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157
157화 푸른 안개 (1)
김민의의 모습을 한 한유현이 차에서 내렸다. 그가 도착한 곳은 커다란 저택 앞이었다. 근처 집들에서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거주자들이 외출한 것이 아니다. 아예 아무도 살지 않았다. 좀 더 확실한 보안을 위해 주변의 집을 매입한 것일 터였다.
한유현은 문 앞으로 다가가 초인종을 눌렀다. 대답 대신 감시 카메라가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한유현은 거리낌 없이 고개를 들었다. 카메라에 연결된 모니터가 비추는 얼굴은 얼룩지듯 흐려져 있을 것이다. 쓰고 있는 안경의 효과였다. 상대가 생물이 아니라면 모자이크처럼 흐리게 처리되었다.
잠시 뒤 안쪽에서 사람이 직접 나와 문을 열어 주었다. 상급 헌터로 보이는 남자가 한유현을, 김민의를 확인했다.
“들어오십시오.”
한유현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정원을 지나쳐 실내로 들어설 때에는 더더욱 머뭇거리듯 느리게 움직였다.
안내된 응접실은 약간 어둑했고, 새 가구 냄새가 났다. 평소에는 쓰지 않는 저택인 듯했다.
잠시 뒤 최석원이 나타났다. 한유현은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실제로도 의외의 일이었다. MKC 길드장이 이렇게 바로 모습을 드러낼 줄은 몰랐다.
‘내가 던전 공략을 마치기 전에 영입을 끝내고 싶어서인가.’
지난번 던전 공략 기간이 유독 빨랐으니 조급해질 만도 했다. 최석원이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한유현의 앞으로 걸어왔다.
“김민의 헌터, 만나서 반갑군. 말은 많이 들었어.”
“처음 뵙겠습니다, 최석원 길드장님.”
“거두절미하고 말하지. 한유진의 납치를 도와라.”
최석원이 거만을 떨쳐 버리지 못한 어조로 말했다.
“의외군요. 제 영입 건에 대해 말씀하실 줄 알았는데.”
“영입? 새로운 S급 헌터라고 떠들어들 대지만 그럴 리가 있나. 진짜 S급이라면 석시명 그 여우 새끼가 여기저기서 찔러 댈 수 있게 내버려 두지도 않았겠지. 한유진 옆에 붙여 놓았으니 B급 보조계는 아닐 테고 기껏해야 A급 전투계, 아닌가?”
최석원이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S급이라는 의혹을 퍼뜨리고서 한유진의 보호를 맡긴다면 진짜 S급 헌터를 곁에 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볼 수 있겠지. 섣부르게 덤비지 못할 테니까. 효율적인 방법이야.”
“자신의 추측이 맞다고 믿으시는 겁니까.”
냉랭함마저 약간 느껴지는 차분한 목소리에 최석원이 눈썹을 찌푸렸다.
“틀렸다고 해도 햇병아리 S급이지. 대답이나 해.”
최석원이 계약서를 꺼내 들며 말했다.
“순순히 협조해 준다면 대가는 충분히 치러 주지. 다른 곳의 연락은 거절하고 찾아온 것으로 보아 소속을 옮길 마음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 않나.”
“이런 식으로 허술하게 서두르는 이유가 뭡니까. 한유진 씨를 납치해 거래하려는 곳은 어디입니까.”
“네가 알 것 없어! 서로 좋게 좋게 가자고. 원하는 게 뭐지?”
한유현은 최석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거만하게 굴고 있지만 감출 수 없는 초조함이 전신에 어려 있었다. 포식자에게 쫓기고 있는 초식동물 같다는, S급 헌터 상대로는 어울리지 않는 감상이 들었다.
‘효도중독자와의 계약 때문인 건가.’
어쨌든 살아서 대답할 생각이 없다면 시체에게 물어보면 된다.
“잡아.”
명령조의 말이 떨어진 직후, 최석원이 이변을 눈치챘다. 방 안에 한 명 더, 인기척이 있다. 하나 이미 늦었다.
독기가 스민 손톱이 그의 뒷목에 닿았다. 거의 동시에 날 선 칼날이 최석원의 목젖을 겨누었다. 뒤쪽은 반응이 느릴 수밖에 없었다 해도 바로 코앞의 움직임조차 따라잡지 못했다.
A급도, 애송이도 아니다.
“네놈…….”
최석원이 이를 으득 갈았다. 자신에게 겨누어진 검이 눈에 익었다.
“한유- 윽!”
순식간에 퍼져 나간 독기가 거미줄처럼 전신을 옭매었고, 최석원의 무릎이 구부러졌다. 수화 한 손끝에서 독액을 떨어뜨리며 노아가 한유현을 차갑게 바라보았다.
“명령하지 마십시오. 어디까지나 한유진 씨의 안전을 위해 협조하는 것일 뿐입니다.”
한유현은 대답 대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노아의 독은 S급 스킬치곤 살상력은 약한 편이었다. 대신 몸을 마비시키고 움직임을 제한하는 효과가 탁월했다. 한번 제대로 달라붙으면 웬만한 해독 능력으로도 벗어나기 힘들었다.
“효도중독자와의 계약을 파기해. 그럼 목숨은 살려 줄 테니.”
한유현이 말했다. 물론 거짓말이다. 형을 노리고 있는 놈을 살려 둘 생각 따윈 없었다. 하지만 바로 목을 베어 버린다면 윤경수 때처럼 시체가 이용당할 가능성이 높았다.
한유현은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 기다란 손가락 끝에서 몬스터 가죽을 다듬어 만든 양피지가 가볍게 흔들린다.
“계약서도 작성해 주겠어.”
S급에게까지 효력을 발휘하는 불법 계약서였지만 이 정도야 형의 힘을 빌리면 쉽게 무효화가 가능했다.
최석원은 자꾸만 힘이 빠지려 드는 고개를 치켜들어 아직 앳된 티가 남아 있는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김민의의 모습은 사라지고 한유현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서늘하게 식은 두 눈 중 한쪽이 붉다.
그 눈과 마주치는 순간 살아남기 글렀다는 확신이 들었다. 최석원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윤경수를 죽인 것도 십중팔구 저놈일 터다. 제 형을 건드리려 했다는 이유로.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몸을 사렸다.
효도중독자, 디아르마의 후임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용용이가 맡긴 일도 실패하고, 쓸모도 없어지고. 내가 널 살려 두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빈정거림을 담은 목소리에 최석원은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장기짝이 필요는 하니까 딱 한 달의 시간을 주겠어. 한 달 내로 네 길드를 추스르고 쓸 만하게 만들어. 만약 눈에 차지 않는다면 재료로나 사용하는 수밖에~.]한 달. 이미 흐트러질 대로 흐트러진 길드를 재정비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범죄자로 수감될 처지에서 구해졌기에 최석원의 입지는 바닥에 떨어진 상태였다. 그나마 협회와 손잡고 MKC의, 길드의 위상만이라도 유지하려 들었으나 돌아온 것은 헌터 협회의 물갈이였다.
연결되어 있던 고위층이 줄줄이 사라지고, 아무 도움 없이 타 길드들과 맞서게 된 것이었다. 처음부터 넘볼 수 없었던 세성과 S급 헌터가 둘이나 더 늘어난 해연, MKC와 달리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고 예전 그대로의 위치를 유지 중인 브레이커.
국내 2위의 길드가 3위도 아닌 4위까지 주르륵 밀려 내려가는 비참한 꼴이 눈에 선했다. 심지어 한신도 무시할 수 없었다.
막다른 길에 몰린 최석원은 국내가 아닌 해외로 눈길을 돌렸다.
‘한유진을 넘긴다면 S급 헌터를 대여해 주겠다.’
중국의 제안이었다. 경력 2년 차의 바로 써먹을 수 있는 전투계 S급 헌터를 5년간 계약시켜 주는 것에 더해 한유진이 키워 낼 기승수와 헌터를 일정 비율 배당해 주겠다는 조건에 귀가 솔깃해졌다.
해연에 S급 헌터가 둘 늘었다고 해도 둘 다 갓 S급이 된 애송이들이다. 경력 있는 전투계 S급 헌터를 데려올 수 있다면 MKC는 다시금 확고한 2위 길드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후 국내에서 상급 기승수를 독점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한유진의 실종으로 인해 그를 보호할 책임을 지닌 길드들이 타격을 입는 것은 덤이었다. MKC는 한유진에게 관여할 수 없게 되어 버렸으니 아무런 책임이 없다.
유일하면서도 확실한 탈출구. 그렇게 느껴졌기에 최석원은 성급히 움직였고, 그 결과가 바로 지금 이 꼴이었다.
“…씨발, 한유현. 살려 주겠다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잘도 지껄이는군.”
“계약서는 거짓말 안 해.”
“바지 사장 소리를 들어도 나도 길드장이다. 네놈 위치쯤 되면 계약 파기 감당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거 알아. 성녀를 찾아가 구슬리는 것도 가능하겠지.”
“형을 두고 해외까지 다녀올 여유는 없어. 계약서를 믿지 못하겠다면, 여기서 끝낼 건가.”
카득
빙글 방향을 돌린 검이 바닥을 짚은 최석원의 손 바로 옆을 꿰뚫었다. 반들거리는 대리석 위로 가는 금이 퍼져 나간다.
“최석원, 나는 네 시체만 있어도 돼.”
“그런데 왜 바로 죽이지 않는 거지?”
“내가 모습을 빌린 사람에게 살인 누명까지 뒤집어씌우긴 조금 미안해서.”
“미안하긴 개뿔이.”
최석원의 입에서 비틀린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차피 끝이라면, 건방진 애새끼 발목 정도는 잡아 비틀어야지.
“한유현 네놈은 첫인상부터 재수 없었어. 제 위에도 옆에도 설 수 있는 사람 한 명 없다는 것처럼 지랄하던 성질 더러운 애새끼가 이제 와서 형이란 놈을 끌어안고 안절부절못하는 꼴이 우습지도 않다고. 그거 진짜냐? 어? 씨발, 형이고 부모고 눈앞에서 찢어발겨도 꿈쩍 안 할 것 같던 새끼가.”
“죽여 달라는 건가?”
“내 목숨은 내가 알아서 한다, 미친 애새끼야.”
최석원은 킬킬대며 자신과 새롭게 계약 한 여자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특전 좋지. 나는 루가 폐야와의 계약을 거절한다.”
지정된 말을 내뱉은 직후, 겨우 버티고 있던 최석원의 몸이 완전히 허물어졌다. 이어.
싸아아
바랜 듯 칙칙한 푸른빛이 도는 안개가 순식간에 주위를 뒤덮기 시작했다.
* * *
승합차에 올라타자마자 휴대폰을 빌려 해연 길드에 전화를 걸었다. 인사팀장과 연결해 달라는 요구를 했더니 잡상인 취급을 좀 받긴 했지만, 무사히 석시명과 전화할 수 있었다.
[세성 길드에 계신 거 아니셨습니까?]“답답해서 산책 좀 나왔습니다. 그보다 김민의 헌터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조금 전의 통행 제한 및 대피 발령과 관계가 있는 건 아니겠지요.”
[당연히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숙면중이지요.]내가 진짜 김민의가 궁금해서 전화했겠냐. 잘 아시는 분이 뻔하게 말을 돌리시네.
“석시명 팀장님께서는 해연을 누구보다도 우선시하셔야 합니다. 가족도 버리란 소리까진 안 하겠지만 외부인인 저보다는 먼저 생각하셔야죠. 안 그렇습니까?”
도하민에게 찾아 달라 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유현이에겐 1년 이상 사용한 일련번호가 있는 물건이 없다.
“그리고 저 걔 얼굴 보기 전까진 안돌아 갈 겁니다. 지금도 처음 보는 낯선 헌터 넷이랑 같이 있어요.”
[…김민의 헌터와 관련 있는 게 맞을 겁니다.]석시명이 하는 수 없다는 듯 털어놓았다.
[MKC 쪽과 만나러 가셨습니다.]MKC. 최석원은 효도중독자와 계약상태다. 그냥 죽였다간 저번 같은 꼴이 날 테고, 계약을 해제하려면 내가 있어야 하건만 왜 혼자 처리하려 든 거냐, 동생 놈아.
“노아 씨에게 연락해 주시겠습니까.”
[노아 헌터도 함께 가셨습니다.]“유, 민의가 노아 씨와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상황에 맞지 않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나 없이도 둘이 같이 다니다니. 열심히 붙여 놨더니 조금쯤은 친해진 모양이다. 보람이 있어, 진짜 좋네. 애들 둘이 일하는데 주책맞게 끼어들고 싶진 않았지만 상대가 상대니 어쩔 수 없다.
“송태원 실장님께 연락해서 가능하면 리에트도 데리고 와 달라고 전해주세요. 아니다, 이미 움직이고 있겠구나. 협회 쪽에 부탁해야겠네요. 리에트에겐 제가 벨라레를 데리고 나갔다고 말하면 얌전히 나올 겁니다. 그리고 세성에도 제 위치 알려 주시고요.”
그냥 최석원이라면 유현이와 노아 둘이서 충분히 상대하고도 남겠지만, 해파리 놈이 개입한다면 말이 달라진다. 저번 던전만 해도 인어여왕이 스킬을 주지 않았더라면 무사히 공략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니 만약을 대비해 리에트와 성현제를 끌어들이도록 했다. 강소영도 불러 달라 할 걸 그랬나. 하지만 A급 헌터라 쉽게 와 달라 말하기엔 주저되었다.
“우리는 하급 헌터라 통제 지역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
운전 중이던 E급 헌터가 말했다. 이 사람들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기에 차를 세우도록 했다. 그리곤 카드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이걸로 새 차 뽑으세요.”
“뭐…….”
“비싼 걸로요. 외제차든 스포츠카든 원하는 대로 고르세요. 아예 각각 한 대씩 뽑아도 됩니다. 막 써요, 막. 할부 말고 일시불로 팍팍.”
어차피 내 카드도 아니다. 성현제의 카드를 당황해하는 C급 헌터에게 쥐여 주었다. 이어 넷 다 차에서 내리게 한 뒤 운전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수동이네.’
1종을 따긴 했었는데 오랜만이라. 시동 한번 꺼뜨렸다가 무사히 출발했다.
“새로운 마음으로 준법정신 지키며 살고 싶었는데.”
-쉬잇.
벨라레가 내 손목을 감아 돌며 혀를 날름거렸다. 핀잔이라도 던지는 거 같구먼. 그래도 아직 대놓고 법을 어긴 적은 딱히 없… 지 않았나? 체포 건도 무죄 처리 되었고, 그밖에는 뭐, 나는 입만 털었을 뿐이다.
벨라레를 어깨 위로 올려 선생님 스킬로 시선 공유를 해 둔 뒤, 휴대폰으로 상황 기사 검색을 하며 내비게이터의 안내를 따라 밟았다. 일반 사람들은 폰 보면서 운전하면 절대 안 됩니다.
다행히 벨라레는 뱀이지만 나보다 더 시력이 좋았다. 동시에 열 감지를 하다 보니 백미러를 보지 않고도 뒤쪽 차량의 움직임을 알 수 있었다. 열 감지 범위가 제법 넓다.
처음에는 차가 좀 밀렸지만 갈수록 도로는 한산해졌다. 이윽고 주위의 차량이 완전히 사라지고 저만치 길을 막은 바리케이드가 보였다.
‘죄송합니다, 지나가겠습니다.’
멈춰서 길게 사정 설명할 시간은 없다. 은혜를 사용하고 한껏 속도를 올렸다.
쿵-!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반짝거리던 바리케이드가 날아간다. 제법 충격이 컸지만 차는 멀쩡히 속도를 유지한 채 도로를 달려 나갔다.
차 튼튼하네. 개조 살짝 한 건가. 헌터용 차량은 던전 브레이크를 대비해서 허가하에 등급 적정 수준의 개조가 가능했다.
뒤쪽에서 무어라 외치는 소리가 들려온 것 같지만 무시했다. 벌금 내겠습니다. 잠깐, 무면허 운전 걸리면 운전면허 따는 데 제한 생기나? 그건 좀 곤란한데.
“…안개?”
얼마쯤 더 달렸을까, 돌연 주위가 희뿌옇게 흐려졌다. 탁한 푸른기 도는 안개 같은 것이 자욱하게 깔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