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spicious little prince is a world's top ten masters RAW novel - Chapter (113)
◈ 113화. 혈교의 침공
자존심을 지키는 대신 사람을 잃는다.
진무립의 그 한마디에 각주들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성각주 장환이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옳은 말입니다. 여기서 자존심을 내세울 것이라면 사천맹의 고루한 수뇌부와 다를 게 무엇입니까? 저는 진단주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이어서 각주들이 경쟁하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단주의 의견에 일리가 있습니다. 맹주님께서 결정만 내려주신다면 당장에라도 따르겠습니다.”
가만히 앉아있던 강유월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비록 가진바 전력이 사대거파에 비할 것은 아니라곤 하나 이들의 응집력은 그들이 따를 수 없는 것이로구나. 이 싸움, 해볼 만하다.’
빙그레 웃은 강유월이 입을 열었다.
“빈도 역시 진단주의 말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중대한 문제가 있습니다.”
초평천은 그의 생각을 짐작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그들 모두를 수용할 수 없다는 말이겠지. 그렇지 않소?”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일꾼들이야 잠시 휴가를 보내면 됩니다. 그러나 서른이 넘는 방파에 딸린 식솔을 계산하면 일만은 훌쩍 넘을 터, 그들을 어디에 수용하면 좋겠습니까?”
초평천은 진무립을 바라보았다.
“왠지 우리 두 사람의 생각은 같을 것 같구나. 네가 말해보아라.”
진무립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중경으로 가면 됩니다.”
강유월이 물었다.
“중경? 마도림을 말하는 것인가?”
“예. 아직 천하대전의 피해를 온전히 수습하지 못한 탓에 빈방이 많습니다. 게다가 대검문이 사용하던 장원 역시 텅 비어있지요. 중경 인근의 방파들까지 협조한다면 식솔들을 수용하기엔 충분합니다.”
초평천이 빙그레 웃으며 수뇌들을 돌아보았다.
“본인 또한 화공단주와 같은 의견이오. 혹시 더 좋은 의견이 있소이까?”
“진단주의 의견대로 진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저 역시 동의합니다.”
만장일치로 진무립의 의견에 동의하자 초평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거령을 내리겠소. 오 각, 이 단의 수장은 모든 힘을 동원해 방파들의 철수를 도우시오. 전쟁이 끝난 뒤, 적의 손에 불타오른 곳이 있다면 복구는 본 맹에서 책임지겠소.”
수뇌부는 일제히 포권을 취했다.
“명을 받듭니다!”
스쳐 지나갈 것만 같던 비는 늦은 장마가 되어 세상을 뒤덮었다.
이런 날씨라면 전서구를 맹신할 수 없다.
적모개는 신법에 능한 비사각의 무인들을 파견했다.
그들이 가까운 방파에 소식을 전달하면, 소식을 받은 이들은 사전에 약속된 인근의 방파에 그것을 전파하는 방식이었다.
사천 전역으로 초평천의 명이 전해지는 가운데, 공위맹에 머물던 각파의 대표들은 철수를 도와줄 동료들과 사문으로 떠났다.
* * *
양옆으로 울창한 숲이 드리운 좁은 길 위.
먹구름에 어둑한 세상, 음산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가운데 쏟아지는 빗줄기는 그칠 줄을 모른다.
벼락이 떨어지며 세상이 번쩍하는 순간 한 무리의 무인들이 숲길에 접어들었다.
짚으로 된 우의를 걸치고 죽립을 눌러쓴 그들은 흙탕물을 피해 신법을 전개했다.
“마치 귀신이라도 나올 것만 같구만.”
“서두르세. 언제 놈들이 움직일지 모르네.”
“그러지.”
이들은 사천맹 신설 부대, 서궁대의 무인들로 대설산맥의 감시를 지원하고자 움직이는 중이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하늘이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으니 시간의 흐름이 무뎌진다.
그저 사방이 점점 더 캄캄해지자 이제 곧 밤이겠거니 싶은 것이다.
등 뒤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질 무렵, 짙은 어둠 속에서 마침내 선두의 사내가 발을 멈췄다.
“더 달리긴 어려울 거 같군.”
“이제 거의 다 왔네. 산 하나만 넘어가면 되니 무리할 것 없이 쉬어가지.”
말이 끝나는 순간, 벼락이 떨어지며 천지가 번쩍이더니 가슴이 덜컥 내려앉을 듯한 뇌성벽력이 뒤따랐다.
쿠르릉!
한 곳을 쳐다본 무인들의 표정이 약속이라도 한 듯 딱딱하게 굳는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그 자리에 있어선 안 될 무언가를 본 것이다.
“저건…….”
“자네도 보았는가?”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었다면 말일세.”
그때 또 하나의 벼락이 십 장 앞의 나무에 떨어졌다.
콰아앙!
마치 도끼로 내리찍은 것처럼 쩍 갈라진 나무에 불이 붙는다.
곧이어 지독한 어둠이 물러가며 서궁대원의 눈에 흐릿한 사방의 풍경이 들어왔다.
좁은 길을 빼곡하게 채운 핏빛 의복의 무인들.
그뿐이 아니라 뒤에도, 좌우의 숲에도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적의 포위망이 갖춰진 상태였다.
그중 선두에 선 사내는 어이가 없다는 듯 얼굴을 매만졌다.
“큭큭큭. 이거 당혹스럽네. 우리 지금 들킨 거야?”
“송구합니다. 소교주. 이 길로 누군가 올 줄은 몰랐던 지라…….”
서궁대원들의 가슴이 거칠게 요동쳤다.
‘소교주?’
‘혀, 혈교가 산맥을 넘었단 말인가!’
이곳에서 성도까지는 불과 보름 거리.
맹에서는 적에 대해 아무런 언질조차 없다.
그렇다는 것은, 저들은 누구도 모르게 변경을 돌파해 이곳까지 왔다는 것이다.
‘알려야 한다!’
서궁대원들이 서신을 교환하며 은밀한 전음을 나누고 있을 때.
“마음 같아선 목을 확 베고 싶은데, 사천 길을 아는 놈이 없어서 봐준다.”
돌아선 무초걸의 두 눈에 지독한 살광이 번들거렸다.
“처리해.”
“존명.”
명이 떨어지는 순간, 포위당한 서궁대원들이 사방으로 몸을 날렸다.
“흩어져서…… 컥!”
가장 먼저 외친 사내는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목이 떨어졌고.
그것을 시작으로 사방에서 찢어질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아악!”
“반드시 돌아가야 한다!”
캄캄한 어둠 속, 아비규환의 참상.
쏟아지는 빗줄기에 솟구치는 피가 섞여 웅덩이를 만들어간다.
그로부터 고작 일다경이 채 지나기도 전에, 열두 명의 서궁대원은 차디찬 주검이 되어 바닥에 몸을 뉘었다.
시신 앞에 쪼그려 앉은 무초걸은 흐르는 피를 쿡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퉷! 맛도 더럽게 없군.”
인상을 쓰며 일어난 그는 성큼 발을 내디뎠다.
“이러다 굶어 뒈지겠어.”
“시신은 두고 갑니까?”
무초걸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제깟 놈들이 알면 어쩔 거야? 시간 없어. 그냥 가.”
당초의 계획은 혈야광인 세 구와 무혼광인 스무 구를 가진 무초걸이 사천에 은밀히 잠입한 뒤, 본격적인 전쟁이 벌어지면 후방을 유린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노출된 이상 그 작전은 성공 가능성이 없게 되었다.
“소교주. 적에게 노출된 이상 후발대를 기다렸다가 함께 움직이시는 편이…….”
사내를 향한 무초걸의 눈이 혈광으로 휘번덕였다.
“내 말에 한마디만 더 토 달면 그냥 죽여버릴 거야.”
오싹한 눈빛에 항거하지 못한 사내는 즉시 고개를 숙였다.
“소, 송구합니다.”
“계획을 바꾼다.”
사내에게서 시선을 거둔 무초걸은 어둠 속 어딘가를 응시하며 히죽 웃었다.
“속도를 올려. 설령 목표를 알더라도 쫓아오지 못할 만큼 잽싸게 달리는 거야. 크히히! 그러다가 놈들이 우리의 목표가 청성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대비에 들어갈 때.”
무초걸의 고개가 픽 꺾였다.
“휙 꺾어서 아미로 달려가는 거지. 아미의 계집들이 우릴 보면 제법 당혹스러울 거야. 크히히히!”
기괴한 웃음소리가 쏟아지는 장대비에 파묻혀간다.
혈교의 사천 침공이 막을 올렸다.
* * *
좀처럼 그치지 않는 빗줄기에 사천맹 전역은 온통 흙탕물이 됐다.
음습한 지하 연무장, 마치 면벽 수련하듯 벽 앞에 앉은 당천은 뒤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발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대주.”
다급하게 문을 연 진설란은 그를 보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죽는 방법도 가지가지네요.”
어디서 물이 새는지 당천의 허리춤까지 물이 찬 상태였다.
당천은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이지?”
“비봉으로 향하던 서궁대가 산속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고 해요.”
“서궁대라면 중소방파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만들어진 부대 말인가?”
“그래요.”
진설란의 표정이 매우 어두워졌다.
“혈교가…… 벌써 대설산맥을 넘은 모양이에요.”
“위에선 어찌하고 있지?”
“일단 소식을 접한 순간 사대거파에 사람을 보낸 뒤 회의에 들어갔어요.”
잠시 생각하던 당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구로 나섰다.
“잠시 본가에 다녀오겠다.”
“공위맹에서도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요?”
“알 수도, 모를 수도 있겠지.”
“그들에게 알리고 함께 대응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그쪽엔 사대거파의 무인들도 있는데…….”
당천은 실소를 머금었다.
“위에서 잘도 그런 일을 하겠군.”
진설란은 앞을 스쳐 가는 당천에게 전음을 보냈다.
[중목원에서 각 부처에 하달한 무혼광인의 공략법. 그것은 사실 비각에서 파악한 것이 아니라 공위맹에서 전해준 것이라고 해요. 그들에겐 우리와 함께할 의사가 있는 것 같아요.]진설란은 지금이라도 진무립을 비롯한 예전 동료들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당천의 입가에는 희미한 조소가 번졌다.
“맹주가 그들과 손을 잡을 것 같았으면 처음부터 손을 놓지 않았을 거다.”
“당신도 혈교를 겪어봐서 알잖아요. 이대로 정말 괜찮을까요?”
사대거파의 힘을 믿지 못하는 게 아니다.
그들을 지휘할 수뇌부의 역량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그녀의 걱정 섞인 말에 당천은 언제나처럼 담담하게 답했다.
“그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당천이 연무장을 나설 무렵, 중목원에선 한바탕 시끄러운 토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지금 당장 비봉에 무인을 파견해 침입한 적을 색출해야 하오.”
“보고가 들어온 지 벌써 사흘이 지났소. 비봉에 보내봐야 그곳엔 아무도 없을 거란 말이외다. 차라리 그들이 움직일 만한 지점을 설정해 기다리는 게 좋을 것이오.”
사방에서 저마다 목청을 키우는 가운데 문밖에서 다급한 보고가 들려왔다.
“적의 위치를 파악했습니다! 주곡, 호산, 서청을 사흘 만에 주파했습니다. 다음 목적지는 금천으로 보입니다!”
수뇌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방향은…….”
한천월의 미간에 짙은 주름이 패였다.
“청성일세.”
청성 출신 천선각주 장유기가 문을 벌컥 열고 물었다.
“적의 숫자는 어느 정도인가?”
“확실하진 않으나 대략 이백은 되는 것 같습니다.”
애매한 숫자다.
지원을 보내자니 수가 너무 적고 방치하자니 적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모른다.
후발대가 파악되지 않은 상황에서 저 정도의 적에 청성을 돕자고 나섰다간 자칫 맹주가 사문부터 챙기려 한다는 구설에 오를 수 있었다.
비각주 정운창이 망설이는 한천월을 대신해 말했다.
“적에겐 실혼인이 있습니다. 숫자만으로 경시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닙니다. 각파에 소식을 전하고 적의 이동이 예측되는 방향에 지원을 보내야 할 것입니다.”
가뭄에 단비와도 같은 말에 한천월은 무릎을 슬쩍 치며 일어났다.
“그렇군. 실혼인이 있다면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일세.”
계단의 중턱까지 내려온 그가 발을 멈췄다.
“천선각과 북천각은 지금 즉시 청성에 무인을 파견해 적의 침공에 대비토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준비하겠습니다.”
장유기와 진하성이 예를 갖추고 나가자 한천월은 자신의 검을 높게 치켜들었다.
“혈교의 침공이 시작되었소. 오늘부터 전 부대에 언제든 출진할 수 있도록 맹 내 대기령을 내리겠소. 사천을 수호하는 것이 누구인지 온 세상에 똑똑히 보여줍시다.”
자리에서 일어난 수뇌들이 일제히 포권을 취했다.
“명을 받듭니다.”
수뇌들이 나가자 한천월은 정운창에게 말했다.
“혈마의 위치를 최우선으로 파악하게. 머리부터 잡으면 이 전쟁은 한결 더 수월해질 걸세.”
정운창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맹주님. 설마 직접 나서실 생각입니까?”
비록 한천월이 사천맹주이자 맹 내 제일의 고수라곤 하나, 자신의 생각으론 혈마는 십대고수의 일인이자 독왕으로 불리는 당가주에게 맡기는 것이 나았다.
그러나 생각과 다른 한천월의 대답은 너무도 단호했다.
“물론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