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spicious little prince is a world's top ten masters RAW novel - Chapter (143)
◈ 143화. 중원으로
누렇게 익은 가을의 들녘에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황금빛 물결을 눈에 담은 유대하가 아련한 얼굴로 물어왔다.
“다시…… 돌아올 수 있겠지요.”
육군명이 짓궂게 웃었다.
“남고 싶으면 그냥 남지 그랬나?”
“그런 말이 아니잖아.”
단려화의 얼굴에도 왠지 모를 쓸쓸함이 떠올랐다.
이들과 달리 자신은 눈앞의 풍광을 언제 다시 볼지 기약할 수 없다.
그녀가 돌아갈 곳은 이곳 사천이 아닌 강남이니까.
용추가 눈을 멀뚱히 뜨고 쳐다보는 가운데 진무립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청승맞게 뭐 하는 거야. 누가 보면 죽으러 가는 줄 알겠네.”
단려화가 곱게 눈을 흘겼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데 감상에 젖을 수도 있죠.”
“나중에 다시 오면 되잖아.”
“그럴 날이 올까요?”
진무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온다.”
자신의 사람과 했던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
언제 올지 모를 그날을 기약한 단려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제 우린 어디로 가죠?”
“우선 대별산의 산채로 갈 거다.”
하남성 대별산은 상천의 여덟 거산채 중 하나다.
육군명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무(無)에서 다시 시작하는 기분이군. 나쁘지 않아.”
앞으로 만날 이들은 모두 자신과 처지가 같은 사람들.
언제 들킬지 모른다는 생각에 쉽게 마음을 열지 못했던 과거와는 다르다.
그 마음을 짐작한 진무립은 웃으며 돌아섰다.
“가자.”
사천을 등진 진무립과 동료들이 능선 아래로 몸을 날렸다.
* * *
수풀이 우거진 산속의 관제묘.
칠흑 같은 어둠 속, 타오르는 모닥불이 붉게 물든 가을의 잎새처럼 주변을 물들여간다.
“으음.”
스며드는 밤바람이 제법 쌀쌀한지 불가에 누운 유대하가 옷깃을 여몄다.
그의 옆으로 나란히 누운 육군명과 용추가 보인다.
숨죽여 움직이는 산짐승의 발소리에도, 바람이 수풀을 흔드는 소리에도 그들은 깨어나지 않았다.
쉬지 않고 달려온 탓에 제법 지친 모양이다.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단려화와 마주 앉은 진무립이 고개를 돌렸다.
[해가 뜰 때까지 쉬어도 좋다.] [예. 주군.]이어서 주변에 머물던 은무대의 기척이 하나둘 멀어져 갔다.
일렁이는 모닥불이 단려화의 빛나는 눈동자에 머물렀다.
“아쉽지 않은가요?”
나직한 목소리에 진무립이 고개를 들었다.
“무엇이?”
“광룡 진무립. 떠오르는 무림의 신성. 소천무군을 제치고 새롭게 탄생한 천하십대고수.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나는 게요.”
“그런 허명은 신경 쓰지 않아.”
단려화가 귀엽게 입술을 삐쭉거렸다.
“난 신경 쓰이던데.”
가까스로 광녀의 오명을 벗고 사천검화라는 멋들어진 무명을 갖게 됐다.
그 기쁨을 고작 며칠도 채 누리지 못하고 떠나온 것이 제법 아쉬운 모양이다.
“이제 무엇부터 할 생각인가요?”
“천하오대표국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나?”
“물론이죠. 그들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당금 무림에서 천하오대표국의 위세는 중원무림맹을 능가할 정도로 대단했다.
“그들의 역사는 고작 삼십여 년에 불과하지. 그들은 어떻게 그토록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을까?”
“천하대전에서 표국의 역할을 하던 많은 방파들이 몰락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다.”
“그럼요?”
“바로 산적 때문이다.”
진무립은 설명을 이어갔다.
무려 만 명이 넘는 사상자와 세 자릿수 방파가 몰락한 천하대전은 무림에 많은 변화를 불러왔다.
관에 협조하며 근방의 치안을 담당하던 방파들이 몰락하자 가장 먼저 산적들이 나타났다.
전쟁이 끝나고 천하 무림이 분쟁을 멀리하자 일자리를 잃은 낭인들이 산채를 구성한 것이다.
산적이 기승을 부리니 그에 맞서 굵직한 표국들이 탄생했다.
천하대전에서 몰락한 방파와 사문을 잃고 떠돌던 이들이 손을 잡고 표국을 세운 것이다.
혼란에서 안정으로 접어드는 지난 삼십여 년간.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성장해온 표국 중 가장 거대한 다섯 표국을 사람들은 천하오대표국이라 불렀다.
“표국에 있어 도적은 필요악이지. 도적이 없으면 표국이 필요 없으니까. 천하오대표국은 천하에 산재한 도적들을 발판 삼아 성장해온 거야.”
“음.”
그녀는 그제야 표국들이 그토록 상천을 싫어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상단을 약탈하고 인명을 해쳐야 할 산적들이 상천의 질서 아래 정해진 규칙을 지킨다.
“표국의 입장에선 밥줄이 끊기게 되었으니 화가 날 만하네요.”
진무립은 고개를 저었다.
“우린 그들의 밥줄을 끊으려 한 적이 없다. 말도 안 되는 의뢰비를 책정한 그들이 자멸을 택한 것이지.”
앞서 표국이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성장했다는 말인즉, 그들의 질서를 거부한 표국이 전부 문을 닫았다는 소리다.
표물을 독점하게 된 천하오대표국은 과하게 높은 표행비를 요구했고, 일부 상인들은 결국 그들 대신 상천과 손을 잡는 길을 택한 것이다.
비록 마적에게 당할 위험은 남아있을지언정 그쪽이 훨씬 싸게 먹혔으니 말이다.
“오대표국이 적정한 수준의 표행비를 받고 통행세를 지불해도 적자가 날 일은 없다. 우린 결코 과한 통행세를 요구하지 않으니까.”
관이 상천의 토벌에 나서지 않는 것은, 상천이 근방의 치안 유지에 협조하고 도적 떼가 창궐하는 것을 막아주기 때문이다.
지금과 같은 시대에, 상천이 사라지면 그 자리에 또 다른 산적이 나타날 뿐이라는 걸 그들도 안다.
그렇다면 대화가 통하는 상천을 이용하는 것이 관의 입장에서도 낫다.
상천이 받는 통행세는 바로 치안을 유지하는 대가였다.
진무립의 말을 이해한 단려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의 다음 목표는 천하오대표국이 되겠군요.”
진무립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천이 살아남으려면 그들의 질서를 흔들고 우리가 설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그들이 끝까지 상천을 적대시한다면 진무립이 바라는 것은 이룰 수 없다.
그렇다면 그들을 쓰러뜨리고 상천의 사람이 자유로울 수 있는 세상으로 나아간다.
단려화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어쩌면 혈교와 싸우는 것보다 고단한 싸움이 될 수도 있어요.”
그저 상대를 죽이기만 하면 되었던 혈교와의 전쟁과는 다르다.
천하오대표국은 적어도 혈교처럼 무차별적으로 인명을 살상하지 않으니까.
“걱정할 것 없다. 나는 이런 싸움이 특기니까.”
진무립은 빙그레 웃었으나 그녀는 쉽게 웃을 수 없었다.
마도림을 사천제일세로 끌어올리겠다던 다짐은 이뤘다.
그러나 지금부터 진무립이 하고자 하는 것은 그보다 더욱 험난한 여정이 될 터.
그 과정에 정체가 노출되면 천하를 적으로 돌리게 될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다.
‘만일 그런 날이 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으로선 부디 그런 날이 오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 * *
완연한 가을의 바람이 불어오는 높은 언덕 위에 진무립 일행이 올라섰다.
며칠간 쉬지 않고 달려온 그들은 잠시 숨을 고르며 죽립을 벗었다.
“어떻습니까?”
질문을 던지는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는 바로 유대하였다.
모처럼 역용을 푼 단려화의 민낯에 만개하는 꽃처럼 화사한 미소가 번졌다.
“이젠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정말 못 알아보겠네요. 정말 능숙해졌어요.”
진무립을 비롯한 네 사람은 오는 길에 그녀에게 역용술을 배운 참이었다.
품에서 손바닥만 한 동경을 꺼낸 용추가 내심 불만스럽게 말했다.
“조금 더 달라질 수는 없습니까?”
똑같이 역용을 했는데 진무립의 외모는 여전히 수려하다.
반면 거울 속에는 전보다 조금 더 험상궂은 산적이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대답은 냉정했다.
“역용술에도 한계는 있어요.”
“…….”
신기한 듯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던 유대하가 운무에 휩싸인 먼 산을 발견했다.
“마치 구름이 산을 감싸 안은 느낌이로군요. 시간만 허락한다면 한 번 올라가 보고 싶을 정도입니다.”
진무립이 말했다.
“저곳이 바로 대별산이다.”
“엇? 정말입니까?”
“그래. 모두 역용을 풀어라.”
말이 끝나는 순간 단려화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전방의 언덕 밑에서, 학사풍의 중년인과 백여 명의 녹의인이 서릿발 같은 기세를 풍기며 달려오고 있었다.
육군명과 유대하가 반사적으로 움직여 진무립의 앞을 막아서는 순간이었다.
순식간에 언덕 위로 올라온 그들은 일제히 옷자락을 걷어내며 경건하게 무릎 꿇었다.
“대별산의 송조광이 천주님을 뵙습니다.”
눈앞의 중년인은 상천팔기(相天八技)의 일원이자 무림에선 휘필일사(揮必一死)의 무명으로 알려진 송조광이었다.
단려화의 눈에 이채가 번졌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도가 무림 칠군의 일원인 백채륜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체 상천엔 이와 같은 인물이 얼마나 많은 것일까?’
이어서 녹의인들의 입이 일제히 열린다.
“천주님을 뵙습니다.”
은은한 내력을 담고 퍼져 나가는 목소리는 온몸에 전율이 일 정도로 웅장했다.
진무립은 그들의 얼굴을 하나씩 눈에 담았다.
“일어나라.”
“예.”
송조광의 점잖은 얼굴에 기쁜 기색이 가득하다.
“정말 대단한 일을 하시었습니다.”
천하 각지로 뻗어 나가는 사천 무림의 소식을 이들이 모를 리 없다.
광룡의 정체를 아는 상천의 무인들은 누구보다 뿌듯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뭐 그 정도 갖고…….”
대수롭지 않게 웃은 진무립이 송조광의 어깨를 잡았다.
“낯빛을 보아하니 잘 지낸 모양이군.”
“물론입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산채로 가시지요. 다들 천주님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근 일 년 이상 자리를 비웠던 진무립이다.
상천의 구성원에겐 외유에서 복귀한 주인이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가자.”
대별채에 들어선 동료들의 눈이 몽롱하게 물들었다.
“신비롭군.”
육군명의 감상에 유대하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그렇군.”
부곡채가 화전민촌을 연상케 했다면 운무에 휩싸인 대별채는 마치 신선들이 노닐 법한 전설 속의 무릉도원 같았다.
진무립의 복귀를 알고 있는지 산채에 머무는 수천 명의 사람이 일제히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천주님께서 돌아오셨다!”
“천주님!”
진무립이 반갑게 웃으며 손을 드는 가운데 단려화를 발견한 아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와! 천주님께서 선녀님을 데려오셨어!”
“지, 진짜 선녀야?”
면사를 걷은 그녀의 미모에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래. 이런 반응이 정상이지.’
사천에서 지내는 동안 잠시 잊고 있던 눈빛들이 이토록 반가울 수 없다.
단려화의 입가에 작위적인 미소가 걸린다.
“아이들이 정말 바르게 자랐군요.”
그녀의 뻔뻔한 작태에 동료들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천중일화의 본모습이 이렇다는 걸 집에서는 알까?’
과거 그녀에게 죽을 고비를 넘겼던 용추가 불만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 소저가 바로…….”
단려화의 전음이 벼락같이 귓전을 후려친다.
[살고 싶다면 그 입 닥쳐요.]움찔한 용추의 입이 꾹 닫혔다.
그사이 진무립은 한 명씩 손을 잡아주며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벌써 아이가 걸어 다닐 정도가 된 건가?”
아이의 손을 꼭 잡은 여인이 빙그레 웃었다.
“천주님께서 염려해주신 덕분이에요.”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조화당(助和黨)에 말하거라.”
조화당은 상천의 식솔들을 관리하는 부처였다.
“감사합니다.”
빙그레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은 진무립이 군중들 사이를 나아갔다.
마치 약속한 것처럼 고개를 숙이는 그들의 눈에는 은은한 경외감마저 엿보인다.
이곳에서 진무립은 마치 신과 같은 존재처럼 보일 정도였다.
거리를 빠져나간 그들은 산채에서 가장 큰 전각 앞에 도착했다.
“앞으로 자주 올 것이니 내가 올 때마다 이렇게 모일 필요 없다.”
곁을 지키던 송조광이 멋쩍게 웃었다.
“나올 필요 없다고 말했습니다만 좀처럼 듣질 않습니다.”
진무립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총사와 팔기는?”
“팔기는 며칠 안에 도착할 것입니다. 총사는 지금 정주에 있습니다.”
“정주?”
“예.”
송조광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천주님께서 자리를 비우신 사이, 오대표국이 점점 대담하게 본 천의 영역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총사는 지금쯤 금성표국주를 만나고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