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ebula’s Civilization RAW novel - Chapter 123
123화
‘항복이라.’
크람푸스는 성운의 말이 갑작스럽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다섯 동맹과 흑린의 싸움 중, 단염과 흑린의 싸움은 부분에 불과했다.
단염은 다른 나라들이 병력을 준비하기 전, 시간을 끌기 위한 전략을 취했다.
‘결과적으로 목표를 달성하진 못한 것 같지만.’
시간을 끈다는 전략적 목표가 좌절된 것과 별개로, 단염은 흑린에게 사실상 패배한 셈이었다.
왕이 된 바비카 돌란이 수도인 데이머릿으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바센 라크 오라즌의 군대를 들인 시점에서 이 싸움은 끝이 났다.
만약, 최종적으로 흑린이 다섯 동맹에게서 승리한다면 이렇게 패배하는 쪽이 더 나을지도 몰랐다.
크람푸스도 로스트 월드를 꽤 많이 플레이했다.
전쟁은 사실 참여한 모두가 패배하는 게임이다.
안 하는 것이 제일 좋고, 한다면 피해가 적을수록 좋다.
‘피해를 내야만 한다면, 이기는 게 좋긴 하지만… 이미 패배한 게임이니까.’
하지만 크람푸스는 성운의 가면을 보자마자 별안간 떠오른 질문을 던졌다.
“네뷸라.”
“뭐지?”
크람푸스가 말했다.
“넌 내가 게임을 못하는 거 같냐?”
성운은 삐딱하게 크람푸스를 바라보며 팔짱을 꼈다.
의도를 살피려는 것 같았지만 곧 아무래도 좋다는듯 답했다.
“아니. 내 생각엔 나쁘지 않은데.”
“그래? 그럼 내가 왜 진 거지?”
성운은 자신의 가면을 검지로 툭툭 두드렸다.
“아직 진 건 아니지. 항복한다고 안 했으니까.”
“했다고 치고.”
“항복한 건 아니고, 했다고 친다고?”
“그래.”
“곤란한데.”
크람푸스가 말했다.
“가끔은 승자의 입장에서 여유를 좀 부려 보는 거 어때? 이미 끝난 부분에 대해서 말한다고 노하우가 새어 나가진 않을 거 아냐.”
“그런가?”
성운이 말했다.
“그럼… 내가 더 잘해서?”
크람푸스는 잠시 먼 산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성운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거 말고는? 내가 널 이길 기회가 없었나?”
“자세하게 말할 생각은 없지만, 솔직히 말해서 없었지.”
“보여 주지 않은 카드가 아직 있었다는 뜻이군.”
“난 아직 상대할 사람이 넷이나 남았잖아?”
크람푸스는 그 부분은 납득하기로 했다.
“그럼, 좀 더 시야를 좁혀 보자고.”
“어떻게?”
“다른 변수가 없다고 가정할 때, 라크락이 단염의 왕을 죽인 뒤부터 딜파 협곡 전투, 그리고 아란주가 바센에게 항복하기까지 일주일 사이에 널 이길 방법이 없었나?”
성운은 잠깐 고민하는가 싶더니 말했다.
“있었지.”
“뭔데?”
“왕이 죽자마자 바비카를 처형하고, 유바임 돌란 대장군을 딜파 협곡에서 후퇴시키는 거지.”
크람푸스는 성운의 아이디어를 가늠해 보았다.
바비카 톨로를 죽인다고 하면, 바비카 만큼의 다른 유력자가 없으므로 그 죽음은 신탁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제 아무리 바비카라고 하더라도 신탁을 무시할 수는 없다.
나름의 저항이 있겠지만 바비카를 죽이는데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이도저도 아니면 그냥 ‘신벌’을 내려 버리면 그만이었다.
소영역이 충분히 오르면 사용할 수 있는 스킬 신벌은 플레이어를 신앙으로 삼는 개체들을 조건을 걸고 피해를 줄 수 있는 스킬이었다.
크람푸스는 잘 사용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위즈덤의 경우에는 공공연하게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 줬다.
크람푸스도 그런 플레이가 효율적이라는 건 인정해야만 했다.
어찌되어든 바비카 톨로를 처리하고 나면 내성은 안정되기보다 더 큰 혼란에 빠진다.
언뜻 보기엔 좋은 수처럼 보이지 않지만, 대장군 유바임 돌란이 후퇴하여 데이머릿으로 돌아오면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유바임에게 어떻게든 권력이 집중될 것이다.
유바임은 왕가를 걱정하는 충신이나, 당장의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서란 명목이라면 내성을 안정시키기 위해 자신의 힘을 사용할 테고, 적어도 흑린군이 데이머릿에 도달하기 전까진 끝낼 터였다.
‘그리고 딜파 협곡에서 실패한 전략이 아닌, 이상적인 공성전을 이어나간다고 가정하면…’
성운이 무슨 수를 숨겨 두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지금의 결과보다는 좋을 것 같았다.
성운이 말한 아이디어는 충분히 그럴듯했다.
“하지만…”
“뭐지?”
“난 그때그때 최선의 수를 선택한 거다. 왕이 죽었으니 그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바비카 톨로에게 맡겼고, 유바임 돌란이 돌아왔으니 위기를 넘기기 위해 바비카가 유바임을 죽이는 걸 넘어가 줬고. 아란주는 너무 빨리 움직여서 생각을 깊게 하진 못했던 패착이 있긴 하지만… 꼬인 건 그 이전부터니까.”
성운은 딱히 반론하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기기 위해선 그때그때 최선의 수로는 부족하다는 말이지.”
크람푸스가 질문했다.
“그럼 뭐가 더 필요한데?”
“계획.”
“…생각해 둔 건가? 즉답인데.”
“대응을 잘하는 것만으로는 게임에서 못 이기니까.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어야지.”
크람푸스가 흥미롭다는 듯 염소수염을 쓸어내렸다.
“그럼 너는 일이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다는 말인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지.”
“무슨 뜻이야?”
성운이 설명했다.
“우선, 계획대로 풀린 건 바비카 톨로가 권력욕에 취했다는 점이야. 각국마다 요인들은 파악하고 있는데, 바비카는 그 권력욕 때문에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인물이었지. 왕이 죽으면 움직일 거란 계산이 있었어.”
크람푸스는 성운이 라크락을 통해 단염의 왕을 죽인 것이 단순히 과시 행위나 일종의 테러가 아니라 계산된 일이었다는 것에 놀랐다.
너무 과격한 행동이기 때문에 충동적인 부분이 없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대장군 유바임은?”
“내 생각엔 허무하게 죽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내가 생각한 그림은 바비카와 유바임이 데이머릿에서 마찰을 빚는 그림이었거든.”
“…과연.”
그렇게 될 경우도 없지 않았다.
바비카가 유바임을 죽이지 못한다면, 그 경우 바비카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유바임에게 끊임없이 권력을 확인하려 들 테고 명령 체계에 문제가 생길 터였다.
성운이 계속 말했다.
“그 경우에 바비카 또는 유바임이 상대를 처리해 버리기 전까진 흑린군이 유리할 거라고 봤지. 그 사이 속전속결로 입성하는 게 목표였어.”
“…음.”
“그런데 일이 계획대로 풀리지 않아서…”
“결과적으로 운이 좋았다는 말이지?”
“더 말해 뭐 하겠어?”
두 플레이어는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성운이 말했다.
“그래서 항복할 생각은? 지금 항복하면 조건을 썩 괜찮게 맞춰 줄 수 있는데.”
크람푸스는 쓰게 웃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항복 안 해.”
크람푸스는 곧장 성운의 화상 채팅창을 꺼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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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람푸스 님은 무슨 생각이실까요?”
“아직 게임 안 끝났잖아? 끝까지 해 보겠단 거지. 난 좋은 태도라고 생각하는데.”
“저라면 포기했을 텐데요.”
성운은 엘다르를 바라봤다.
엘다르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아니, 자포자기하는 게 아니라, 저라면 저를 믿는 엘프들이 가여워서요.”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음.”
“그것도 나쁜 태도라고 생각하진 않아.”
성운은 엘다르와 함께 데이머릿을 내려다보았다.
데이머릿은 높은 성벽 안에도 농지가 있는 데다, 강을 끼고 있다.
단염이 수성전을 제대로 벌였다면 흑린으로서는 난전을 각오했어야 했다.
‘전투 없이 입성하긴 했지만, 이걸 또 무작정 운이 좋다고 할 수는 없겠지.’
성운의 반대편 멀리에는 크람푸스가 있었다.
크람푸스 또한 성운처럼 시스템 창을 이리저리 조작하며 자신의 플레이를 하고 있었다.
‘뭘 하려는 건진 알겠어. 하지만 당장 손을 댈 수는 없으니…’
성운은 우선 필요한 일들이 진행되고 있는지 확인했다.
바로 단염의 항복을 문서화하는 과정이었다.
단염의 항복은 빨랐다.
이 말은 단순히 단염의 새로운 왕 아란주 돌란이 겁이 많았다거나 섣부른 판단을 했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바센 장군, 당신이 가진 군대보다 단염 내부의 군대가 더 많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내가 항복하지 않았더라면 많은 피해를 입었으리란 건 자명해.”
“…음. 하지만 피를 보고 싶지 않은 건 단염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리고 현재 단염군은 모두 무장 해제가 끝났다. 맨손으로 봉기하겠다면 말리지 않겠어. 우리를 성에 먼저 들인 건 그쪽이니 후회는 없으리라 보는데.”
“그렇다고 해서 과도한 요구를 하게 되면 단염의 민심을 살피지 못한 결과를 가져올 텐데. 또한 우리의 말은 결국 다른 동맹에게도 알려질 테고. 흑린이 가혹하다는 이야기가 들리면 우리와 같이 항복하는 이들이 또 있겠나? 흑린은 계속해서 어려운 싸움을 이어가고 싶은 건가?”
항복했지만 아란주 돌란은 당당한 태도를 유지했다.
마치 자신이 왕이라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정말로 태어날 때부터 왕족의 피를 이어받기라도 한 것처럼.
바센은 내부자를 통해 아란주 돌란에 대한 대강의 이야기를 들었다.
어려서부터 말타기와 칼싸움을 즐겼고 동네 아이들과 왈패를 이루어 들판을 돌아다니다 머리가 굵어졌을 때 아버지의 추천으로 무관이 되었다.
따지고 들면 왕족이 아니라는 점만 제외한다면, 바센 자신과 크게 다를 것도 없는 이였다.
‘며칠 전까진 왕이 될 꿈을 꾸기는커녕, 자신이 왕이 될 것도 몰랐을 텐데.’
답을 아는 건 성운이었다.
‘왕이 되는 건 개인에게 있어 정말 거대한 사건이지. 심지어 왕족도 아니라면. 왕이 되면서 능력치가 크게 상승했어. 그리고 보이지 않던 스탯인 매력과 지도력도 준수한 수준으로 올랐고. 잠재되어 있었던 거야. 단지 플레이어로서는 알 수 없었던 거지.’
하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아란주 돌란은 강국인 흑린과 유능한 장군인 바센을 상대로 단염의 권리를 쉽게 빼앗기지 않고 잘 해내고 있었다.
물론, 성운은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바센은 원래 이런 협상 테이블에 앉는 건 잘 해낼 능력치가 아니었다.
바센 뒤에는 카일 라크 오라즌이 있었다.
‘어차피 오라즌에서 올 소식을 기다려야 할 테니까.’
당장 필요한 간단한 조약은 이미 맺어진 상태긴 했다.
흑린군은 전투 승리에 대한 보상금과 별도로 체류 비용을 모두 데이머릿에서 받는 대신, 약탈은 금지되었다.
다행히 흑린군 또한 딜파 협곡에서는 대승을, 데이머릿에 입성하면서는 피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약탈이 금지되었다고 해서 큰 불만이 나오진 않았다.
군대의 구성 대부분이 전쟁 경험이 적은 이들이란 점도 다행이었다.
흑린군이 체류하면서도 심각한 치안 문제가 발생하지 않자, 내성에서 암투가 이어지는 동안 경직되었던 데이머릿 또한 어느 정도 활기가 돌았다.
하지만 그 활기 사이에 두 플레이어의 손길이 오가고 있었다.
성운의 부탁으로 엘다르 또한 손을 거들었지만, 성운은 이 싸움만큼은 승리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기지 않아도 괜찮은 것인지요?”
“응. 이건 군대가 싸우는 것과는 달라. 데이머릿은 이미 크람푸스가 차지한 구역이니까, 이기는 건 불가능하지. 흑린군을 보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데이머릿 외곽의 외딴 숲속, 무너져 가는 폐가, 어두운 골목길.
데이머릿의 활기 사이로 얼굴을 가린 이들이 새벽 중에 은밀히 모였다.
그런가 하면 단염의 귀족들이 등에 칼을 맞고 죽거나, 잠자는 중에 심장에 찔려 죽기도 했다.
오라즌에서 오는 사신단을 기다리는 며칠 동안 데이머릿에서 꽤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성운은 다른 일을 위해 자리를 비웠다가도 틈틈이 데이머릿으로 돌아왔다.
“이제 끝나 가는 것 같군.”
이 며칠 사이 일어난 일은, 플레이어들끼리 ‘가지치기’라고 부르는 일이었다.
불분명한 것들은 떨어져 나가고 자신의 편과 아닌 편을 가르는 작업이다.
이 작업은 플레이어에 의해서 일어났다.
플레이어들은 각 개체들 중 신앙이 불분명하거나 약한 이들을 시험하고, 선명하게 한쪽으로 기울도록 했다.
그러다가 다른 쪽으로 넘어갈 것 같으면 다른 신도를 시켜 살해하도록 계시를 내리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적과 아군이 선명히 구분되는 것이다.
“이제 숨겨져 있던 신앙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거지.”
성운의 말대로였다.
이른 아침.
단염과 사티로스의 신, 무진을 추종하는 이들이 데이머릿의 광장에서 흑린과 야천을 모욕해 댔다.
모여선 군중들이 그들의 말을 듣고 연신 동의를 했다.
광장의 무진을 추종하는 선동꾼이 말했다.
“밤중에 무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흑린에게는 항복할 수 있지만, 야천에게 항복해선 안 된다고!”
그 말에 군중들이 열띤 환호를 보냈다.
엘다르가 성운에게 말했다.
“잠깐, 이렇게 되면… 벌써 그 이벤트가 나오는 건가요?”
“그래.”
성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교분리(政敎分離)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