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330
328화 흑룡의 심장 (3)
“그게, 제 몸 상태가 좀 안 좋았잖아요.”
“죽으려고 발악하긴 했지.”
“…형?”
“눈 안 보였던 거 말이야, 눈. 어르신이 과장되게 말씀하시는 거야. 지금은 시력도 많이 회복되었잖냐.”
혼돈님, 어르신, 제발! 다행히 혼돈은 더 말하지 않고 팔짱을 꼈다. 하지만 유현이는 여전히 미심쩍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세성 길드장 도와줬던 거, 많이 무리한 거였어?”
“아냐. 물론 힘들지 않았던 건 아닌데, 그냥 과로지. 평범한 야근 같은 거.”
검은 눈이 가늘어졌다. 붉은 눈도 가늘어졌다. 혼돈이 유현이와 닮았다 보니 동생이 둘이 되어 나를 탓하는 것만 같았다.
“사, 사람은 구해야 했으니까…….”
“세성 길드장이란 놈은 또 뭐냐.”
“아, 그…….”
“형을 귀찮게 구는 인간입니다.”
“네가 내버려 둔 거 보면 그 녀석도 원맥자인 모양이지.”
“네. 하지만 곧 해외로 나갑니다.”
유현이가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을 처리한다는 듯 말했다. 뭔가 변명을 해야 할 거 같은데 내가 성현제를 감싸 줄 필요가 있나. 그래도 일단 말은 꺼냈다.
“도움은 되는 사람이에요. 저와는 일종의 동업자나 협력자 같은 거기도 하고요. 성격은 좀 문제가 있긴 한데 그래도 얼굴은, 아니 능력은 좋고요. 그리고… 빵도 잘 만들더라고요.”
외모 빼니 음식밖에 안 떠올랐다. 이래서 먹는 게 남는 거라고 하는 건가. 뜨개질도 쓸데없이 잘하긴 했지.
“…아무튼 뭐 괜… 찮은 사람인데. 나쁘지는, 않죠.”
성현제를 칭찬하려니까 송 실장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송 실장님, 죄송합니다. 어린 혼돈이 그런 나를 묘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 녀석과 만난 지 얼마나 되었냐.”
“예? 한 넉 달쯤 됐을걸요. 가짜 세계 시간까지 더한다면.”
“넉 달? 그런데 말하는 꼴이 영… 네 녀석 정이 헤픈 거냐 그놈이 원맥자답지 않은 거냐.”
“형이 속아 넘어간 겁니다.”
유현이가 나 대신 못마땅하게 대답하곤 말을 덧붙였다.
“아무나 쉽게 좋아하기도 하고요.”
“아무나라니, 그런 적 없어. 내 주위에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그러냐.”
“형은 원래 그랬으니 어쩔 수 없지만 조심은 해. 심지어 내가 모르는 사이에도 자꾸 늘어나잖아. 저… 분은 또 언제 친해진 거야?”
좀 억울했다. 오히려 그 반대였는데. 낯선 사람이 접근해 오면 의심부터 깔고 간 세월이 5년이다. …그 와중에도 몇 번 넘어가긴 했으니 동생의 말도 아주 틀린 건 아니지만. 진짜 괜찮은 사람인 척, 이해해 주는 척 하면 어쩌겠냐고. 남의 약점 쑤셔가며 속인 놈이 나쁜 거지.
“혼돈 선생님이랑은 딱 두 번밖에 안 만났어. 친하긴. 그리고 어르신, 저 성현제, 세성 길드장이랑 별로 안 친합니다. 그 인간 자기 입으로 친구 같은 거 한 명도 없댔거든요. 제가 봐도 평생 없을 거 같던데. 잠깐 친구 하기로 한 건 옛날 옛적에 유효기간 지났고요.”
“그래, 그래. 만난 지 넉 달 된 원맥자더러 괜찮은 사람이라고 얼빠진 소리 하는 주제에 잘도 안 좋아하겠다. 타고나길 그 꼴인 거냐, 저놈 키우다가 그리 된 거냐?”
어린 혼돈이 절벽 끝으로 다가가며 말을 이었다.
“본바탕은 평범한 수준의 인간인 듯한데 뭐 저런 게 다 있을까. 고작해야 30년 산 어린놈이.”
“30살인 줄 어떻게 아셨어요? 신입이 말해 줬습니까?”
“보면 알아.”
티가 나나. 그거 말고도 내 몸 상태를 바로바로 알아차리긴 했지만. 뭐 해파리도 진단 내려 줬었지. 문득 어린 혼돈에 대해 궁금해졌다. 초월자라고 해도 다양한 듯하던데.
“저기요, 어르신이 신입 대하는 거 보면 꽤 높은? 아무튼 한가락 하시는 게 아닐까 싶던데요. 다른 초월자들에게도 요즘 것들이라 하셨고, 그러니 어르신은 훨씬 오래 사셨겠죠?”
“살 만큼 살았지.”
혼돈의 몸이 공중으로 가볍게 떴다. 절벽 아래로 뚝 떨어진 그의 발끝이 수면에 닿았다. 참방, 둥글게 파문이 일더니 바다가 순식간에 밀려나간다. 마치 썰물을 촬영한 영상을 빠르게 재생하는 것만 같았다. 가득 차 있던 바닷물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빠져나가고 젖은 바닥과 동강 난 용의 몸뚱어리들이 드러났다.
예림이처럼 물을 조종하는 것도 아닌 듯한데 대체 무슨 재주로 저런 광경을 만들어 내는지 코앞에서 보고도 모르겠다. 같은 초월자라고 해도 만약 무해의 왕 대신 어린 혼돈과 붙었다면 이기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스탯이 더 높다고 해도 말이다.
나도 따라 내려가려는데 유현이가 내 허리를 낚아챘다. 버들잎이 흩날리고 계단을 내려가듯 사뿐사뿐 물이 빠진 땅에 다다랐다.
“지금은 나 혼자서도 내려올 수 있다만.”
“그래도 굳이 직접 움직일 필욘 없어. 무엇보다도… 솔직히 말해 줘, 형. 지금 이 정신계 스킬도 형에게 부담 가는 거 아니야?”
유현이가 걱정과 의심이 섞인 눈으로 물었다.
“진짜 솔직하게 말해서 예전이라면 부담 갔을 거야. 스킬을 쓰면 마나가 소모되는데 내 마나통이 템빨 받아 봤자 작잖냐. 의식 없는 상태로는 마나포션도 못 먹고. 근데 지금은 은혜 덕분에 괜찮아.”
성현제 때와는 달리 마나가 부족한 느낌은 전혀 없다. 여봐란 듯이 혼돈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렇죠? 어르신.”
“나와 저 도마뱀 놈만 없었다면 말이야.”
“예?”
“하루쯤 앓아누울 거다.”
말은 하루 앓고 만다는 식으로 했지만, 나를 향하는 붉은 눈이 엄했다. 유현이 앞이라고 줄여 말해 준 거구나 싶었다. 그것만으로도 동생은 충분히 당황했다.
“형……!”
“어쩌겠냐, 이미 벌어진 일인걸. 다음부턴 어르신 말대로 조심하면 돼.”
유현이를 다독이는 사이 혼돈이 흑룡의 잘린 머리통 쪽으로 다가갔다. 닫혀 있던 용의 주둥이가 벌어지며 날카로운 이빨이 좌라락 드러났다. 기둥처럼 거대한 송곳니 사이로 으르렁거림이 새어 나온다.
“시끄러워.”
혼돈이 돌멩이를 발로 찼다. 날아간 돌멩이가 용의 콧등에 부딪치고 벌어졌던 주둥이가 망치로 내려치기라도 한 듯 콱 다물려졌다.
“…어르신이 무해의 왕보단 강하죠?”
“내가 제일 강해.”
“…네?”
어, 그러니까.
“그, 초월자들 중에서요? 제일이요? 혹시 초승달보다 말입니까?”
“그래.”
그가 당연한 사실을 말하듯 덤덤하게 대답했다. 믿어도 되는지 모르겠네. 보통이 아닌 건 확실한데, 그래도 제일 강하다니. 흑룡을 힐끔거리며 혼돈에게로 다가갔다.
“저기요, 어르신. 그럼 저희 좀 도와주세요. 제발요. 초월자들이 쓸데없이 간섭만 안 해도 알아서 잘 살아남을 자신 있거든요. 만족하실 만한 대가를 지불할 능력은 없지만 뭐든 원하시는 대로 다 해드릴게요. 가여운 애들 적선해 준다 생각하시고─”
“형! 뭐든지라니! 차라리 내가 대신할게!”
“뭐? 대신하긴 뭘 대신해!”
“…두 놈 다 입 다물어.”
어린 혼돈이 눈가를 찌푸리며 말했다. 호통도 아닌 나직한 목소리였음에도 유현이도 나도 꼼짝 못 하고 입을 딱 다물었다. 감히 반항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나는 먼저 덤비는 놈 아니면 공격 못 한다. 게다가 지금 내가 끼어들면 더 난장판이나 되겠지.”
크게 기대한 건 아니지만 역시 안 되는구나. 하긴 아무리 강해도 혼자서 다른 초월자들을 모두 상대할 순 없을 것이다.
“당장은 걱정할 필요도 없어.”
혼돈이 혀를 쯧 차며 말했다.
“두 무리가 협상을 끝내면 어느 쪽이든 이 세계에 직접적인 개입은 하지 못할 거다. 간접적인 수작질이야 해대겠지만, 흠.”
겉모습은 열두엇 소년이면서 나이 든 티 팍팍 나는 태도로 느슨히 팔짱을 끼며 어린 혼돈이 흑룡의 머리를 돌아보았다.
“우선은 이놈 마저 처리하고.”
흑룡이 분한 듯 낮게 그르렁거렸다. 어떻게 설득한다지. 일단 통성명부터 해볼까.
“안녕하세요, 흑룡 씨. 저는 한유진이라고 합니다. 이쪽은 제 동생인 한유현이고요.”
바늘처럼 가는 새빨간 동공이 나를 향해 움직였다. 마치 검은 암벽 사이로 스며 나오는 끓은 용암 같았다.
“충분히 오래 사시긴 했겠지만 그래도 여기서 죽는 것보단 사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제 동생 무기도 아끼는 편이에요. 관리도 잘해 드릴 수 있고 가능한 한 편의도 봐드리겠습니다. 인벤토리 갑갑하실 텐데 꺼내 놓고 다니라고 할까요? 무선 이어폰 달아서 음악이나 오디오북 같은 거 틀어 드릴 수도 있어요.”
요즘 선 없는 것도 음질 깔끔하다던데.
– 사는 게 더 낫다고?
잔뜩 긁혀서 걸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열기가 훅, 뜨겁게 닿아왔다.
– 내 몸뚱이로 만든 검 속에 갇혀서 의식만 간신히 이어지는 걸 산다고 말하는 거냐.
“어… 그건 저도 할 말이 없네요. 그래도 여기서 덜컥 죽는 것보단 딱 몇 년만이라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천천히 떠나시는 걸 권하고 싶습니다만. 여생의 마지막을 즐길 수 있도록 최대한 도와드리겠습니다.”
– 몇 년? 그걸 어떻게 믿을 수 있지. 다시 구할 수 없는 좋은 무기를 그냥 버리겠다는 소리 아닌가.
흑룡이 비웃었다. 확실히 어떤 미친놈이 L급으로 성장 가능한 무기를 스스로 없애려 들까. 나 같아도 믿지 못하겠다. 그때 유현이가 입을 열었다.
“약속할 수 있어.”
– 그까짓 말로만.
“내겐 인벤토리에서 꺼낸 도검은 모두 녹일 수 있는 스킬이 있다. 하지만 군림자의 검은 L급 이하의 불에서는 녹지 않는다는 특성 때문에 스킬이 통하지 않았어.”
도검 포식자 스킬 설명은 등급 상관없이 녹이는 게 가능하다고 했지만 그 반대되는 군림자의 검 특성이 더 우위였던 모양이었다. 하긴 군림자의 검은 원래 L급 수준이고 도검 포식자 스킬 등급은 그보다 낮으니까.
“도검 포식자 스킬이나 불길이 더 강해지면 군림자의 검 또한 삼킬 수 있겠지.”
– 그래서, 그때 녹여 주겠다고?
“형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아무리 귀한 무기라 해도 아낄 생각 없어.”
여차하면 녹여 사용할 것이라고 유현이가 담담하게 말했다. 내 심정으로는 아무리 그래도 L급 검을 막 녹이려고! 싶었지만 입 다물고 있었다.
“지금 여기서 죽어도 네 육신으로 만든 검은 그대로다. 깨끗하게 녹아 사라지고 싶지 않아? 나라면 그럴 텐데.”
“야! 뭐가 나라면이야!”
“형이 없어서 더 살 필요가 없으면 말이야. 이린이 처리해 주겠지.”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꼴을 보니 속이 답답해졌다. 역시 어떻게든 백 년은 더 살아야 하나.
흑룡이 잠시간 침묵했다. 말을 하려는 듯 주둥이를 약간 들썩이다가 다시 다물어 버린다. 그것을 쳐다보던 어린 혼돈이 나섰다.
“막상 죽여 준다 하니, 죽기는 싫은 모양이지.”
– 그…….
“맞네요, 어르신. 생각해 보니 진짜 죽고 싶었다면 어르신 오기 전에 자살해 버리면 되는 거 아닙니까. 역시 살고 싶었구만, 흑룡 씨.”
혼돈에게 맞장구치며 솔직해지라는 내 말에 흑룡이 크르렁거렸다.
– 검에 갇혀 살기 싫다는 거지 벗어날 방법이 있다면 당연히!
“새 육신을 얻을 방법이 있다면 어쩔 테냐.”
혼돈의 말에 흑룡이 다시 침묵했다. 검은 눈이 의심스런 빛을 띠었다.
– 만들 수 있는 건 도검뿐이고 부수는 것밖에 못 하는 늙은이가.
“나보다 네놈이 오천 살이나 더 많아.”
참 의미 없는 나이 타령이다. 혼돈이 손을 뻗어 내 팔을 잡고 당겼다.
“그리고 육신을 만들어 주는 건 이 녀석이다.”
“예?”
– 뭐?
“형을 끌어들이지 마, 십시오. 제 검이고 제 일입니다.”
유현이가 내 다른 쪽 팔을 붙잡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흑룡이 의아한 듯 나를 살펴보았다.
– 옆의 원맥자와 다르게 평범한 인간인데.
“이 녀석은 양육자다. 키워내는 능력만큼은 정원사 뺨칠걸. 남은 게 심장 한 조각뿐이니 원래의 육신에는 훨씬 못 미치겠지만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건 가능할 텐데, 어쩔 거냐.”
정원사는 또 누구야. 단순한 직업을 말하는 건 아닌 듯한데. 어린 혼돈의 말에 흑룡이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 정말로 가능하다고? 고작 심장 조각으로?
“저놈도 있지. 너와 가까운 성질의 원맥자 말이다.”
“가까운 성질이라고요? 흑룡과 유현이가요?”
내 물음에 혼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척 봐도 불의 성질을 가진 원맥자잖냐. 네 동생과 달리 근원의 비율은 절반 좀 넘는 정도지만.”
새삼스럽게 흑룡을 바라보았다. 같은 불의 원맥자라니.
“그럼 유현이와 동족에 가까운 거겠네요.”
“저것보다 형이 훨씬 더 가까워.”
“그건 또 무슨 헛소리냐. 둘이 혈육이라 해도 완전히 다르게 느껴질 텐데.”
그러게. 나도 고개를 갸웃하며 유현이를 돌아보았다.
“지금 형은 나와 같잖아. 완전히 똑같은 힘을 쓰고 있고.”
똑같은 힘이라니, 그것 때문에? 혼돈에게 선생님 스킬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 주었다. 내 이야기를 들은 어린 혼돈이 별 희한한 일 다 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튼, 네 동생은 순도 짙은 원맥이라 별다른 정제를 거치지 않고서도 육신을 재료로 쓸 수 있어.”
“재, 재료라뇨! 아니 왜 멀쩡한 사람을! 설마 그것 때문에 초월자들이 유현이를 노리거나 하는 건 아니겠죠?”
해파리도 관심을 보이긴 했었다. 기겁하며 유현이를 끌어안자 혼돈이 방정 떨지 말라며 설명을 이었다.
“손이 덜 갈 뿐이지 그 자체가 귀한 건 아니니 걱정 마라. 평범한 인간에게도 근원의 힘은 깃들어 있어. 초월자라면 네 동생을 갈기보다는 지성체 만 명을 정제하겠지. 드문 원맥을 찾아 헤매느니 그게 더 편하고. 여느 원맥자라면 백 명쯤 들려나.”
“…그렇게 차이가 많이 납니까?”
“불순물을 거르다 보면 근원의 힘도 같이 깎여 나가니까. 정제할 능력이 없는 자들이라면 귀히 여기겠지만 그런 놈들이야 원맥자를 사로잡질 못해. 잡아 봐야 제대로 다루지도 못할 거고.”
그래도 원맥자를 잡아다 불로장생의 영약을 만든다느니 한 자들이 없는 건 아니라 하였다. 그런 점만큼은 현대사회라 다행이었다. …아니, 현대에도 안 늙고 오래 살 수 있다면 눈 뒤집어지는 인간들 많긴 하지만. 각성자 상대로 떠도는 살벌한 미신도 꽤 있고.
“흑룡의 의식이 완전히 깨어난 것도 제 본성과 비슷한 순도 높은 원맥의 힘을 머금은 탓일 거다. 그러니 심장 조각에 불의 원맥도 좀 넣으면 그럭저럭 쓸 만한 몸뚱이가 나오겠지.”
어떠냐는 어린 혼돈의 말에 흑룡이 눈을 느릿이 끔벅였다. 그리곤 대답했다.
– 좋아, 받아들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