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picked up a black panther and became a duchess RAW novel - chapter 104
키르젠은 각인을 깨닫게 된 과정까지는 입에 올리지 않았다.
어차피 불필요한 이야기였다.
그가 에밀리나와 헤어진 지 1년째 되는 날,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이 찾아왔으니까.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이 고통이 각인 때문이라는 것도 뒤늦게서야 알았다.
숙부와의 싸움으로 지쳐 그녀를 찾아갔던 날, 본능적으로 이게 각인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녀를 단순히 그리워하는 것을 넘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에 활력이 돌았다.
자신을 이루는 모든 것이 그녀를 원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그래서 그날 이후론 생각날 때마다 그녀를 먼발치에서 훔쳐보았다.
전쟁 중에는 그녀를 찾아가기 어려우니 로지를 통해 안부를 들으며 찾아오는 각인통을 견뎠다.
그리고 지금에 이른 것이다.
키르젠은 그런 과거는 속으로 묻어 둔 채 에밀리나에게 상황을 전했다.
에밀리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불미스러운 사건. 그것은 자신이 납치되었던 날을 말하는 것이니까.
당시 키르젠은 고열을 앓고 있었으니, 그게 각인으로 인한 열병이라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에밀리나는 주름진 미간을 꾹꾹 누르며 말을 이었다.
“넌 억울하지 않아?”
“무엇을 말입니까?”
“각인 말이야. 결국 네 의지는 없이 일어난 일이잖아.”
“그렇긴 합니다만, 상대가 부인이잖습니까.”
“그래도…… 후회할 수는 있는 거잖아.”
에밀리나는 생각했다.
키르젠도 사람인데, 각인한 상대만을 바라보는 건 너무 잔인한 일이지 않을까?
고작 각인했다는 이유로, 반려자로 선택했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맹목적으로 따르고 헌신하는 건 잘못된 일이었다.
저라면 억울해서 잠도 못 잤을 정도였다.
어떻게 보면 내 생각과 신체의 자유를 잃은 체 타의에 의해 통제당하는 삶이 아니던가.
보이지 않는 족쇄를 달고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니 끔찍한 일이었다.
정작 키르젠은 그런 사실에도 전혀 개의치 않은 모양이지만.
에밀리나의 입장에서는 너무 신경 쓰이고 불편한 일이다 보니 키르젠이 안쓰럽지 않을 수 없었다.
‘하…… 어째 점점 말려드는 기분인데.’
에밀리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키르젠을 바라보았다.
어느 순간부터 그가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씩 다가오는 그를 밀어내지 못했다.
그게 변화를 준 가장 큰 요인이 아닐까 싶었다.
조금씩 다가오는 그를 밀어내지 못한 채 마음을 열게 된 것이다.
그를 자신의 사람이라 여기면서 점점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남자로서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껏 의식하지 못한 키르젠의 모습을 다시 보게 되었다.
마냥 어린 줄로만 알았던 그의 다부진 체격은 버팀목처럼 우직해 보였고, 날카로운 턱선과 남성적인 얼굴은 알게 모르게 에밀리나의 가슴을 뛰게 했다.
키르젠과 가까이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도 한 남자라는 걸 의식하게 되었다.
수도에 와서부터 각자 바쁜 일상을 보내도 틈틈이 한 침대를 공유하며 밤을 지내니 서로가 조금씩 편해진 탓이다.
그렇다 보니 키르젠은 다가오는 것에 점점 거침없어졌고, 에밀리나는 그것이 못내 부끄러우면서도 자각하게 되어 어느 순간 그를 피하듯 서재에 박히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키르젠을 마주할 때마다 여주인 클로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쭙잖은 죄책감이 그녀를 괴롭혀 댔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부로 끝이 났다.
클로이의 유학 소식에 마음이 가벼워지면서 키르젠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더 이상 원작과 주인공들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다.
키르젠을 향한 제 감정을 마음 가는 대로 표출할 수 있었다.
에밀리나는 이제껏 있는 그대로 감정을 부딪친 키르젠에게 답변을 주고 싶었다.
그에 앞서, 키르젠이 말했다.
“후회하지 않습니다. 부인을 바란 건 제 선택이었고, 설령 각인되지 않았다고 한들 부인 이외의 사람은 제가 용납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는 잔잔한 목소리로 제 마음을 고백했다.
정말이지, 키르젠은 끝까지 맹목적이었다.
에밀리나는 자신만을 바라보는 키르젠을 보며 설핏 웃었다.
이렇게 자신을 위해 주는 사람은 부모님 빼고 처음이었으니까.
그간의 마음고생을 생각하면 조금 괘씸하기도 했지만, 자신을 누구보다 생각해 주는 이가 키르젠이었기에 에밀리나는 용서할 수 있었다.
“너는 정말 변함없구나.”
“그렇습니까?”
“응.”
그러니 이젠 보답해 줄 때가 되었다.
에밀리나는 얕은 심호흡과 함께 키르젠의 이름을 나직이 불렀다.
“키르젠.”
키르젠은 갑작스럽게 바뀐 그녀의 분위기에 표정을 살짝 굳혔다.
어딘가 긴장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밀리나가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그동안 내가 듣고도 모른 척했던 네 마음, 많이 답답했을 거라고 생각해.”
“……답답하지 않았습니다.”
키르젠은 그렇게 말하며 에밀리나의 눈치를 보았다.
조심스러운 눈짓이 그녀의 생각을 가늠하는 듯했다.
에밀리나는 그런 키르젠을 보며 차분히 말을 꺼냈다.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하지만 나는 시간이 필요했거든. 생각해야 할 문제도 있었고.”
“생각해야 할 문제라면……?”
키르젠이 곧장 꼬리를 물듯 물음을 건넸지만, 에밀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에 와선 의미 없는 대답이기 때문이었다.
“그냥. 이런저런 문제. 하지만 해결됐으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키르젠은 아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히는 서운함이 깃든 눈으로 그녀를 살폈다.
아직 그녀에게 믿음을 주지 못한 것 같아 속상함이 든 탓이다.
그게 표정으로까지 드러났는지 에밀리나가 옅은 웃음소리를 냈다.
그리고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쨌든, 그렇다 보니 지금까지는 말을 아끼고 있었는데…….”
에밀리나는 잠시 말을 골랐다.
막상 입 밖으로 직접 말을 꺼내자니 어딘가 부끄러웠다.
그녀가 잠시 머뭇거리니 키르젠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리지만, 조금 긴장된 표정이 불안을 내비치고 있었다.
에밀리나는 그런 키르젠을 보며 다시 한번 굳게 다짐했다.
자신의 어정쩡한 태도를 바로잡으리라고.
매번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며 마음 졸이는 모습이 은근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더 이상 키르젠을 불안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확실하지 못한 태도에 키르젠이 일희일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만큼은 솔직한 모습으로 진심을 전하고 싶었다.
그렇기에 용기 내 마음을 전했다.
“나도 좋아해.”
“……예?”
“널 좋아한다고.”
그 순간이었다.
키르젠이 덥석 에밀리나의 어깨를 잡았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에밀리나는 살짝 놀라고 말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어깨를 감싸 쥔 키르젠의 손아귀엔 힘 하나 들어가 있지 않았다.
그저 손을 올려 두듯 아주 조심스러운 태도로 그녀를 잡고 있었다.
그게 마치 유리공예를 다루듯 어딘가 부서질까 조심하는 모양새여서 에밀리나는 또다시 웃고 말았다.
더구나 키르젠은 어딘가 고장 난 사람처럼 입을 여닫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입을 열었을 땐…….
“이게 꿈이 아니라면, 제가 입맞춤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왔다.
그간의 애정을 갈구하듯 간절한 물음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리고 손을 들어 그녀의 흘러내린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겨 주었다.
느릿한 손길이 간지럼을 태우며 이상한 기분을 자아내고 있었다.
에밀리나는 곧장 직진해 오는 키르젠의 태도가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가 오랫동안 기다렸음을 알고 있으므로.
또한 그녀 역시 원하고 있었기에 떨리는 마음을 감추며 받아들였다.
그렇게 에밀리나가 보일 듯 말 듯 작게 고갯짓하니 키르젠의 황금안이 어둠 속에서 자취를 감췄다.
* * *
몇 달 후.
디트리오 공작령에서 성대한 결혼식이 열렸다.
갑작스러운 혼인 관계로 생략되었던 예식인지라 한동안은 모두가 어리둥절했지만, 키르젠의 강력한 추진에 결국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에밀리나가 키르젠에게 마음을 고백한 그날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키르젠은 식을 꼭 올리고 싶다며 에밀리나를 매일같이 설득했고, 그의 앞날에 걸리는 일까지 없어지자 결국 동의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우습게도, 키르젠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난 뒤부터는 일이 이상하리만치 잘 풀렸다.
그래. 예로 들자면 키르젠의 숙부인 로이뎅 몬테이로 백작의 일.
에밀리나는 몬테이로 백작을 사냥제에서 처음 보았는데, 그게 마지막 만남이 될 줄 상상도 하지 못했다.
사냥제에서 만난 몬테이로 백작은 키르젠을 종일 모함하더니 종국에는 리오네프에 반감을 품은 제노바민을 부추겨 반란을 일으켰다.
그렇다 보니 그날 하루는 정말 혼이 쏙 빠질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제노바민의 반란에 사냥제는 곧장 종료됐고, 키르젠의 보호 아래 혼란스러운 상태로 집으로 귀가하니 모든 상황이 끝이 났다.
다만, 몬테이로 백작의 행방은 알 수 없었는데 나중에 라젤라 백작 부인이 말하기로는.
“저도 들은 소문인데, 전하께서 많이 노하셔서 북부 숲에 가둬 놨다는 말이 있어요.”
이런 허무맹랑한 말을 전해 주기도 했다.
아니, 사실은 허무맹랑하지 않았다.
왜냐고?
알고 있었으니까.
북부 숲.
그곳 어딘가에 몬테이로 백작이 있다는 걸.
생사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백작이 그곳에 있는 건 키르젠과 관련됐고 그 이야기를 에밀리나가 우연히. 정말 우연히 듣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제롬과 은밀히 나누던 대화를 하필 에밀리나가 지나가면서 엿듣고 만 것이다.
그래서 모르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이런저런 사건들이 지나고 지금.
에밀리나는 며칠 전 평생을 약속한 남자에게 다시 한번 고백했다.
“사랑해, 키르젠.”
키르젠 역시 오랫동안 마음을 준 여자에게 환한 미소로 답했다.
“저도 사랑합니다, 부인.”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두 사람은 앞으로도 좋은 일만 가득하리라 생각했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