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ebula’s Civilization RAW novel - Chapter 115
115화
“어처구니가 없군.”
레딘 비알 오서는 다소 황망한 기분을 느끼며 굴속을 걷고 기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레딘은 괜찮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은 창류의 사제들과 코볼트들이 벌인 실수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게다가 레딘은 자신이 트롤이라는 것에 언제나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코볼트들도 손쉽게 해내는 일을 트롤이 해내지 못할 게 무어냐고도 생각했다.
“망할 코볼트 놈들, 굴 파는 걸 얼마나 좋아하는 거야?”
하지만 다시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레딘의 생각과 달리 굴속을 걷거나 기어 다니는 일이 쉽지 않았다.
허리를 숙이고 걷다가 굴이 좁아지면 무릎을 대고 기어서 간다.
익숙하지 않은 동작을 반복하며 평소 쓰지 않는 근육을 써야 한다.
트롤이라는 강건한 신체임에도 체력이 달릴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다른 문제가 있었다.
레딘이 의지하고 있던 횃불이 꺼져 가고 있었다.
“아직 굴을 다 확인하지 못했는데…”
레딘은 이미 좌수법과 같은 고대 유적 탐사 방식이 너무 오래 걸릴 거라고 판단했기에, 통로를 걸어갔다가 돌아 나오는 식으로 확인했는데도 시간이 부족했다.
레딘은 등골이 아찔해지는 감각 이후로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사타구니 사이로 힘이 바짝 들어갔다.
“…아니, 아냐. 겁먹을 필요는 없어.”
레딘은 어두운 굴속에서 잠깐 동안 잊고 있던 자신의 신분을 자각했다.
스물한 번째 자식이기에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했던 과거는 이제 없었다.
이제는 왕의 대리인으로 외교 행사에 참석할 정도로 레딘은 데르말딘 비알 오서의 자식 중 가장 널리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설마하니 석면의 이름을 무시하진 않겠지.”
레딘은 이제라도 창류의 사제들이 허겁지겁 자신을 찾아다니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 모습을 생각하자 긴장이 풀리고 입가에 실소가 걸릴 정도였다.
“갓난애도 아니고, 어둠을 두려워해서 되겠나.”
하지만 레딘은 횃불이 꺼지고 창류의 사제들이 찾아오는 것과 별개로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것은 체질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생각해 보니 어차피 위로 굴을 파고 올라가면 될 일 아닌가?”
어차피 종교 의식을 체험하는 과정에 가까울 뿐, 사제가 말했던 것처럼 조금만 파고 올라도 되지 않겠냐는 판단이 섰다.
그 사실을 뒤늦게 떠올렸다는 것이 자신이 너무 바보 같다고 생각하며 레딘은 굴속에서 가장 지표에 가까울 거라고 판단한 자리로 가서 굴을 파기 시작했다.
굴 때문에 다소 건조된 흙들이 나무 토대 사이에서 가볍게 곡괭이에 무너졌다.
“이럴 거면 진작 움직이는 게 나았겠군.”
그리고 레딘은 이 일이 생각보다 어렵다는 걸 알았다.
검을 내려치는 것과 곡괭이를 휘두르는 것은 달랐다.
동작에 쓰이는 세세한 근육의 차이는 물론이고 검은 한 번 전투에서도 열댓 번 휘두르면 이길 수 있지만, 곡괭이는 열댓 번은커녕 수백 번을 휘둘러도 소용이 없었다.
“아직 멀었나?”
횃불이 완전히 꺼졌다.
“…아직도?”
몸을 식히고 땀을 닦아 내는 짧은 휴식을 몇 번이나 가졌다.
굴 아래로 내려가 소변을 두 번이나 보고 왔다.
팔이 뻐근해 더 이상 올라가지 않자, 레딘은 곡괭이질을 멈추었다.
눈꺼풀까지 무거워져 한 번 감기자 레딘은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이제는 정말 레딘도 인정해야만 했다.
“이상하군.”
잠깐 잠들었던 시간이 생각보다 짧았을 가능성은 있었다.
횃불도 공기가 잘 통하지 않아 금세 꺼졌던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레딘은 스스로 옛 전사의 피를 이은 전사라고 생각했고 몸을 쓰는 일에 대해서라면 제법 잘 알았다.
빛 한 점 없으므로 시간이 정확히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른다.
다만 이 정도로 피로하다면, 굴을 파기 시작한 지 적어도 한나절은 지났음이 분명했다.
“거대한 농담 같군.”
사실 레딘은 자신이 제대로 하늘을 향해 굴을 파고 있는지도 의심이 들었다.
굴은 구불구불하게 팔 수 밖에 없었다.
간혹 레딘이 가진 트롤의 힘으로도 어찌 할 수 없는 거대한 바위가 나타나기도 하고, 흙이 너무 질어 무너져 내릴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피해 가야 했으니까.
그럼에도 어느 정도는 하늘을 향해 가고 있다고 확신했다.
“모든 물질은 아래를 향해 떨어지니까.”
레딘은 흙을 한 줌 부수어 떨구었고, 자신의 발등에서 떨어지는 흙을 느꼈다.
그럼 머리 위를 부수어 굴을 만들어 가면 올라가고 있긴 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레딘은 땅 속에 있었다.
“…함정인가?”
함정이라면 누가 만든 함정이란 말인가?
아버지의 함정이라고 해도 석면에서 만굴은 너무 먼 땅이었다.
게다가 너무 허술했다.
레딘이 졸지도 않고 의욕적으로 굴을 팠다면?
애초에 레딘은 축제에서 흙에 몸을 묻힐 생각도 없었다.
창류의 사제가 마지막까지 권했을 때도 레딘은 그만둘 생각이 절반이었다.
“…그럼 왜?”
레딘은 꾸벅꾸벅 졸다가 잠들었다.
몇 시간, 어쩌면 몇십 분 뒤 깨어난 레딘은 허기가 몰려왔다.
레딘의 주머니에 풀 같은 게 집혔다.
망로초였다.
“…이걸 먹으면 힘이 난다고 했던가?”
레딘은 주저하다가 망로초를 씹었다.
다른 누군가가 구해 주러 온다고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니만큼 레딘 스스로 땅을 파서 밖으로 나가야했다.
그러기 위해선 무언가를 먹으면서 버텨야 했고, 아직 힘과 체력이 남아 있는 지금 꾸준히 땅을 파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레딘이 기대했던 것 이상의 놀라운 활력이 몸속을 돌았다.
역시나 망로초에 대한 소문처럼 어지러움이 있었지만 생각한 것보다는 버틸 만했다.
레딘은 꾸준히 굴을 파고 들어갔다.
다시 레딘의 팔이 무거워질 시점에서, 레딘은 또 한 줌 흙을 들었다.
“확실히 위로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망로초는 코볼트들에게만 효력이 있고 트롤인 나에겐 효력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확인은 한 번 해야겠지.”
레딘은 흙을 부수어 떨구었다.
그러자 흙 알갱이는 레딘의 얼굴을 향해 떨어졌다.
“…뭐?”
입을 벌린 레딘의 입으로 흙 알갱이가 쏟아졌다.
거꾸로 서 있다는 것을 자각하자마자 앞으로 굴러 버렸다.
지금까지 똑바로 서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머리를 바닥에 대고 벽에 거꾸로 기대고 있었던 것이다.
레딘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그저 피곤하다는 이유로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고 생각했을 뿐.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모든 것이 땅을 향해 떨어지는 진리가 바뀔 수는 없다.
그렇다면 문제가 일어난 것은 흙 알갱이가 몸에 닿는 감각 자체의 문제일 확률이 높았다.
레딘은 망로초가 소문보다 더한 물건이라고 확신했다.
망로초는 단순히 방향 감각을 잃게 만드는 약초가 아니었던 것이다.
촉각 이상을 넘어, 환촉 효과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추측할 수밖에 없겠군.’
망로초의 효과와 별개로 레딘은 자신이 창류의 수행 사제들이 겪는다는 ‘빈 하늘의 시험’과 완전히 똑같은 상황에 놓였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 상황은 좀 더 나빴다.
먹을 음식은 망로초뿐이고 지쳐 쓰러져도 도와줄 선임 사제가 없었으니까.
이대로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가 레딘의 몸을 가로질렀다.
“아무도 모르는 허망한 죽음. 이보다 나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레딘의 그 생각조차도 틀렸다.
레딘은 자신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땅을 팠다.
배가 고플 때마다 길을 잃게 만드는 망로초를 먹어야 했다.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만으로 땅을 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레딘을 휘감는 공포는 끔찍해졌다.
이렇게 위로 나아가고 있지만, 사실은 더 깊은 곳으로 향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최선을 위한 노력임에도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죽음을 위한 귀결로 이어진다는 것은, 일종의 실존적인 공포였다.
지금 이 순간 레딘의 자유의지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레딘은 욕설을 내뱉으며 곡괭이로 굴을 파다가도 멈춰 서서 비명을 질렀다.
그러다가 관습적으로만 믿고 있던 신의 이름을 절실하게 불렀다.
─┼
-행자여.
지쳐 쓰러졌던 레딘은 자신 마음속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눈을 떴다.
다시 감았다.
어둠 속에선 눈을 뜨나 감으나 마찬가지였다.
-행자여.
어둠 속에서 몇 번의 환청을 경험했던 레딘은 그 말을 무시했다.
하지만 그 마음속의 말은 부지런히 레딘을 불렀다.
레딘은 이번 환청은 다르구나 생각하며 답했다.
-행자여.
“난 행자가 아니다.”
-아니다. 그대는 창류의 시험을 겪고 있으니 행자가 맞다.
“그렇다고 치자. 넌 누구지?”
목소리가 말했다.
-난 아직 이름이 없다. 나는 속선에 의해 모습이 다듬어졌고 창류에 의해 의식을 부여받았다. 두 신의 창조물이 내 정체성이다.
“…황당한 이야기군.”
레딘은 자신이 단단히 미쳐 간다고 생각했다.
두 신 사이에서 만들어진 창조물, 즉 이것은 속선과 창류의 자식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지?”
-두 신은 야천을 상대하려 한다. 하지만 다섯 신의 힘으로도 야천은 강대한 적이다. 여러 가지 방편이 필요한 것이지.
이것은 또 사리에 맞는 말이었다.
“내게 왜 나타났지?”
-널 도와주러 왔다.
“그런 환청이 몇 번이나 나를 다녀갔다. 여전히 난 거기에 있고.”
-널 이 시험에 빠트린 것이 자신이라고도 하던가?
“뭐?”
목소리가 말했다.
-너를 내가 함정에 빠트렸다. 나는 속선으로부터 서로를 엮을 힘을 이어받았고, 창류로부터 거짓을 비추는 힘을 내려 받았다. 나에게는 쉬운 일이었다.
이상하게 레딘은 분노하지 않았다.
이 모든 건 기이한 일이었고, 그럼 신들의 조화 속에서 길을 잃은 것일지도 몰랐다.
신들이 하는 일에 화를 내어 무엇 하겠는가?
샘솟은 것은 의문이었다.
“왜?”
-답은 스스로 알게 될 것이다. 정면을 곡괭이로 파라.
“뭐?’
-밖으로 나가지 않을 건가?
“아니, 왜 머리 위가 아니라 정면을 파라는 것인지…”
-그곳이 위다.
레딘은 주저했지만 그냥 그렇게 했다.
곡괭이를 휘두르고 나서야 레딘은 자신이 바닥에 누워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번에는 아래.
레딘은 이번엔 물구나무 서 있었음을 알았다.
-이번에는 등 뒤.
레딘은 이 모든 것 또한 허상이며 자신의 본능은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말도 안 되는 지시에 따라가서는 안 된다고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레딘에겐 더 이상 아무런 힘이 없었다.
목소리를 듣고 따라가는 것만이 레딘의 의지였다.
“젠장, 도대체 언제까지…”
-무릎 꿇고 앉아, 바닥으로 손을 뻗어라.
“음.”
레딘은 주저하며 손을 뻗었다.
레딘이 나아가려 할 때마다 막아서던 단단한 밀도는 없었다.
손목 사이로 빛의 고리가 걸렸다.
“설마.”
레딘은 곡괭이를 집어 던지고 양손으로 허겁지겁 땅을 팠다.
아래가, 곧 위였다.
레딘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내밀었다.
빈 하늘이었다.
레딘이 한 번도 없는 광야의 풍경.
해가 떠오른 지 시간이 꽤 지난 아침인 것 같았고, 아침의 열기로 불어오는 바람이 세찼다.
레딘은 흘린 줄도 몰랐던 땀을 차게 식혔다.
레딘은 자신을 도와준 목소리에게 감사를 표할 요량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때 목소리가 싸늘하게 말했다.
-이제 알겠나?
그 말에 레딘은 각성의 순간에 도달했다.
목소리의 힘이 분명했다.
레딘은 자신의 삶을 아우르던 모든 순간을 자신의 눈이 아닌 제3 자의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이번 굴속에서의 공포만이 아니었다.
모든 순간 신의 손길이 닿아 있었다.
자신이 꿈꿔 온 어머니의 복수도, 아버지에 대한 분노도, 죽음으로부터 공포도, 그 감정을 억누르기 위한 모든 행위들이 ‘만들어진 것’에 불과했다.
레딘은 신들의 비의를 엿보고 있음을 알았다.
자신의 감정도, 감각도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
오직 분명한 것은 하나뿐이었다.
“…신의 뜻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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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즈덤이 중얼거렸다.
“개체의 조종이 불편한 게임이라면, 편하게 조종할 수 있도록 고치면 그만이지.”
장완이 호응했다.
“우리 둘이 플레이 방식이 닮아서 다행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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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걸어가라.
야트막한 언덕 아래로, 레딘은 수많은 창류의 사제들이 자신을 향해 엎드려 있음을 알았다.
-저들 또한 그대와 같은 결론에 이르렀으니, 믿는 신은 달랐으니 그대들은 서로 다르지 않다.
“그런가.”
목소리가 말했다.
-이제 결합을 시작한다. …신을 받아들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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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가 된 레딘 비알 오서는 코볼트 사제들의 시체 사이에서 일어났다.
망로초의 효력이 다했다.
레딘은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레딘은 자신의 아버지가 있는 북쪽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