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idden second life of the soldier RAW novel - Chapter (176)
176화
철갑선단의 선장, 터그는 30년을 넘게 뱃사람으로 살아왔다.
그런 만큼 터그는 바다에서 일어났던 온갖 신비와 현상을 목격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하늘 높이 뛰어오르며 무지개를 만드는 고래라던가, 해골로 만들어진 유령의 배를 마주했다든가 하는 것들 말이다.
바다는 단순하지만 심오하며 아름답지만 기괴하다.
하지만 크라켄이라는 마수는, 뱃사람으로서 경험담에 속하지 않는 것이었다.
바다의 악마, 난파선의 인도자.
그런 별명이 붙을 정도로 공포스러운 존재.
그것을 마주치는 건 뱃사람의 죽음을 의미했으니까.
오죽하면 크라켄의 그림자를 보았다면 모든 걸 포기하고 유언장을 담은 유리병을 저 멀리 던지라는 뱃사람의 격언이 있을 정도다.
크라켄에게서는 벗어날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크라켄이 배부른 상태이기를 바라는 것.
터그 역시 십수 년 전 저 멀리 앞서가던 친우의 배가 집어삼켜지는 걸 바라보며 겨우 탈출했기에 더욱 잘 알았다.
‘그런데 저건 대체······.’
그렇기에 터그는 지금 일어난 상황을 쉽게 믿기 어려웠다.
철갑선의 주위를 둘러싼 새하얀 안개.
흑마법사들이 만들어낸 마기의 안개는 아니었다.
그건 시커먼 색이었으니까.
이 안개는 인근의 바닷물이 끓어오르며 만들어진 수증기였다.
주륵.
후끈한 열기에 이마에 맺힌 땀을 닦은 터그가 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바다가 끓는 걸 보게 될 줄이야.’
온갖 기현상을 보아온 터그로서도 주변의 바닷물이 수증기로 증발하는 걸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걸 만들어낸 건······.
터그는 바다 위에 떠 있는 불의 거인을 바라보았다.
쿠르르르──!
거인의 몸에서 끝없이 타오르는 불의 열기가 주위의 바다를 증발시키고 있었다.
그런 거인의 앞에는 반쯤 익은 크라켄의 사체가 바다에 둥둥 떠 있었다.
포격에 다리가 잘려 나간 뒤, 분노하여 달려드는 크라켄 앞에 난데없이 나타난, 불의 거인.
그 존재가, 크라켄을 향해서 불의 검을 마구잡이로 휘둘러댔고, 끝내 바다의 마수를 완전히 처치한 것이다.
작열하는 대검의 열기가 어찌나 뜨거운지 잘려 나간 크라켄의 몸통은 익다 못해 타들어 간 부분도 보였다.
증발하는 바다, 불타오르는 거인, 그리고 크라켄의 죽음까지.
터그는 새삼 평생 하나만 보아도 신기할 광경을 연달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저자는······.’
정작 그 광경을 만든 제이드는 아무렇지 않은 듯 크라켄의 사체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대체 저 정도 되는 인물이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이 순간, 제이드는 감격하고 있었다.
‘내가 크라켄을 잡게 될 줄이야.’
크라켄.
본디 카일과 도로시가 함께 처치하는 마수였다.
카일이 크라켄의 모든 다리를 베어내고, 도로시가 화염 마법으로 녀석을 불태우는 것으로 처치했던 것을, 그 전설 같은 일화를, 이번엔 나와 단원들이 이룩한 것이다.
‘물론 정령 병기가 있었기 때문이지만 말이지.’
방패에서 흘러나오던 정령 융합체, 이프리트가 흩어지면서 불꽃이 사그라들었다.
방패 한가운데의 보석의 빛이 사라졌다.
과부하였다.
정령의 힘을 쓸 수 있는 특수한 병기인 만큼 한 번 이용하고 난 뒤에는 다시 사용하기까지 일주일 정도 시간이 걸렸다.
일종의 쿨타임인 셈.
사기 무기인 만큼, 쿨타임이 길었다.
‘감옥섬에서는 이프리트를 쓸 수 없겠네.’
기껏 루퍼스에게 빌려온 것인데 벌써 써버렸다는 생각에 아쉬움이 들었다.
‘아니, 지금 사용하지 않았으면 섬에 갈 수도 없었을 거야.’
제이드는 애써 아쉬움을 삼키며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바라보았다.
[심해의 마수, 크라켄을 처치했습니다.] [명성이 (+200) 상승합니다.] [칭호 – 중급 악마 사냥꾼이 그 위업을 흡수합니다.] [바다가 인접한 모든 도시에 명성이 퍼져나갑니다.] [터그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40)]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세이비어 결사단의 평균 전투력이 72에서 75로 상승합니다.]어지러이 떠오른 메시지는 이내 하나의 상태창이 되어 상태를 나타내주었다.
[제이드]– LV. 55
– 힘: 53
– 체력: 51
– 마력: 58
– 직위: 세이비어 결사단 단장
– 칭호 : 주신교단 – 실버 크로스, 중급 악마 사냥꾼
– 특성: 용맹함[D], 영웅[A], 카일룸 연공법[B], 흑암성[EX], 영력(靈力)[A], 정령의 은총[A]
– 보유 스킬: 용병술(LV. 8), 화술(LV. 7), 검술(LV. 14), 사이코메트리(LV. 3), 안목(LV. 2), 붉은 폭풍(LV. 5), 테이밍(LV. 2), 흑암성계(LV. 3)
‘이제 55레벨.’
세계에 끼치는 영향과 가치에 따라 레벨이 정해지는 만큼, 55레벨이라는 건 적지 않은 숫자였다.
제이드 역시 이제 어디 가서도 안 꿀린다는 뜻이었다.
시야에 떠오른 상태창을 만족스럽게 바라본 제이드는 칼라마르를 바라보았다.
녀석은 크라켄의 익은 다리를 뜯어 제 입에 가져다 넣고 있었다.
“칼라마르. 아무거나 주워 먹으면 안 돼.”
크릉.
제이드의 말에도 칼라마르는 크라켄의 다리 살을 맛있다는 듯 꿀꺽꿀꺽 씹어 삼켰다.
그러자 녀석의 비늘은 오히려 광택이 나더니 성장했다는 듯 그 덩치가 약간이나마 커졌다.
[스킬 – 테이밍의 레벨이 (LV. 2)에서 (LV. 3)으로 상승했습니다.] [‘칼라마르’와의 교감도가 상승했습니다. (+20)] [‘칼라마르’ (80/100)] [‘칼라마르’의 스킬 – 마기 추적이 (LV. 3)에서 (LV. 4)으로 상승했습니다.] [‘칼라마르’의 스킬 – 마나 스케일이 (LV. 1)에서 (LV. 2)으로 상승했습니다.] [‘칼라마르’의 스킬 – 브레스가 (LV. 1)에서 (LV. 2)으로 상승했습니다.]‘아니, 정말로 성장했네.’
떠오른 메시지에 제이드는 칼라마르를 바라보았다.
그럴 것도 당연한 게 칼라마르는 아룡종이자 영물인 록 드레이크 아닌가.
영물인 만큼 성장하며 그 능력을 키울 수 있는 것도 당연했다.
“······칼라마르, 꼭꼭 씹어먹어라.”
크릉?
칼라마르는 갑자기 바뀐 주인의 태도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 * *
다행히도 크라켄의 습격에도 철갑선들은 부서지지 않았고, 운행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게다가 크라켄의 피가 묻었기 때문인지, 감옥섬으로 향할 때까지 다른 마수들의 방해가 없었기에 순항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검은 안개 너머로 육지가, 정확히는 섬이 나타났다.
감옥섬이었다.
철갑선들은 섬으로 다가가 정박하는 대신, 섬의 연안 근처에서 거리를 둔 채 관찰했다.
섬을 점거한 놈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서 좋을 건 없었으니 말이다.
제이드는 갑판에 서서 섬을 바라보았다.
마력으로 시력을 강화시키자, 저 멀리 점처럼 보이던 섬이 확대되었다.
모래와 자갈로 이루어진 해안가. 그 안쪽으로 회색 벽돌의 높은 장벽과 그 안으로 보이는 사각형의 건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마기 안개가 짙었으나, 그래도 어렴풋이 보일 정도로 그 구조물들은 거대했다.
섬을 둘러싼 장벽 한곳에는 투석기와 대포가 반반 섞인 듯한 것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네스, 저게 네가 말했던 마력포야?”
“맞아. 해안 경비용 마력포. 신성한 감옥을 탈출하려는 놈들을 쏴 죽이려고 만든 거지. 엄청나게 비싼 물건이야. 웬만한 왕국도 보유하지 못할 정도로.”
제이드의 물음에 이네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짜증 난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감옥섬으로 향하는 동안 이네스가 몇 가지 이야기해준 것이 있다.
그중 하나가 저 마력포였다.
화약 무기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 그나마 대포 같은 무기.
본래 탈옥자나, 외부의 습격을 막는 용도로 설치된 것이었으나, 섬을 점거당한 지금은 흑마법사들이 섬 안으로 진입하는 군대를 막아내는 데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이네스는 담배를 물고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매캐한 담배 연기는 이내 주변의 마기 안개로 스며들었다.
“문제는 저 주위로 가득 메운 안개야. 저 섬에 진입하려면 신성력으로 마기를 밀어내야 하는데, 그러면 마기의 흐름을 통해서 놈들이 신성력을 감지할 수 있을 거야.”
“너희가 접근하면 들킬 수도 있다는 거네.”
“응. 먼저 온 교단의 성기사들도 그래서 함부로 들어가지 못했어. 들어갔다가 마력포 맞고 겨우 탈출한 성기사도 있었지. 쯧······.”
제이드는 해안가 곳곳에 있는 얕게 파인 구덩이와 폭발의 흔적 같은 구덩이를 바라보았다.
아마 저것이 마력포 포격의 흔적인 듯했다.
제이드는 그녀가 왜 자신을 불렀는지 단번에 이해했다.
“좋아, 그러면 우리가 할 일은 마력포의 무력화로군.”
마기를 밀어내는 신성력과 달리, 마기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흑암성.
즉, 제이드와 단원들이라면 흑마법사들에게 들키지 않고 섬에 잠입할 수 있다.
“제이드, 역시 이해력이 좋네.”
빙그레 웃은 이네스가 제이드를 향해 눈짓했다.
“제이드. 너와 네 부하들이 장벽의 마력포만 제거해주면, 우리가 빠르게 진입할게.”
“아니. 그렇게 해서는 늦어. 마력포가 파괴되면 흑마법사들도 눈치채겠지.”
흑마법사 놈들은 원체 까다로운 술수를 내놓는 편이다.
기왕 침투할 거면 빠르게 진입하는 게 좋다. 놈들이 다른 수를 준비할 틈을 주기보다는.
“그러면?”
“마력포가 파괴되면, 연안에 상륙해서 후방 지원을 준비해줘. 여기는 사실상 적진이고 함정 투성이니까 우리 중 누군가는 상황을 보고 대응할 필요가 있어.”
“······뭐? 너희는 어쩌려고?”
이네스를 향해 제이드가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감옥에 침투해야지. 특공대가 되어서 말이야.”
“제이드님, 그런데 아직 안 정해진 게 있어서 말입니다.”
그때 묵묵히 듣고 있던 인디에고가 손을 들며 조심스레 물었다.
“침투니, 뭐니 하는데. 해안가까진 어떻게 갈 겁니까? 철갑선으로 가져가면 들킨다면서요?”
“인디에고.”
제이드는 인디에고를 향해 친절한 미소로 물었다.
“수영 좀 하냐?”
* * *
마기의 연무로 가득 찬 섬의 해안가
물이 찰랑거리는 소리가 울리더니, 검게 물든 바닷물 사이로 머리가 하나 치솟았다.
그 뒤로 또 다른 머리들이 하나둘씩, 조용히 올라왔다.
총 사십여 명의 인원.
“······.”
그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고, 주변을 정찰하더니, 인기척을 죽인 채 빠르게 해안가를 향해 움직였다.
제이드가 가장 먼저 상륙했고, 그 뒤로 로빈과 그룬이 올라왔다.
옷에 잔뜩 흡수된 물기를 털어낼 새도 없이 로빈과 그룬이 곧장 빠르게 질주했다.
그들의 목표는 해안가를 감시 중인 흑마법사들이었다.
“컥─”
“뭐, 뭐야─ 끅!”
시야에 적이 들어오자마자, 로빈은 활시위를 튕겨 저격했다.
단번에 머리를 꿰뚫어 적들을 즉사시켰고, 허물어진 시체를 그룬이 소리 없이 받아냈다.
“완전 암살자 같군요.”
“제이드가 워낙 훈련을 빡세게 시켜서 말이지. 너도 단원이 되면 아주 좋아 죽을걸?”
“크흠! 저는 원체 자유로운 영혼인지라······.”
그 둘을 지켜본 인디에고와 데릭이 감상을 남겼다.
대원들은 제이드를 따라서, 해안가를 에두른 장벽 아래로 은밀히 이동했다.
섬의 장벽 곳곳에는 작은 구멍이 수없이 나 있었고, 그 안으로 날카로운 철창들이 박혀 있었다.
날아다니던 새들이 찔려 죽었는지, 구멍과 벽 곳곳에는 얼룩진 피가 묻어 있기도 했다.
‘신성한 감옥이라더니······. 어디가 신성하다는 거야?’
어딘가 섬뜩한 장벽의 모습은 신성함과는 전혀 거리가 멀어 보였다.
제이드는 이네스가 했던 말을 되새기면서도 인디에고를 향해 신호를 보냈다.
“인디에고. 장벽을 올라가야 한다. 하지만 보다시피 잘못 올라갔다가는 몸에 구멍이 몇 개 더 생길 판이거든.”
마력포는 이 장벽 위, 감시 초소에 있다.
이곳을 넘는 게 진입하기에도, 시간 단축에도 최선일 터.
그리고 그걸 위해서 필요한 핵심 키가 바로, 인디에고였다.
제이드의 물음에 순간 인디에고는 곧장 성벽 곳곳에 난 구멍들을 잠시 바라보곤 말했다.
“에이, 뭐야. 이거 고전적인 장치네요.”
그러고는 맥이 빠진다는 듯 웃으며 설명했다.
“성벽 곳곳에 있는 감지기가 있습니다. 그걸 건드는 순간 철창이 튀어나오는 형식입니다. 보십쇼.”
인디에고는 팔의 검은 뱀 문신을 꺼내더니 벽돌의 한 곳을 건드리게 시켰다. 그러자······.
챙!
구멍 중 일부에서 철창이 위협적으로 튀어나오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스르륵 구멍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에 단원 한 명이 깜짝 놀라 인디에고를 말렸다.
“이봐, 함정을 작동시키면 어떡해? 들키면 큰일 난다고.”
“걱정하지 마십쇼. 워낙 단순하고 구식인 함정이라, 함정이 작동됐는지, 신호도 안가는 종류입니다. 북부 드워프들 식인데, 그 인간들 얌체라서 시공이 워낙 가라입니다.”
10초도 채 되지 않아, 장벽의 함정을 간파하다니······.
‘역시 녀석을 데려오길 잘했군.’
제이드는 속으로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이며 인디에고에게 물었다.
“해체할 수 있겠어?”
“해체요? 에이, 저를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닙니까? 이런 함정은 눈 감고도 넘죠.”
제이드의 물음에 코웃음 친 인디에고는 성벽을 쭉 올려다보더니 무언가를 가늠하기 시작했다.
“높이랑 구조를 볼 때······ 좋아, 이쪽으로 이어지겠네.”
그는 벽돌 몇 곳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챙! 챙! 챙!
그럴 때마다 장벽 곳곳의 철창이 위협적으로 튀어나왔건만, 인디에고는 별 신경도 안 쓴다는 듯 계속 건드렸다.
“오케이 여기군. 창 한 자루만 주시죠.”
그러더니 철창이 튀어나오는 구멍 속으로, 창을 역으로 집어넣었다.
콰직!
그러자 철창 일부만 튀어나온 채 함정은 작동을 멈췄다.
“어떻게 한 거야?”
“철창을 움직이는 기계 장치를 위치를 파악하고 그걸 고장 낸 겁니다.”
“솜씨 좋군.”
“흐흐. 자, 이제 이러면 창이 튀어나오더라도 더 이상 안 들어갑니다. 이렇게 역이용할 수도 있고요.”
인디에고는 튀어나온 철창들을 마치 사다리처럼 타고 오르며 웃음을 흘렸다.
“어서 올라가시죠. 저 인디에고가 어떤 길이든 뚫어 드리죠.”
* * *
세이비어 결사단이 장벽을 넘고 있던 그때.
흑마법사들이 점거한 감옥.
그곳의 3층, 비상용 대피소에는 흰 의복을 입은 몇몇 남녀가 수심에 빠져 있었다.
불안함을 감추지 못한 젊은 여사제가 좁은 대피소 안을 왔다 갔다가 했다.
“저, 정말 구출대가 오고 있는 걸까요? 만일 오고 있는 게 아니라면 어쩌죠?”
“멜리나, 너무 걱정하지 마. 교단과의 연락이 닿았고 이미 몇 번이나 상륙을 시도했다는 걸 알고 있잖아? 비록 실패했지만, 방법을 찾고 말 거야.”
남자 사제는 불안감에 휩싸인 여사제를 달래주었다.
“하지만······ 흑마법사들이 죄수들을 풀어내고 있잖아요! 만약······ 정말 만약에 0등급 죄수가 풀려나는 순간엔······ 대재앙이 펼쳐질 거예요!”
0등급 죄수의 탈옥이라니······.
여사제의 말에, 사제들의 얼굴이 잠시 굳었다.
그때 대피소 안쪽에서 중후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정하게, 멜리나 사제.”
그 목소리에 다른 모든 사제가 고개를 돌렸다.
흰 머리에 고집이 세 보이는 강직한 인상의 중년이 앉아있었다.
사제 사빌나르.
한때는 악마연구회를 주도하던 주교였으나, 지금은 교단의 정치질로 좌천된 사내였다.
“사빌나르 사제님······?”
“교단에서는 더 많은 병력을 보내준다고 하였네. 우리는 그를 믿으며 주신께 기도를 드리면 되지 않겠나.”
일말의 흔들림도 없어 보이는 목소리에 멜리나 사제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하, 하지만 함대 규모로 오더라도 상륙 못 할 거라고요. 사제님도 아시잖아요? 감옥의 보안이 얼마나 철저한데요!”
사제 멜리나는 처음 구출대가 온 당시를 똑똑히 기억했다.
교단의 구출대가 섬에 도착하자마자 마력포에 휩쓸리고, 다급히 도망치던 모습을.
“그런데, 다시 구출대가 올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 이들은 고립되었다.
교단의 지원으로부터, 감옥을 점거한 흑마법사들과 탈옥수들로부터.
흑마법사들이 함부로 뚫지 못하는 대피소로 몸을 피했지만, 그 때문에 새장 안에 갇힌 새 신세가 된 셈이다.
멜리나 사제의 말에 몇몇 사제가 고개를 푹 숙였다.
좀 전에 그녀를 진정시키던 남자 사제는 바깥과 연결된 수정구를 통해 감옥의 상태를 확인했다.
건물 곳곳에 흩어져 죄수들을 풀어주는 흑마법사들과 사나운 마수들이 도사리는 감옥 안의 광장.
해안가를 향해 조준된 마력포와 혹시 모를 침입자를 감시하는 흑마법사들의 모습까지.
며칠째 변함없는 모습에 조금씩 그들의 마음 한구석, 희망이 조금씩 흔들렸다.
정말 이대로라면······ 끝일 수도······.
“진정하지. 좌절한다고 달라지는 건 아니네. 믿음을 흔들리지 말게.”
최악의 상황이지만, 사빌나르 사제는 두려움이 없는 듯 흔들리지 않았다.
부동심이었다.
“······사빌나르 사제님 다우시군요.”
그 모습에 오히려 동요했던 사제들이 다시 차분해졌다.
멜리나 사제는 자기 모습이 추하고 부끄러웠음을 깨닫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사제님. 제가 실례를 저질렀어요.”
“괜찮네. 누구나 힘들고 괴로운 시기를 겪으면 심신이 흔들리게 되네. 하지만 우리는 루멘을 섬기는 몸으로서 다시 일어서는 법을 배우면 되네.”
사빌나르 사제는 그렇게 말하며 바깥에 있을 흑마법사들을 떠올렸다.
‘내가 조금만 더 이곳으로 일찍 왔다면 눈치챌 수도 있었을 것을.’
흑마법사들이 이 섬에 침투한 방식은 기발했으나 단순했다.
사역마를 통해 죄수에게 마기를 옮기고선, 그 죄수가 제 몸을 제물로 바치며 포탈을 열다니.
악마연구회로서 악마와 흑마법사들의 방식을 아는 자신이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대응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안일했지.’
애꿎은 형제들이 희생당한 것에 기도하려는 그 순간.
퍼어엉!
갑자기 들려오는 커다란 폭발음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폭발음?! 갑자기 이게 무슨······!”
“이건 마력포의 폭발음입니다!”
“설마 다시 구출대가?”
사제들의 중얼거림에 사빌나르의 머릿속에 한가지 장면이 떠올랐다.
마력포에 공격받아 대응하지 못하고 있을 형제들과 교단의 배가 수장되는 것을.
“다, 다들 이걸 보십시오!”
그때 수정구를 들고 있던 남자 사제가 다급히 소리쳤다.
바깥에서 벌어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마법 아티팩트.
그것을 남자 사제는 모두가 볼 수 있게 들어 보였다.
폭발에 난장판이 된 광경이 영사되고 있었다.
“자, 잠깐······ 여기는?”
그런데 장소가 이상했다.
폭발에 휘말린 장소는 구출대가 있을 해안가가 아니었다.
마수들이 모여있던 광장. 그리고 흑마법사들이 모여있던 건물들이 포격에 박살이 나고 있었다.
사빌나르 사제가 보기 드물게 당혹했다.
“여, 여기는 감옥 내부지 않은가? 마력포는? 마력포는 어떻게 되어 있나?”
“자,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수정구를 들고 있던 남자 사제가 마력포를 살폈다.
수정구가 비친 장벽의 마력포.
그런데 그 방향이 이상했다.
본래라면 해안가를 향해 조준되어 있어야 할 마력포가 거꾸로 돌아가 있는 게 아닌가?
즉, 흑마법사들도 모르는 누군가가 이곳으로 침투했다는 뜻이었다.
‘대체······ 누가?’
사빌나르 사제는 흑마법사들이 모여있는 곳을 발포하는 마력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쿵! 쿠우웅!
그럴 때마다 대피소가 조금씩 흔들렸다.
사빌나르 사제의 부동심 역시 그를 따라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