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est of Corruption RAW novel - chapter (150)
150 화 광휘교의 사제.
광휘교의 사제.
붉은 머리 여인은 동굴 입구에서 가만히 내 대답을 기다렸다. 마치 나는 널 적대할 생각이 전혀 없으니 안심하라는 듯이.
한밤중의 불청객에겐 어떤 답이 어울릴까. 잠깐 고민에 빠진 나는 무심코 내 허벅지를 베고 누운 어머니의 머리를 쓰다듬고 말았다. 피부로 느껴지는 비단 같은 머릿결의 감촉이 부드럽게 흩어졌다.
‘ㅅ…ㅏ…ㄹ….ㅎ…ㅐ…’
어머니께선 부스럭대며 무어라 중얼거리셨지만, 다행히 잠에서 깨시진 않았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붉은 머리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성함을 말씀해 주시지요. 자신의 이름조차 밝히지 않는 자를 선뜻 믿기는 어려운 법이지 않겠습니까?”
내 대답에 붉은 머리 여인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이거 내가 실례를 했군. 보통 낯선 이에게 다가갈 땐, 내 이름 몇 자보다 내 신분을 밝히는 편이 일이 쉽게 풀려서 말이지. 내 이름은 카디쇼. 광휘교(光輝敎)의 사제지.”
‘온기 없는 빛’을 모시는 광휘교라. 들어 본 적 있긴 했다. 저들은 응징의 천칭을 모시는 교화교 사제들처럼 곤경에 빠진 사람들을 돕기보다는 해악을 끼치는 괴수나 인간들을 제거하는 쪽으로 선행을 베푸는 계열의 사제들이었다.
즉, 전투에 특화된 사제들. 그제야 나는 그녀의 등 뒤에 메고 있는 그리 길지 않은 금속봉에 시선이 갔다. 전투가 시작되면 저 금속봉에 맺힌 권능이 저들에게 허락된 빛의 색으로 불타오르겠지. 나는 문득 든 의문을 던졌다.
“어떤 색의 빛을 다루십니까?”
붉은 머리 여인, 카디쇼가 살짝 눈을 크게 떴다.
“호오. 우리 광휘교에 대해서 조금 잘 아나 보군?”
“그리 잘 알지는 못합니다. 들은 풍문이 조금 있을 뿐이죠.”
“그래?”
빙그레 웃은 여인은 등 뒤의 금속봉을 툭툭 두드리곤 대답을 꺼냈다.
“‘온기 없는 빛’께선 과분하게도 내게 주황색 빛까지 다루는 것을 허락해 주셨지.”
“이거 꽤 높으신 분이셨군요.”
광휘교의 막 입문한 사제는 보랏빛을 다루며, 저들은 무지갯빛의 역순으로 빛을 다룰수록 더욱더 무거워지고 단단해졌다. 즉, 보랏빛이 가장 약하고, 붉은빛이 가장 강했다.
빛이 무거워지고 단단해진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권능이란 이름의 기적들이 그렇듯 저들에게 그것이 현실이고 당연한 현상이었다. 소문으로는 광휘교 사제들은 언제나 백색의 빛을 다루는 이가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다곤 하지만, 소문은 소문일 뿐. 진짜 백색 광휘를 다루는 광휘교 사제는 아직 나타나지 않은 거로 알고 있었다.
온기 없는 빛. 저들은 모시는 신의 이름처럼 한 점 열기가 없는 빛을 다뤘다. 열기가 없는 빛이 과연 어떻게 무기가 될 수 있을까 의문이 들겠지만, 광휘교의 사제들이 다루는 빛은 열기가 없는 대신 빛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단단함과 예리함을 자랑했다.
쉽게 말하자면, 저들은 열기가 없는 대신 단단하고 얼마든지 길이를 늘일 수 있는 광선 병기들을 사용하는 성전사들이었다. 물론, 빛은 빛이니만큼 저들이 권능을 사용하는 순간, 주위는 저들의 무기에 맺힌 권능이 발하는 강렬한 빛으로 환히 빛날 수밖에 없었다.
더욱 악랄한 점은 광휘교 사제들은 스스로 만들어 낸 빛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지만, 그들의 적은 그 화려한 눈뽕을 그대로 견뎌 내며 광휘교의 사제와 전면전을 벌여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무기의 육중함으로 적을 상대하는 교화교의 사제들과 달리 광휘교의 사제들은 날렵한 움직임과 치명적인 눈뽕을 이용해 상대방을 일방적으로 두들겨 패는 이들이 많았다.
카디쇼는 나를 바라보며 쓰게 웃었다.
“혹시 내가 광휘교 사제라는 걸 못 믿겠으면 권능이라도 보여 주고 싶지만, 내가 권능을 내보이면 거기 단잠을 취하는 두 사람이 깜짝 놀라서 깰 것 같으니 웬만하면 믿어 줬으면 한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얇은 금속 갑옷엔 신이 내린 가호가 걸려 있었으니까. 내가 선신과 악신의 신성을 따로 구분하지는 못하지만, 악신의 숭배자들은 선신의 사제를 거짓으로 칭하는 걸 절대 기피했다.
사실, 카디쇼가 자신을 광휘교의 사제라고 소개한 순간부터 나는 그녀가 정말 선의로 우리를 돕기 위해 이곳으로 왔다는 걸 알고 있었다. 보기론 여기가 어딘지 제대로 아는 것 같으니 그녀에게 가까운 마을의 위치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게 좋아 보였다.
“들어와서 앉으시죠.”
“실례하지.”
가벼운 절그럭 소리와 함께 카디쇼는 성큼성큼 걸어 모닥불 근처의 빈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주저앉았다. 그녀는 내 허벅지를 베고 누운 두 사람이 깨지 않도록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카디쇼는 모닥불 주위를 훑어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식사를 한 흔적이 없군. 먹을 걸 못 구했나?”
“이 동굴을 찾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허비해서 먹을 걸 따로 구할 여유는 없었습니다.”
덕분에 쟈멜과 어머니 둘 다 내가 항상 챙겨 다니는 벌꿀 사탕을 몇 개 먹고 눈을 붙인 상태였다.
“저런.”
짧게 혀를 찬 카디쇼는 자신의 허리춤을 뒤적거리더니 자그마한 주머니를 내밀었다.
“내가 먹으려고 챙긴 육포인데, 먹어도 괜찮다. 상하지는 않았으니까. 대신 조금 많이 딱딱할 거다.”
주는 식량을 마다할 상황이 아니었다.
“감사합니다.”
나는 냉큼 주머니를 받아 안을 확인했다. 자그마한 주머니 안에는 잘 마른 육포가 가득 들어있었다. 아껴 먹는다면 며칠 동안은 충분히 먹을 수 있을 만큼. 육포를 조금 찢어 입 안에 넣고 씹어 보았다. 몇 번 질겅질겅 씹어 보니, 확실히 카디쇼가 왜 딱딱하다고 경고를 해 줬는지 알 만한 물건이었다.
이거 어머니한테 그냥 드렸다간 턱 아프다고 그러시겠는데. 내일 조금 물에 불려 먹어야겠는걸.
카디쇼는 내 행동을 가만히 관찰하더니 빙그레 웃었다.
“보기보다 손아귀 힘이 좋군. 평범한 이들이 그 마수 고기로 만든 육포를 찢어 내려면 아주 용을 써야 하는데 말이지.”
“뭐, 나름 몸이 튼튼하기는 합니다.”
나는 그녀에게 대충 대꾸하며 내일 물에 불리기 편하도록 커다란 육포 조각들을 잘게 찢었다.
“혹시 하나 물어봐도 되나?”
“육포도 주셨는데, 제가 설마 질문을 피하겠습니까? 편히 물어보시면 됩니다.”
카디쇼는 쟈멜이 입고 있는 내 헐렁한 사제복을 가리켰다. 쟈멜이 입고 있는 탓에 사제복은 걸린 가호의 힘을 잃고 그저 평범한 옷과 같은 상태였다.
“옷이 다 젖은 여인에게 빌려 준 옷은 네 것인가?”
“맞습니다. 저는 매일의 삶을 수호하는 유지의 여신을 모시고 있는 사제 마르낙이라고 합니다.”
“역시.”
‘음음.’ 하며 고개를 주억거리는 그녀에게선 아까보다 조금 더 진한 호의가 느껴졌다.
“그런데 여기까지 오면서 수상한 자들을 본 적은 없나?”
“흐음. 다른 사람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습니다만… 여기 와서 만난 사람은 카디쇼 님이 처음입니다.”
“님 자는 안 붙여도 된다. 그런 존칭은 조금 부담스럽군.”
“알겠습니다.”
내 대답을 들은 카디쇼는 턱을 매만지며 골똘히 무언가를 고민했다. 잠시 후 그녀는 또 다른 질문을 내게 던졌다.
“그럼 들짐승을 본 적은 있나?”
“그러고 보니 짐승들도 없더군요.”
짐승이라도 마주쳤으면 잡아서 어떻게든 고기를 구워 먹었을 텐데 말이지.
“역시 기분 탓이 아니었군. 나도 사실 이곳에 온 지는 며칠이 안 됐다만 이곳, ‘배회하는 숲’에서 쥐새끼 한 마리도 마주치지 못했다.”
“그러던 와중 저희가 만든 빛을 발견하신 거군요.”
“그렇지.”
나는 이 카디쇼라는 여인이 내 생각보다 사리 판단 능력이 뛰어난 이라는 걸 깨달았다.
홀로 생명의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숲을 며칠 동안이나 수색했는데도, 며칠 만에 발견한 이들을 적대하기는커녕 침착하게 상대방의 상태를 살피고 호의적으로 접근한다는 것 자체가 무척이나 대단한 것이었다.
뭐,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미치지 않은 이상 생체 실험을 자행하는 자들이 모여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이곳을 수색하러 올 리가 없겠지만.
문득, 나는 손으로 열심히 잘게 찢고 있는 육포로 시선을 보냈다.
“그럼 이걸 저희한테 주시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넉넉히 챙겨 와서 나눠 주는 거니, 그런 건 신경 안 써도 된다.”
그렇다면야. 감사히 받아야지.
“그런데 광휘교에선 원래 혼자 수색을 다닙니까?”
그럼 밤에 잘 때 취약할 텐데.
내 질문을 들은 카디쇼가 쓰게 웃었다.
“당연히 아니다. 원래는 이인 일조가 원칙이나 최근 말살성전단을 지원하러 떠난 인원들 때문에 손이 조금 부족해서 말이지. 이런 확실하지도 않은 정보에 사제를 둘이나 파견할 여력이 없을 뿐이다. 뭐, 나 혼자서 충분하기도 하고.”
그녀의 목소리에는 미묘한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 하긴 주황빛을 다루는 사제라면 그런 자신감을 가질 만도 한가.
슬슬 대충 얻을 정보는 다 얻었겠다. 나는 본론을 꺼냈다.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로 가려면 얼마쯤 걸립니까?”
“가까운 마을이라. 흠. 이곳에서 정남쪽으로 이틀 정도 걸어가면 자그마한 마을이 하나 나올 거다.”
이틀? 이틀이면 충분히 걸을 만했다. 어머니를 손으로 변하게 해서 품속에 챙기고 내가 쟈멜을 업고 걷거나 하면 하루로도 충분히 닿을 수 있겠지.
카디쇼는 나를 대충 훑어보더니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데 길은 잘 찾는 편인가? 흠… 이거 이런 질문은 실례인가.”
‘길을 잘 찾는다면 이런 데서 조난을 당할 리가 없겠지…’라는 자그마한 중얼거림. 나는 약간의 억울함을 담아 대꾸했다.
“길을 잃어서 조난을 당한 게 아닙니다. 수적들과 전투를 하다 배에서 추락했을 뿐이지요.”
“그래, 그렇겠지.”
예의상 한 대답이 분명했다. 나를 바라보는 카디쇼의 눈빛에는 미묘한 동정심이 한가득 담겨있었기에. 그녀는 자신의 턱을 톡톡 두드리며 잠깐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뭐, 여기서 며칠 더 수색한다고 해서 뾰족한 단서를 찾을 것 같지도 않으니 교단으로 돌아가는 김에 가까운 마을까지 데려다주지.”
“저희가 길을 잃을까 봐 일부러 도와주시는 거면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하시던 일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빙그레 웃었다.
“마침 이 적막한 숲도 질리던 참이었다. 온기 없는 빛께서도 존재조차 불확실한 적을 쫓는 것보단 눈앞의 조난자를 도우라 하시겠지. 내일 아침 해가 밝거든, 내가 만들어 둔 임시 거처로 가서 놓아둔 짐만 챙기고 이 지긋지긋한 숲을 같이 떠나지. 내 짐 가방 속엔 그 육포보단 부드러운 음식들이 몇 개 있으니 거기 곤히 잠자는 두 사람한테 먹이면 될 거다.”
사실, 안내자가 있는 편이 훨씬 낫기는 했다. 여기서 더 거절하기도 뭐하고. 나는 잘게 찢던 육포 조각 하나를 입으로 밀어 넣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까운 마을까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자마자 카디쇼를 발견한 쟈멜이 화들짝 놀라며 ‘귀, 귀신이다앗!!! 마르낙 사제님 빠, 빨간 귀신이 있어요!!!’하고 호들갑을 떨긴 했지만, 그것 말고는 딱히 별일이 없었다.
다만, 깨어나신 어머니께선 뭔가 미묘한 눈빛으로 카디쇼를 한참을 바라보다 고개를 갸우뚱거리셨다.
‘살해…?’
어머니는 자신의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하며 한참을 고민하더니 내 옷깃을 꾹꾹 잡아당겼다.
‘살해살해.’
이런 적은 처음이라는 한마디.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살해!’
어머니가 하고자 하는 말은 아주 간단했다. 손가락 개수가 세어지긴 하는데, 그게 뭔가 딱 잘라서 말하기가 애매하다는 것.
어머니가 정확한 손가락 개수를 못 세신다고?
아예 손가락을 보지 못하시는 것이라면 악마와 관련이 있는 것이겠지만, 이렇게 따로 이야기하시는 걸 보니 그 경우와는 또 다른 이야기인 듯했다.
주황빛을 다룬다더니, 뭔가 가호 같은 게 걸려 있는 건가. 그게 아니라면 어머니의 시선을 방해하는 성물을 지니고 있거나.
“대충은 가늠이 가십니까?”
‘살해!’
그렇다는 대답.
“대충 몇 개쯤 됩니까?
어머니는 양 손바닥을 한 번에 들어 보이셨다.
왼손에는 손가락 세 개 반을, 반대편 손에는 손가락 네 개를.
만약 오른손의 손가락 개수가 맞는다면…
“날이 밝았으니, 어서 움직이지. 이 숲은 빨리 어두워지는 편이거든.”
사람 좋은 미소를 지은 채 날 바라보는 카디쇼를 바라보며 나는 마음속 깊은 곳으로 짧게 다짐했다.
괜히 시비가 붙을 거 같으면 조금 양보하자고.
“쟈멜.”
“네! 마르낙 사제님! 저 옷 다 입었어요! 이제 출발하면 돼요!”
“육포를 조금 찢어서 물에 불려 뒀습니다. 드시겠습니까?”
“네! 먹을래요!”
‘살햇?!’
당황하는 표정. 어머니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똑바로 올려다보셨다.
“당연히 어머니 것도 있습니다.”
‘살해살해.’
어머니 것도 있다는 한마디에 어머니는 그제야 편안하다는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둘에게 미리 불려 둔 육포를 건네주고 카디쇼와 함께 그녀가 만든 임시 은신처로 향했다.
하지만 임시 거처에 도착한 우리를 반긴 건, 난장판이 되어 버린 거처였다. 카디쇼는 파헤쳐진 자신의 짐들을 보고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활짝 웃었다. 여태까지 보여 준 미소 중에서 가장 활짝.
그녀는 붉은 눈을 반짝이며 입술을 살짝 핥았다.
“드디어 꼬리를 드러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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