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layer who hides his past RAW novel - Chapter 542
◈ 542화. 변함없는 존재들이여 (2)
악마족 몬스터가 까다로운 이유?
‘원래 밑도 끝도 없는 놈들이 더 무섭거든.’
그랑펠 말처럼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덕분에 악마는 언제나 악의를 불사를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악마족 몬스터조차 공포에 떨게 할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천적인 악마 사냥꾼이다.
나는 냉정하게 생각했다.
‘악마 앞에서 절대적인 강함은 무의미해.’
멀리 갈 거 없이 마탑에 숨어있던 악마 숭배자들을 보면 알 수 있잖아? 원로 마법사라 불렸던 이들이 거악도, 상위 마왕도 아닌 그저 그런 악마들을 보고 두려워나 했겠냐?
화룡, 카림제바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그대라면 진정한 진리에 도달……!”
그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악마에게 홀린 거겠지.
악마는 교묘하고 악독한 놈들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간만에 그랑펠 앞에서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악마 사냥꾼을 선택하지 않았으면 말이야.’
그랑펠, 아무리 너라고 해도.
악마를 상대하기 쉽지 않았을걸.
절대로 과장이 아니다, 너?
보다시피 지옥에서도 한결같잖아, 저 녀석들.
[지옥의 임프 : Lv.200]수치와 무관하게 그 강함이 지나쳤다.
체감 레벨이 최소 1,000레벨이 넘는 몹들과 비슷했다. 거기에다가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하는 악마답게 격이 다른 나의 마력을 보고도 위축되지 않았다.
하지만 한결같은 건 악마만이 아니었으니.
반짝.
점멸하는 퀘스트 메시지.
[클래스 퀘스트 : 우리는 여전히 악마인가?]악크샨이여, 묻겠다. 악마를 사냥하기 위해 악마가 되어 지옥에 떨어진 우리는, 지옥에 떨어져서도 악마를 사냥해온 우리는, 여전히 악마인가?
-지옥의 악마 사냥꾼과 조우하라. (성공)
철컥.
들려오는 석궁의 장전 소리.
“히이이이익?!”
공포에 질린 임프들의 얼굴이 깨닫게 한다.
“오랜만이군. 악크샨, 나의 전우들이여.”
지옥의 악마 사냥꾼.
악마의 천적이 이곳에 모습을 드러냈노라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거 진짜 정 없으시네, 누구처럼.’
그래도 당신들을 쫓아서 지옥까지 왔는데, 눈인사 정도는 괜찮은 거 아닌가? 조금 서운하긴 했다만, 하긴 언제부터 악크샨이 사이좋게 인사를 주고받았다고.
나의 말에 킨베르가 [은신]을 해제했다.
“저, 전우라면 설마 그 낭설도 사실이었다는……?!”
전우, 악크샨.
내 혼잣말에 눈치챈 듯싶었다.
내 클래스가 [악마 사냥꾼]이라는 걸 말이야.
‘그래, 사실이었다. 그 소문.’
그런데 어째 말이 좀 이상하다, 킨베르?
‘이거 말고 또 무슨 낭설이 있는 건데?’
혹시, 내가 모르는 사이에 킨베르가 멋대로 착각을 해버린 건가?
‘……헛소문이 한두 개가 아니라 짐작도 안 되는데.’
내가 심각하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엘시도어의 읊조림이 들려왔다.
“믿기지 않습니다.”
뭐, 블러드 엘프의 시선으로 봐도 놀라울 정도겠지.
“저들이 진정 인간이었다니.”
사실 지옥의 악크샨 선배님들의 무력을 수차례 목격한 나도 적응이 되지 않는 광경이었다. [집념]에 더해 [천적관계]까지 발동됐어도 저게 악마 사냥꾼이라니.
“사, 살려줘!!!”
“또 죽고 싶지 않다고!!”
“으, 으아아아악!!”
그야말로 압도.
내 마법에는 물론, 엘시도어의 검기 앞에서도 위축되지 않았던.
임프 무리가 공포에 질려 줄행랑을 치기 시작한다.
‘죽은 존재들이 떨어지는 지옥이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하다.
‘사실 죽이거나 죽여도 무의미하단 소리야.’
하지만 [집념]의 화신들이신 우리 선배님들이렷다.
그래, 선배님들께서는 어떻게 보면 무의미할지도 모르는 악마 사냥을.
지옥에서도 이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지옥의 악마조차 주제를 파악하게 할 정도로.’
역시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전투는 그걸로 끝났다.
임프 무리가 전부 사냥당해서는 다시금.
녹색 불꽃, 지옥불에 활활 타올랐거든.
로렌츠크가 나지막이 말했다.
“끝이 없는 쳇바퀴인가, 말 그대로 지옥도로군.”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악크샨 선배님들은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지옥에서 영원토록 끝나지 않을 악마 사냥을 지속해오고 계셨으니, 그랑펠식 화법으로 말하자면.
‘그게 당신들의 긍지이기 때문이겠지.’
승리의 통쾌함 따윈 없었다.
적막 사이에 흐르는 감정은…….
굳이 표현하자면 경건하다고 표현해야 할까.
‘……젠장, 저 복장이 다시 멋있어 보이는 날이 올 줄이야.’
그 시절, 중학교 2학년 이후로 처음이로구만.
물론,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눈앞에서 퀘스트 목표가 점멸하고 있었다.
보자, 이젠 선택만이 남았겠군.
나는 점멸하는 메시지를 바라봤다.
-지옥에 진입하라. (성공)
●지옥의 악크샨을 인정한다. (선택)
●지옥의 악크샨을 거절한다. (선택)
참고로 중요한 건 내 의견이 아니겠지.
그랑펠의 의견이었다.
나는 속에서 그랑펠의 눈치를 살폈다.
‘……사실 아직도 확실하지 않아.’
감히 장담하는데, 나보다 너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현실에도 아르카나 대륙에도 없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그래도 네 속을 모르겠단 말이야.
‘내가 아는 그랑펠이라면.’
그리고 조금 전 마주한 원혼들이 알고 있는 그랑펠이라면, 틀림없이 지옥의 악마 사냥꾼들을 인정하겠지. 아니, 인정하는 걸 넘어서 자랑스럽다고 칭찬하지 않을까.
‘아주 뻔뻔하게 말이야.’
악크샨의 생존자에서 악크샨의 지도자가 된 우리였으니까.
하지만 말했듯 나는 확신할 수 없었다. [흑화],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폭주 상태에서 목격했던 그랑펠의 이면이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으니까.
그때였다.
또각.
……과연, 내 우려와는 무관하게 넌 거침이 없구나? 내 발이 악크샨 선배님들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의 입술이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철컥.
지옥의 악마 사냥꾼.
그들이 나를 향해 석궁을 장전했으니까.
엘시도어의 다급한 음성이 들려온다.
“위험합니다!”
지옥의 악마 사냥꾼들의 무력을 목격했던 엘시도어였다. 그런 이들이 나를 향해 공격 태세를 취했으니, 그의 음성이 극도로 날카로워지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괜찮다, 엘시도어.
‘내가 저 양반들 하루 이틀 보는 줄 알아?’
그랑펠식 화법과 비교해도 절대 밀리지 않을 악크샨식 소통.
나, 이호열.
막말로 선배님들이 내 목덜미에 은검을 들이댔어도 조금도 겁나지 않았을걸?
‘악크샨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를 생각하면…….’
아득한 절벽 위에 있던 악크샨 기지. 그 절벽을 간신히 기어 올라갔더니만, 제한시간이 지났다고 발로 뻥 차버리는 게 바로 악크샨식 환영인사였거든.
게다가.
‘아무리 대단해도 결국, 악마 사냥꾼이라니까?’
아까의 무력은 오직 [천적관계]가 발동됐을 때만 유효하다는 말씀.
제 말이 맞죠, 선배님들?
내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바라보자 지옥의 선배님들이 말한다.
“진실과 마주하기 전까지.”
단도직입, 역시나 약크샨이 분명했다.
“그대는 우리를 이해할 수 없으리라.”
점멸하는 시야.
●지옥의 악크샨을 인정한다. (선택 불가)
●지옥의 악크샨을 거절한다. (선택 불가)
일단, 사과하겠다 그랑펠.
‘세상에 너처럼 비밀 많은 인간이 있나 싶었는데.’
저 양반들도 장난 아니네, 진짜!
내가 어떤 진실과 마주하지 못했다고.
하다 하다 퀘스트 선택지까지 막아버리는 건지 모르겠다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러나 마주할 각오가 되었다면 나아가라.”
우리 선배님들.
말은 살벌하게 하시면서도.
제3관문을 향해 길을 열어주셨으니까.
나는 문득, 원혼들의 애원을 떠올렸다.
-“가시면 안 됩니다……! 그 문 너머에는 더욱더 고통스러운 시련과 진실이 어린 가주님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고통스러운 시련과 진실이라.
그땐 그냥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거, 각오하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군.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아주 중요한 ‘무언가’와 마주할 기회가 이 지옥에 있는 듯했으니까. 그런데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어라.
언제나 당당하던 구둣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앞으로 나아가려 안간힘을 써봐도 요지부동이었다. 그래도 내 몸뚱이기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랑펠?
이유까진 모르겠다만.
그랑펠이 나의 걸음을 허락하지 않았다.
잠깐만, 말이 다르잖아 너?
‘가주답게 멋있는 척은 다 하고서는.’
그놈의 진실과 마주할 기회를 코앞에 두고는.
갑자기 멈추는 이유가 대체 뭔데?
나의 침묵엔 일행들도 사뭇 놀란 모양이었다.
킨베르가 조심스럽게 나를 부른다.
“총대장님……?”
여전히 침묵하는 나를 대신해 입을 연 건 지옥의 악마 사냥꾼들이었다. 철컥. 선배님들은 치켜들었던 석궁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런가, 아직도 시간이 필요한 건가.”
나, 이호열.
이 순간, 다른 무엇보다도.
선배님들의 너그러운 태도가 가장 두려웠다.
“이해하겠다.”
저 피도 눈물도 없는 양반들이 이해할 정도로.
천하의 그랑펠이 머뭇거릴 정도로.
제3관문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 진실이 막중하다는 건가?
‘뭔데.’
내가 흠칫하던 순간이었다.
비로소 말이 떨어졌다.
그랑펠이 내뱉었다.
“유감스럽게도.”
그 첫마디부터 짐작할 수 있었다.
너, 정말 이런 상황에서까지…….
변함이 없구나, 그랑펠?
“진실과 마주하는 것보다 급한 일이 생겼다.”
야, 아무리 그래도 그런 변명은 아니지!!
‘급한 일 같은 거 없잖아, 우리?’
평소와 다르게.
일주일이라는 준비기간을 두고 진입한 지옥이었다.
남들에게는 고작 일주일이라도 그랑펠에게는 ‘무려’ 일주일이었다.
‘파이몬 때문에 며칠을 날리긴 했다만…….’
진입 당일엔 엄마 아빠 심지어는 웬수한테까지.
지옥에 다녀올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고해성사까지 하고 진입한 지옥이었단 말이다!
그러나.
화르륵.
나의 의문과 무관하게도 어느새 지옥의 불길이 나를 휘감고 있었으니. 로렌츠크가 재빠르게 [지옥의 횃불] 효과를 발동한 것이었다.
‘왠지 다급하네.’
로렌츠크의 얼굴엔 웃음기가 없었다.
이거, 괜한 걱정을 끼친 것 같구만.
아마도 마지막 순간, 내 침묵이 영향을 끼친 거겠지.
‘그나저나.’
녹빛.
지옥의 불길 속에서.
나를 바라보는 선배님들이 시선이 느껴진다.
그들의 눈초리에 나는 변명하듯 생각했다.
‘……일단, 저희끼리 합의부터 하고 오겠습니다.’
그러니까 대충 넘어갈 생각은 하지 마라, 그랑펠.
[육망성 브로치]부터.핑계까지 대가며 진실과 마주할 기회를 두고 후퇴한 것까지.
‘간만에 네 앞에서 어깨에 힘 좀 줄 수 있겠는데.’
나, 이호열 어엿한 어른이자 사회인으로서.
그랑펠에게 잔소리를 좀 해보겠노라, 다짐하던 순간이었다.
급격하게 시야가 바뀌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이었다.
현실.
기이의 땅, 서울.
복귀하자마자 밀렸던 메시지가 갱신된다.
그리고.
‘……!’
그 메시지들에 나는 이번에도 그랑펠 앞에서 한 수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젠장, 진실과 마주하는 것보다 급한 일이 진짜로 터졌을 줄이야.
“만신전이여.”
갖가지 감정들이 겹치고 겹친다.
덕분일까.
나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나의 발길을 돌린 대가는 심히 막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