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idden second life of the soldier RAW novel - Chapter (175)
175화
안개 속을 유영하는 함대는, 새벽녘의 부둣가에 서 있는 것처럼 고요했다.
그 적막 속에서 칼라마르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을 노려보면서, 칼라마르가 이빨을 드러냈다.
크르르르.
칼라마르의 눈동자가 세로로 찢어졌고, 으르렁거리는 소리도 점점 더 커졌다.
이에 제이드가 신호를 보내기도 전에, 로빈과 단원들이 무기를 뽑아 들고 경계했다.
뒤이어 성기사들이 하나둘 무기를 뽑아 들었다.
“제이드, 뭐야?”
“······뭔가 있어. 안갯속에. 아니, 바닷속에······.”
옆으로 붙은 이네스를 향해 대답한 제이드는 그대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제는 칼라마르의 반응이 아니어도 느낄 수 있었다.
커다란 마기의 덩어리가 지근거리에서 접근하고 있었다.
“로빈!”
“이미 확인하고 있다!”
로빈은 곧장 돛 위로 올라가 화살을 뽑아 들고 주위를 살피려 했다.
하지만 검은 안개는 밖을 조금도 보여주려 하지 않았다.
그 점을 눈치챈 이네스가 허리춤에서 등불을 꺼내 들었다.
“모두 등불을 들어라!”
“예!”
이네스가 기도를 외우자 그녀의 손에 들린 등불에서 신성이 터져 나왔다.
“주신이시여, 어둠을 밝히고 나아갈 용기를 주소서!”
“어둠을 밝히고 나아갈 용기를!”
뒤따라 성기사들도 하나둘 등불을 꺼내며 기도했고, 그러자 배 곳곳에서 성스러운 빛이 등대처럼 밝게 빛났다.
신성의 등불은 검은 안개를 밀어내며 주위를 밝히기 시작했다.
다섯 척의 철갑선들이 서로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을 때쯤.
쿠르르르······.
일대의 바다에 드리운 거대한 그림자 다발을 볼 수 있었다.
그런 그림자들이 함대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뭐, 뭐야 이거!”
“뒤로 물러서! 해양 마수가 분명하다!”
마수의 습격임을 깨달은 로빈이 갑판을 향해 소리쳤다.
하지만 로빈의 외침보다 놈들의 공격이 빨랐다.
퍼어어엉!
바닷속에서 솟구쳐 오른 한 가닥의 촉수.
마치 문어의 다리처럼 생겼지만, 그 굵기는 배의 마스트와 비슷했고, 돌기처럼 난 빨판에는 날카로운 가시들이 자라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선두 배 후미에 서 있던 선원 한 명을 낚아챘다.
“흐아아악!”
거대한 촉수에 붙잡힌 선원의 짧고 날카로운 비명이 바다를 울리고는 바다 깊은 곳으로 빨려 들어갔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 선원을 걱정할 겨를이 없었다.
퍼어엉!
퍼어어엉!
퍼어어어엉!
함선들 사이 곳곳에서 촉수들이 솟아올랐으니.
“크라켄이다! 모두 뒤로 물러서!”
제이드의 외침과 동시에 크라켄의 다리가 철갑선을 후려쳤다.
쾅!
그 충격에 선체가 흔들리더니 순식간에 갑판 일부가 찌그러졌다.
철갑선이 아니었다면, 배가 으스러졌을지도 모르는 공격이었다.
동시에 다른 다리들이 배를 옭아맸고, 갑판 위 사람들을 향해 채찍처럼 휘둘러졌다.
쾅! 콰앙!
그동안 바닷속 마수들의 공격에도 끄떡없던 철갑선의 외갑이 조금씩 우그러지고, 찌그러져 갔다.
우그그극!
그게 다가 아니었다.
끼릭! 끼릭!
배의 옆면을 타고 사람만 한 골격의 게들이 기어 올라왔다.
그러고는 집게로 찌르고 휘두르며 공격해오기 시작했다.
놈들의 집게에 잡히는 순간, 팔이나 다리가 절단될 것이었다.
그 중 한 마리를 통째로 갈라버린 제이드가 단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세이비어 결사단! 전원, 크라켄의 다리를 노려라!”
“와이트 아울 기사단! 흑마법사들이 무리는 짐승이 나타났다! 교단의 의무를 다해라!”
이네스 역시 제이드 옆에서 등불의 빛을 더욱 키우며 소리쳤다.
커다란 대검을 가볍다는 듯 휘두르며, 다른 한 손에 든 등불은 신성력이 담긴 성화(聖火)를 피워올렸다.
화르르륵!
키이이이!
성화의 빛줄기에 닿은 게들이 새까맣게 타오른 채 바다에 다시 빠졌다.
이네스는 신성력을 등불에 쏟아 부어서 갑판 위에 올라온 게들을 단숨에 밀어냈다.
마치 화염방사기를 뿜어서 쓸어버리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정도의 화력이었다.
한편, 로빈은 돛 위에 매달린 채 화살을 날려대고 있었다.
하지만 원체 크라켄의 다리가 두꺼웠기에 별 소용 없는 듯 보였다.
“로빈! 화살 받아라!”
“고맙군, 그룬!”
빠르게 돛을 타고 오른 그룬이 로빈을 향해 화살 꾸러미 하나를 던졌다.
요령 좋게 화살을 잡아챈 로빈이 곧장 새 화살을 걸어 쏘았다.
그것은, 마리온이 만들어낸 신형 폭발 화살이었다.
콰아앙!
로빈이 화살 여러 발을 쏘아내자, 깊숙이 박혔던 화살들이 터져 나가며 다리의 일부를 잘라냈다.
중간이 잘려 나간 크라켄의 다리가 맥없이 바다로 떨어졌다.
그것에 분노한 듯 옆의 다리가 크게 부풀며 채찍처럼 휘둘러졌다.
파앙!
갑판 위 드렌트가 서 있던 곳이었다.
“어딜!”
그를 피한 드렌트가 능숙히 흑전철로 만든 창을 휘둘렀다.
파지지직!
한번 휘두를 때마다 창끝에서 튀어나온 전류가 다리를 지졌다.
우레를 부르는 피뢰창.
오랜 시간, 드렌트가 애병으로 삼아온 이 창은 하프 드워프인 다그너와 마리온이 손보며 언제든 뇌전을 방출할 수 있는 무기로 탈바꿈되었다.
드렌트는 곡예를 하듯 배의 밧줄에 매달린 채 크라켄의 다리들을 베어내고 지져대었다.
종종 작살처럼 바닷속으로 창을 던져넣고 전류를 방출했고, 그럴 때마다 크라켄의 다리가 크게 발작했다.
“하, 이거 아주 끝내주는데?”
“드렌트, 그 녀석은 내 거다!”
드렌트를 향해 내려치는 다리를 향해 달려든 데릭이 그대로 회전하며 다리를 토막 냈다.
“젠장, 데릭님! 저 보호할 거면 제대로 지켜달란 말입니다!”
인디에고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게들을 향해 화염 술식이 적힌 마석을 던지고는 성기사들이 피워올린 보호막 안으로 몸을 던졌다.
항상 몸은 안전하게, 이득은 최대로라는 신념과 달리, 이번 일은 위험천만하기 그지없었다.
“젠장, 어쩌다가 내 신세가 이렇게 된 건지! ─성기사님! 저쪽에서 게들이 올라옵니다!”
육지였다면 곧장 도망이라도 쳤겠으나, 이곳은 망망대해 한복판이다.
바다에서, 그것도 마수가 우글거리는 바다에 빠진다면?
그 미래가 어떨지는 뻔하지 않은가.
잔뜩 울상을 지은 인디에고가 신세 한탄하면서도 성기사들을 도와 마수들이 기습해 오는 걸 막아냈다.
“마기 폭발!”
그때 검보라빛의 검기가 폭발하며 단번에 크라켄의 다리 두 개를 날려버렸다.
그 굉음에 인디에고가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제이드 백작과 그의 애마라 불리는 록 드레이크, 칼라마르가 보였다.
제이드 백작은 말에 탄 것처럼 칼라마르에 올라탄 채 검보라빛 오러를 날리고 있었다.
칼라마르 역시 크라켄의 다리를 할퀴고 물어뜯으며 잘라냈고, 때로는 입으로 검보라빛의 마력을 방사했다.
마치 둘은 한 몸이라는 듯, 합을 맞추면서 흔들리는 배 위에서도 안정적으로 싸워나갔다.
그 모습에, 인디에고의 머리로 제이드 백작이 가졌던 위명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악마 사냥꾼, 마누스 왕국의 영웅, 검은 드레이크의 기사.
“······와, 존나 멋있어······.”
팬이라 자처할 정도로 인디에고는 제이드에 대해 꽤 높은 호감을 지니고 있었다.
비록 강제로 끌려왔다지만, 저런 제이드의 모습을 보니 후회보다도 감탄이 나왔다.
어쩌면 저자라면 크라켄도 쉽게 죽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마저 들 게 만들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그때.
쿠웅!
인디에고의 그런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철갑선이 크게 흔들렸다.
심지어 크라켄의 다리가 잡아당기며 한쪽에선 두 척의 배가 서로 충돌하고 있었다.
“으아아아!”
“충격에 대비해!”
철갑 일부가 떨어져 나간 배는 조금씩 우그러들며 당장이라도 침몰할 것만 같았다.
“이대로는 안 돼!”
모두가 제이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때, 하부 갑판으로 가는 문이 열리며 마리온이 얼굴을 내밀었다.
“제이드 형! 장전 완료입니다!”
“당장 쏴!”
“알겠어요! 쏴요! 당장!”
제이드의 명령이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내려졌고, 마리온이 곧장 신호를 보냈다.
철컥! 철컥! 철컥!
그와 동시에 철갑선의 선체 뚫린 모종의 구멍들이 일제히 열렸다.
이 시대에는 아직 화포를 탑재한 군함이라는 개념이 생소했다.
그것도 함선 양측 면을 포문으로 채우는, 전열함 같은 개념은 더더욱이.
제이드가 로버트에게 부탁해 미리 포문으로 쓸 수 있도록 개조한 곳이었다.
그리고 그곳으로 고개를 내민 것은······ 수용철로 만든 포탄을 장전한 대포들.
옆면에 7곳씩. 총 14개의 검은 대포가 고개를 디밀었다.
총 다섯 척이다.
“발사──!”
아래에서 마리온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쾅! 콰앙! 펑!
퍼버버버벙──!
배 한 척당 14개의 검은 주둥이에서 커다란 폭음이 터져 나왔다.
폭음이 온 세상을 뒤덮었고, 폭발과 함께 주변을 덮고 있던 안개들이 밀려났다.
그리고 철갑선들을 으스러트릴 듯이 옭아맸던 다리들이 터지고 뜯겨나갔다.
사방에서 솟구쳤던 다리들이 떨어지며 바다에서 푸른 형광색의 피가 흘러나오는 게 보였다.
크라켄의 잘린 다리들이 미친 듯이 꿈틀거리며, 그 고통을 표현했다.
바닷속에서 거대한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는지, 바닷물이 마구잡이로 뒤엉켰다.
배들은 출렁거리는 물살을 따라서 뒤흔들렸고 선원들이 나동그라졌다.
“머, 먹힌 거 맞지?”
“그런데 아직 살아 있는데!”
그때.
쿠오오오오──!
바다를 울리는 거대한 울음소리와 함께 크라켄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몸집과 함께 솟구친 문어의 머리.
그 아래로 미처 흘러내리지 못한 바닷물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바다의 폭포, 그 사이로 수십 개는 되어 보이는 눈동자와 수천, 수만 개의 송곳니가 이빨을 드러냈다.
“허······.”
그 모습에, 인디에고의 입이 절로 다물어졌다.
해상 위로 솟구친 크기만 하여도, 철갑선들과 맞먹었다.
해수면 아래로 드러나지 않은 몸뚱이까지 감안한다면······ 그보다 배는 더 클 것이라는, 본능적인 공포감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주위의 선원은 물론이요, 굳게 서 있던 성기사들 역시 외우던 기도가 끊겼다.
그런데 문득 인디에고의 시야에 제이드가 들어왔다.
아니, 홀로 녀석을 향해 걸어가고 있으니 시야에 들어올 수밖에 없겠지만 그렇기에 깜짝 놀랐다.
‘웃고 있어?’
제이드는 푸른 형광색의 피를 흘리는 크라켄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시는군.”
자신들을 습격한 것이 크라켄이라는 걸 안 시점부터 지금까지.
제이드는 이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쿠오오오──!
그런 제이드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크라켄이 배를 향해 달려들었다.
거대한 가시가 달린 입을 벌려서, 단숨에 제이드를 삼키려고 했다.
“어서 와라.”
제이드는 등에 멘 방패를 하나 꺼내 들었다.
은빛의 원형 방패. 그 한 가운데 박힌 붉은 보석이 반짝였다.
[흑암(黑暗)의 소유권을 확인했습니다.] [정령 병기 – 이프리트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숙회로 만들어주마.”
화르르륵!
일순간 세상의 공기가 뜨겁게 달궈졌다.
그리고 태양이 뜬 것처럼, 눈 부신 빛이 일대를 감싸았다.
방패에서 솟아오른 불의 거인.
그 거체가 달려드는 크라켄을 향해, 화염의 대검을 내려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