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egendary youngest son of the marquis RAW - Chapter (514)
제 515화
허무맹랑한 생각은 아니었다.
그가 라그나로크라면 모든 게 간단해진다. 묵시록의 마지막 내용이 두 개로 나누어진 이유도 사실 그가 라그나로크여서 나누어진 것일 수도 있다. 라그나로크여서 자기 스스로 시간을 돌렸다면? 그리고 그걸 자기 자신도 모른다면? 라그나로크가 잭 밀로스의 몸 안에 숨어 있다면?
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였다.
역천을 한 게 맞다면 시간선이 뒤틀린 부분이 있을 거다.
보통의 사람들은 못 잡겠지. 느끼지도 못하겠지.
하지만 그게 가능한 사람도 있다.
적어도 이 동대륙에서 두 사람은 그게 가능하다.
천마 영정, 검존 혁진강.
밀실에서 눈을 뜬 영정이 왜 폐관에 들어갔나. 왜 여기에서 이러고 있나.
길이 마음을 인도한다. 마음이 길을 인도한다. 지금 인도했다.
보았다.
짧지만 역천의 흔적을 보았다. 천마 영정이 본 것은 굉장히 한정적이었다.
검은 눈, 온몸이 검게 물든 잭 밀로스는 지금과 사뭇 다른 모양새였다. 얼굴에는 흉터가 가득했고 몸은 마치 잘려졌다가 다시 맞춰진 인형 같았다. 그리고 강했다. 지금보다 훨씬 강했다.
전생에서 천마신교와 천외천은 손을 잡았다. 그리고 서대륙을 멸망시켰다. 잭 밀로스가 라그나로크라 확신이 되면 싸우겠다고 했다. 몸을 숨기고 상황을 살피던 전생의 천마를 검존 혁진강에게 집어 던진 그는, 하늘을 지배했다.
그가 말했다.
‘[오늘, 세상은 멸망한다.]’
거기까지였다. 딱 거기까지 보았다.
그리고 그거면 충분했다.
그 이상의 존재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 정도의 힘과 그 정도의 생김새.
그는 괴물 그 자체였다. 혼돈이었고 파괴의 마왕이었다.
천마는 가볍게 손짓했다. 쿠궁, 밀실의 문이 열린다.
그곳에 한 남자가 있었다. 익숙한 얼굴의 남자.
천마신교의 부교주 천월.
그의 충성심은 어마어마하다. 천마가 죽으라 하면 그는 죽을 것이다. 죽는 시늉이 아니라 정말로 죽는다는 뜻이다.
“지존이시여, 깨어나셨습니까.”
천월은 속으로 조금 의아했다. 폐관에 들어간다던 천마가 지금 폐관을 깼는데 왜…… 별반 달라진 게 없는 걸까.
그런 천월의 귓가로 영정의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잭 밀로스가 지금 신교에 있느냐.”
“예. 지금 혈마교의 교원에서 담소를 나누는 중입니다.”
“담소?”
“혈마와 담소를 나눴고 지금 백마 단리백과…… 싸우는 중입니다.”
영정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진다.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잘됐군.
잘못 들은 걸까.
천월이 고개를 갸웃한다. 그런 그에게 천마가 폭탄을 던졌다.
“병사를 모으거라.”
“……예?”
“모든 병사를 모아 집결시키거라. 잭 밀로스, 놈을 죽인다.”
천월의 눈이 크게 떠졌다. 왜? 왜 갑자기?
그런 천월의 두 눈을 천마가 바라본다. 천마는 진지했다. 정말로 진지했다.
천월의 의구심을 천마는 해소시켜 주었다.
“그가 라그나로크다.”
운명이 흐르기 시작했다.
* * *
수라도제 유제하는 겉보기와는 다르게 꽤 능력이 있는 남자였다.
잭이 3시간을 말했을 때 당황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잭이 내린 두 번째 명령이다.
첫 번째 명령은 마궁에 침입했을 때 가서 거지를 죽이라는 명령이었는데 유제하는 보여 주고 싶었다. 정확히는 증명하고 싶었다. 스스로의 가치를.
3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다. 그걸 가능하게 해야 한다. 그래야 체면이 산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면서 누군가의 울타리 안에 들어가는 것은 유제하 사전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해낼 수밖에 없었고 해냈다.
함선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 큰 수의 배를 구했다. 약 200척.
마궁의 주민들 중 서대륙으로 가고 싶어 하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총 2만.
이게 많다면 많은 건데 10만 단위가 넘어가는 인구 중에 고작 2만이다. 유제하의 입장에서는 적을 수밖에 없었다.
강요하지는 않았다.
서대륙이 어떤 곳인지 뭐 하는 곳인지 유제하도 자세하게는 모르니까.
직감만으로 모든 것을 밀어붙이는 건 못할 짓이다. 그 2만 명은 오직 유제하만 바라보고 둥지를 옮기는 거다.
그렇게 200척의 배와, 잭이 타고 왔던 노아호까지 총 201척의 함선이 바다를 가르고 있었다.
처음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배를 오래 탄 적이 없는 사람들이 곳곳에서 구역질을 하는 탓에 잠깐 요란스러웠던 적을 제외하면 정말 별일 없었다.
하루가 지났고 이틀이 지났다. 시간이 계속 흘렀다.
4일째 새벽, 05시.
배의 행렬은 흑해의 경계선에서 약 20km 떨어진 지점에 도착했다.
해가 뜨기도 전인 그 시각, 셀은 그 누구보다 가장 먼저 눈을 떴다.
워낙 잠이 없기도 했지만 특수한 경우였다. 이상함을 느꼈으니까.
초월자의 영역에 한 다리를 걸친 유제하보다 더 빨랐다.
그건 드래곤으로서의 본능이었다. 종족으로의 차이. 단순히 그 차이였다.
셀이 고개를 돌린다. 노아호의 뒤쪽으로 200척의 함선이 거리를 벌린 채 따라오는 그 장면은 꽤 장관이었다.
셀은 그 너머를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눈으로 보이는 것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셀이 눈을 게슴츠레 뜬다. 그런 셀의 곁으로 한 남자가 다가왔다.
“잠이 많이 없으신가 보군.”
-네.
굉장히 짧은 단답이었다.
말을 하고도 신경 쓰였는지 셀이 말을 덧붙인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유제하는 웃고 말았다. 이건 버릇이 없다거나 그런 종류가 아니었다. 낯을 많이 가린다고 해야 하나.
그렇게 둘은 말없이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이어서 노아호에 있던 샬롯도 잠에서 깼다. 하후돈도 잠에서 깼다. 모두가 잠에서 깬다.
유제하는 조용히 등에 차고 있던 수라도를 뽑았다.
샬롯은 허리춤에 있는 단검을 다듬었고 하후돈은 창을 뽑았다.
셀이 눈을 감는다.
아까 느꼈던 그 위화감은 바로 이것 때문이었나 보다.
눈을 떴다.
마궁의 주민들이 타고 있는 200척의 뒤쪽으로 그와 흡사한 숫자의 배가 있었다.
아니, 더 많았다.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앞쪽에서 오고 있는 배.
그곳에서 느껴지는 기운에 소름이 끼쳤다.
눈을 좁힌 유제하가 그를 유심히 살핀다. 이어서 미간이 구겨진다.
셀이 물었다.
-아는 사람인가요?
“……무림에는 삼왕이 있다는 거 들으셨나?”
-대충요.
“그 삼왕 중에 두 명의 왕이 사천맹을 다스리지. 한 명은 독왕 여화, 그리고 암왕 주체.”
-주체?
“사천맹의 실질적인 지배자는 두 명이네. 앞서 말한 여화와 주체가 그 둘이지. 하지만 여화가 팔이라면 주체는 머리, 둘의 역할은 달라. 또한 두 왕 중에 주체가 여화보다 강하다는 것은 이미 만 세상에 알려진 사실이지. 저 남자가 바로 주체일세.”
유제하의 손이 살짝, 떨려 온다.
“서천암왕, 주체.”
진심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 남자가 왜 저기에 있는 거지?
왜 저렇게 많은 배를 이끌고 이쪽으로 오고 있는 거지?
딱 보니까 저 배에 타고 있는 무인들의 수준은 꽤 높았다. 아니지. 꽤 높은 수준도 아니었다. 저건 분명 사천맹의 무인들이었으니까. 거의 대부분의 무인을 이끌고 온 게 확실하다.
400척, 500척, 점점 배의 모습이 보인다.
그러다 깨달았다.
사천맹과 접점이 없진 않았다는 것을.
패력무제 진우.
그를 누가 죽였나. 그의 아들을 누가 죽였나.
발렌타인이 죽였다. 진우는 사천맹의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거대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수라도제-!!”
바다가 진동할 정도의 고성이었다. 그 고성에는 묘한 즐거움마저 섞여 있었다. 그래, 저 목소리의 주인.
“오랜만일세-!! 잘 지냈는가-!!”
서천암왕 주체.
그에 대한 것은 대부분 베일에 싸여 있다.
하지만 딱 하나. 그의 성격은 유명하다. 호탕하면서도 가끔 이해할 수 없는 괴상한 일을 저지르는 남자. 괴짜이면서도 가끔은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남자.
“그러게 그때 사천맹으로 들어오라고 했을 때 들어오지 그랬나-!”
“…….”
“그랬으면, 이 바다에 수장될 일도 없었을 텐데, 아니 그런가-!”
유제하가 입술을 핥았다.
왕이다. 삼왕 중에서도 가장 강하다는 평가를 받는 남자.
경지는 이미 생사경을 넘어 신화경을 바라본다는 말이 있을 정도의 남자. 아마 신화경에 도달했을지도 모른다.
유제하는 호승심이 들끓어 올랐다.
하지만, 옆에 있던 셀이 슬쩍 그의 팔을 잡는다.
-생각만 하세요. 생각만.
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유제하는 아주 자연스럽게 끓어오르던 흥분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싸움의 기본이다. 가슴은 뜨겁게 대가리는 차갑게.
가슴과 대가리가 둘 다 뜨겁다면 그건 문제 있는 거다. 지금 문제가 생길 뻔했다. 이 아이. 대체 뭐지.
셀은 뒤쪽에 있는 하후돈과 다른 선원들에게 눈빛으로 명령했다. 배의 속도를 높이라고.
마지막으로 샬롯을 바라본다. 샬롯의 양손에는 단검이 쥐어져 있었는데 저 단검이 채워져 있던 허리춤에는 싸구려 검 한 자루가 더 걸려 있었다. 잭이 준 검이다. 저 흑해의 경계를 부술 수 있는 검.
둘은 뜻이 통했다. 고개를 끄덕인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머지않아 마궁의 주민들이 타고 있는 200척의 배가 속도를 높인다. 하지만 노아호는 지금의 속도를 유지했다. 200척의 배들이 노아호를 스쳐 지나간다.
200척의 배 중 가장 앞쪽으로 샬롯이 자리를 옮긴다. 하후영도 옮겼다.
하후돈만이 셀의 옆에 섰다. 하후돈이 말했다.
“거리는 대충 28km. 저쪽의 속도가 빠르긴 하지만, 아슬아슬하겠군.”
셀은 고개를 들었다. 28km의 거리를 뚫고, 뱃머리에 양발을 올린 채 서 있는 서천암왕과 눈을 맞췄다.
그의 키는 작지 않았다.
180cm. 몸무게는 약 80kg.
머리는 짧았고 수염은 없었다. 외모는 30대 중후반으로 보였다.
이어서 셀의 몸에서 빛이 터져 나온다.
키는 커졌고 뿔은 솟아났다.
가까이에 있던 유제하가 놀란 표정을 짓는다. 하후돈도 마찬가지였다. 말로는 들었다. 인간이 아니라고.
그런데 이렇게 직접 보니까 색다르다.
뭐라고 해야 할까. 이게 드래곤이구나. 이게 전설 속에 존재한다던 용龍이구나.
셀이 작게 말했다.
-왜 그렇게 쳐다봐요?
“……음, 아무것도 아닐세.”
유제하와 하후돈은 머리를 긁적였다. 잠시 동안의 여유였다.
사천맹의 함선들과의 거리는 여전히 차이가 있었다.
셀은 잠시 동안이지만 생각했다. 싸워야 하나 아니면 피해야 하나.
답은 하나였다. 사실 생각 자체가 무의미했다.
피해야 했다. 혼자가 아니니까. 함선의 행렬을 책임졌으면 말 그대로 책임을 다해야 하니까.
그 책임감이라는 것을 잭에게 배웠다.
셀의 모습을 확인한 주체가 외쳤다.
“세상이 참 좋아졌어-!”
셀은 말없이 주체를 응시했다.
“영물이 인간의 행세를 하다니, 꼬마야-! 내 궁금해서 그러는데 하나 물어봐도 되겠냐.”
주체가 볼 수 있는 것은 하나였다. 손을 천천히 들고, 그 손으로 이쪽을 겨누는 셀의 모습.
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냥 물었다.
“너의 심장을 먹어 보고 싶은데 한입만 주지 않으련?”
셀은 그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미친놈을 보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셀의 손을 중심으로 기운이 뭉쳤다. 마나가 압축되었고 계속 압축되었다. 중앙에서 회전했고 서로 충돌하며 마나가 분리된다. 분리된 마나는 또다시 충돌했다. 잘게 부서져 나가며 입자 단위로 뭉친다. 이건 다르게 보면 증폭이었다.
과거의 드래곤은 총 3개의 언령 마법을 사용했다고 한다. 틀린 말이다.
정확히 말하면 ‘과거의 일반 드래곤’이 총 3개의 언령 마법을 사용한 거다.
로드급의 드래곤은 다르다.
오직 로드급이 되어야 사용할 수 있는 언령 마법이 추가로 3개가 더 있다. 그 3개를 셀은 배웠다. 누구한테 배웠냐면 발렌타인에게.
지금 하려는 게 그 3개의 언령 마법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