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ebula’s Civilization RAW novel - Chapter 196
196화
“알마.”
분노하는 자의 다섯 번째 사도, 자신을 삼키는 뱀, 라미아 알마 알로이는 세계의 벽을 넘고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다.
이제 막 자신의 지휘천막에서 눈을 뜬 알마는 세상이 수축하는 것을 보았다.
자신은 분명 가만히 있는데도, 지휘천막의 입구가 당겨져왔고, 그 너머의 자랑스런 연합왕국의 병사 진지들이, 그리고 새벽 훈련을 마치고 복귀하는 훈련병들과, 제4 대륙의 숲과 초원이 그려내는 원경이 자신의 시야 안쪽으로 압축되었다.
시야 안의 풍경들은 각각의 선으로 좁혀지더니 이내 바다와 하늘의 경계를 넘었고 어느새 자신이 익히 알고 있는 분노하는 자의 전당으로 가득찼다.
분노하는 자의 전당의 수 많은 문들이 차례대로 열리는가 싶더니 높은 단상 위의 거대한 왕좌가 보인 순간, 알마에게 현실 감각이 되돌아왔다.
분노하는 자가 눈가에서 불길을 뿜으며, 알마 알로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분노하는 자가 대륙으로부터 알마를 소환한 것이다.
알마는 머리를 덮치는 현기증 때문에 쓰러질뻔 했다.
하지만 가까스로 집중력과 인내심을 일으켜 자신의 길다란 하체를 비틀어 허리를 세웠다.
“알마.”
“예, 분노하는 자여, …부르셨습니까?”
라미아는 자신의 옷매무새가 형편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차마 건드릴 수는 없었다.
신과 신의 지배를 받는 필멸자의 관계가 아닌, 단순한 상관과 부하의 관계로 본다면 분노하는 자는 그렇게 나쁜 상관은 아니었다.
하지만 분노하는 자에게도 기분이 좋지 않을 때가 있었다.
특히나 그런 일은 야천과 그의 만신전을 상대하고 난 뒤 잦았다.
“내가 널 왜 불렀는지 아는가?”
알마는 고개를 숙였다.
알마 정도의 사도라면 직접 진행하는 크고 작은 작업만 하더라도 수 십 개는 되었고, 간접적으로 간섭하는 일은 수 백 개는 되었다.
알마는 신이 아니었고, 모든 일에 문제가 생기는 즉시 알지는 못했다.
몇 가지 짚어볼만한 일들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렇다고 분노하는 자 앞에서 적당히 넘겨짚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죄송합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방금 전체 신앙의 2%가 날아갔다.”
알마는 이제 신의 언어와 기준에 익숙해졌으므로 그것이 무엇을 얼마나 말하는지 이해했다.
작다면 작고, 많다면 많은 양이다.
현재 전선을 상시 유지하기 위한 신앙 자원이 전체의 절반 가량이고, 나머지 절반은 그때그때 창조물을 만들어내거나 기적을 사용하거나, 전투 시에 창조물들과 사제들이 힘을 발휘할 때를 위해 여유를 둔다.
큰 전투가 한 번 있으면 신앙 자원이 글자 그대로 바닥에 가깝게 떨어질 때도 있다.
‘하지만 일시적인 현상이라면 분노하는 자께서 심각하게 여기실 이유가 없다.’
알마는 자신이 맡고 있는 일들 중 많은 신앙이 오갈 수 있는 일들로 문제를 추렸다. 이제 분노하는 자가 언급하려는 사건은 양손의 손가락으로 충분히 추려볼 수 있을법 했다.
알마가 추리해내기 전에 분노하는 자가 먼저 말했다.
“알마, 뱀파이어에 대해 알고 있었나?”
“…네.”
알마는 이제 하나의 문제로 좁힐 수 있었다.
대략 백여년 전의 일이었다.
당시 가랑 왕국과 그 근방에서 통일 전쟁을 수행하던 알마 알로이는 한 계곡에서 실종자가 잦은 것을 알아차리고 조사를 시작했다.
그 조사 끝에 발견한 것은 한 뱀파이어의 존재였다.
알마는 그것을 당장 치워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우선은 분노하는 자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분노하는 자의 생각은 알마와 달랐다.
분노하는 자는 뱀파이어가 다른 신을 피해 도망온 것을 알고, 위안이 되도록 그 신을 흉내내었다.
가짜 신을 믿게 된 뱀파이어는 신앙의 증거가 되어 노예들에게 거짓된 신앙을 퍼트리게 만들었다.
그 노예들은 언젠가 구원이 올거라고 믿었고, 결국 죽어서까지 분노하는 자에게 예속되었다.
분노하는 자의 수 많은 기책 중 하나였으니 분노하는 자는 특별한 일이라고 기억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일은 수 없이 얽힌 실타래, 즉 인과의 아래에 있는 일이므로 그 누구라도, 그 상대가 신이라 하더라도 쉽사리 풀어낼 수 없을 것이므로 알마 또한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기어코 분노하는 자의 대적자가, 그 마신이 실마리를 찾아낸 것이다.
알마가 말했다.
“이빨을 시켜 그들을 쫓게 했습니다. 하지만…”
“그래. 실패한 것 같군.”
분노하는 자의 투구 안에서 울리는 날카로운 쇳소리가 알마의 가슴을 서늘하게 했다.
델은 유능한 자였고, 분명 노역장의 방비도 철저했다.
열차에서 그들을 찾아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그에 관해서 거의 신경쓰지 않아도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었다. 델을 내보임으로 인해서 놈들이 그 위치를 찾아냈구나.’
분노하는 자가 말했다.
“야천은 그들에게서 단순히 신앙을 빼앗는 것만이 아니라 그 가짜 신이 바로 자신이라고 말했다.”
“그런…?”
“나는 노예들을 기만하여 희망이라는 족쇄를 둘렀으나, 기어이 야천이 그것을 낚아챘다.”
알마는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 큰 문제라는 걸 깨달았다.
잃어버린 신앙 2%는 단순히 2%로 볼 수 없었다.
노역자들은 자신들이 믿는 신이 단순히 가짜라는 걸 알아차린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기대한 구세주로서 야천을 믿기 시작했다.
배후자에게 기대었던 신앙심보다 더 큰 믿음으로 야천을 따를 것이다.
게다가 배후자의 신앙을 유지하는데 뱀파이어는 불필요할 정도로 많은 기적을 강요당했다.
그 기적에 사용되는 신앙 자원은 분노하는 자가 아닌 야천에게서 쓰였다.
‘그럼 그 격차는 2%가 아니라 4%… 아니, 분명 그 이상이다.’
중요한 문제였다.
단순 신앙 자원의 크기만 봤을 때는 제국이 더 많이 가지고 있다.
하지만 제국은 연합왕국처럼 강압적인 정책을 쓰지 않기 때문에 소수 종족이나 곳곳의 반란군, 그리고 연합왕국 이외의 다른 나라와의 전쟁 때문에 더 많은 유지 비용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격차 때문에 힘의 균형이 맞아떨어진 상태였다.
오랜시간 국경에 변동이 없는 이유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 일로 균형이 깨졌다.’
격차가 5% 이상 나기 시작한다면, 단순히 힘의 차이라고만 볼 수 없다.
신앙을 통한 기적과 창조물의 배치, 그리고 사제들의 힘은 전략적, 전술적 가치가 더 크다.
지금까지 제국과의 전쟁에서 신앙 격차는 간헐적으로 5%, 그 이상 날 때도 있었지만…
‘이번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야. …연합왕국의 전쟁 교리 자체를 바꿔야할 정도다.’
사도의 지위라고 한들, 감히 목숨만으로 책임을 질 수 없다.
알마가 바닥에 두 손을 짚고 엎드렸다.
“벌해주십시오.”
분노하는 자는, 헤게모니아는 잠시 침묵했다.
헤게모니아는 자신의 게임 플레이 스타일을 알고 있었다.
날카로웠지만 플레이에는 언제나 고집이 있었다.
전체적인 맥락을 풀어나가기 보다는 적이 실수로 만들어내는 약점들을 완벽한 타이밍에 동물적인 감각으로 찾아내어 파고들었다. 그 고집이야말로 헤게모니아에게 승리를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그게 늘 승리로 연결되는 건 아니지.’
특히나 네뷸라와 같은 플레이어 앞에서는 더 그랬다.
파고들 틈이 없고, 틈이 생겨도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낼 궁리로 가득 찬 플레이어라면 헤게모니아는 자신의 강점을 발휘하기 힘들다.
시간이 지나면 헤게모니아는 자신에게 유리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유능한 플레이어도 집중력을 잃기 마련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과거의 잘못이 도드라지는 법.
하지만 정작 날카로움이 무뎌진 것은 자신이었다.
맥락없이 풀어나갔던 수 많은 변수들 중 하나가, 마치 마구잡이로 빌려댄 빚처럼 채무 상환을 독촉해오고 있는 것이다.
‘내 잘못이야.’
알마는 충성스런 부하였다.
알마는 이 일을 중요한 일로 보고하지 않았을 뿐 꾸준히 알려왔고, 관심을 가지지 않은 건 헤게모니아 자신이었다.
헤게모니아, 분노하는 자가 말했다.
“상벌을 논할 자리가 아니다.”
“하지만…”
“루베일에 천둥 도마뱀이 나타났다. 나는 이미 제1 사도를 내려보냈다.”
분노하는 자와 야천, 두 신의 힘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는 각각의 첫 번째 사도들은 지금까지 오랜시간 싸워왔다.
하지만 알마는 이번 싸움은 지금까지와는 다르다고 느꼈다.
“내 계산에 따르면 현재 격차는 7%. 향후 사후세계 반환이 일어나면 격차는 더 커지겠지.”
“….”
“이대로는 그 격차를 안고 천천히 패배할 수 밖에 없다.”
분노하는 자의 뿔투구 안으로 불꽃이 타올랐다.
“자리에서 일어나라, 알마. 이제 총력전이다.”
─┼
라크락의 창날이 이빨 요원과 경비대에게 들이닥쳤다.
창날과 지면 사이에서 번갯불이 요동쳤다.
그 사이에 휘말리는 것만으로 병사들이 피할 사이도 없이 타죽었다.
‘…죽는다!’
그 순간, 허공에서 무언가 떨어져내렸다.
-콰앙!
라크락을 향한 충격파가 먼지를 동심원 모양으로 밀어냈다.
라크락은 자신의 머리를 향해 내리쳐진 망치를 창대로 막아냈지만, 발 아래가 푹 꺼질 정도로 꺼졌다.
라크락의 뒤쪽 갱도 끄트머리가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무너져내렸다.
라크락이 망치를 들고 있는 놀에게 말했다.
“살카잇.”
분노하는 자의 첫 번째 사도, 잘린 귀 부족의 대족장이자 건국왕, 땅을 부수는 살카잇이 말했다.
“라크락, …오랜만이군.”
라크락은 창대를 비끼면서 망치를 흘렸다.
자신의 머리통만한 전쟁망치를 든 살카잇은 공방일체의 창날을 피하면서 재차 망치를 휘둘렀다.
서로 공방이 오가며 하늘에 우레소리로 가득해지고 땅에서 지진이 일었다.
두 사도의 싸움은 살아있는 자연 재해였다.
공격이 빗겨나갈 때마다 멀찍이 있던 이들마저 휘말렸기 때문에 이빨 요원과 경비대, 노역자들이 피아를 가리지 않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라크락이 살카잇의 공격을 피하며 라민에게 외쳤다.
“뭘 하고 있나? 휘경을 구해라!”
라민은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라크락의 목소리를 듣자 해야만 한다는 걸 알았다.
휘경과 주란은 저 멀리 도망치는 델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살카잇은 눈을 좁혀 뜨고는, 라민을 향해 망치를 내리쳤다.
라민은 일백미터가 가까운 거리였기에 살카잇의 실수인가 싶었다.
-콰앙!
하지만 땅이 쪼개지고, 그 균열이 자신의 발아래까지 이어지자 빠르게 몸을 굴려 피했다.
지면이 쪼개지며 단층이 서로 빗겨졌다.
라민은 맨땅에서 멀미를 느꼈다.
살카잇이 웃었다.
“하하! 갈 수 있겠나?”
재빠르게 라크락이 살카잇의 목덜미를 창날로 긁었다.
다시 공방이 이어졌다.
라민은 한 발을 내딛기 무섭게 부서져내리고 머리 보다 높게 치솟는 지형을 내달렸다. 몇 번이나 넘어져 머리를 박고 무릎을 찧었다.
“달려라!”
먼지 구름이 솟아서 보이지도 않는데도 라크락의 목소리가 들렸다.
라민은 이를 악 물고 언덕 하나를 올랐다.
‘이것만 넘으면…!’
하지만 언덕 위에서 보게 된 모습에 라민은 다리에 힘이 풀릴 뻔했다.
-고오오오…
집채만한 골렘이었다.
오로지 돌로 만들어진 것 같은 이 괴물은, 연합왕국의 전선에서 종종 보이는 존재로, 공성 골렘이라고 불렸다.
‘그렇구나, 여긴 연합왕국. 분노하는 자가 원하면 언제든지 그 괴물들을 내보일 수 있어.’
헤게모니아는 창조물을 쓸 때 플레이어들이 흔히 사용하는 템플릿을 그대로 사용했고, 공성 골렘은 많은 플레이어들이 즐겨 쓰는 대적자였다.
강하고, 튼튼했다.
자질구레한 특성이 없지만 덕분에 완벽한 효율을 자랑하는 괴물이었다.
‘그냥 내보내진 게 아니야, 전기도, 검도 통하지 않아. 날 막기 위한 수호자야.’
적들의 신에게도 눈여겨졌다는 점을 기뻐해도 좋을지 라민이 생각하는 사이, 공성 골렘의 주먹이 라민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쿵!
언덕 뒤로 충격음이 들려오자, 살카잇이 웃었다.
“하하하! 검은 도마뱀, 유감이군. 여긴 분노하는 자께서 언제든지 힘을 보태주실 수 있는 곳이라.”
“….”
“손이 모자란 게 유감이군.”
라크락이 말했다.
“내가 언제 혼자 왔다고 말했지?”
“…응?”
라크락은 생전에 자신의 군대를 대동했고, 이름 높은 전사들이 함께 하였다.
이 무적의 군대는 패배하는 일이 없었다.
그 전설을 모르는 이는 없다.
시간이 흘렀고, 사도 라크락의 명성이, 정확히는 레벨이 오르며 더 많은 전설들이 그의 힘으로 전환되었다.
이제 전설적인 뇌룡제왕은 그 이름에 걸맞는 과거의 전사들을 대동할 수 있었다.
공성 골렘의 공격을 막기 위해 검을 들었던 라민은 자신을 가린 그림자를 알아차렸다.
한 리자드맨이 방패를 들어 공성 골렘의 공격을 막아냈다.
리자드맨이지만, 라크락은 아니었다.
“누구…?”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듯 옅은 푸른빛에 휘감긴 검은 비늘의 리자드맨이 라민을 돌아보았다.
“…무엘.”
“저요?”
“아니.”
리자드맨은 방패로 공성 골렘의 공격을 밀쳐냈다.
힘싸움만으로 공성 골렘이 휘청이며 한 발 물러났다.
리자드맨은 고개를 치켜들고 공성 골렘을 노려보았다.
“내 이름은 사이란 무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