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spicious little prince is a world's top ten masters RAW novel - Chapter (131)
◈ 131화. 결전을 앞두고
쥐 죽은 듯 조용한 밤이 지나간 파악산에 아침이 밝아왔다.
흩어졌던 사대거파의 무인들이 속속 집결하고 중경과 공위맹 총단에 남아있던 중소방파 무인들까지 모두 집결하자 그 수는 무려 오천에 달했다.
마지막 결전을 앞둔 파악산에 사뭇 비장한 공기가 감돌았다.
높이가 일 장에 달하는 장막이 정상의 공터를 회의장으로 만들었다.
장막을 따라 공위맹의 주축들과 당가의 당조, 아미의 자소, 강유월과 하종보가 청성과 점창을 대표해 자리에 앉았다.
다만 상천을 대표하는 백채륜은 할 일만 알려달라며 참여하지 않았다.
모두가 모인 가운데 초평천이 예를 갖추며 말했다.
“회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여러분께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소이다.”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초평천은 각파의 수장들과 차례로 눈을 마주쳤다.
“사천맹이 어째서 무너졌는지 잊어서는 안 될 것이오. 이 자리에는 상석과 하석의 구분이 없소이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싸워야만 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주길 바라오.”
사대거파의 대표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천맹이 몰락하고 사문이 불타오른 것은 자신들의 오만과 방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반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간 본 가가 행한 무례와 독선을 이 자리에 계신 여러 대협께 진심으로 사죄합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당조가 초평천을 비롯한 중소방파의 무인들에게 차례로 예를 갖췄다.
“본 가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초대협과 수뇌부의 결정에 어떤 이의도 없이 따를 것을 약속하겠습니다. 일선에서 싸우라면 싸울 것이고, 물통을 나르고 밥을 지으라면 그리할 것입니다. 부디 사천 무림의 일원으로 여러분과 함께할 기회를 주길 바랍니다.”
그 어느 때보다 공손한 당조의 태도에 중소방파 무인들은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천하십대고수의 일원이 자신들에게 고개를 숙이리라곤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어서 자소가 일어났다.
“본 파가 사천맹에서 보인 무책임한 태도로 여러 대협의 신망을 잃었다는 것을 잘 압니다. 우리 아미는 여러분께서 허락해주신다면 백의종군하는 마음으로 이번 전쟁에 임할 것입니다.”
이어서 강유월과 하종보까지 모두에게 예를 갖추었다.
그들에겐 직접적인 책임이 없다곤 하나 사문의 일원으로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던 까닭이다.
함께할 기회를 달라.
몸을 낮춘 사대거파 대표들의 읍소에 중소방파 무인들은 어쩔 바를 몰랐다.
초평천이 옅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저들이 기회를 달라고 하는군. 반대하는 의견이 있으시오?”
짧은 정적 끝에 검명문 출신의 무성각주 장환이 입을 열었다.
“과거의 태도를 버리고 본 맹의 규율과 맹주님의 의지에 따르고자 한다면 함께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어서 북천도문의 조야명이 말했다.
“사천맹에서처럼 방파의 구분을 나눈다면 몰락한 그들의 전철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모두가 합심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야 할 때입니다.”
사천맹이 사대거파와 중소방파 사이에 벽을 만들었다면 공위맹은 어떤 벽도 세우지 않기 위해 세워진 집단이다.
혈교의 침공으로 상황이 매우 달라졌으나 과거의 원한으로 벽을 세운다면 사천맹과 다를 게 없었다.
초평천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럼 회의를 시작합시다.”
진무립이 먼저 일어났다.
“시간이 많지 않으니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선결과제는 무인들의 배치였다.
혈교보다 많은 수의 무인이 모였으나 중소방파의 하급무인들은 전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혈교도를 잘 아는 진무립은 냉정하게 상황을 설명했고 반 시진에 걸친 논의 끝에 무인의 편성이 끝났다.
적과 싸울 무인은 사대거파를 포함해 이천오백.
그 외 오백은 지원부대로, 나머지 무인들은 중경의 경계로 보냈다.
고작 십 년 내력도 갖지 못한 이들이라면 학살의 대상이 될 뿐이었기 때문이다.
길어진 회의에 모두가 지쳐갈 무렵.
“헤헤. 안녕하세요.”
동초개가 눈치를 살피며 들어오더니 적모개의 손에 뭔가를 쥐여주고 나갔다.
종이를 확인한 적모개가 말했다.
“조금 전 들어온 보고에 의하면 생각보다 속도가 빠릅니다. 이대로 움직이면 내일 오전에는 시야에 잡힐 것입니다.”
“내일 오전이라고?”
좌중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가는 와중에도 초평천은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조금 이르긴 하지만 시간이 없는 것은 아니외다. 대처할 시간은 충분하니 동요하지 마시오.”
진무립이 말했다.
“그들은 분명 우리와 정면에서 맞붙고 싶을 겁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초무강이 입을 열었다.
“정면 대결을 원하면서 우리를 끌어내고자 한다면, 산을 우회해 중경 쪽으로 무인을 보내고자 하겠군. 우리가 보는 앞에서 말이야.”
하수가 고수를 상대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편은 변수가 많은 전장에서 싸우는 것이다.
혈교가 파악산을 지나쳐 중경으로 가고자 한다면, 공위맹은 산의 이점을 버리고 그들을 막아야 한다.
중경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가족들이 있기 때문이다.
입술을 매만지는 진무립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역시 그렇게 나오는군.’
적이 정면에서 붙길 바란다는 것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적의 눈 밖에서 움직이며 피해를 최소화했으나 이번만큼은 다르다.
진무립이 입을 열기 직전, 그에 앞서 적모개가 먼저 일어났다.
“제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말해보시게.”
좌중의 쏟아지는 시선 속에 적모개가 자신 있게 눈을 빛냈다.
“저들이 원하는 힘과 힘의 싸움이 될 경우, 어느 쪽도 급할 것이 없는 전쟁이 됩니다. 서로 대치하는 상황을 딱 하루만 만들어야겠습니다.”
* * *
탕약의 알싸한 향으로 자욱한 작은 막사.
안으로 들어선 진설란의 눈에 면포로 얼굴을 가리고 잠에 빠진 청년이 보인다.
뚝 잘라 만든 나무 위에는 한 시진 전에 가져온 탕약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고르게 오르내리는 가슴 위로 가녀린 손이 올려진다.
“대주?”
묘한 괴리감을 느낀 진설란은 사내의 얼굴을 가린 면포를 걷었다.
“…….”
당천의 침상에 누워 잠든 사내는 당우였다.
세상모르고 태평하게 자던 당우가 잠결에 중얼거린다.
“나는…… 사천의 대협이…….”
“되세요.”
면포를 얼굴에 휙 던진 그녀는 그대로 막사를 나섰다.
아름드리나무가 사방을 둘러싼 작은 공터.
“후우…….”
나직이 숨을 내뱉는 당천의 전신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움직일 때마다 느껴지는 육신의 고통에는 제법 익숙해졌다.
팔도, 다리도 제대로 움직인다.
‘잡아야 한다.’
위기에 직면한 상황에서 처음으로 성공시킨 만월천비의 초식.
손끝의 감각이 남아있을 때 초식을 완전히 제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내력을 움직이자 단전에서 시작된 끔찍한 고통이 전신으로 번져갔다.
“크윽!”
육신의 고통과 달리 몇 번을 시도해도 이것만큼은 익숙해지지 않았다.
결국 참지 못한 당천이 지면에 무릎을 꿇었을 때였다.
“무공을 잃고 싶은 것이냐?”
중저음의 나직한, 그리고 지엄한 목소리는 바로 부친 당조의 것이었다.
그의 어깨 너머로 조영성이 보인다.
“그러다 죽을 거 같아서 모셔왔다.”
사문의 참사에 복잡한 마음을 달래고자 산책하던 조영성은 이곳에서 당천을 발견했다.
땀에 젖어 안간힘을 쓰는 당천의 모습에 때마침 회의를 마친 당조를 데려온 것이다.
“가보겠습니다.”
“고맙네.”
예를 갖춘 조영성이 사라지자 당조는 비탈을 내려왔다.
“내가 너를 잘못 가르쳤구나.”
부친의 냉혹한 말에 과거의 참담한 기억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가문과 사천 무림의 미래였던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풍천지회의 기억.
당천은 이를 악물었다.
“두고 보십시오. 소자는 반드시 소천무군을 뛰어넘을 것입니다.”
“너를 탓하는 게 아니다. 너를 가르친 나를 탓하는 것이다.”
어색한 정적이 바람과 함께 스쳐 지나간다.
당조는 의문 섞인 아들의 시선을 피해 하늘을 응시했다.
“나는 최고가 되고 싶었다.”
뼈를 깎는 노력 끝에 천하십대고수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마도림의 몰락과 함께 당가는 사대거파의 일원으로 사천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욕심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더 나아가 당가를 사천이 아닌, 남궁세가를 뛰어넘는 천하제일의 명문세가로 이끌고 싶어졌다.
그 욕심은 자식에게서 주변을 돌아볼 여유를 빼앗았고 결국 결과만을 쫓게 하는 외골수로 만들었다.
‘세간의 시선 따위 모두 부질없는 일이거늘.’
집을 잃고, 가족을 잃은 지금에서야 뼈저리게 느껴진다.
한탄을 속으로 삼킨 당조는 아들의 얼굴을 직시했다.
“천하십대고수.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아무것도 아닌 허명이다.”
“……아버지?”
언제나 강건한 모습만 보여주던 부친이었다.
난생처음 접하는 부친의 넋두리 같은 말에 당천은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누워만 있으려니 몸이 근질근질하겠지. 그러나 쉬는 것도 수련이다.”
불어오는 바람에 수풀이 차르륵 넘어진다.
잎새를 어루만진 여름의 훈풍은 부친의 나직한 전음과 함께 귓속을 스며들었다.
당천은 마치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서 부친의 전언을 머리에 새겼다.
잠시 후, 바람의 방향이 변함과 동시에 부친의 전음이 끊어졌다.
“모두 외울 수 있겠느냐?”
멍하니 서서 입술을 달싹거리던 당천은 작게 끄덕였다.
“예.”
머릿속을 스며든 부친의 목소리는 다름 아닌 구암환영공의 마지막 초식, 만사비천도의 구결이었다.
당조는 흡족한 얼굴로 말했다.
“만사비천도의 묘리는 그간 네가 배운 다양한 무공 속에 숨어있다. 실전에서 만월천비를 사용했다면 준비는 되었을 터,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 찾아오너라.”
돌아선 당조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등을 돌린 채 나직이 말했다.
“너는 아비처럼 위만 보지 말고 주변을 돌아보는 가주가 되어라.”
작은 목소리였으나 그 말은 당천의 귀에 선명하게 틀어박혔다.
산새에 엄습한 땅거미처럼 왠지 모를 먹먹한 감정이 스며든다.
비탈을 오른 부친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우두커니 서 있던 당천은 고개를 푹 숙였다.
누구에게도 지금의 얼굴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당천을 찾아 헤매던 진설란이 언덕 위에서 소리쳤다.
“대주!”
한달음에 비탈을 내려온 그녀는 당천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오늘 저녁에 부상자를 이송한다는 얘기 못 들었어요? 계속 고집을 부리겠다면 강제로…….”
“간다.”
당천이 예상 밖으로 순순히 나오자 진설란의 눈이 동그래졌다.
“간다고요?”
“그래.”
고개 든 당천의 입가에 정말 오랜만에 평온한 미소가 걸렸다.
“이제는…… 조금 쉬어도 될 것 같구나.”
* * *
밤 깊은 진무립의 막사에 반가운 얼굴이 찾아왔다.
“아직 안 주무셨습니까?”
싱긋 웃으며 나타난 인물은 바로 백채륜이었다.
회의에서 정해진 계획을 듣고자 온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부르려 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진무립은 지도를 펼치며 말했다.
“너희들은 이곳 벽산에서 대기해라.”
벽산은 이곳 파악산 동쪽으로 십 리 밖에 자리한 산이다.
백채륜은 곧장 진무립의 의도를 알아챘다.
“몰래 중경으로 빠지는 자들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말씀이로군요.”
“적과 싸울 만한 모든 전력이 이곳에 몰려있다. 가족들이 있는 중경을 치는 것만큼 우리를 흔들 수 있는 것은 없지.”
행여 다른 길로 우회한다면 그만큼 시간이 걸릴뿐더러 적모개와 비사각의 눈에 걸릴 것이다.
“그리하지요. 그런데 실혼인을 저들에게 맡겨도 되겠습니까?”
상대편에서 가장 강한 전력은 바로 혈야광인을 위시로 한 실혼인들이었다.
진무립이 말했다.
“그건 계획이 있다.”
백채륜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조금 전 총사가 보낸 물건이 도착했습니다.”
팔천영신공을 펼치기 위한 여섯 가지 무기.
바로 진무립의 독문병기 육병흑궤를 말함이었다.
진무립의 눈이 별처럼 반짝인다.
“지금 어디에 있느냐?”
“막사에 보관 중입니다. 가져다드릴까요?”
“들고 다니기엔 너무 눈에 띈다. 벽산에 가져다 두어라.”
“그곳에서 혈마와 싸울 계획입니까?”
“시작은 다른 곳이겠지만 종국엔 그곳으로 갈 것이다. 너희들은 벽산으로 오는 적을 처리하고 기다리다가 나와 혈마가 도착하면 접근을 차단해라.”
천하의 주목을 받는 전쟁인 만큼 며칠 전부터 각지에서 몰려든 세작이 인근에 숨어있었다.
세작으로 떠돌 만한 이들 중 그것을 알아볼 무인은 없겠지만 주의를 기울여 나쁠 건 없었다.
백채륜은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세작이라…… 참으로 계륵 같은 존재로군요.”
진무립의 입가에 쓴웃음이 맺혔다.
“어쩔 수 없지.”
전시인 만큼 세작을 죽여도 할 말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보는 눈이 많으면 많은 만큼 소문은 더욱 빨리 퍼질 터.
마도림의 부활과 상천이 전쟁에 함께했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기 위해선 그들이 필요한 게 사실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돌아가서 준비하지요.”
진무립은 당부하듯 말했다.
“절대 그 누구도 중경으로 보내선 안 된다.”
백채륜의 뱀 같은 눈매가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상대편에 천주님과 같은 괴물만 없다면 뚫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
밖으로 나가려던 백채륜이 잠시 발을 멈췄다.
“이번 전쟁이 끝나면…….”
진무립은 침상에 드러누우며 불을 껐다.
“당연한 걸 묻지 마라.”
내심 안도한 백채륜이 슬쩍 웃으며 돌아섰다.
“그러지요.”
* * *
차분히 내려앉은 새벽이슬과 함께 동쪽 하늘이 서서히 밝아오기 시작했다.
결전의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