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spicious little prince is a world's top ten masters RAW novel - Chapter (188)
◈ 188화. 연판장
자영은 의문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냥 그렇게 해라.]확신이 없는 이상 자신의 심중을 그대로 설명해줄 수는 없다.
그러나 이렇게라도 해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잠시 악계화를 응시하던 자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 *
노을이 물러가며 땅거미가 내려앉을 무렵, 태산표국의 굳게 닫힌 정문이 활짝 열렸다.
가벼운 봇짐을 걸머진 용삼이 정문 밖을 나서며 뒤를 돌아보았다.
‘이건 의외로군. 지금은 한 명이라도 더 전력이 필요할 때가 아닌가?’
상부의 결정은 모두에게 작지 않은 충격이었다.
자신들을 이토록 쉽게 풀어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억지로 잡아두느니 남을 자만 남겨 결속을 다지겠다는 것인가.’
그때 장일이 곁으로 다가와 어깨를 툭 쳤다.
“가세.”
“음.”
다시 발을 내딛는 용삼의 귀로 반가운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잘 지냈는가?]휘둥그레진 용삼의 눈에, 골목 모퉁이에 몸을 숨긴 죽립인이 보였다.
슬며시 들어 올린 죽립 아래로 미소 짓는 하관이 드러난다.
[날세.] [두표사님!]정문을 살핀 두용청은 바닥에 얇은 책자를 내려두었다.
[청송객잔을 빌려두었네. 이 명단에 있는 형제들을 그리로 데려와 주게.] [알겠습니다.]두용청이 사라지자 용삼은 한달음에 달려가 명부를 챙겼다.
장일이 따라오며 물었다.
“그게 무엇인가?”
명부를 빠르게 훑어본 용삼이 입을 열었다.
“우리와 평생을 함께 갈 이름들일세. 설명은 나중에 하고 일단 명부에 적힌 자들을 청송객잔으로 데려가야 하네.”
용삼은 명부의 절반을 잘라 장일에게 건넸다.
“알겠네. 함께 행동하면 더 빨라질 테니 다른 친구들에게도 전하겠네.”
용삼에게 전해 들은 무면산왕은 믿고 따를 만한 주군이었다.
태산표국에 배신감을 안고 떠나는 동료들에겐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꿈을 찾는 것도 나쁘지 않은 제안일 것이다.
장일의 제안에 용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겠군. 그럼 객잔에서 보세.”
갈라진 두 사람은 서둘러 동료들을 찾아 움직였다.
태산표국을 떠난 표사들 중 능력 있고 믿을 만한 자들은 모두 청송객잔으로 향했다.
옛 동료들을 반갑게 맞이한 두용청과 석두는 지난 이야기를 천천히 풀어놓으며 그들을 설득했다.
태산표국에서 홀대하던 두용청이 천주의 인정을 받고 전이각주가 된 이야기.
부하들을 제 몸처럼 아끼는 주군의 이야기에 끌리지 않는 이는 없었다.
태산표국을 떠나 새로운 일을 찾아야 했을뿐더러 상천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용삼까지 나서서 적극적으로 설득하자 무려 백여 명이 넘는 표사가 상천에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 * *
두용청이 표사들을 이끌고 곡부로 떠난 지 사흘이 지난날.
해 저문 이가장의 연무장이 식사를 마친 무인들로 북적거렸다.
“어이. 백대주. 저녁은 배불리 드셨는가?”
고개 돌린 백하진의 눈에 씩 웃으며 다가오는 한천유가 담긴다.
“뭐냐? 한대주.”
백하진의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것을 보니 대주라는 호칭이 제법 기꺼운 모양이었다.
“그냥 불러봤어. 백대주.”
“용무가 없으면 부르지 마라. 한대주.”
“섭섭하게 이럴 거야? 백대주.”
“섭섭할 것도 없군. 한대주.”
그들의 뒤에 선 오광과 문사영이 한심하다는 듯 둘을 쳐다봤다.
[대주가 되더니 둘 다 미쳤나보다.] [하진이 이럴 줄은…….]두 사람은 각각 청사대와 녹사대의 부대주로 대주를 보필하는 임무를 맡았다.
한숨을 내쉰 오광이 한천유를 잡아당겼다.
“멍청아. 대주가 됐으면 좀 달라져야 할 거 아니냐? 부하들 보기에 창피하지도 않아?”
“어허. 지금 누구한테 말을 낮추는 거야?”
“가시죠. 대주님.”
“허허. 그러자꾸나.”
“…….”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단려화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감투가 좋긴 좋네요.”
진무립이 실소를 흘렸다.
“저런 바보들일 줄은 몰랐다.”
“어둡고 칙칙한 것보다는 낫잖아요. 저들은 분명 상천에 큰 힘이 될 거예요.”
“부디 그랬으면 좋겠군.”
그때 서진환이 연무장의 담을 넘어 진무립에게 다가왔다.
“주군. 이가장주가 잠시 뵙길 청합니다.”
“알았다.”
진무립은 단려화의 어깨를 두드리며 몸을 돌렸다.
“다녀오지.”
“그래요. 난 몸 좀 풀어야겠어요.”
진무립이 떠나자 그녀는 검파를 움켜쥐고 한천유를 찾았다.
“청사대주! 상대 좀 해줄래요?”
대주 소리에 기분이 좋아진 한천유는 여유롭게 웃으며 비도를 꺼냈다.
“허허. 봐 드리지 않겠……. 억!”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부릅뜬 한천유의 동공에 단려화의 발바닥이 확장됐다.
퍽!
연무장의 비무가 시작될 무렵, 이가장주 이웅은 진무립에게 정중히 예를 갖추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그간 바쁘신 듯하여 시간이 날 때만을 기다려왔습니다.”
진무립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바쁘기로는 나보다 장주께서 더 하셨을 텐데 말이오.”
이웅은 멋쩍은 얼굴로 마주 앉았다.
“역시 알고 계셨군요.”
무면산왕의 부하들은 말단조차도 이가장의 무인들을 능가한다.
상천의 처지는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도 같다.
제남의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을 거란 것은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하나 여쭙겠습니다.”
“말씀하시오.”
“천주께서는 상천의 사람들이 자유롭게 세상을 활보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소.”
“만일 훗날 상천이 그와 같은 힘을 가졌을 때, 천주께서는 무엇을 다음 목표로 삼고자 하십니까?”
진무립은 이웅의 의도를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세상에 혈겁을 일으킨 팔황문. 그와 같은 무공을 익힌 태산표국이 재차 같은 짓을 하려고 했으니 우려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자신들 역시 그들과 같은 뿌리를 가졌으니 그의 걱정에도 일리가 있었다.
“은곡의 무공을 익혔다고 해서 모두가 세상을 지배하길 원하는 것은 아니오. 우린 세상의 일부가 되어 살아가고 싶을 뿐이지 다른 뜻은 없소.”
“상천이 꿈꾸는 세상에 우리가 자유롭게 살아갈 자리도 있겠습니까?”
과거 팔황문주 황운천이 원했던 무림 독패를 꿈꾸는 게 아닌지 묻는 것이다.
진무립은 이웅의 눈을 지그시 응시했다.
“장주.”
“예.”
“장주께서는 황운천의 능력을 어떻게 보시오?”
천하대전을 일으킨 팔황문주 황운천.
장강의 강변에서 단소룡과 경천동지할 접전 끝에 아쉽게 패배한 마지막 전투는 무림의 전설로 남아 있었다.
이웅이 말했다.
“신룡이라는 불세출의 고수가 없었더라면, 아마도 천하는 그의 손에 떨어졌겠지요.”
“그러나 결국 그는 실패했지. 내가 그였다면 그런 방식으로 거사를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오.”
“황운천은 무려 수십 년에 걸쳐 각파에 세작을 집어넣고 때를 기다려왔습니다. 그리곤 일시에 세작을 부추겨 자중지란을 일으킨 뒤 천하를 휩쓸었지요. 그보다 좋은 방도가 있었단 말입니까?”
“당시 은곡의 힘은 화령을 압도했지.”
“그렇기에 화령도 구천맹을 세우고 무림의 힘을 하나로 모았던 것이 아닙니까.”
“내가 만일 그였다면, 신룡이 금정산에서 일천의 무인을 쓰러뜨리고 천하제일이 된 시점에 화령도부터 불태웠을 거요. 천하가 화령을 중심으로 힘을 모으기 전에 말이오.”
이웅은 흠칫 몸을 떨었다.
만일 황운천이 처음부터 화령을 경계했더라면 진무립의 생각대로 되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단소룡과 대군사 화윤이 있는 이상 쉬운 일은 아니겠으나 적어도 황운천의 방식보다는 확실하다.
“내게는 황운천과 같은 방심이 없소. 만일 무림 독패를 꿈꿨다면 적어도 이 시점에 무림의 절반은 손에 넣었겠지.”
“신룡과 화령이 있는데 가능하겠습니까?”
“천산의 마교와 손을 잡고 서장을 끌어들이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지. 그렇지 않소?”
오랜 내분을 수습한 마교가 호시탐탐 중원을 노린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들이 주저하는 유일한 이유는 무림의 기둥으로 존재하는 신룡과 화령이었다.
만일 상천이 천하를 지배할 목적으로 손을 내민다면 그들은 결코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결코 무림 독패를 원하지 않소. 이게 그 증거지.”
진무립은 탁자 위에 금빛 신패를 올려놓았다.
신패를 유심히 살피며 글귀를 읊조렸다.
“태종무사(太宗武士)?”
경악한 이웅이 다급하게 신패의 뒷면을 살폈다.
소문대로 그곳에는 사천 무림 모든 방파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은명패(恩銘牌)라는 거요. 내 조부님과 혈육들이 무림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어찌 다른 마음을 품을 수 있겠소?”
이미 객잔의 전투에서 얼굴을 드러낸 이상 곧 천하가 알게 될 일이다.
상천을 은인으로 여기는 이웅에게 먼저 밝힌다고 나쁠 것은 없었다.
그가 무엇을 준비하고 자신을 보자고 했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신패와 진무립을 번갈아 보던 이웅이 말했다.
“그러면 천주께서……. 바로 그 광룡이란 말입니까?”
몰락한 마도림의 소공자.
무림에 나타난 지 고작 일 년 만에 혈교를 무너뜨리고 마도림의 위상을 되찾아준 천하십대고수.
당금 무림에서 가장 뜨거운 두 사람이 동일 인물이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진무립은 은명패를 회수하며 말했다.
“여기서 내 목을 걸고 말하지. 내가 꿈꾸는 천하에는 분명 그대들의 자리도 있을 것이오.”
놀란 눈을 부릅뜬 이웅은 애써 마음의 동요를 억눌렀다.
‘광룡 진무립은 천하에 보기 드문 절세 미남이라고 들었다. 그러고 보니 천주의 얼굴도…….’
상천의 천주가 굳이 들통날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다.
정말 눈앞의 사내와 마도림의 소공자가 동일 인물이라면 상천이 천하독패를 꿈꾸지 않는다는 것도 진실일 것이다.
놀란 마음을 다스린 이웅은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내왔다.
“천주님을 믿겠습니다.”
그가 탁자 위에 올려둔 족자에는 산동 수십 개 방파의 이름과 수장들의 직인이 찍혀 있었다.
“태산표국의 추악한 행보를 보면 조만간 무림에 커다란 분란이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 산동무림은 앞으로 상천과 그 뜻을 함께하고자 합니다.”
그가 내민 족자는 예상했던 것처럼 산동무림의 연판장이었다.
산동의 수장들은 태산표국의 마수에서 제남을 구한 상천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이웅의 말처럼 머지않아 천하에 폭풍이 몰아친다면, 힘을 하나로 모을 구심점으로 상천 이상의 방파는 없다는 게 공통된 의견이다.
하여 그들은 이웅을 통해 진무립의 의도를 확실히 파악한 뒤 연판장을 넘기기로 합의한 것이었다.
연판장을 살펴본 진무립이 이웅을 쳐다봤다.
“우리와 함께 싸우겠다는 것이오? 아니면 상천의 그늘 밑에서 풍파를 피하고 싶다는 말이오?”
“수십 년간 유지해온 평화의 밑바탕에는 선배들이 흘린 피와 땀이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당연히 함께 싸울 것입니다.”
이웅의 말은 연판장에 서명한 수장 모두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과 같았다.
연판장을 챙긴 진무립은 그에게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그대들이 우릴 믿는다면, 우리는 그 믿음을 절대 배신하지 않을 것이오.”
이웅도 마주 예를 갖췄다.
“이미 상천에는 구명지은을 입었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하십시오. 물심양면으로 돕겠습니다.”
“고맙소. 당면한 일을 마무리하면 한잔합시다. 이만 가보겠소.”
돌아서는 진무립을 바라보던 이웅은 불현듯 의문이 떠올랐다.
“천주님. 혹시 늘 함께하시는 그 여인이 바로 광녀입니까?”
광룡의 곁에는 항상 광녀가 있다.
천하에 자자한 소문을 그도 모르지 않았던 것이다.
주변을 살핀 진무립이 당부하듯 말했다.
“손주들이 장성하는 것을 보고 싶다면, 그녀 앞에서 절대 그런 말을 내뱉지 마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