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328
326화 흑룡의 심장 (1)
어린 혼돈. 지금의 모습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호칭이었지만 그가 새하얀 검을 손에 쥐었다. 검은 용이 몸을 웅크리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훤칠하게 큰 키에 너른 어깨와 등을 지닌 혼돈이었지만 용에 비하면 작디작은 뒷모습이었다. 미미하다 못해 가냘프다 해도 좋을 정도로. 그럼에도 밀린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다. 흑룡이 가진 위압감이 보이지 않는 막에 막히다 못해 뒷걸음질 치는 듯했다. 산책이라도 나온 듯 가볍게 선 자세에 일말의 긴장도 없다.
“···유현아.”
동생을 감싸고 있던 몸을 옆으로 틀었다. 유현이가 눈앞의 광경을 볼 수 있게끔.
“잘 봐둬.”
“···형.”
“보기 힘들다면 정신 똑바로 차리고 몸으로라도 느껴둬. 아무런 제약을 가지지 않은, 세상 밖의 존재의 힘을.”
나와는 다르게 유현이는 언젠가 다다를 수 있는 곳이다. 아직은 멀고먼 그 힘을 단순히 경험해 보는 정도만으로도 도움이 될 것이다. 실질적인 능력이든 정신적인 마음가짐이든. 겁을 먹고 위축되어 버릴 수도 있겠지만 내 동생은 그렇게 약하지 않다. 설사 움츠러든다고 해도 내가 다시 일으켜 세워주면 된다. 언제든지 몇 번이든지.
유현이가 내게 의지해 비스듬히 기대 있던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안색도 거의 평소대로 돌아왔다. 나와는 달리 공포 저항도 없는데, 대견하다.
“형은, 괜찮아?”
“그럴 리가 있겠냐.”
좀 나아졌다 해도 여전히 목이 조여 오는 기분이다. 무엇보다도 자칫 또다시, 동생을 잃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그저 겁먹고 포기하면 그걸로 끝이니까 버티는 것뿐이다.
– 크르르르르.
위협적인 목울림 소리가 새어 나오고 용의 입이 벌어졌다. 무심코 다시 유현이를 부둥켜안았다. 이빨은 물론 혓바닥까지 시꺼먼 너머, 무저갱 같은 목구멍이 드러났다.
그 속에서 광풍이 일고 뭉치고 얽히다가- 단숨에 토해졌다.
콰과과과-!!
가득 들어찼던 호수물이 일순 증발했다. 수증기조차 생겨나지 못한 채 완전히 사라진다. 직접적인 힘이 닿아오지 않았음에도 전신이 떨렸다. 우리로선 잠시잠깐도 버티지 못할 공격이었다.
그러나 앞을 막아선 남자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스르륵. 닿는 모든 것이 녹아내리는 용의 숨결 앞에서 흰 검을 든 손이 움직였다. 늘어진 소맷자락이 젖혀졌다. 새끼고양이에게 강아지풀을 흔들 듯 가벼운 검로가 흉포한 기세의 열기와 맞부딪친다.
구구궁-
사방의 공기가 수천 개의 북이 된 것처럼 묵직하게 울렸다. 숨이 콱 막혔다. 귀를 막고 두 눈도 감아 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앞을 바라보았다.
저것을 단순한 마력의 움직임이라 감히 말할 수 있을까. 까마득히 덮쳐오는 파도를 막아내는 방파제라 생각했던 하얀 칼이 어느 순간 거대한 산이 되어 그대로 쏟아져 내렸다. 단 한 번의 휘두름이 엉망으로 녹아내린 대지를 휩쓸며 단단하게 굳혀 버린다.
팔의 움직임을 따라 소맷자락이 다시금 손등에 닿을 듯 흘러내리고, 새하얀 칼날이 빙그르 맴을 돌았다. 희미한 빛이 칼날 위를 데구르 구른다.
“그때는 꽤 애먹었었는데.”
혼돈이 춤을 추듯 가볍게 걸음을 떼며 말했다.
“나도 어릴 적이었으니. 천지가 끓어오르는 땅이라 덥기도 더웠고.”
하지만 지금은.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 웃고 있을 목소리로 그가 말을 이었다.
“정말로 한낱 도마뱀 같구나.”
혼돈의 모습이 사라졌다. 스킬을 쓴 것 같지는 않았다. 내 눈이 그의 움직임을 따라잡질 못했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던 시야에 검은 물체가 들어왔다. 태양에 닿을 듯 높게 치솟아 오른 거대한 머리통이 그대로 쿵! 땅에 처박힌다. 꺾어진 외뿔이 그 서슬에 튕겨나가 바닥에 깊게 들이꽂혔다.
용의 머리가 단숨에 잘려 나간 것이었다.
그러고도 용의 몸은 움직이고 있었다. 마지막 발악을 하듯 넓게 날개가 펼쳐지자 무시무시한 광풍이 여기까지 몰아닥쳤다.
“윽!”
급히 유현이를 감싸며 실드를 쳤지만 낙엽 한 장 들이민 수준이었다. 실드가 산산조각나자마자 유현이가 예장을 넓게 펼치며 되레 나를 보호해 주었다. 방어력이 중첩 상승한 채인 예장도 단순한 바람을 버티지 못했다. 크게 얻어맞은 듯 둘이 엉켜 주르륵 밀려나고 얼른 동생에게 치유 스킬을 써주었다.
“으··· 유현이 너 괜찮-”
콰르르릉!
쓰러진 몸을 추스르기도 전에 또다시 땅이 흔들렸다. 만 번의 벼락이 동시에 내리치는 듯 하늘이 번쩍였다가 검게 물들어간다. 조금 전 해가 떠올랐던 하늘이 끝도 없이 어두워졌다. 공기는 탄내와 피 냄새로 축축히 젖었다. 폭탄이 터져나가는 전쟁터 한가운데에 떨어진 비무장 민간인이 된 기분이었다.
여파를 버티는 게 고작인 힘의 소용돌이 속에서, 동생이 나를 부축하며 일어섰다. 잦아들지 않은 바람에 예장의 자락이 나부꼈다. 피투성이에 흙투성이에 머리카락도 엉망으로 헝클어지고. 난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꼴이었지만 유현이는 어느새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차분해진 눈으로 치솟고 녹아내린 땅의 너머를 바라본다.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입을 열었다.
“역시 무서워.”
“유현아.”
“저걸 상대로는 형을 지키지 못하겠지.”
냉정하게 판단하면서도 체념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지금의 자신이 얼마나 미약한지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동생은 끝까지 내 앞을 막아설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라도 네가 모자라단 생각은 하지 마라. 세월이 달라, 세월이. 넌 충분히 강하고 저들에게도 닿을 수 있어. 언젠가는.”
유현이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솔직히 막막하기는 했다. 유현이보다는 내가 말이다. 채터박스가 원래의 힘을 고스란히 지닌 채 쳐들어오지는 못하겠지만, 젠장. 라이트미니멈과 헤비도 양반이라 말할 체급 차이로 복수라니, 양심이 없다.
또다시 땅이 크게 흔들리고 하늘이 무너질 듯 회오리쳤다. 평범한 지진 같은 게 아니라 공간 자체가 뒤흔들려 둘 다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피부가 따끔할 정도의 진득한 살의가 확 퍼져 나가더니.
고요해졌다.
하늘 또한 씻어낸 것처럼 맑아지고 저 멀리서 물 흐르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짓눌러오던 위압감과 천지를 뒤흔들던 마력의 움직임 또한 깨끗이 사라졌다.
이거, 끝난 건가. 제대로 쉬기 힘들었던 숨을 크게 토해 내는데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높게 솟은 땅을 누군가가 가볍게 뛰어넘어 우리에게 다가왔다. 당연히 어린 혼돈이겠거니 했는데.
“어?”
어린애였다. 조금 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처음 봤을 때처럼 헐렁한 로브자락을 끌고 있다. 여전히 어릴 적의 유현이를 빼닮은 얼굴이었다.
“···저 사람.”
어린 혼돈을 본 유현이가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형은 나 어릴 적 모습 정말 좋아하는구나.”
당연히 내 영향으로 저 모습이겠지, 하는 투로 유현이가 말했다.
“아니, 그게.”
좋아하기는 한다만··· 솔직히 귀여운 건 사실이잖아. 안 좋아하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그 사이 어린 혼돈이 빠른 걸음으로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일단 감사인사부터 해야 하나 입을 열려는데.
“악!”
조그만 손이 대뜸 내 귀를 잡아당겼다. 그리곤 강하게 틀었다.
“형!”
“아파! 아파요! 좀 놓, 아악!”
그냥 귀를 비틀었을 뿐인데도 눈물 나게 아팠다. 반사적으로 혼돈의 팔을 붙들어 떼어 내려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무슨 쇠뭉치 같다. 유현이가 당황하며 나를 구하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닿기도 전에 하얀 칼이 칼집 채 툭, 유현이의 손을 쳐냈다.
어린 혼돈이 찌푸린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목숨 아까운 줄 모르지.”
“그건, 악!”
“형! 윽!”
유현이가 자꾸 끼어들자 흰 칼집이 이번에는 동생의 옆구리를 콱 찔렀다. 겉보기엔 멍도 들지 않았을 듯한 공격임에도 유현이는 그대로 몸을 웅크리며 주저앉아 버렸다.
“남의 동생은, 으윽, 왜 때려! 악, 아프다고!”
“동생 챙기는 놈이 스킬은 잘 알지도 못한 채 막 쓰고.”
“아니, 윽, 잠까····!”
진짜 아파, 진짜! 정말로 눈물이 다 새어 나왔다. 스킬을 써보려고 해도 무슨 짓을 했는지 마력이 움직이질 않았다. 상대의 키가 작다보니 엉거주춤 자세가 굽혀진 채로 버둥거리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혀, 형!”
마비라도 된 듯 꼼짝 못 한 채 고개만 겨우 든 유현이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울상을 지었다. 동생이 날 놓아달라고 소리쳤지만 어린 혼돈은 들은 척도 하질 않았다.
“저게 내 검이 아니었다면 들어오지도 못했다.”
“으흑, 잘못했, 흑, 제가, 악! 아, 아!”
“이래 봐야 안 쓸 놈이 아니니, 수상한 이력이 있는 물건은 무조건 빼놔.”
“알겠, 알겠어요!”
잘못했다고 몇 번 더 빌고 나서야 겨우 귀가 놓였다. 얼얼한 귀를 감싸며 풀썩 쓰러지자 유현이가 나를 감싸며 어린 혼돈을 노려보았다.
“괜찮아? 많이 아파?”
“괜찮, 아. 으··· 아니 대체 귀를 어떻게 비틀면 칼 맞은 것보다 더 아픕니까?”
웬만큼 아픈 건 잘 참는 편인데 진짜 장난이 아니었다. 목숨이 위험하겠다 싶은 그런 고통과는 또 달랐다. 아프다는 사실을 머릿속에 억지로 밀어 넣어지는 기분이었다. 고작 귀를 비틀 뿐이지만 넌 아주 많이 아파야 해, 라고 최면에라도 걸린 듯하다고 할까.
“···어쨌든 감사합니다. 도와주셔서.”
눈물을 대충 닦아내고 말했다. 잔뜩 골이 난 유현이도 달랬다.
“네 검 주신 분이야. 덤비면 안 돼. 방금도 우리 구해 주셨잖아.”
덤벼 봐야 지금은 쪽도 못 쓴단다. 떨어져나갈 듯 아프던 귀는 금세 멀쩡해졌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유현이와 닮은 소년을 바라보았다.
“아까는 어른이더니 왜 또 그 모습입니까.”
“일종의 저주야.”
“그래도 굳이 제 동생 모습을 할 건 없잖아요. 여긴 현실도 아닌데.”
내 말에 어린 혼돈이 눈썹을 치켜들었다.
“지금은 내 모습이다.”
“···예?”
“정신계 스킬을 쓴 네 녀석이 선입견을 가진 탓이야. 제대로 봐라.”
그 말대로 어린 혼돈은 내 동생 모습이 아니다, 염불을 외며 눈을 감았다 떴다. 음··· 그래도 비슷한데. 붉은색 눈은 원래 그랬고 머리칼의 곱슬기는 적어졌다. 얼굴 선도 좀 다른 듯하고 키는 약간 더 작은가? 어른 모습일 땐 유현이보다 더 큰 거 같았는데.
“여전히 비슷하긴 하네요. 혹시 제 동생 닮으신 겁니까?”
“네 동생이 나를 닮은 거지.”
그러면서 유현이를 쳐다보았다.
“내가 더 잘생겼지만.”
뭐라시냐. 유현이를 잠시간 살펴보던 혼돈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여전히 유현이와 비슷하다 보니 귀엽긴 귀여웠다.
“이거 신기하네.”
“뭐가-”
혼돈의 모습이 사라졌다. 거의 동시에 유현이의 신음성이 낮게 들려왔다. 급히 고개를 돌리자 소년의 손아귀가 유현이의 목을 잡아채 그대로 바닥에 엎어뜨리는 것이 보였다.
“무슨 짓이야!”
저 겉 어린 노인네가! 급한 대로 손만 수화 해 덤벼들었다. 하지만 제대로 움직여보기도 전에 로브에서 빼낸 허리끈이 찰싹, 내 손을 때렸다. 이번에도 악 소리 나게 아팠다. 본능적으로 움츠러드는 몸을 억지로 움직여 허리끈을 움켜쥐었다. 내리누른 유현이를 바라보던 혼돈이 나를 돌아보았다.
“요 어린것이.”
어째서인지 웃고는 허리끈을 휙 내 손목에 감는다. 반항할 틈도 없이 두어 번 빠르게 허리끈을 움직이자 어느새 내 양손목이 단단히 묶여져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이해도 가질 않았다.
“네 형을 해칠 생각은 없다.”
어린 혼돈이 유현이를 놓고 일어나며 나를 툭 밀쳤다. 균형을 잡지 못하고 주저앉아 버린 내게 얌전히 있으라 말하곤 다시 유현이에게 시선을 돌린다. 유현이 또한 일어나 혼돈을 마주 보았다. 동생의 목에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역시.”
짧게 말한 소년이 움직였다. 여전히 따라잡기 힘든 움직임으로 칼집째 칼을 휘두른다. 유현이의 팔이 아슬아슬하게 가슴을 노리는 칼을 막았지만.
퍼억!
“유현아!”
방어가 무색하게 유현이의 몸이 그대로 붕 떠 뒤로 십여 미터쯤 날아가 땅에 처박혔다.
“야! 멈춰!”
망할 늙은이가 남의 애를 잡으려고! 일어나지도 않은 채 허둥지둥 순간이동 스킬을 썼다. 유현이 옆으로 이동하자마자 혼돈의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공격한다기보단 밀쳐내는 수준이었지만, 아니 어떻게 순간이동보다 더 빨리 움직이냐.
바닥을 데굴 구르는데 스르릉, 섬뜩한 소리가 귀에 꽂혔다. 칼 뽑았어. 미친, 뭐, 뭘 하려고!
“미친놈아! 내 동생 잘못되면 나도 죽어!”
“말버릇 봐라.”
쯧,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내 손목을 묶은 허리끈이 깔끔히 잘려 나갔다. 얼른 몸을 일으키자 유현이가 앉아있는 게 보였다. 큰 부상은 없었지만 목덜미에 붉은 선이 그어져 있다. 칼날이 스친 흔적이었다. 얼른 동생에게 가 앞을 막아섰다.
“말로 해요, 말로! 뭐가 문젭니까!”
“문제라기보다는.”
어린 혼돈이 칼을 허리에 차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사람이 아닌 걸 어떻게 사람노릇 하게 만들어 놓았지.”
“···네?”
“네 동생 말이다.”
···인상이 절로 확 찌푸려졌다. 이젠 남의 귀한 동생을 아예 사람 취급도 안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