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idden second life of the soldier RAW novel - Chapter (73)
73화
– 어떤가, 한번 해보겠나?
수정구에서 루퍼스의 말이 다시 울렸다.
그 목소리에는 미약한 긴장이 서려 있었다.
나는 수정구를 향해 빙그레 웃어보였다. 웃음이 절로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자 내 앞에서 대기 중이던 그리핀 라이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 해보겠습니다.”
잠깐의 정적.
– ······진심인가?
몇 박자 늦게 답변이 돌아왔다.
그 목소리에는 놀람과 당황이 섞여 있었다.
어려운 의뢰인 만큼 내가 고민이라도 할 줄 알았나 본데.
설마 이렇게 흔쾌히 승낙할 줄은 전혀 몰랐겠지.
나는 소리죽여 웃고는 대답했다.
“저하. 제가 저하에게 거짓을 고한 적 있습니까?”
– 지금 하는 말이 농이 아니란 말이렷다?
이번에는 수정구가 차가운 빛을 냈고, 루퍼스의 목소리 역시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내가 고민 없이 응하자 그저 장난이라고 생각한 듯했다. 목소리일 뿐인데도 루퍼스가 언짢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이 사항을 가벼이 여기거나 농담을 한 줄 아는 걸까?
나는 다시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저하. 저는 칼테르 요새의 탈영병 역시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그리고 저하께서 의뢰한 이번 임무 역시, 해낼 자신이 있습니다.”
– 내가 자네의 능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마는······ 이건 좀 결이 다를 텐데? 흔적조차 없단 말일세.
그건 그렇지. 시조의 왕관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지만, 그걸 찾아오는 건 전혀 쉽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그걸 의뢰한 입장에서 부정하는 걸 보면 루퍼스 역시 일말의 기대만 한 듯했다.
“흔적부터 찾아볼 생각이었습니다. 시간 급하지 않다면 말입니다.”
루퍼스는 잠시 침묵하다 웃어 보이고는 입을 열었다.
– 제이드, 만약 자네가 유물을 구해온다면 보수는 톡톡히 쳐주지.
“제가 원하는 걸 제시해도 되겠습니까?”
– 말해보라.
나는 잠시 숨을 고른 뒤, 입을 열었다.
“길들인 그리핀 5마리를 주십시오. 거기에다가 그리핀 산으로 출입할 권한을 부탁드리겠습니다.”
“헉! 죄, 죄송─ 흡.”
그런 소리를 낸 것은 그리핀 라이더였다.
통신병으로서 묵묵히 듣고 있던 그는,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엘리트 통신병이 왕자의 통신에 잡음을 넣을 정도로, 내 제안은 충격적이었다.
그리핀의 가치는 엄청나게 높았다. 왕국의 재산 중에서도 손꼽힐 만큼.
포악하지만 길들일 수만 있다면 말 백여 마리보다도 가치 있는 이동 수단이었으니까.
땅의 제약에서 벗어나고, 하늘을 누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기동력을 얻는 셈이다.
당장 마누스 왕국의 그리핀 라이더들이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지 않나.
나는 상상했다.
만약, 용병단 안에 그리핀 라이더 부대를 만든다면?
로빈을 필두로 한 궁수들이 하늘에서 날리는 화살 비.
제아무리 기사가 오러를 길게 뽑아 휘두르려 해도 하늘엔 닿지 않는다.
오러의 검기를 날리자니 그리핀에게 검기가 닿기 전에 오러가 증발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적은 아니다.
페르딤 공화국도 그리핀을 잡을 방법을 고안해냈고, 그래서 그리핀 부대의 전선 투입이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러나 웬만한 전투에서는 최고의 병기가 되리라는 건 확실했다.
그리고 앞으로 내 세력이 커질 때, 전령 역할이 될 것이고.
– 좋다. 왕국의 상징적인 보물을······ 흔적 쫓지 못하고 있는 그것을 찾아와준다면은 그리핀 쯤이야 못 줄 것도 없지.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리핀은 마누스 왕국 최고의 전략 물자다.
이토록 쉽게 승낙할 줄은 몰랐다.
“정말, 이십니까?”
– 내가 너에게 거짓을 고한 적이 있었나?
물론 믿습니다, 루퍼스 왕자님! 제대증도 흔쾌히 주셨으니까!
띠링!
[새로운 퀘스트가 발생합니다.] [퀘스트 정보]– 제목 : 건국의 영광을 찾아서
– 설명 : 마누스 왕국의 1왕자 루퍼스는 마누스 왕국의 건국왕이 썼다는 왕관, 태양의 재림을 찾고 있습니다. 하지만 태양의 재림은 동부의 사막으로 사라진 이후, 지난 백 년 동안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태양의 재림을 찾아준다면 루퍼스는 당신을 높게 평가할 것입니다.
– 보상 : 사육된 그리핀 5마리, 그리핀의 산 출입권. 루퍼스의 호감도 크게 상승.
“그 의뢰 받겠습니다.”
– 네게 거는 기대가 크다. 실망하게 하지 않도록 부탁하지.
그것으로 수정구의 불빛이 꺼졌다.
* * *
이로써 우리의 다음 목적지는 오르투스 지방에서도 더 동쪽, 마누스 왕국의 국경 너머의 ‘와투스 사막’으로 확정됐다.
그에 맞춰서 나는 새로운 훈련을 준비했다.
비무장에 모래를 가득 채웠고, 훈련용 허수아비를 곳곳에 세워뒀다.
“제이드, 이것들은 뭐야?”
“의뢰가 들어왔어. 마누스 왕국의 의뢰야.”
첫 번째 의뢰주가 왕국이란 소식에 대원들을 놀랐다.
“뭐, 뭐? 왕국에서 의뢰를 해? 설마 또 전쟁이야?”
“그건 아니고. 사막으로 가서 뭐 좀 찾아 달라네. 보수가 클 거야. 너희도 이제 그냥 병사가 아니니까 충분한 급여를 책정해줄게.”
돈이라는 말에 대원들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간 징집병으로서 숱한 전장에서 굴렀으나, 보수는 만족할 만한 정도는 아니었다.
특히 가족이 있는 녀석들은 가족들에게 그 돈을 보내기도 했으니까.
“이 모래사장과 관련이 있는 건가? ······설마 사막으로?”
로빈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국경 너머의 사막으로 나갈 거야. 이건 그걸 준비하는 적응 훈련이고.”
“사막······. 재미있겠는데? 그럼 제이드 여기서 뭘 하면 돼?”
“뛰어.”
어깨를 풀며 자신만만해하던 데릭이 내 말에 멈칫했다.
“응? 뛰라고?”
“열 바퀴, 선착순 열 명, 낙오자는 다시 뛴다. 시작!”
“그게 무슨······.”
대원들이 머뭇거리는 사이 로빈과 브룩 등 눈치 빠른 대원들이 한순간 튀어 나갔다.
“야, 야 저 자식들 잡아! 아니 뛰어!”
“젠장, 제이드! 너무 하잖아!”
뒤늦게 달려 나간 대원들이 쫓아갔다.
“큭, 뭐야!”
“발이······!”
하나 같이 당혹감을 표출했다.
‘사막에서 달리는 게 쉽지 않을 거다.’
흙이나 늪지와 달리 사막은 한 걸음 한 걸음이 바닥으로 움푹 꺼지는 모래다.
그런 만큼 다리를 움직이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짓이었다. 더군다나 몸을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는 전투라면?
‘체력이 쉽게 고갈 날 거야.’
예상대로 대원들은 자기 발을 삼키는 모래 때문에 미끄러지는 등, 균형이 쉽게 무너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호흡이 흐트러지는 대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산과 온갖 험지를 넘나든 키텔로 레인저 출신인 로빈은 잘 버티고 있었지만, 나머지 대원들은 모래에 균형을 잃기 시작했고, 개중에는 다섯 바퀴를 채우지 못하고 낙오하는 녀석도 있었다.
“롭. 또 너야? 네 바퀴에서 쓰러지는 게 말이 돼?”
“흐에엑. 제이드, 자, 잠깐만 옆구리 장난 아니게 아파.”
내가 롭의 옆구리를 찌르자 녀석이 괴성을 지르며 뒹굴었다.
‘그래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수준이 나쁘지 않네.’
다들 체력이 떨어져 숨이 차는 것이 보였지만, 내 예상보다 더 잘하고 있었다.
그중 의외는 드렌트였다.
녀석의 거리 감각도 천부적인 걸 알았지만, 균형 감각 역시 남달랐다.
쉼 없이 모래를 밟아 나가는데, 드렌트의 발은 모래 위를 미끄러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이 마치 사막에서 오래 굴렀던 베테랑을 떠올리게 할 정도였다.
힘을 과하게 주지 않고, 지면을 딛는 면적을 넓혀서 발이 모래 안으로 파고 들어가는 걸 방지하는 것이었다.
그래, 녀석의 가장 큰 장점은 적응력이다.
“드렌트, 로빈 이리 와볼래?”
나는 훈련에서 가장 우수한 두 대원을 불렀다.
“제이드, 무슨 일이지?”
“대장. 이거 확실히 재미있는데?”
두 녀석은 호흡이 거칠어진 것을 제외하고는 힘든 티를 내지 않았다.
이 녀석들이라면 가능할 듯했다.
“드렌트가 방패, 로빈이 활을 들고 서 봐.”
나는 방패 하나와 활을 건네며 설명했다.
“지금부터 로빈 너는 모래 위의 허수아비를 맞추는 거야. 드렌트 너는 로빈과 보폭을 맞춰서 바로 옆에서 움직이다가 날아오는 공격을 막아내.”
“지금 그게 무슨─ 큭!”
드렌트의 질문은 이어지지 않았다.
내가 던진 돌멩이에 허벅지를 맞은 드렌트가 주저앉았다.
그냥 돌멩이일 뿐이지만 마력을 약간 담아냈으니, 꽤 아플 거다.
다시금 날아간 돌멩이를 튕겨낸 드렌트가 소리쳤다.
“자, 잠깐 제이드. 젠장! 로빈! 빨리 허수아비들 맞춰!”
“기다려라! 지금 계산 중이잖나!”
텅! 터텅!
곧장 자세를 낮춘 로빈이 화살을 쏘았고, 드렌트는 방패를 들어 로빈을 향한 돌멩이를 막아내었다.
갑자기 시작한 훈련에 당황하던 둘이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의 합이 맞아가기 시작했다.
텅!
피슉!
쏘아진 공격을 막아내고, 로빈이 차분하게 활시위를 튕겼다.
이내 모래사장의 허수아비 열 개가 전부 쓰러졌다.
“수고했어.”
“······.”
“······.”
두 녀석은 풀썩 주저앉으면서도 나를 노려보았다.
이렇게까지 굴려야 하냐는 눈빛이었다.
“제이드. 대체 뭘 위해 이런 훈련을 하는 거지?”
방패병과 궁병이 2인 1조가 되어 적들을 쓰러트린다.
궁병은 목표물에게 활을 쏘며, 방패병은 궁병을 호위하며 적들의 반격을 막는다.
로빈과 드렌트 뿐만 아니라 지켜보던 대원들 모두 이해한 전술이었다.
“소수의 병력으로 거리를 유지하면서 다수의 진영을 흔들 때 용이해. 아니면 근접전이 어려운 적을 야금야금 갉아먹기도 좋지.”
“회색 숲 전선의 전투 트롤 때처럼 말인가?”
“뭐, 비슷하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명 ‘비바람 대형’.
비가 옷을 시나브로 젖게 하듯이 적들을 갉아 먹고, 바람처럼 도망친다.
그럴듯하게 말했지만 쉽게 말하면 ‘히트 앤드 런’이다.
몽골군이 유럽 기사들을 털어먹었던 전술과도 비슷하달까.
사실 내가 짜낸 전술은 아니고, 와투스 사막의 오크 부족들이 연합하여 서쪽으로 진격하여 엘프들의 숲을 공격할 당시 ‘신궁’이 고안한 전술이었다.
용사의 동료인 그가 세웠던 업적이자 첫 이름을 날리던 순간이었다.
“아무튼 우리가 사막으로 가게 되면 동부의 오크들과 마주하게 될 거야.”
“굳이 싸우리라는 법은 없잖아? 고드록 씨처럼.”
“고드록 씨는 착한 오크가 맞지. 근데 롭. 착한 사람이 있듯 악한 사람도 있는데, 오크라고 다를 것 같아?”
아니, 오히려 더 위험하다. 거친 사막에서 나고 자란 오크들은 대다수 사납고 과격했으니까.
그리고 인간과 오크는 과거사가 악연으로 엮여 있거든. 빛 바란 과거사라고 하지만, 여전히 악감정을 지닌 부족들이 다수였다.
“전부 데릭보다 더한 녀석이라 생각하면 돼. 놈들과 함부로 붙었다가는 오크들의 도끼에 찍힌다면 방패로 막아도 팔이 버티지 못할 거야.”
데릭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예시가 나야? 그냥 고드록 그 양반으로 하면 되잖아.”
“과연, 데릭보다 더하다면······.”
“함부로 붙으면 안 되겠지.”
한 대원을 제외한 나머지 대원들이 내 설명에 납득했다.
입을 삐죽 내민 데릭이 물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훈련을 받는다는 거야?”
“어, 앞으로 이 훈련을 매일 반복할 거야. 로빈, 드렌트 할 만했지?”
내 물음에 두 대원의 눈동자가 흔들리며 교차했다.
부정의 눈빛이었다.
“너희가 할 게 아니야. 대원들이 할 거지. 너희는 대원들의 훈련을 가르치고 보조할 거야.”
“할만했다.”
“할만했지.”
그제야 두 녀석의 눈이 호선을 그렸다.
반면 대원들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 * *
훈련을 시작한 지 2주가 지났다.
대원들의 체력은 더욱 높아졌고, 모래에서 오래 달려도 쉽게 지치지 않게 되었다.
대원들은 죽을상이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매우 빠른 성장세를 보이며 훈련에 적응해나갔다.
세워놓은 허수아비 대신, 칼의 검은고블린 용병대를 불러서 모의 전투를 벌여 적응했다.
“크하핫! 제이드. 이 녀석들 정말 그때 그 녀석들이 맞다고? 그때도 대단했지만······ 지금은 아예 사람이 바뀐 것 같군.”
모래에 주저앉아 중얼거리는 칼이 갑옷에 박힌 화살을 뽑아냈다. 그의 갑옷에 꽂힌 화살만 네 발이었다.
촉을 둥글게 하여 위력을 줄이지 않았다면 큰 부상을 입었을 것이다.
“저희 대원들 제법 아닙니까?”
“큭, 지금이라도 너네 용병대로 이적하는 걸 진지하게 생각해봐야겠어.”
중얼거리는 칼을 두고 대원들을 바라보았다.
“훈련은 충분히 된 것 같군.”
“후후. 우리가 그 개고생을 어떻게 버텼는데.”
“오크들이 와도 두렵지 않다고.”
대원들은 모의 전투에서의 승리로 자신감이 가득 찼는지, 씨익 웃어보면서도 좀전의 상황을 복기했다.
그때 남작가의 병사 한 명이 우리 쪽으로 달려왔다.
“제이드님! 제이드님! 제이드님 계십니까?”
상당히 다급한 부름이었다.
“뭐지?”
“헉! 델토로 남작님이 긴급히······ 헉! 헉! 도움을 요청하셨습니다!”
“도움? 그게 무슨 소리지?”
그리고 예상 밖의 대답이 튀어나왔다.
“오크. 오크들이 습격했답니다.”
아무래도, 생각보다 이르게 오크들과 마주하게 될 듯했다.
*
델토로 남작가로 향하자 안쪽에서는 회의가 한창이었다.
델토로 남작과 아직 요양 중인 로이암과 힐다 등 기사들이 모여 있었다.
“제이드 씨.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안경을 치켜올린 델토로 남작이 내게 공대했다.
다른 이들이 봤다면 이상한 상황이었지만, 델토로 남작은 영웅을 함부로 대할 수 없다며 공대했다.
“이예르, 아니 델토로 남작님. 어떻게 된 거죠?”
“사막 접경 지역의 수비 기지가 습격당했습니다. 수비대가 돌파당했다는군요. 오크 부족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인근 마을에서 항전 중이라고······.”
“이곳과 가장 가까우면서 과격한 부족이라면 ‘붉은도끼’ 부족일 겁니다.”
흘러나온 대답에 고개를 돌리자 일전의 오크 주술사 고드록이 침울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거친 사막을 돌아다니는 오크들의 강한 신체는 평범한 인간 남성으로는 이겨낼 재간이 없다.
그렇기에 마누스 왕국이 세워지기 전까지, 과거 동부의 패자라고 한다면 오크들을 뜻하는 말이었다.
인간들이 기사단이라는, 초인 전투 부대를 만들기 전까지 말이다.
그것도 체계적인 전술을 연구하고, 마법사들까지 동원하여 전쟁을 벌이기 전까지 오크들의 세력은 강성했고 밀어내기 어려웠다고 한다.
그러니 이들의 습격을 막아내려면······.
“······기사들의 지원이 필요하겠군요.”
“원래대로라면 그렇습니다만.”
내 말에 델토로 남작이 얼굴을 구겼다.
“남작님. 이 로이암의 출전을 허락─”
“안 됩니다, 로이암 경. 아직 몸도 온전치 않잖습니까.”
아, 그러고 보니 지금 여기 남아 있는 기사들은······.
근육이 빠진 로이암과 아직 요양 중인 힐다나 다른 기사들 역시 그 상태가 안 좋았다.
몸도 안 좋은 이들이 출전해보았자 피해만 늘어날 것이다.
그러니까.
“저희에게 의뢰를 맡겨 주시지요.”
우리가 나설 차례였다.
물론 유료로.
* * *
“젠장, 저 빌어먹을 오크들이······.”
“말코, 흥분하지 마. 지금 같은 상황에선 더더욱.”
베르탈 수비 기지의 병사 코비는 가쁜 숨을 내쉬었다.
그들이 지금 위치한 곳은 델토로 남작령 최동단에 위치한 마을이었다.
왜, 이름조차 없는 마을 있지 않은가.
사막과의 접경 지역인 만큼 황무지나 다름없는 곳이다.
기껏 해봐야 인간들과 교류하러 오는 오크 상인들이 찾아올 뿐.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크하하하! 인간 놈들, 겁에 질려 꽁무니를 내빼는구나!”
“나, 붉은 도끼의 세다르가! 네놈들을 짓밟고 고향의 땅으로 돌아가겠다!”
바싹 메마른 흙과 누런 모래만이 널려있던 이곳은 녹빛의 오크들로 가득 차 있었다.
다만 이번에 찾아온 오크들은 교류를 위해 찾아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였다.
‘제기랄, 제기랄!’
동료를 잃은 병사 한 명을 달랜 코비는 속으로 욕설을 지껄였다.
근래 잦은 오크들과의 교류로 거래도 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 않았나?
물론 다른 약탈 부족들이 가끔 공격해 오는 경우도 있긴 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열 명도 채 안 되는 무리로 공격해온 것이었지. 이렇게 대규모로, 무자비하게 공격적으로 치고 들어온 것은 그가 근무한 이래로 처음이었다.
아니 아버지 때도. 어쩌면 할아버지 때에도.
상상도 못 한 습격이었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베르탈 수비 기지가 무너졌고, 결국 이곳 마을까지 후퇴하기에 이르렀다.
‘기사 분들이 아니었다면 나 역시 죽고 말았을 거야.’
코비의 고개가 앞으로 향했다.
델토로 남작가의 기사들.
이아곤, 데카인, 그리고 헤겔.
저 세 기사가 긴급히 달려오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반면 헤겔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제길, 오크들이 갑자기 발정이라도 난 건가? 단체로 지랄이군.”
일부러 거칠게 말을 내뱉었지만 속은 초조했다.
이름조차 없는 마을의 방책으로 버티는 것도 잠시다.
이미 포위된 상태였고, 오크들은 승리의 여유로서 우리를 다 잡은 고기 마냥 취급하고 있었다.
기사로서 그리고 전사로서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옆에 선 이아곤이 결심했다는 듯 입을 열었다.
“헤겔 경. 어쩌면 여기가 저희의 마지막일 수도 있겠군요.”
“이상한 소리 하지 마라. 우리는 살아 돌아갈 거다.”
반발하듯 말했지만, 헤겔 역시 내심 동감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로이암 그 인간이 에스트콕을 지키고 있을 테지.’
반병신같이 몸이 좋지는 않았지만, 성을 지키는 것 정도라면 가능하지 않겠는가.
나름 동부 최고의 기사니까.
그리고 정 안 되면······ 칼테르 요새에 있는 그 녀석들도 움직여줄 것이었다.
오히려 지금은 로이암보다 더 믿음직스러운 존재였다.
“헤, 헤겔 경! 저 뒤에서 지원군이 오고 있습니다!”
그때 뒤에 마을 사람들을 지키며 숨어 있던 한 병사가 소리쳤다.
“지원군이라고?”
헤겔은 깜짝 놀랐다.
“설마 로이암이냐?”
자신의 경쟁자, 그가 병상을 털어내고 달려왔단 말인가?
그러나 병사의 말이 자신감 없이 흐려졌다.
“기사는 아닌 것 같습니다. 어······ 처음 보는 이들인데······ 병사? 용병들 같습니다?”
“헤겔 경······ 지원군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습니다. 서른? 아니 스무 명 정도 되는군요. 어쩌면 협상하러 오는 게 아닐까요?”
병사들은 실망감을 숨기지 못했다.
병사들의 말대로 지원군의 규모는 이십여 명 정도 되었다.
그런데 헤겔은 지원군의 모습이 어딘가 낯익었다.
“그럴 리가, 잠깐······ 설마?”
헤겔이 눈에 마력을 넣고 안력을 키웠다.
“하, 하하. 이아곤, 죽을 각오는 접어두지.”
선두의 사내를 확인한 헤겔의 입꼬리가 치솟았다.
“가장 든든한 지원군들이 왔으니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