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aling life of a regressed top star RAW novel - Chapter 58
57. 도깨비 무사 촬영 >
태주 일행은 오늘도 제법 이른 시간에 리딩 현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태주가 시간에 늦는 걸 싫어해서 항상 여유롭게 다니는 편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신인의 입장이니 부지런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이번 2차 리딩은 비공개로 진행된다. 홍보를 위해 문을 열어놓고 기자가 볼 수 있게 진행했던 1차와 달랐다. 오늘은 제대로 못 하면 적나라한 평을 들을 수도 있었다.
이번 작품 출연진 중에 아이돌을 싫어하는 배우가 좀 있었다. 주연인 조세라도 그렇고, 중견 배우인 박정준도 아이돌 출신을 싫어한다. 둘 다 성격이 만만치 않은 배우들이라, 김은형과 윤비가 제대로 해주길 바라고 있었다.
‘세라 누님은 여전하셨지. 김은형 씨 연기가 나쁘지 않았는데도 도끼눈을 뜨시던데, 윤비 씨는 어떨지 모르겠네.’
지난번에 오지 못했던 윤비가 이번 리딩엔 참가하기로 했다. 분량이 많진 않아도, 여주인공의 동생 역이기 때문에 자주 나온다. 태주와는 드라마의 중반쯤부터 자주 부딪힌다. 무사의 정체를 캐려는 윤비를 태주가 방해하며 골려주는 장면이 꽤 있었다.
친절한 은형 씨가 도착했다. 자리에 앉지 않고 문가에서 들어오는 배우들에게 인사를 하던 태주가 멈칫했다. 정원에 눈이 내리는 바람에 잊고 있었다. 이번 작품에 조심해야 할 인물이 한 명 더 있었다는 사실을.
“안녕하세요, 태주 씨.”
“네, 안녕하세요.”
밝게 웃으면서 인사하는 은형에게 마주 인사하는 태주는 속으로 긴장하고 있었다. 본능적인 위기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거 받으세요. 저번에 도와주셔서 감사했어요.”
“이게 뭔가요?”
“그, 손난로하고 보온병이에요. 꼭 필요하다고 해서….”
“감사합니다. 잘 쓸게요.”
스태프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견우와 미나가 자신을 보고 웃는 게 보였다. 김은형에게 휘둘리는 느낌이라고 얘기했던 걸 기억하는지 주의해서 보고 있었나 보다. 태주는 얼굴이 붉어지지 않았길 바랐다.
“그, 저….”
“네?”
“토, 톡 해도 될까요?”
“네, 편하게 하세요.”
보자마자 대뜸 선물을 건네더니, 이번엔 소심하게 눈치를 보면서 물어온다. 이미 통화도 했었고, 따로 만나서 연습도 봐줬는데 톡 하는 일을 조심스럽게 묻고 있었다.
‘아, 답답해.’
차례차례 사람들이 들어오고, 빈자리 없이 모두 채워진 후에 바로 리딩이 시작됐다. 태주는 한 감독이 윤비에게 소개할 시간을 주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누구시죠! 누구신데 우리 언니를 찾아요!”
윤비가 여동생 역의 대사를 말하자, 리딩장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태주는 맞은 편에 앉은 조세라의 눈에서 불똥이 튀는 걸 봤다. 그녀의 걸걸한 욕설은 친해진 뒤에야 들을 수 있으니, 아마 지금은 속으로 욕설을 삼키는 중일 것이다.
“후우. 윤비 씨. 지금은 누군지 따지는 상황이 아니라, 그냥 가볍게 물어보는 거예요. 힘 좀 뺍시다.”
이후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만약 윤비가 아이돌이 아닌 신인 배우였다면 아마도 욕설에 가까운 평을 들었을 텐데, 한 감독을 제외한 누구도 지적하지 않았다.
윤비 파트를 제외하면 나쁘지 않은 리딩이었다. 김은형은 이틀 새에 버릇을 많이 고쳐서 훨씬 자연스럽게 대사를 했다. 태주는 김은형이 대사를 제대로 읊을 때마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촬영 얼마 안 남았습니다. 준비 잘하시고 다음에 촬영장에서 뵙겠습니다.”
한 감독이 깊은 한숨을 내뱉은 후, 리딩 종료를 알렸다. 태주는 지난번처럼 먼저 일어나서 선배들에게 인사를 했다.
2차 리딩은 나쁘지 않았지만, 매우 피곤한 리딩이었다. 윤비와 같이 나오는 씬은 연기를 받쳐주고 끌어주고 할 것도 없었다. 그녀는 인물이나 상황에 대한 분석이 전혀 안 되어 있어서, 본인이 어떤 캐릭터를 연기할 것인지도 정하지 못한 것 같았다.
‘세라 누님처럼 무시하고 내 연기만 해버릴까.’
예전 웹드라마를 찍을 때처럼 상대를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감독도 배우도 노련한 사람들이라 조연배우 때문에 균형이 깨지는 걸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나저나 다들 독하네. 한 마디도 안 걸 줄이야. 뭐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태주 역시 윤비에게 인사 외의 말을 걸지 않았다. 기본적인 준비도 안 해온 사람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럴 바에야 불편하더라도 김은형을 봐주는 게 훨씬 생산적이었다.
김은형을 생각하니 답답한 느낌이 들었지만, 노력하는 모습은 마음에 들었다. 어딘가 좀 어설프긴 했지만.
“스타라이즈 김은형. 아이돌은 아이돌이네. 댓글이….”
김은형이 도깨비 무사에 조연으로 출연한다는 기사가 많이 올라와 있었다. 그 밑에 달린 댓글은 응원하는 댓글 반, 욕하는 댓글 반이었다. 간간이 모르는 아이돌의 이름을 대고 비교하는 댓글이 있었다. 그런 곳엔 김은형의 팬이 몰려가 싸우고 있었다.
‘무섭다. 확실히 아이돌 팬들은 과격하구나.’
그러고 보니 태주 자신에게도 팬카페가 있었다. 매니저님이나 회사에서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고등학생일 때부터 있던 것이다. 회귀 전엔 데뷔하기 전에 폐쇄되었었지만, 이번엔 아직도 있을 것 같았다.
“한번 확인해볼까? 아니, 내가 미쳤다고 거길.”
태주는 자신의 팬카페 같은 게 있는 줄도 모르다, 친구 은혁에게 놀림을 당한 후에야 알았다.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XX동 얼짱, XX고 왕자님 같은 별명도 생겨있고, 팬카페도 생겨있었다.
그 팬카페는 고등학생 때 축제에서 공연한 걸 본 누군가가 만든 카페였다. 첫 번째 게시물이 축제 공연 관람 후기여서 알게 됐다. 그 외에는 사생활 침해에 가까운 것들이 올려져 있었다. 공원에서 기타 연주하는 사진, 밥 먹는 사진, 반바지만 입고 농구 하는 사진 등, 사생활이 그대로 찍혀있었다.
사진을 확인한 후, 초상권 침해가 아닌가 생각해서 팬카페 폐쇄를 요청하려 하자 은혁이 말렸었다. 태주의 사진은 이미 SNS 같은 곳에 올라갈 만큼 올라간 상태였다. 게다가 인터넷엔 올리지 않았지만, 같은 학교 학생이나 주변에서 몰래 촬영한 것들은 파악도 안 될 정도로 많았다.
은혁은 이상한 사이트에 태주 사진이 올라가는 것보단 차라리 팬카페 같은 공개된 곳을 두는 게 낫다고 얘기했다. 태주도 은혁의 말이 그럴듯해서 팬카페를 그냥 두었었다.
“대체 누가 일반인의 팬카페를 만든 건지, 참.”
지금 봐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유명인도 아니고 평범한 고등학생의 팬카페를 만든 사람의 심리는 알 수 없었다.
이후 태주는 팬카페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가끔 생각날 때마다 그저 이상한 사진만 올리지 않길 바랐다. 처음 팬카페를 확인했을 때를 떠올려보면 아마도 이상한 사진이 많을 것 같았지만, 굳이 그런 사진을 찾아보고 수치심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태주 왕자님이었지. 세상에. 유치원생도 아니고, 요즘 누가 그렇게 부르냐고. 게다가 그 사진은 대체 어디서 난 거야.’
게임 벌칙으로 여장한 사진이 떡하니 팬카페 갤러리에 올라간 걸 본 후 다시 들어간 적 없는 태주였다.
*
태주의 촬영은 박지헌과 같이 찍는 장면이 많았다. 그와 연기호흡이 괜찮아서 다행이었다. 아니었다면 오늘은 감기약을 먹어야 했을 게 분명했다.
“으. 춥다.”
“넌 그래도 왕이라 여러 겹 입었잖아. 난 무사 옷이야.”
여러 겹을 입었지만, 보온이 되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옷이 길고 치렁치렁한 덕에 안쪽에 핫팩을 많이 붙일 수 있는 건 확실히 좋았다.
“빨리 현대로 넘어갔으면 좋겠어요. 너무 추워요.”
“그러게 말이다.”
난로 앞에 붙어서서 기다리는 두 사람에게 조연출이 다가왔다. 조연출은 조세라 쪽 촬영이 늦어지고 있어서, 두 사람만 나오는 장면을 먼저 찍어도 괜찮을지 의견을 물었다. 태주와 박지헌이 괜찮다고 하자 바로 촬영이 시작됐다.
“강인아 이리 와 보거라.”
“부르셨습니까.”
“네 요새 어딜 그리 다니는 것이냐?”
화려한 대문을 나서려던 도깨비 무사가 왕의 부름에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행선지를 묻는 왕의 질문에 도깨비 무사가 시선을 피하며 대답을 머뭇거렸다.
“쯧. 너무 늦지 말 거라. 가끔은 네 사부에게도 들르고.”
“예, 그리하겠습니다.”
“컷. 좋아요.”
자신에게 인사를 하고 바로 인간계로 내려가는 무사를 못마땅한 듯 보는 왕의 얼굴을 촬영하고 장면이 끝났다. 다음 씬은 왕의 당부에도 매일같이 인간계에 내려가 연인을 만나는 무사와 그런 무사를 걱정하는 왕의 모습을 찍어야 했다.
곧 촬영이 이어질 줄 알고, 둘은 촬영장 한쪽에서 기다렸다. 하지만 연인 역의 조세라가 촬영장에 오지 않았다. 다른 촬영장에서 간단한 장면만 찍고 합류할 예정이었는데, 촬영이 길어진다더니 아직도 찍고 있는 것 같았다.
“B팀에 무슨 문제 있나?”
“문제가 있긴 있지.”
“네?”
“아니다. 기다려봐. 금방 오겠지.”
그 후로 한참을 더 기다리자, 분장을 마친 조세라가 왔다. 필요한 세팅은 이미 되어 있는 상태라 빠르게 리허설을 마치고 바로 촬영에 들어갔다. 셋 모두 실수 없이 한 번에 촬영을 끝낼 수 있었다.
배경은 허름한 초가집이었지만, 화려한 외모의 셋이 한 장면에 담기는 그림은 꽤 훌륭했다.
“이야 보기 좋네. 미남미녀만 모아 놓으니 그림이 아주….”
“셋이 한 장면에 들어가는데도 균형이 좋네요. 전 도깨비 왕이 너무 화려한 캐릭터라 튈 줄 알았는데, 괜찮네요.”
“괜히 만장일치로 배역을 준 게 아니야. 그림이 가장 잘 나올 수 있게 받쳐주기도 하고, 카메라를 제 쪽으로 당기기도 하고. 노련해. 시야도 넓고.”
촬영감독은 태주를 촬영하면서 흥분하고 있었다. 태주는 훌륭한 피사체였다. 입체적인 생김새에 배우 본인이 가진 분위기와 무게감이 독보적이었다. 특히 보통 사람은 소화하기 어려울 정도로 화려한 의상과 장신구를 착용하고도 위화감이 전혀 없었다. 지금 촬영하는 게 영화가 아닌 드라마라 컷이 제한된 게 아쉬울 정도였다.
A팀 촬영이 부드럽게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것에 반해 B팀은 촬영 속도가 나지 않았다.
“윤비 씨 아까 리허설 했던 대로만 움직여 주세요. 자꾸 검에 시선을 주시는데 지금은 그냥 집안을 빠르게 훔쳐보고 나가는 장면이에요.”
“네.”
무사의 정체를 의심하는 동생이 집안을 둘러보는 장면이었다. 대사가 있는 것도, 다른 상대가 있는 장면도 아니었다. 거실을 천천히 통과해 서재 문을 열고 훑어보면 끝나는 장면이었다. 서재에 장식된 검을 스치듯 보는 게 전부였는데 윤비가 검에 시선을 너무 오래 두어서 문제였다. 게다가 검을 보면서 놀라는 표정까지 짓고 있었다.
스태프들의 얼굴에 짜증이 서렸다. 중요한 장면도 아닌, 무사를 의심하는 사람이 있다는 점과 검의 존재를 가볍게 알려주는 장면이었는데 벌써 여러 차례 반복하고 있었다. 오전에 조세라와 같이 찍을 때도 겨우겨우 넘어갔는데, 같은 상황이 오후까지 이어지자, 다들 피곤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김은형은 촬영을 기다리면서 스태프들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NG 횟수가 늘어가자 다들 말수가 줄고 짜증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아이돌이라서 더 그러나, 사람들이 더 예민한 것 같아.’
사실 김은형의 생각이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아이돌을 무시하는 사람은 스태프들 사이에도 있었다. 촬영준비 중 통제되지 않는 아이돌 팬 때문에 고생했던 사람도 있었고, 아이돌에게 좀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사람도 있었다.
무사의 집에서 나온 동생을 데리고 돌아오는 장면을 찍어야 해서 기다리던 김은형은 점점 가라앉는 촬영장의 분위기에 조금씩 주눅이 들었다.
은형: 촬영 끝나셨어요?
태주: 네. B팀은 아직인가요?
은형: 네. 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아요. ㅜㅜ
태주는 촬영분량을 모두 찍고 돌아갈 준비를 마친 채였다. 박지헌과 조세라 두 주연은 아직 촬영이 남아있었다. 반 사전 제작이라지만 시간이 넉넉한 건 아니었다. 본방송이 시작되기 전에 최대한 분량을 확보하기 위해 다들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매니저님 B팀 촬영장 여기서 안 멀죠?”
“네, 20분이면 됩니다.”
“잠깐 들릴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하시죠.”
B팀에 태주가 아는 사람은 김은형뿐이었다. 태주의 촬영은 거의 A팀으로 잡혀 있었다. 장면 대부분을 남주 박지헌과 같이 찍기 때문이다. 갑자기 B팀에 가자는 건 아마도 김은형이 신경 쓰여서 그러는 것 같았다.
“도착하실 때쯤이면 김은형 씨 씬이 끝나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아직 기다리고 있다는데요. 봐서 늦어지면 인사만 하고 가요.”
태주 일행이 B팀 촬영장에 들어설 때까지 김은형은 촬영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촬영장 안은 조용했다. 평소에도 조용하지만, 지금은 다른 이유로 조용한 것 같았다.
김은형 곁으로 다가간 태주가 그의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 감독님에게 인사를 하기엔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그는 놀란 표정을 짓는 은형을 데리고 촬영장에서 조금 떨어졌다.
“무슨 일이에요? 분위기가 왜 이래요?”
“그게, 윤비 씨가.”
“네?”
“NG가 계속 나서, 잠깐 쉬고 하자고 했는데, 윤비 씨가 안 나와서요. 밴에 들어가서 안 나와요.”
“네? 무슨 그런 짓을.”
이제 데뷔하는 신인배우가 무슨 밴에서 안 나오고 촬영을 지연시킨단 말인가. 버스킹 촬영할 때도 단역이 문제를 일으키더니, 참 황당한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었다.
‘정한선 감독님이야 성격이 좋으셔서 계속 기회를 주신 거지만, 여긴 그런 걸 받아줄 리가 없는데.’
“뭐가 문제래요?”
“모르겠어요. 처음엔 동선을 틀리다가, 나중엔 시선 처리가 안 돼서 문제였는데….”
태주는 정한선이 자주 쓰던 ‘아이고, 두야.’라는 말을 내뱉을 뻔했다. 김은형은 동선, 시선 처리만 말했지만, 아마 그 외에 대사나 표정 등 전반적으로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그는 윤비야 어쨌든 눈앞의 김은형을 다독여주기로 했다. 윤비야 준비를 안 해왔으니 욕을 먹어도 어쩔 수 없지만, 열심히 준비한 은형이 촬영장 분위기에 짓눌려 연기를 망치게 둘 순 없었다.
‘아아. 이 사람하고 있으면 피곤할 것 같았어.’
태주는 한숨을 삼키며 은형에게 대본을 꺼내라 말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