.
새가 태어날 거로 예상해서 고양이한테 필요한 물건을 전혀 구해놓지 않았다. 분유는 고사하고 당장 새끼를 눕힐 방석조차 없었다. 상점을 뒤지는 손길이 매우 분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