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layer who hides his past RAW novel - Chapter 490
◈ 491화. 밑거름 (7)
세계수.
아르카나 대륙에서 만물의 어머니는.
하이엘의 입을 빌려서 자신의 뜻을 전했었다.
그 기억을 떠올려보자면…….
‘굉장히 낯설었지.’
평소와 달라진 눈빛과 어조.
찰나였지만, 하이엘의 몸과 정신에 세계수가 깃들었다고 해야할 정도였다. 그런 의미에서 그랑펠이 다짜고짜 유감을 표한 이유는 짐작됐다.
“허락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다른 누구한테 허락할 것도 아니면서 같은 말을 해도 참…….
익히 알다시피 우리 그랑펠 님께서 어디 남에게 휘둘리실 분이신가? 설령 그게 아르카나 대륙의 어머니, 세계수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라는 뜻이다.
‘……받은 게 있는데, 죄송합니다.’
세계수 족보의 막내로서 나는 사과했다.
물론, 입 밖으로 낼 순 없었다.
마음의 소리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진심은 통하는 법이라고. 만물의 어머니라면, 철면피 아래에 숨겨진 나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지 않으실까……?
‘……말도 안 되는 기대를 해라, 호열아.’
내가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과연, 그런 거군요. 그대의 뜻을 존중하겠습니다.
세계수의 목소리가 답했다.
당사자이기에 직감할 수 있었다.
이건, 그랑펠의 뻔뻔한 거절을 존중하겠다는 게 아니다.
세계수는 내가 전한 사과를 받아들인 거다.
‘……잠깐, 내 생각에 대답했다는 건.’
혹시 세계수쯤 되면 알고 있는 거 아닐까? 클라우디 가문의 역사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도, 나 이호열이 어떠한 흑역사로 그랑펠과 닿게 되었는지도……!
‘아니, 그런 것까진 아실 필요 없는데……!’
갑자기 뺨이 뜨거워지던 때였다.
슥.
내 손가락이 흩날리는 이파리 하나 붙잡았다.
시간이 멈춘 듯한 정적 속.
다른 이들의 시선에서 나는 어떻게 보이려나.
어쩌면, 내가 세계수를 소환한 것처럼 비치고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마탑의 마법사들과 백이설은 물론.
‘현실이니까 어디선가 중계되고 있을지도 모르지.’
어쩌면, 전 세계가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나는 평온하게 손을 움직였다.
입술을 움직였다.
“이것은 그대의 안배가 아닌.”
……아직도 안 끝났구나, 그놈의 뒤끝!
“우리의 투쟁이니까.”
세계수의 안배가 아니라 투쟁이다.
그랑펠 님이 누구시던가?
그럴싸하게 생색내시기의 일인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신 분.
그랑펠은 이번에도 은근하게 생색을 내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오리에드의 변심도, 유그위드의 행동도, 현실보다 일찍이 아르카나 대륙에서 사투를 벌인 이들의 상처도, 이 순간 현실에서 눈을 감은 이들의 희생도.”
이번만큼은 나도 그 생색에 동참해야겠다.
‘세계수, 당신의 안배라고?’
그놈의 안배 때문에 벌어진 일을 봐라.
소외된 정령, 오리에드가 벌인 일을 봐라.
내가 만약 세계수, 당신의 안배를 긍정한다면.
나는 레이먼 션을 긍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솔직히 그 방법에 큰 차이점이 보이지 않으니까.’
나는 이파리를 세게 쥐었다.
“그렇다. 모두 우리의 선택으로 비롯된 것.”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우리 그랑펠 님께선 누군가에게 휘둘리는 걸 극도로 싫어하셔서 말이야. 세계수의 말을 전달하기를 거절하는 걸 넘어서 세계수의 안배,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순수하게 걱정이 된다.
‘혹시 이러다가.’
괘씸죄로 [첫 세계수의 축복]을 회수당하는 거 아닐까?
만약, 버프의 효과가 세상에 알려진다면.
나는 질타를 받을지도 모른다.
그런 사기적인 버프를 그렇게밖에 못 써먹었느냐는 질타를.
그 정도로 [첫 세계수의 축복]의 효과는 사기적.
그러니 아쉬워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소인배, 이호열과 세계수는 그릇의 크기가 달랐다.
그랑펠의 꼿꼿하기 짝이 없는 말에도.
세계수는 여전히 온화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러한 생각 또한 존중하겠습니다.
그건 비단 말뿐이 아니었다.
이파리를 쥔 그랑펠의 손아귀에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는 빛.
그에 맞춰서 시야가 점멸한다.
알 수 없음이라고 명시되어 있었거늘.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자연} 능력이다.
[스킬], 『마법』과는 또 다른 미지의 힘이기에.시스템조차 표현할 수 없는 제3의 힘.
‘마계 관련 퀘스트가 물음표인 것처럼.’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일까? 첫 세계수를 거절하고도, 나는 각성한 [첫 세계수의 축복]을 다룰 수 있었다. 정확하게는 이파리 하나에 담긴 힘이겠지만…….
스오오오.
거기에 격이 다른 나의 마력이 더해진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융합지성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골렘이 오리에드의 {자연} 능력과 유그위드의 『마법』을 융합시킨 기이 그 자체라고 한들. 말했잖아?
‘격이 다르다고.’
내게서 피어오르는 기이의 기세.
“이, 이, 이, 이럴 수가.”
그제야 이쪽을 돌아볼 여유가 생긴 건가.
홀로 융합지성체를 가로막았던 벤쉬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어쩐지, 감격한 듯한 눈빛.
“이 수석님! 뒤에 그건 설마 세, 세계수……?!”
그에게 나는 고개를 한 차례 끄덕여줬다.
“역시……!!”
나는 그런 시답지 않은 질문에 대답한 게 아니다, 벤쉬 윌리엄 선임. 내가 고개를 끄덕인 건 일종의 신호였다. 휘말리기 싫으면 당장 그 자리에서 텔레포트 하라는 신호.
대신하여 그 뜻을 알아차린 걸까.
뱅그릿.
그가 벤쉬를 향해 소리쳤다.
“벤쉬 선임님, 당장 피하세요!!”
우렁찬 목소리 덕분이었다. 벤쉬가 곧장 텔레포트를 발현, 융합지성체와 거리를 벌렸다. 이윽고,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울려 퍼지는 굉음.
쿠쿠콰콰쾅─
기이의 충돌.
나와 융합지성체.
한 치의 양보도 없는 힘 싸움의 후폭풍이.
이윽고, 마력 입자 폭풍 사이로 비치기 시작했다.
당황한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마, 마탑이……?”
과연, 쉽게 말을 잇지 못할만 하군.
아마도 아르카나 역사상 최초일 테니까.
마탑의 최상층이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린 건.
*
마탑의 최상층.
마탑이 초래한 모든 업보는 크리스탈 홀에서 시작된 게 아니요, 토파즈 홀도 아니요, 에메랄드 홀도 아니요, 흉악한 마도구가 보관되어 있는 가넷 홀도 아니었다.
-빌어먹을 장소.
그 원흉은 진리 추구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우월감을 품게 하는 최상층이었다. 유그위드는 무의식에 빠진 지금, 억제하고 있던 자기혐오를 숨김없이 표출했다.
“가엾구나, 유그위드.”
대지의 정령왕.
오리에드.
그녀의 손아귀 안에서.
유그위드와 오리에드.
오직 둘만이 존재하는 의식의 공간.
의식의 주도권은 오리에드에게 있었다.
의자에 앉은 유그위드.
이윽고, 그녀를 향해 다가온 오리에드가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양손에 쏙 들어오는 머리 크기. 손끝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유그위드의 상태를 말해준다.
“넌 아직도 어린아이에 불과하구나, 유그위드.”
의식 속 유그위드는 대여섯 살 무렵 어린아이의 모습이었다.
오리에드는 그녀의 머리를.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또 무엇이 너를 외롭게 했느냐, 유그위드? 내게는 모든 걸 말해도 좋다. 나를 의심할 필요는 없단다. 아르카나 대륙에서 사라진 마탑도 찾아내, 이렇게 네 손으로 파괴할 수 있도록 했지 않느냐?”
이러한 상태로도 의식을 부여잡고 있었을 줄이야.
과연, 원로 마법사라는 직책에 괜히 올라선 게 아니군.
그럼에도 오리에드는 미소를 흘렸다.
“하지만 곧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명심하렴. 모든 놀이가 끝나면 그때 너는 의자에서 내려와 낮잠에 빠질 시간이란다. 영영 깨지 않을 단잠에.”
시간문제였으니까.
설령 유그위드의 의식이 돌아온다고 해도 이젠 상관없었다.
자신의 무의식이 한 일을 본다면, 자신의 손으로 마탑을 공격한 걸 알아차리게 된다면, 그때야말로 연약한 소녀에 불과한 너는 모든 걸 포기할 테니까.
스윽.
오리에드가 다시금 속삭였다.
“너는 순수한 아이니까.”
그렇기에 유그위드에게 남은 마지막 미련이 무엇인지.
오리에드는 짐작할 수 있었다.
넌 틀림없이 ‘그들’을 찾고 있겠지.
“어디 보자, 저기 보이는구나.”
그림자 용병단.
“해산한다고, 그 추악한 냄새는 사라지는 게 아니니까.”
아르카나 대륙.
융합지성체의 육체를 향해 공세를 시작한 그림자 용병단원들.
유그위드의 무의식도 그림자 용병단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움찔.
오리에드가 그녀의 반응에 희번뜩 눈을 빛냈다.
“놈들에게 죗값을 치르게 해주려무나.”
그와 동시에 끝난 줄 알았던 아르카나 대륙의 융합지성체 레이드가 재개되었다. 그렇다, 아르카나 대륙 전기식으로 표현하자면 숨겨졌던 히든 페이즈의 시작.
쿠쿠구구궁.
상체가 반파되었기에 가벼워진 몸.
모두가 우려했던 상황이 벌어진다.
융합지성체가 서서히 기립한다.
거대한 몸을 바로 세워간다.
그 첫 발자국이 향하는 곳은 당연하게도.
“마음껏 짓밟아도 좋단다.”
전(前) 그림자 용병단원들이 모여든 장소였다.
막을 수도, 그렇다고 피할 수도 없는 자연재해.
그러나 융합지성체의 발이 그들을 짓밟는 일은 없었다.
아르카나 대륙과 현실.
완전히 다른 두 세계를 동시에 지켜보고 있었기에 보인 것이다. 상황의 『반전』이. 풀어서 표현하자면 무너졌던 마탑이 『반전마법』으로 다시 세워지고 있는 광경이.
……움찔.
마탑 최상층이 원상 복구됐다.
나의 행동이 무의미해졌다.
유그위드의 무의식이 발작했다.
뚝.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던 오리에드의 손길도 멈췄다.
“정말로 기이한 존재구나, 클라우디.”
의식의 주도권에 집중하고 싶었기에 생각하지 않았건만.
고뇌하지 않고는 도저히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오리에드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아르카나 대륙에서 숨을 거둔 네가 어떻게 그 세계에서 멀쩡하게 숨을 쉬고 있는 걸까? 네게는 아직도 부활의 권능이 남아있기라도 한 걸까? 어째서 네게만……!”
그러나 흥분할 필요는 없었다.
“아니, 됐어.”
그뿐이었으니까.
현실에 있는 그가 아르카나 대륙에 영향력을 행사할 순 없다. 이 순간, 세계수의 권능을 온전히 다룰 수 있게 되었다고 해도 이야기는 달라지지 않는다.
“너는 우리의 걸음을 막을 수 없다.”
유그위드.
이 가엾은 소녀가 마지막 걸림돌인 그림자 용병단을 짓밟아 파괴하는 순간. 그녀의 의식은 완전히 무너지고 융합지성체의 통제권은 온전히 자신에게 돌아오게 될 테니까.
그 이후엔…….
“나는 비로소……!”
오리에드가 희열에 차 읊조리는 순간이었다.
의식을 뚫고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다.
클라우디, 호열의 목소리였다.
“내게 감사해도 좋다, 유그위드.”
……갑자기 감사해도 좋다니?
뜬금없는 말.
오리에드가 자신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나의 반전마법이 아니었다면, 그대는 마탑의 엄격한 규율에 따라 원탁회의에 회부되어 마탑의 지하 무간(無間)에 영원토록 수감되었을 터.”
이러한 상황에서 고지식한 마탑의 규율에 관해 떠들고 있단 말인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오리에드가 슬그머니 유그위드의 귀를 양손으로 막았다.
그리고 부드럽게 속삭였다.
“아르카나의 벌레들에게 집중하는 게 좋겠지?”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이어지는 말.
“그러나 반전은 비단 마법으로만 발현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 유그위드 전 원로 마법사. 모든 것은 반전될 수 있다. 인간도 예외는 아니지.”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설마, 그림자 용병단을 말하는…….’
그 말에 더욱 자세히 들여다보게 된다.
그러자 보였다.
그들이 자신들의 목숨이 달린 상황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
그림자 용병단원들은 제국의 백성들을 구출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머리 위에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로.
쿵.
그때였다.
융합지성체가 크게 휘청거렸다.
오리에드는 더욱 세게 유그위드의 귀를 막고, 간악하게 속삭였다.
“아니, 인간은 달라지지 않는단다. 특히나 인간이 지은 죄의 무게는 더더욱 달라지지 않지. 그림자 용병단이 쌓은 죗값은 물론, 네가 이 순간 쌓은 죗값도 결코 사라질 수 없다는 뜻……!”
그러나 역시나 그를 부정하는 말이 이어진다.
“그대의 행보도 마찬가지다, 유그위드.”
“닥쳐!!!”
오리에드가 자신도 모르게 감정적으로 소리쳤다.
하지만 그 감정적인 행동으로.
오리에드는 의식의 주도권을 놓고 말았다.
그리고 그 순간, 상황이 『반전』되었다.
“모든 게 반전돼도 한 가지는 되돌릴 수 없군.”
어느새 하얗게 센 머리칼.
자연스럽게 세월을 머금은 피부.
그럼에도 얼핏 남아있는 소녀의 얼굴.
“어떻게……?”
유그위드가 경악하는 오리에드에게 능청스럽게 덧붙인다.
“어디 흘러간 세월까진 반전할 순 없는 건가, 이 수석?”
*
절망적인 상황.
플레이어들의 시야가 점멸한다.
환각을 본 게 아니라는 것처럼.
[융합지성체 유그위드가 자멸합니다.]“부활에, 세계수에, 이젠 몬스터가 스스로 자멸한다고……?!”
현실.
아르카나 대륙.
두 세계를 뒤흔들 마지막 페이즈가 시작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