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idden second life of the soldier RAW novel - Chapter (216)
216화
과거, 로빈이 키텔로 레인저에 소속되어 있었을 무렵의 일이었다.
로빈의 선배라고 할 수 있는 키텔로 레인저들 대다수는 은퇴했고, 단장을 비롯한 몇몇 레인저들도 부상으로 더는 키텔로를 이끌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나무의 오래된 잎은 저물고 새 이파리가 피어난다.
로빈과 함께 입단한 루셴이 어느새 단장 대리직을 수행하게 된 당시.
키텔로 레인저는 꽤 중요한 의뢰를 받게 되었다.
키텔로 레인저의 명예를 이어 나가고, 성공적인 세대교체를 알릴 만한 막중한 의뢰.
의뢰의 내용은 야만 부족의 감시.
마누스 왕국과 인접한 마레오 공국, 남부 지방의 한 도시.
그 근처의 헤네시 산맥 너머 고원 지대에 사는 야만 부족들이 점차 약탈을 일삼기 시작한 것이다.
로빈을 비롯한 키텔로 레인저들은 야만 부족의 동태를 감시하고, 침투해오는 약탈자들을 요격하는 임무를 받았다.
헤네시 산맥 곳곳에 은신처를 마련하고 야만 부족들의 움직임을 감시해야 하는 것이다.
그만큼 장기 임무였고, 키텔로 레인저의 절반이 동원될 정도의 임무였다.
여느 때처럼 로빈은 헤네시 산 중턱에 설치한 감시 기지에서 야만 부족의 동태를 감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일이 터졌다.
“로빈 선배님! 큰일입니다!”
“무슨 일이지?”
신참 키텔로 레인저 한 명이 다급하게 산을 타고 올라왔다.
단장 대리, 루셴의 전령이었다.
녀석이 보고하길.
“부족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놈들이 연합을 했는지, 엄청난 수의 전사들을 모아서 협곡을 내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뭐? 숫자가 얼마나 된다는데?”
“파악된 것만 삼사백에 이릅니다!”
약탈을 위한 움직임이 아니었다.
“침공이다.”
갑작스러운 침공의 시작이었다.
놈들이 도시로 향하면, 도시 전체가 유린당할 것이 분명했다.
당연히 임무의 실패로 귀결될 것이고, 많은 혼란이 찾아올 것이다.
키텔로 레인저의 이름을 걸고 시간을 벌어야만 했다.
“······놈들을 막아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키텔로 레인저는 산맥을 14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퍼져 있는 상황.
집결하기 위해서는 꽤 시간이 걸릴 것이고, 그 사이에 야만 부족은 도시로 향할 게 분명했다.
로빈이 대책을 강구하려는 그때, 전령이 이어서 보고했다.
그리고 그 말에 로빈은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뭐라고 했지?”
“현재 로사 선배님을 포함한 수색조의 레인저 다섯 명을 이끌고 시간을 끌겠다고······.”
로빈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로사가 어째서······!’
로빈은 그 즉시 본부로 달려가 루셴을 찾아 소리쳤다.
“루셴! 지금 당장 작전을 취소해! 수색조를 사지로 내몰 셈이야? 고작 다섯 명을 보내다니! 개죽음이야!”
“아니, 작전은 그대로 진행한다. 취소는 없어. 흩어진 대원들이 모두 모일 때까지 시간이 필요해.”
루셴은, 아니 키텔로 레인저의 단장은 결단한 것이 분명했다.
수색조를 미끼 삼아 임무를 성공시키겠다고.
“설마 투입된 대원 중 한 명이 로사라서 그러는 건가? 안타깝지만, 로빈······ 특별 대우는 없어. 우리는 한 몸이다. 합리적인 임무 분배 속에서, 각 대원이 최선을 다할 뿐이다.”
루셴은 오히려 로빈에게 냉담하게 쏘아붙였다.
“······화살에 감정을 싣지 마라. 모든 건, 키텔로 레인저 전체를 위한 선택이니까.”
그리고 얼마 후, 로빈은 마주할 수 있었다.
싸늘한 주검이 된 로사를. 그리고 그녀가 쥔 마지막 화살을.
그것이 그가 키텔로를 떠난 이유였다.
* * *
‘집중해라. 로빈. 지금은 과거에 연연할 때가 아니야.’
로빈은 갑작스레 떠오른 상념을 흩어내고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높이 자라난 거대한 나무를 타고 오르는 키텔로 레인저들이 보였다.
하나 같이 그 높이만 수십 미터짜리의 거대한 나무다.
세계수의 근처에서 자라난 것만으로 평범한 나무보다 몇 배는 더 크게 자라난 나무들이었다.
과성장한 나무들의 가지들은 서로 엮이고 꼬이며 다리처럼 만들어져 있었다.
사람 스무명은 그 위에 서 있어도 아무렇지 않을 정도로 튼튼하게.
로빈을 비롯한 키텔로 레인저들은 현재 나무 위에서 몸을 숨기고, 주변을 정찰하는 중이였다.
그때 로빈의 뒤에 선 루셴이 중얼거렸다.
“로사도 같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
로빈이 멈칫했고, 자신의 말실수에 루셴이 흠칫했다.
루셴은 잠시 우물쭈물하다가 한숨을 푹쉬며 사과했다.
“미안하다, 로빈.”
“잘 아는군.”
“······.”
“하지만, 그렇다고 용서할 수 있는 건 아니지.”
로빈은 냉랭한 대답을 하며, 품속에서 꺼낸 망원경으로 세계수의 주위를 관찰했다.
루셴 역시 집중력을 잃지 않고 수신호로 대원들을 이끌었다.
“그래, 알고 있다. 우리가 어렸을 적부터 한 가족처럼 지냈지만······ 진짜 가족인 네 마음을 내가 헤아릴 수는 없겠지.”
로빈에겐, 그리고 로사에겐 크나큰 빚이 있다.
욕을 먹어도, 복수해도 루셴은 받아들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한가지의 오해를 풀고 싶었다.
그렇기에 용기를 짜내며 조심스레 말했다.
“나도······ 반대했었다.”
“?”
그 의미심장한 말에는 로빈도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녀석의 고집을 꺾을 순 없더군.”
“······그게 무슨 소리지? 네가 명령을 내렸다고 하지 않았나?”
“······내가 책임져야 할 일이었으니까.”
로빈의 물음에 루셴이 입꼬리를 구기며 그날을 회상했다.
* * *
“지금 당장 레인저들 소집시켜!”
야만 부족의 대군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포착한 직후.
헤네시 산에 위치한 키텔로 레인저 중앙 감시 기지는 그 어느 때보다 분주했다.
그리고 단장 대리를 맡은 루셴은 그중에서도 가장 다급했다.
“군대가 협곡으로 오고 있다고? 그러면 협곡의 가장 좁은 구역에서 놈들을 막아야 할 텐데······.”
놈들이 지나칠 협곡.
그곳을 키텔로 레인저가 합심하여 막아선다면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놈들의 진격 속도가 예상외로 빨랐다.
산맥에 퍼져 있는 레인저들이 전부 모이기 전에 구역을 지나칠 것이 뻔했고, 만반의 준비 없이 마주했다간 손쉽게 뚫릴 것이 분명했다.
“루셴. 이대로라면 전멸 위기야. 그냥 후퇴하는 게─.”
“그러면 우리를 고용한 도시를 버리자고? 콜빈. 네가 3류 용병인가!”
키텔로 레인저의 이름이 걸고, 이 임무를 반드시 완수해야만 한다.
루셴이 방법을 찾는 그때, 한 여인이 말했다.
“내가 가서 막을게.”
“로사?”
로사.
로빈과 함께 루셴의 가장 오랜 친구.
그녀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수색조를 먼저 보내서 시간을 끌면, 충분히 단원들을 끌어모을 수 있을 거야.”
“로사. 수색조 몇 명이 수백 명에 달하는 야만 부족에게 어떻게 이기겠다는 거야. 고산 지대에서 사는 놈들이라 기동력도 우수하다고. 헤네시 산맥에서의 싸움만큼은 놈들이 더 유리해. 그것도 수색조 몇 명으로는 시간을 끌기도 힘들 거야.”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로사는 의견을 굽혀지지 않았다.
“아니. 나는 가능해.”
그렇게 말하며 로사는 흙바닥에 자란 새싹 위로 손을 덮었다.
스르륵.
그러자 로사의 손에 닿은 새싹이 급속도로 성장하더니 굵은 넝쿨처럼 자라났다.
다른 이들이 보면 마법사, 마녀라고 불렀을 만한 힘.
하지만 루셴은 알고 있었다.
로사.
그녀가 정령의 축복을 지니고 있다는 걸.
“협곡에 덤불을 만들어서, 놈들의 발을 묶을 수 있어.”
로사가 가진 정령의 힘을 이용한다면 적들을 저지하지는 못해도, 발목을 붙잡는 것 정도는 가능하다.
분명 그 시간이면 키텔로 레인들을 한 곳에 모으는 것 역시 가능할 것이다.
분명 합리적인 이야기다.
“······로사.”
하지만 그렇기에 루셴은 함부로 결정할 수 없었다.
루셴에게 있어, 로사는 로빈과 함께 가장 오랜 친구이자, 가족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키텔로 레인저 모두가 가족처럼 소중한 이들이지만, 두 친구는 의미가 남달랐다.
그런데 그녀가 지금, 자살 임무에 자원했다.
단장 대리인 자신은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하는가?
모두를 위한, 그리고 임무를 위한 책임을 지니고 선택을 내려야만 한다.
‘로사를 작전에 보내면······ 분명 막을 수 있겠지만 그러면 로사는······.’
이성은 키텔로 레인저를 선택했지만, 루셴의 감정은 로사를 선택하고 있었다.
망설이는 동안에도 시간은 계속 흘렀다.
야만 부족은 계속해서 진격해오고 있을 것이다.
빠르게 결정해야 했다.
그 고민을 끝내버린 건 로사였다.
화살을 챙긴 로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루셴. 로빈에게, 내 오빠에게 대신 인사 전해줘.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그 녀석은 안 그래 보여도 ······속이 여린 편이니까.”
“······잠깐-”
루셴은 기지를 떠나는 로사를 끝내 붙잡지 못했다.
그게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루셴은 납득했으니까.
그러고 말았으니까.
단장 대리로서.
그렇기에 로빈이 왔을 때 루셴이 꺼낼 수 있는 말은 하나였다.
“루셴! 지금 당장 작전을 취소해! 수색조를 사지로 내몰 셈이야?”
이를 악문 루셴이 로빈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니, 작전은 진행한다. 취소는 없어.”
* * *
“······그렇게 된 거였다.”
루셴은 그동안 꺼내지 못했던 말을 꺼내고는, 묵혀두었던 죄의식과 슬픔까지 발견한 표정이었다.
“······말하지 못해서 미안하다. 그때는 너한테 내가 내린 명령이라고 말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 왜일까······ 결국 로사를 막지 못한 건 나라서? 모든 책임은 단장인 내가 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걸 수도 있겠지. 단장인 이상 내 책임이 맞으니까. 그리고······ 너한테도 그편이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
“너라면, 네 자신을 책망할 것만 같아서······.”
로빈은 입을 다물고 잠시 고개를 숙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자신의 동생이 사지로 들어가는 걸 방관한 것에 대한 분노? 원망?
루셴은 로빈의 그 어떤 반응에도 받아들이리라 각오했다.
그런데.
“훗.”
로빈이 피식 웃음을 흘리는 게 아닌가.
로빈은 품속에서 낡은 화살을 꺼내 보곤 중얼거렸다.
“확실히 내 동생이 맞긴 하군.”
“뭐?”
“나도 지금, 그 녀석과 같은 처지니까 말이지.”
의아해하는 루셴에게 로빈이 대꾸하며 낡은 화살을 쥐었다.
그 당시의 로사가 그러했듯, 로빈 역시 자살에 가까운 임무에 자원한 상황이지 않은가.
로빈의 자원에 머뭇거리던 제이드의 반응이 떠올랐다.
로빈은 주저하던 제이드의 반응이 오히려 기꺼웠다.
늘 냉철한 판단을 내리던 그 녀석이 머뭇거린다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아낀다는 걸 알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용기를 내서 고민을 덜어줬다.
자신도 이 임무가 자살에 가까운 걸 알았지만, 녀석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필요한 일이기도 했고.
그제야 로사의 심정이 이해됐다.
‘그런가. 그래서 로사도······.’
아마, 주저하는 루셴을 밀어주었겠지.
로빈이 한껏 누그러진 시선으로 루셴을 바라보았다.
루셴의 심정 역시 알 것 같았다.
로빈 자신 만큼이나, 어쩌면 그 이상으로 마음이 찢어졌으리라.
“이걸 받아라.”
로빈은 낡은 화살을 루셴에게 내밀었다.
“이건?”
“로사의 마지막 화살이다.”
“······이걸 왜 나한테.”
“좋아하지 않았나. 로사를.”
로빈의 말에 화살을 받아들던 루셴이 움찔했다.
그러더니 눈을 뒤룩뒤룩 굴리며 물었다.
“······로사가 말했나? 눈치 없는 네가 알아챘을 리가 없는데?”
“눈치가 빠르군.”
“······제길.”
한숨을 푹 내쉬는 루셴을 향해 로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넌 단장다운 판단을 내렸어. 사실 내가 옹졸했던 거다. 내가 겉으로는 과묵해서 무거운 사람으로 보이지만, 사실 마음은 복잡한 편이거든.”
“과묵······? 로빈, 역시 눈치가 없군.”
“음?”
고갤 갸웃거린 로빈과 루셴은 서로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줘서 고맙다. 루셴. 너는······ 내가 아는 한, 두 번째로 괜찮은 지휘관이다.”
“두 번째? 아, 누군지 알겠군.”
루셴은 한 사내의 얼굴을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로빈은 어딘가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 녀석은······ 실패하지 않아. 그래서 나도 그럴 거다. 실망하게 하지 않아야 하니까.”
그렇기에 루셴은 호기심이 들었다.
대체 로빈에게 어떤 의미를 가진 사내인지.
“제이드 백작······ 아니, 세이비어 결사단의 단장은 대체 어떤 사람이지?”
“제이드 말인가? 녀석은······”
로빈은 잠시 말을 고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영웅이지. 악으로부터 대륙을 구해낼.”
영웅.
그렇게 말하지 않고선 설명할 수 없는 행보를 보이던 사내였으니.
그리고 그때.
나무 아래로 커다란 폭음과 함성이 들려왔다.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교단의 성기사들과 데릭을 비롯한 돌격대원들.
그들이 짐승들의 시선을 끄는 것이 보였다.
로빈이 그 모습을 보며 시위에 화살을 걸며 키텔로 레인저들을 향해 말했다.
“가지. 영웅의 앞길을 열어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