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spicious little prince is a world's top ten masters RAW novel - Chapter (180)
◈ 180화. 웃었다
등 뒤의 은근한 시선이 엄청난 압박으로 다가온다.
취기는 사라진 지 오래다.
‘후우.’
짙은 한숨을 가까스로 삼킨 한천유가 말했다.
“배도 채웠으니 그만 나가자.”
한천유가 긴장하는 모습을 처음 본 동료들은 뒤의 두 노인이 심상치 않은 존재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래. 가자.”
그들이 탁자 앞에서 일어날 때였다.
“이보게.”
등 뒤의 목소리가 세 사람의 발을 붙잡았다.
유사시 이들에게서 등을 돌리고 도주에 성공하는 그림은 그려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잠시라도 이들의 발을 묶어야 한다.
충호보다는 오광의 신법이 낫다.
[무슨 일이 벌어지면 네가 이가장으로 가라.]오광에게 전음을 보낸 한천유는 긴장한 내심을 감추며 몸을 돌렸다.
역이광의 주름진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기도를 감추는 수법이 제법이로군. 어느 문하에서 무공을 배웠는가?”
세 사람이 익힌 영하은기(影下隱氣)는 십대고수에 준하는 고수가 아니라면 무공을 익힌 사실조차 모를 만큼 고절한 수법.
이것은 은곡이 아닌 진무립과 스승이 함께 창안한 것이라 저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싸우면 필패야.’
여기서 대답을 잘못했다간 전멸이다.
한천유의 머리가 맹렬히 회전했다.
“댁들이 그걸 알아서 뭐 할 거야? 엉?”
꿈틀거리는 표정과 말투가 왈패를 연상케 할 만큼 불량스럽다.
질문했던 역이광은 예상치 못한 한천유의 태도에 그만 헛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
“웃겨?”
눈치 빠른 충호가 한천유의 팔을 붙잡았다.
“죄송합니다. 노야. 원래 이런 친구가 아닌데 많이 취했나 봅니다. 그만하고 가세.”
“취하긴 누가 취했다고 그래?”
충호와 오광이 한천유를 양쪽에서 붙잡고 계단 앞까지 끌고 갔을 때였다.
역이광의 예리한 눈썰미는 한천유의 마지막 걸음이 온전하다는 것을 간파했다.
‘취하지 않았구나.’
경험 부족한 무림 초출일뿐더러 계단 앞까지 도착한 순간 긴장이 풀린 탓에 실수가 나온 것이었다.
‘앉은 자리의 창문 너머로 보이는 것은 태산표국이야. 저 아이들은 상천의 무인일 가능성이 농후해.’
가능성이 있다면 붙잡아서 확인해야 한다.
역이광은 탁자를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천의 무인들이여. 노부는 그대들에게 가도 좋다고 허락한 적이 없네.”
한천유의 미간이 잔뜩 일그러졌다.
‘눈치 빠른 노인네.’
어설픈 변명은 통할 것 같지도 않다.
오광의 어깨에 걸쳐진 손이 슬며시 내려오며 품으로 들어갔다.
[가라!]전음에 반응한 오광은 즉시 계단 밑으로 몸을 날렸다.
동시에 등 뒤에서 가공할 기운이 밀물처럼 쏟아져 온다.
충호를 밀쳐낸 한천유는 벼락같이 돌아서며 품 안의 비도를 날렸다.
쐐애액- 콰앙!
두 사람의 정중앙에서 폭음이 터지며 기파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일 수를 교환한 역이광의 눈이 살짝 커졌다.
‘이 녀석이?’
영하은기를 해제한 한천유의 기세가 예상을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도망친 아이를 잡아 오겠네. 물어볼 것이 많으니 죽이지는 말게나.”
비도를 회수하는 한천유의 동공에 일어나는 또 한 명의 노인이 떠오른다.
“충호!”
“알았다.”
충호는 창틀을 잡아가는 정사륭에게 암기를 발출했다.
쉬이익! 타타타타탁!
일직선으로 날아간 다섯 개의 비사침(飛死針)이 순차적으로 창틀에 틀어박혔다.
창밖으로 나가려던 정사륭의 상체가 뒤로 물러난다.
탓!
충호는 지체 없이 정사륭을 향해 몸을 날렸다.
적어도 오광이 오십 장 밖으로 도망칠 때까지는 시간을 벌어야 한다.
그사이 허공에 떠오른 열 자루 비도가 역이광을 향해 맹렬하게 쇄도했다.
역이광의 두 손이 원을 그리듯 허공을 휘젓는다.
티티티티팅!
짓쳐 들던 비도가 그 이상의 속도로 튕겨 나왔다.
“재주가 좋구나.”
불같은 정사륭과 달리 매사에 신중한 역이광에게 상대를 경시하는 마음은 없다.
전방으로 내민 그의 소매가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쿠구구구…….
지진을 만난 듯 요동치는 지붕.
역류하는 공기의 흐름이 역이광의 장심으로 빨려들더니 이윽고 가공할 장력을 쏟아냈다.
쏴아아아!
‘역시 장성 소표청의 혼원무극장이다.’
한천유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두 손을 교차했다.
촤르륵!
튕겨 나간 비도들이 순식간에 회수되며 허공에 잘 짜여진 그물망을 펼쳐 간다.
연사비도 도연망(挑連網)의 촘촘한 방어에 역이광의 수염이 파르르 떨려왔다.
‘받아내겠다?’
밀물처럼 쏟아지던 장력이 그물에 충돌하기 직전, 한천유의 손가락이 당겨지자 허공에 드리운 비도의 그물이 비스듬히 기울었다.
콰아앙!
귓전을 강타하는 굉음과 함께 도연망에 튕겨 나간 장력이 지붕을 박살 냈다.
“큭!”
억눌린 신음과 함께 한천유의 두 발은 속절없이 미끄러진다.
“훌륭하다!”
백발을 휘날리며 쇄도하는 그의 외침은 진심이었다.
이제껏 한천유의 연배에 혼원무극장 일섬표(一殲慓)의 초식을 이토록 완벽히 막아낸 상대는 없었다.
한천유는 쏟아지는 일장을 피해 우측으로 미끄러지며 충호를 살폈다.
[너무 접근하지 마! 시간을 끄는 것으로 충분해!]창문을 등진 충호는 역수로 쥔 소검을 수평하게 그어가고 있었다.
‘멍청아. 그게 되겠냐?’
물론 한천유도 그게 말이 안 된다는 걸 알고 보낸 전음일 것이다.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쉬익!
예상대로 정사륭은 어렵지 않게 물러나며 소검을 피해냈다.
충호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삼십 장.’
머릿속으로 계산한 오광의 이동 거리다.
“클클클. 감히 본좌를 앞에 두고 잡생각을 하는 것이냐?”
물러났던 정사륭이 조소를 흘리며 번개같이 주먹을 뻗어왔다.
쾅!
차마 피하지 못한 충호의 왼쪽 어깨가 움푹 꺼진다.
“컥!”
억눌린 신음을 토해낸 충호는 소검을 그어 간격을 확보하려 했다.
그러나 소검을 허깨비처럼 통과한 상대의 공격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빠르고 육중했다.
카앙!
주먹과 검날의 날카로운 충돌.
소검을 쥔 충호의 오른팔이 크게 벌어진다.
슈아악!
사선으로 벼락같이 솟구친 정사륭의 발이 활짝 열린 가슴을 노려왔다.
피할 겨를이 없다.
지금 무너지면 소식을 전하러 간 오광도 죽는다.
충호는 이를 악물었다.
‘아직은 버텨야 한다!’
콰직!
“크윽!”
오른쪽 가슴이 움푹 꺼지며 충호의 신형이 좌측으로 형편없이 튕겨 나갔다.
핏발선 눈동자에 창문을 바라보는 노인의 얼굴이 담겼다.
창을 넘어 오광을 쫓아갈 모양새다.
“이렇게 보내주겠냐!”
충호는 온 힘을 다해 역수로 쥔 소검을 창틀에 걸었다.
콰직!
소검이 창틀을 한 치가량 파고들며 튕겨 나가던 몸이 멈춘다.
가슴에서 치미는 끔찍한 고통도 동료를 지키고자 하는 그의 일념을 지배할 수 없었다.
이를 악다문 충호의 하체가 맹렬히 회전한다.
쐐액!
발뒤축이 날아들자 창문 밖으로 나가려던 정사륭은 미간을 좁혔다.
‘적당히 살려두려 했거늘.’
모조리 사로잡아 정보를 캐내려 했으나 놈의 집념은 자신의 생각 이상이었다.
턱!
들어 올린 손등에 혼신의 일격이 너무도 가볍게 막힌다.
“한 놈쯤 죽어도 상관없겠지.”
살기 짙은 목소리와 함께 뻗어 나온 손이 회수하는 충호의 오른발을 붙잡았다.
우두둑!
소름 끼치는 소음과 함께 넓고 튼튼한 발이 흉물스럽게 우그러든다.
충호는 비명을 내지르는 대신 다리가 뒤틀리는 것도 참아내며 소검을 휘둘렀다.
탁!
좌수를 뻗어 검신을 낚아챈 정사륭은 그것을 충호의 발목에 쑤셔 박았다.
푹!
떨리는 충호의 동공에 매섭게 확장되는 상대의 좌권이 담긴다.
죽음이 다가오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충호의 마음은 여느 때보다 편안했다.
‘느린 놈이 아니니까 이 정도면 충분히 멀어졌겠지. 임무는 완수했다.’
역이광을 상대로 두 발과 두 손을 바쁘게 움직이던 한천유가 절규를 쏟아냈다.
“충호-!”
콰쾅!
애처로운 절규를 집어삼킨 두 개의 폭음.
빗살같이 튕겨 나간 충호의 신형이 탁자를 휩쓸더니 얇은 벽을 뚫고 나갔다.
콰직!
그사이 한천유에게 새하얀 장력이 화살같이 날아들고 있었다.
정사륭이 다급하게 외쳤다.
“그놈은 죽이지 말게!”
폭천격을 얻어맞고 날아간 자는 분명 살지 못할 터.
연신 비도를 쏘아내는 녀석까지 죽이고 도망친 놈을 잡지 못한다면 아무 소득도 얻지 못한다.
그의 외침에 비도를 뿌리치고 쇄도하던 장력이 순식간에 방향을 바꿔 허공으로 치솟았다.
쾅!
간발의 차이로 장력을 피한 한천유가 벽에 난 구멍으로 몸을 날렸다.
“충호!”
새까만 어둠 속, 삼 층에서 추락한 충호는 좁은 골목의 담장에 처박혀 있었다.
마지막에 얼굴을 가린 두 팔은 낫처럼 꺾여있었고 구멍 난 가슴에선 피가 쉴 새 없이 쏟아진다.
“버텨라. 지혈하겠다.”
한천유는 서둘러 그의 혈도를 찍었지만 피는 멈출 줄 모르고 흘러나왔다.
‘멈춰라! 제발 좀 멈추라고!’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문 한천유는 두 손으로 구멍 난 가슴을 짓눌렀다.
충호는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리며 물었다.
“왜 안 웃냐?”
“미친놈이…….”
잔뜩 일그러진 한천유의 볼을 타고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너 같으면 지금 웃음이 나오겠냐?”
“봐라.”
피에 젖은 충호의 입꼬리가 씰룩거리며 올라간다.
“웃었다.”
그는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농담 같지 않은 말을 던지며 웃고 있었다.
“넌…… 웃을 때가 제일 무섭다고…….”
점점 작아지던 목소리와 함께 그의 호흡이 거짓말처럼 뚝 끊어졌다.
상처를 짓누른 손등으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은곡을 나선 후 처음으로 전투에서 친구를 잃었다.
흐느낌을 억지로 삼키는 한천유의 뒤로 역이강이 뛰어내렸다.
“순순히 협조했으면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네.”
“…….”
그때 도망친 오광을 잡으러 갔던 정사륭이 낭패한 얼굴로 돌아왔다.
“놓쳤는가?”
“발이 빠른 놈일세. 기척을 잡을 수가 없었어.”
역이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천유를 응시했다.
“저 아이는 붙잡아야겠군.”
캄캄한 어둠 속, 주저앉은 한천유의 어깨가 그 말에 반응하듯 부르르 떨려왔다.
“큭큭큭.”
섬뜩한 웃음에 이어 천천히 일어난 그가 나직이 읊조렸다.
“미안하다. 네 말대로 나답지 않았지.”
비로소 충호가 남기고 간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벽력도 악계화를 상대할 때조차 미소를 유지하던 자신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던 자신이 저들과 조우한 뒤로는 한 번도 웃지 못했던 것이다.
잔뜩 얼어붙은 자신과 달리 충호는 마지막까지 임무만을 생각하며 용맹하게 맞서 싸웠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면 적어도 녀석의 뒤를 따라갔을 때 부끄럽지 않게 싸워야 한다.
스스스…….
바닥에 널브러진 비도가 하나씩 한천유의 소매로 빨려들 때, 마주 선 두 노인의 고개가 골목 끝으로 돌아갔다.
“조금 늦었나.”
그들의 시선이 닿은 곳엔 숨을 헐떡이는 백하진이 있었다.
진무립의 명을 수행한 뒤 조금 떨어진 객잔에서 대기하던 그가 폭음을 듣고 달려온 것이다.
정사륭의 입꼬리가 길쭉하게 올라갔다.
“제 발로 죽을 자릴 찾아온 용감한 젊은이로군. 한 놈은 죽여도 되겠어.”
한 손으로 비도를 움켜쥔 한천유가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웃었다.
“백하진.”
“그래.”
쿠우우우…….
한천유의 전신에서 지독한 살기가 줄기줄기 솟구쳤다.
“한 놈은 반드시 죽일 거다.”
“그래.”
누구보다 오랜 세월 함께해 온 두 사람이다.
백하진은 담담한 얼굴로 대답했으나 한천유가 죽음까지 각오했다는 것을 확신했다.
두 노인을 향한 한천유의 눈동자에 결연한 각오가 떠올랐다.
“월천지망(月天地網)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