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idden second life of the soldier RAW novel - Chapter (30)
30화
졸튼 남작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조금 전의 일을 떠올렸다.
‘그 비열하게 생긴 놈······ 건방지단 말이지.’
귀족도 아닌 주제에 자신의 앞에서 그렇게 뻗대는 것이 불쾌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고작 백작의 병사 중 한 명인 주제에. 멍청한 자식. 그란디스 백작이 어떤 상태인 줄도 모르나?’
그란디스 백작은 썩은 동아줄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자를 등에 업고 명예를 운운하다니. 참으로 어리석은 놈이었다.
그나마 졸튼 남작에게 다행인 점이라면 이런 불쾌감을 굳이 숨길 필요가 없다는 점일 것이다.
“좀 전에 자신이 백인대장이라던 망나니. 그자가 아케르 요새의 지원군으로 오는 걸 보면 그란디스 백작도 이제 한물간듯하더군. 그렇지 않나?”
“남작님 말씀이 맞으십니다. 전공도 쌓지 못할 텐데. 지금은 전쟁 때문에 어쩔 수 없겠지만 전쟁이 끝나면 얼마 못 가겠지요. 그란디스 백작가는 필히 무너질 겁니다.”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듯 대답하는 크루소 수비대장의 말에 졸튼 남작은 기분이 좋아져 입술을 씰룩였다.
“그런데 최근 아케르 요새에서 일어난 전투. 방어전에서 완승했다고 들었는데······.”
린델 기사단을 이끄는 기사, 듀이 경의 말이었다.
이에 졸튼 남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게 정말이오?”
“남작님께서는 영지가 가까운데 못 들으셨습니까?”
“하하. 아랫것들을 보살피다 보니······. 큼.”
“그런데 이상한 소문이 돌더군요. 그 승리의 중심에 별동대장이 있었다던데.”
“별동대장? 아까 그 애송이가······ 벼, 별동대장이라 하지 않았었소?”
졸튼이 놀란 듯이 중얼거렸다.
분명히 그놈이 그란디스 백작의 직속 별동대를 이끈다고 했던 것 같았다. 그 새파랗게 젊은 놈이 백인대장인 것도 이상하거늘 별동대로 대활약했다니, 믿을 수 없었다.
이에 크루소 수비대장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 다른 놈이겠지요. 애초에 새파랗게 어린 녀석이 대장일 리가 있겠습니까? 아무래도 그란디스 백작이 사병을 많이 징집한 걸 수도 있겠지요.”
“설마, 반역이라도 준비하는 거 아닙니까?”
옆에서 말을 타고 움직이던 기사가 끼어들며 장난하듯 말했다.
“어허! 그런 말은 함부로 하지 마시오.”
호통치듯 말하는 졸튼 남작 또한 그 농담에 피식 웃으며 손사래 쳤다.
그 순간.
히이이잉!
갑자기 선두의 척후병들이 걸음을 멈췄고, 놀란 말이 번쩍 다리를 들었다.
“흐아아악!”
고삐를 제대로 쥐고 있지 않았다면 낙마할 뻔했기에 졸튼 남작의 심장이 거칠게 쿵쾅거렸다.
“졸튼 남작! 괜찮소?”
“괘, 괜찮으니 걱정 마시오.”
‘이 개 같은 놈들이 무슨 짓을······!’
당장 척후병들을 처벌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지금은 보는 눈이 많았다.
“크흠! 큼! 무슨 일이냐?”
“저 앞에······ 한 무리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무리? 그랑힐 시에서 마중을 나온 것인가?”
한 척후병의 손을 따라 시선을 돌리자 저 멀리 걸어오고 있는 이들이 보였다.
‘설마 도적은 아니겠지?’
제이드, 그 애송이가 말했던 도적이 떠올랐다.
근래 지속된 전쟁 때문에 전 국토에서 도적이 들끓었기에 불안한 마음이 솟았다.
‘아니, 아무리 큰 도적단이라도 어찌 감히 군대에 맞서겠어?’
이백여 명의 병사와 5명의 기사가 있는 이 군대는 도적단 따위가 쉬이 건드릴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아! 그렇군! 그랑힐 시도 어지간히 급했나 보군! 마중을 나올 정도니 말이야! 어서 가지!”
생각을 정리하고 안심한 졸튼 남작이 고삐를 당겼다.
하지만 졸튼 남작의 말은 얼마 안 가서 우뚝 걸음을 멈췄다.
저 멀리, 어두운 숲 반대편에 등장한 이들이 풍기는 분위기가 너무나 이상했기 때문이다.
마중을 나왔다기엔 너무 허름했고, 도적이라기엔 그 수가 적었다.
“거기 누구냐!”
선두가 소리쳤으나, 숲길 끝에 늘어지듯이 서 있는 이들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 순간 졸튼 남작은 몸이 움츠러드는 기분을 느꼈으나, 자신이 왜 그런 것인지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뭐, 뭐지?”
“왠지 이상합니다.”
졸튼 남작뿐만이 아니었다. 선두의 척후병부터 크루소 수비대장, 기사 듀이 또한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미시감(未視感).
분명 그저 인영(人影)이건만, 이상하게도 심히 낯설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우우웅!
그때 숲 안에 싸늘한 바람이 불어오며, 악취와 함께 알 수 없는 불쾌감이 몰아쳤다.
“어어······.”
그 불쾌감이 공포라는 것을 깨닫는 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바스락 바스락
수풀을 밟고 걸어오는 한 무리.
아니, 어느새 이 숲 주변을 둘러싼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
그들은 관절을 간헐적으로 비틀면서 기이하게 움직였다.
마치 실에 매달린 인형처럼.
살아 있지 않은 존재처럼 말이다.
사람은 죽음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과 불쾌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일까? 이 자리의 모두, 순간 저들에게서 죽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 느낌은 끈적이는 공포가 되어 병사들을 얽매기 시작했다.
“저, 저건 설마······.”
“주, 죽은 자다! 죽은 자들이 일어났다!”
선두 병사들의 비명과 함께 공포가 퍼져나가는 순간.
까드드득 달그락!
그으으으!
언데드 무리가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정신 차려라! 모두 방패를 들어!”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기사, 듀이 경이였다.
듀이의 외침에 병사들이 방패를 급히 들었고.
텅! 텅! 텅!
엄청난 속도로 달려든 언데드 무리가 휘두른 녹슨 검과 창에 방패가 울렸다.
그 둔탁한 울림에 이게 꿈이 아님을 졸튼 남작은 깨달았다.
“모두 방패를 들고 막아! 놈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방벽을 세워!”
투구를 바짝 내린 졸튼 남작이 소릴 지르는 순간, 놈들의 기묘한 움직임이 눈에 비쳤다.
무기를 휘두른 선두의 언데드들이 뒤로 슬쩍 비켜나가더니, 후위의 언데드들과 어깨를 맞춘다. 그리고 함부로 방패를 들이받지 않고, 아군 방어진을 향해서 무기를 겨눈 채······ 천천히, 아군을 둘러싸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이게 무슨······.”
어떻게 언데드가 체계를······?
그 기이한 광경에 졸튼 남작의 말문이 막혔다.
“남작님! 포위당했습니다!”
“뒤에서도 언데드들이 달려듭니다!”
정말로 포위진이었다.
정면과 양쪽 숲속에서.
그리고 후방에서까지.
좁은 숲길을 종대로 행군하고 있던 병사들에게는 빈틈이 너무 많았다.
“마, 막아! 둥글게 감싸고 어떻게든 막아라!”
숲길은 좁았고 전열을 세우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길을 벗어나 수풀 안쪽으로 들어가는 건 자살행위였다.
우거진 수풀은 시야를 제한해 공격을 막아낼 수 없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뭘 해야 하지?
졸튼 남작은 자신이 지휘관임에도, 아무런 명령을 내릴 수 없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기 때문이다.
분명 언데드는 미친개처럼 이지를 잃은 채 본능적으로 달려드는 존재였다.
그런데 누군가의 지휘를 받는 듯 체계가 잡힌 언데드들의 움직임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제, 제기랄······.”
숲으로 들어오기 전, 그놈의 말이 떠올랐다.
“정말 언데드가 있을 줄이야······.”
졸튼 남작은 혼란스러운 마음에 다시 입술을 씹었다.
입 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그 사이에도 망자들은 천천히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 * *
“시작됐다.”
신출내기 흑마법사 러셀은 사령술사의 중얼거림에 눈을 떴다.
꽤 오래 눈을 감고 있어서인지 눈이 뻑뻑했다.
“몇 명이었습니까?”
“이백? 좀 안되더군. 전부 무장한 병사들이었다. 기사도 몇 있더군.”
“꽤 큰 수확이군요!”
“그래. 만족스럽지.”
러셀의 대답에 검은 로브를 눌러쓴 주름진 남자가 거칠게 웃었다.
그러자 남자의 찢어진 입꼬리 사이로 턱뼈가 비쳤다.
러셀로서는 그 모습이 흉하고 징그러웠지만, 티를 내진 않았다.
자신은 이곳의 말단이었고, 남자는 이중 가장 강한 사령술사였으니까.
러셀은 시선을 돌렸다.
그의 앞에는 뼈를 깎아 만든 새하얀 토템이 세워져 있었다.
그 주위로 도적들과 산짐승의 사체가 가득 쌓여 있었고, 오망성 형상의 마법진이 그 위에 놓인 사체에서 생기를 흡수하고 있었다.
흑마법을 위해 준비한 제물이었다.
그 주위에 자신과 같은 흑마법사가 둘 앉아 있었다.
자신보다 먼저 흑마법사가 된 선임들이었다.
“러셀. 자리에 앉아라. 이제 언데드들을 움직여야 한다.”
“예.”
사령술사가 러셀을 불렀고, 그에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는 묘한 희열감에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불과 5년 전만 하더라도 시골의 농민이었던 자신이 이렇게 강한 마법사가 되다니.
심지어 지금은 병사 이백 명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물론 자신은 사령술사의 부족한 마기를 보조할 뿐이었고, 언데드를 직접 조종하는 건 사령술사였지만 러셀은 자신도 어엿한 흑마법사라고 생각했다.
흑마법.
몇 가지 준비물로 그 강대한 힘을 빌릴 수 있다는 매력은 너무나 유혹적이었다.
단순히 제물이 사람들일 뿐이고 가끔은 스스로의 피와 몸뚱이도 담보로 써야 했지만······.
‘훨씬 남는 장사지.’
그 위력에 비하면 사소한 비용에 불과했다.
“뭐야, 벌써 사냥이야? 빠르네에.”
그때 옆에서 나른하게 자고 있던 한 여성이 비척거리며 일어났다.
아무것도 입지 않았기에 흘러내리는 로브 사이로 드러난 요염한 나신.
러셀이 다급히 시선을 돌렸다.
볼이 붉어진 러셀을 본 그녀가 눈을 호선을 그리며 미소 지었다.
“꼬마야. 이 누나가 외로워서 그러는데, ······한번 할래?”
“크흠! 큼!”
그 아름다운 외모에 외설스러운 손짓, 야릇한 목소리까지.
‘저게 어딜 봐서 흑마법사야? 창부지.’
그것도 귀족들이 찾는다는 고급 창부 같았다.
그때 혀를 찬 사령술사가 흐름을 끊었다.
“장난은 그쯤 하지. 이 녀석은 마기 적성이 높아서 계속 데리고 다닐 거다. 정기는 딴 놈한테서 가져가라.”
“아쉽네에. 맛있어 보였는데.”
탄식을 뱉은 그녀가 입술을 핥았다.
‘내가 맛있어 보인다고?’
여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몰랐지만, 칭찬 같았기에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러셀. 그년은 몽마의 힘을 빌린 흑마법사다. 발정 난 저년과 자는 순간 네놈의 목숨은 끝이다. 집중하도록.”
“네, 넵!”
뒤이은 스승의 호통에 러셀은 음심을 접었다.
몽마가 무슨 말인지는 몰랐지만, 그의 말은 절대적이었다.
평범한 농민이었던 자신을 마도의 길로 걷게 해준 사령술사는 러셀에게 있어 스승이었으니까.
“네년도 할 일을 마저 해라.”
“칫. 짜증 나. 언제까지 냄새나는 곳에서 부려 먹을 건데?”
짜증 난다는 듯 한숨을 내쉰 여인이 손을 크게 내저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마기가 주위를 감싸며 결계를 보강했다.
‘그건 맞지. 한번 도시에 가보고 싶은데.’
시골에만 살아왔고, 지금은 숲 안쪽의 습지에서 몇 달째 머물고 있었기에 러셀은 무심코 그녀의 말에 공감했다.
“걱정 마라. 숲의 저 병사들만 잡아도 200여 기의 언데드가 만들어질 테니. 아직까진 잘 막아내는 것 같지만······ 곧 녀석들도 힘이 다할 거다.”
“기사도 껴있다며? 놈들이 여길 찾아오면?”
“이곳은 습지다. 두꺼운 갑옷을 입은 기사 놈들이 여기서 제대로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으냐? 애초에 이 숲의 습지에 우리가 있다는 걸 알 수도 없고.”
“하긴~ 이런 꿉꿉한 곳을 찾아올 사람이 있을 리가 없지.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히히!”
“그러니까, 잡소리 말고 결계나 잘 지키도록. 곧 때가 온다.”
낮게 울리는 사령술사의 말에 러셀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때가 온다.’
이곳에서 만든 언데드들로 그랑힐 시를 전복한다는 계획이었다.
“사령술사님. 혹시······ 그랑힐 시를 손에 넣는다면, 저도 제 언데드 하나를 받고 싶습니다.”
지금껏 마법과 강령술을 배우고 마기를 보조하기만 했지, 자신만의 언데드가 없었기에 러셀은 애착 시체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괜찮겠지. 아니 이참에 이번 병사 중에 한 녀석 골라주마.”
“정말입니까?”
러셀은 사령술사의 말에 활짝 웃었다.
곧 때가 올 테니 이 지긋지긋한 습지도 나갈 것이고, 자신만의 언데드까지 생긴다니.
이렇게 좋은 날이 있는 것은 스승에게 거둬지고 나서 두 번째였다.
그 순간이었다.
서걱!
갑작스러운 절삭음과 함께 허공으로 무언가가 날아올랐다.
“어?”
조금 전만 해도 자신과 자고 싶다던 그 여자 흑마법사의 야릇한 얼굴이 왜 공중을 날고 있는가?
그 요염한 몸뚱이는 어째선지 저 멀리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인형 놀이 재밌었냐? 이 찐따들아.”
지금껏 듣지 못한 낯선 목소리. 그에 고개를 돌리자 무장한 스무 명의 병사가 보였다.
마누스의 군복이었다.
“무, 무슨!”
러셀은 몹시 당황했다.
대체 어떻게 이곳을 뚫고 들어왔단 말인가?
자신도 이 결계를 드나들기 위해선 앞서 죽은 몽마의 여인이 결계를 열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일개 병사들이······?
“이노옴! 이곳에 어떻게 들어온 것이냐!”
혼란한 러셀의 뒤로 사령술사의 격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막아라! 러셀! 네 녀석은 토템에 마기를 불어넣도록. 숲의 언데드를 유지해야 한다!”
“예!”
사령술사의 호통에 러셀이 토템 앞에 앉았고, 자리에서 일어난 두 선임 흑마법사가 언데드들을 일으켰다.
‘바보 같은 놈들! 여기에도 언데드가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
비상용 시체들을 이곳에 묻어두었단 걸 떠올린 러셀이 안심했다.
하지만 병사들은 생각보다 강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그들이 무기를 휘두르자 언데드들이 속절없이 무너졌다.
기어코 두 선임이 병사들에게 죽었을 때 이상함을 느꼈다.
‘병사들이 저렇게 강하다고?’
특히 선두의 사내. 그가 든 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마기의 흐름이 엉키고 있었다.
‘마기가 줄어든다고? 어째서? 설마 저게 스승님이 말했던 교단의 신성력인가?’
러셀은 불안함을 느꼈다. 교단의 병사들이라면 상대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었다.
‘아니야. 스승님이라면 방법이 있을 거야!’
지난 5년간 러셀에게 사령술사는 어떤 문제도 손쉽게 해결하는 진정한 악마 그 자체나 다름없었다.
‘분명 이번 문제도 손쉽게······!’
고개를 돌린 러셀은 그대로 굳었다.
언제나 자신감 있는 표정을 짓던 그의 스승이 이토록 구겨져 있는 모습은 처음이었기에.
그 표정에서 드러나는 감정은 여지없는 당황이었다.
“사령술사님······?”
“러셀. 이리 오도록.”
어딘가 차분해진 사령술사의 목소리에 러셀이 빠르게 다가갔다.
“아깝지만 내 목숨이 먼저니······. 희생해라 러셀.”
“예? 그게 무슨······ 컥!”
러셀의 목을 쥔 사령술사.
그의 손아귀에서 러셀의 생명력이 빠르게 흡수되었다.
풀썩!
“아깝군. 생명력과 마기 둘 다 재능 넘치는 아이였건만.”
사령술사는 바싹 마른 러셀을 놓아버리곤 자신의 몸속에 넘치는 마기와 생명력을 음미했다.
마음 같아선 이걸 온전히 소화하고 싶었지만······.
“네 놈들을 죽이는 것이 먼저다.”
넘치는 힘에 히쭉 웃은 사령술사가 손아귀를 펼쳤다.
“부패의 손길.”
콰아앙!
죽음의 힘이 담긴 강력한 녹색의 화염이 폭발하듯 터져나갔다.
“호오. 이건 최고잖아!”
자신의 주력인 사령술이 아니었지만, 아끼던 제자의 힘은 주술의 힘조차 크게 끌어올린 게 아닌가?
‘놈들을 죽이고 숲의 병사들로 언데드를 보충한다. 때는 그다음이다.’
그런데.
사내가 검을 휘두르자 자신의 흑마법이.
역대 최고로 발휘한 강력한 녹색 화염이.
후우우우······.
그것을 구성하던 마기가 끊어지고, 속절없이 흩어져버리는 게 아닌가?
“이, 이게 무슨······! 말도 안 돼! 이런 건 교단도 불가능할 텐데!”
사령술사의 얼굴이 경악으로 구겨지는 한편.
마기를 먹는 검을 든 사내의 입꼬리는 길게 오르고 있었다.
“체크메이트.”
* * *
“흐으윽. 버텨라! 놈들을 막아! 흐윽.”
졸튼 남작은 남은 병사들을 향해 외치며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병사들이 아직 버텨주고 있었지만, 타고 있던 말들을 언데드들의 먹이로 던졌기에 가능했다.
이제는 병사들도 눈에 띄게 지쳐있었고, 함께 지휘하던 듀이 경조차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이런 곳에서, 그것도 끔찍한 언데드들에게 죽고 싶지 않았기에 졸튼 남작은 발악하듯 소리쳤다.
쿵!
다시 한번 달려든 언데드들에 한순간에 무너졌고, 썩어 문드러진 언데드 한 마리가 졸튼 남작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흐아아악! 오지 마! 꺼지란 말이다!”
그 순간이었다.
코앞까지 다가온 언데드가 무너져내린 것이 말이다.
콰드드.
“이, 이게 무슨······?”
자신에게 잠재된 신성력이 발휘되기라도 한 것인가?
깜짝 놀란 졸튼 남작이 주변을 살피자 주위의 언데드들 또한 실 끊긴 인형처럼 무너지기 시작했다.
콰드드드드─
“어······.”
“뭐지?”
갑작스러운 기적.
하지만 그 누구도 기뻐하지 않았다.
그 이유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긴장을 풀 수 없었다.
“겨, 경계를 늦추지 마라! 언제 되살아날지 모르는 놈들이다!”
아직 상황이 파악되지 않는 순간, 한 사내가 숲 안쪽에서 나타났다.
“다행히 아직 무사하셨군요.”
그란디스 백작의 별동대장 제이드.
“너, 너! 네놈!”
그 병사 놈이 부하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저 녀석들만 이탈을 안 했더라도 분명 언데드들을 어느 정도 막아냈을 거다!
고작 스무 명이 대열에 추가되더라도 그럴 리는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졸튼 남작은 이 분함을 쏟아내고 싶었다.
그런데.
데구르르.
놈이 던진 무언가에 시선이 내려갔다.
그것은 노인이었다. 다만 하관의 뼈가 일부 드러나고 몸뚱이가 없는.
“흐아아악!”
그리고 그것과 눈이 마주친 순간.
졸튼 남작은 비명을 참지 못하고 뒤로 쓰러졌다.
“이, 이건!?”
“흑마법사입니다.”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인 제이드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완벽한 합동 작전이었습니다.”
“······뭐?”
“여러분들이 시선을 끌어준 덕에 흑마법사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 그, 무슨······.”
졸튼 남작은 제이드의 눈을 바라보았다.
무어라고 호통치고 싶었다. 그래야만 자신의 체면이 살 것만 같은 옹졸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는 감히 입을 벌리지 못했다.
제이드.
저 사내에게서 풍겨오는 묘한 기운.
그 안으로 감히 침입할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그 침묵 속에서, 제이드가 쥐고 있던 검을 슬며시 들어 올렸다.
졸튼의 몸이 저절로 움찔했다.
검은 검집으로 들어갔다.
“가시죠. 그랑힐 시는 한 시가 위급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