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spicious little prince is a world's top ten masters RAW novel - Chapter (23)
◈ 23화. 기상천외한 계획
백연곡 동쪽의 나지막한 야산.
부하들과의 약속 장소에 몸을 숨긴 유대하는 신경을 바짝 곤두세웠다.
‘상대의 정체를 모르니 정말 답답하군.’
대검문이라는 적과 싸울 땐 암울하긴 했어도 답답하지는 않았다.
적이 명확히 보였던 그때와 달리 이번의 적은 마치 안개와 같았다.
가늘어진 유대하의 눈은 이따금 오가는 상인들부터 골짜기를 드나드는 나무꾼까지 가리지 않고 주시했다.
‘슬슬 올 때가 됐군.’
유대하의 눈이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해를 담고 있을 때.
“누구를······ 기다리시나?”
뒤에서 들려온 무거운 목소리에 유대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감지하지 못했다?’
천천히 일어난 유대하의 손이 검병에 올라갔으나 상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네가 정가장주를 납치한 흉수인가?”
“뭐 그렇다고 해두지.”
부정하지 않는 걸 보면 놈은 자신이 마도림의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듯했다.
상대는 어쩌면 자신조차 감당하지 못할 고수.
유대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감당할 수 없다면 나 하나로 끝내야 한다.’
자신이 당한 뒤에 부하들이 이곳에 모인다면 그들도 죽는다.
그렇다면 부하들과 함께 왔다는 사실을,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숨겨야 한다.
긴장감을 끌어올린 유대하는 천천히 돌아서며 웃었다.
“네놈이 올 줄 알았지.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나는 광룡대 부대주 유대하다. 네놈은 누구냐?”
죽립 아래로 드러난 사내의 미소가 소름 돋을 만큼 섬뜩하다.
“내 이름을 들으면······ 네놈은 죽어야 할 텐데 그래도 듣고 싶나?”
말이 끝나는 순간 유대하는 전신의 살갗이 아려올 정도로 강렬한 투기를 느꼈다.
‘천하에서 놀 만한 고수들에겐 저마다 특유의 기도와 기세가 있다. 그걸 이겨내지 못하면 제 실력을 발휘하기도 전에 목이 떨어지는 거지. 그게 범인과 고수의 차이다.’
진무립의 말을 떠올린 유대하는 망설임을 버리고 검파를 움켜쥐었다.
‘천하에서 놀 만한 고수.’
자세를 낮춘 유대하는 전신의 내력을 끌어올렸다.
“이름은?”
사내는 히죽 웃었다.
“배짱이 좋군. 그래. 알려주지. 내 이름은······.”
상대의 신형이 꺼지듯 사라졌고.
이어진 말은 귓가의 오싹한 속삭임으로 들려왔다.
“악위청이다.”
이를 악문 유대하의 검이 빛살처럼 허공을 갈랐다.
‘혈천수라(血天修羅) 악위청!’
천하삼흉의 일인이다.
***
‘피 냄새.’
등에 활을 매단 사내, 사조장 후영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유대하가 기다리고 있어야 할 장소에 그는 없고 핏자국과 싸운 흔적만 있으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여긴 위험하다.’
사냥꾼 출신 후영은 본능적으로 이곳이 사지(死地)라는 것을 느꼈다.
‘만일 부대주가 당했다면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적일지도 모른다. 서둘러 대주에게 알려야 해.’
그는 즉시 부하들에게 말했다.
“너는 한경에게, 너는 전유에게 가서 즉시 파중으로 돌아가라고 전해. 나는 풍연과 주초에게 소식을 전하고 함께 돌아간다.”
“알겠습니다.”
***
칠흑 같은 어둠 속.
똑. 똑. 똑.
수면 위에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짙은 울림을 자아낸다.
유대하의 눈꺼풀이 무겁게 올라갔다.
‘여기는······.’
분명 죽음을 각오했는데 살아있었다.
‘인질이 더 필요했던 것인가.’
그래도 좀 더 해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일각도 버티지 못하고 패하고 말았다.
무림의 후기지수 중 그만큼 버틸 수 있는 자도 드물었지만 패배는 패배.
겨우 그 정도에 만족할 수 없었다.
무채색의 세상을 보는 유대하에게 지금의 어둠은 너무도 짙게만 느껴졌다.
“크윽!”
정신을 차리니 팔다리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온다.
바로 옆에서 나이 든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움직이지 말게. 자네가 당한 것은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고통이 더해지는 사공이라네. 하루는 꼼짝 말고 누워있어야 해.”
한참을 몸부림치던 유대하는 가까스로 고통에 적응하며 물었다.
“노야께서는 누구십니까?”
“노부는 정필군이라고 하네.”
유대하의 눈이 부릅떠졌다.
“정가장주님?”
“그렇다네. 자네는 마도림에서 왔는가?”
일어나려 애쓰던 유대하는 고통이 심해지자 포기하고 드러누웠다.
“그렇습니다. 예를 갖추지 못하는 점 이해해주십시오.”
“이해하네.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가?”
유대하가 주변을 살피는 듯 하자 정필군이 다시 말했다.
“지금 이곳엔 자네와 나 둘밖에 없네. 걱정하지 말게.”
“림주께서 제가 속한 광룡대에 정가장의 일을 맡기셨습니다.”
“광룡대? 처음 듣는 이름이로군.”
“얼마 전 대검문을 멸하고 그곳의 고수들을 수습해 만든 부대입니다.”
정필군의 눈이 부릅떠졌다.
“대검문이 사라졌다고?”
“예.”
유대하는 매일 시신이 발견된다는 소식을 제외하고 간략하게 바깥소식을 전했다.
하루하루 대검문의 압박에 세가 위축되던 마도림.
정가장의 지원까지 받아야 했던 마도림이 중경의 패권을 되찾았다는 소식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이번엔 유대하가 물었다.
“장주님. 어째서 이곳에 혈천수라가 나타난 겁니까? 혈천수라가 재물을 탐낸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어봅니다.”
놀라운 소식에 뛰던 가슴을 가라앉힌 정필군은 고개를 저었다.
“나도 그 이유를 모르겠네.”
그때 입구 쪽에서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소리에 귀 기울이던 유대하의 미간이 좁아졌다.
‘두 명이라고?’
정필군이 나직이 침음하는 것을 보면 그 또한 몰랐던 것 같았다.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와 함께 둘의 대화가 들리기 시작했다.
“별거 아니더군. 손주 놈들을 전부 납치했더니 속곳까지 팔아서 돈을 만들던데?”
처음 듣는 목소리에 이어 혈천수라의 웃음이 들려왔다.
“크흐흐. 이번엔 자네에게 졌군.”
“자넨 혈정(血精)을 흡수하느라 두 달 가까이 틀어박혀 있었으니 어쩔 수 없지. 그보다 오는 길에 들었네. 마도림이 대검문을 멸했다더군.”
“사천신검이니 뭐니 으스대던 놈이 꼴 좋게 됐군.”
“마도림이 적잖은 돈을 확보했을 거야. 곧 장주의 딸년에게 연락이 올 수도 있겠어.”
“무인을 보낼 수도 있겠지.”
“오늘 한 놈 잡아 왔다지 않았나?”
“잔챙이 한 놈이 나를 잡겠다고 매복해서 기다리고 있더군. 죽일까 하다가 살려뒀네. 조만간 다른 놈들을 보내올 수도 있을 거야.”
“마도림이랑은 싸워도 상관없잖아. 사천무림에서 마도림의 부활을 원하는 놈이 누가 있을까? 도리어 우릴 도와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긴, 그렇게 소문이 퍼졌는데 도와준다는 놈이 없는 걸 보면 그럴지도. 하여간 편협한 놈들이라니까.”
“이제 정가장의 돈만 받아내면 우리의 계획도······.”
가까워지던 발소리가 다시 멀어지는 것을 보니 동굴 안에 다른 방이 있는 듯싶었다.
‘한 명은 혈천수라. 다른 한 명은 혈천수라와 대등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
유대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설마 삼흉이 손을 잡았단 말인가?’
***
서둘러 복귀한 조장들은 즉시 진무립을 찾았다.
단려화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진무립은 부하들의 굳은 얼굴에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이냐?”
“부대주가 사라졌습니다.”
“유대하가?”
사조장 후영이 말했다.
“일을 마치고 약속 장소로 복귀했는데 핏자국과 싸운 흔적만 남아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일수록 냉정해야 한다.
진무립은 차분히 머리를 식히며 물었다.
“놈들의 은신처를 찾아내야 구할 수 있다. 뭐 좀 건진 건 없나?”
모두가 고개를 젓는 가운데 거구의 사내, 주초가 슬며시 손을 들었다.
후영이 눈을 부라리며 따졌다.
“너 이 새끼. 아까 물었을 땐 아무 말도 안 했잖아?”
“······.”
말이 많은 후영과 달리 주초는 극도로 과묵하다.
그런 주초의 입이 답답할 정도로 느릿하게 열렸다.
“두 달간······. 백하촌에서······. 기르던 가축과······. 옷들이······.”
진무립도, 단려화도, 심지어 오래 함께한 조장들조차도 답답한 마음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결국 참지 못한 후영이 옷섶을 펄럭이다 한경에게 소리쳤다.
“와, 답답해 뒈지것네. 뭘 봐 새끼야.”
날벼락을 맞은 한경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 나한테?”
진무립은 손을 들어 모두를 진정시켰다.
“거기까지 들었으면 됐다. 풍연. 너는 지금 당장 정문에 백기를 내걸어라.”
백기를 내건다는 건 돈이 준비됐다는 것을 흉수에게 알리는 것이다.
‘돈을 마련하셨나?’
고개를 갸웃한 풍연은 반문 없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오늘 회의는 끝이다. 내일 아침까지 계획을 정리할 테니 돌아가서 쉬어라.”
한경이 물었다.
“바로 백하촌을 뒤지는 게 아니었습니까?”
“유대하조차 감당하지 못한 적이다. 부하들이 들키지 않고 접근할 수 있겠어?”
전유가 민머리를 슥슥 문지르며 말했다.
“대주의 말씀이 지당하시네. 인질이 있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될 것이야.”
회의가 파하자 모두가 숙소를 찾아 돌아갔다.
진무립은 나가려는 단려화와 연소정을 불러 앉혔다.
“내일 아침 다시 모이는 게 아니었나요?”
“두 사람은 지금부터 시작이야.”
진무립의 진지한 표정에 두 사람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말씀하세요.”
진무립의 입이 작게 열리자 잠시 후 단려화의 눈이 경악에 물들었다.
연소정이 영문모를 얼굴로 쳐다보는 가운데 그녀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물었다.
“농담은 아니죠?”
“이런 상황에서 농담을 할 만큼 한가하지 않아.”
진무립의 입가에 걸리는 미소가 왠지 섬뜩했다.
“숨겨둔 실력 좀 발휘해봐.”
***
다음 날 아침.
장주의 실종으로 초상집 같던 정가장이 다시 한번 발칵 뒤집혔다.
“대주! 대주!”
다급하게 진무립을 찾아 헤매던 광룡대원들은 숙소의 식당에서 술에 취해 잠든 진무립을 발견했다.
“대주! 일어나십시오!”
“뭐야?”
눈을 비비며 일어난 진무립에게서 짙은 주향이 물씬 풍겼다.
풍연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지금 태평하게 주무실 때가 아니란 말입니다!”
“알았으니 잠깐 기다려봐. 야! 거기 물 좀 가져와라.”
진무립은 부하가 가져온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에이씨.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꾹 참고 기다리던 풍연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대부인과 소공녀께서 실종되셨습니다.”
“뭐야?”
“대주와 새벽까지 술을 마시던 그년들이 두 분을 납치했다 그 말입니다!”
“이런 미친.”
벌떡 일어난 진무립은 즉시 내원으로 달렸다.
정가장 무인들의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진무립은 정인령의 처소로 뛰어들었다.
여느 때처럼 깔끔하게 정리된 처소, 유일하게 평소와 다른 것은 주인이 없다는 거다.
방안을 살피던 진무립은 침상 밑에서 흉수가 남긴 서신을 발견했다.
정가장 무인들이 뒤따라 들어오는 가운데 진무립은 서신을 읽어갔다.
“오늘 밤 전표를 가지고 동문 밖 관제묘로 와라. 허튼수작을 부린다면 인질은 죽는다?”
총관 금자윤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아아, 아가씨마저······.”
이마를 부여잡고 휘청이던 총관이 무인들에게 업혀 나갔다.
주변을 힐끔 돌아보고 서신을 다시 읽은 진무립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시작이다.’
***
파중현 모처의 밀실.
작은 방 안에 네 명의 여인이 나란히 앉았다.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신가요?”
단려화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대답하는 이는 바로 정인령이었다.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보였다.
“나는 괜찮답니다.”
곁에 앉아있던 초유림도 씩 웃으며 말했다.
“나도 괜찮아.”
부드럽게 미소지은 단려화가 초유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불편해도 조금만 참으려무나.”
“알았어. 헤헤.”
지켜보던 연소정은 새어 나오는 한숨을 억지로 삼켰다.
‘납치라니. 대체 머릿속이 어떻게 되먹은 사람이지?’
진무립이 두 사람에게 부탁한 것은 다름 아닌 정인령 모녀의 납치였다.
돈이 준비됐음을 알리는 백기는 지난 저녁에 내걸었다.
그런데 중간에 어떤 놈이 나타나 그 돈을 가로채려 한다면 흉수는 반드시 현장에 나타날 것이다.
진무립은 사건의 주도권을 가져와 놈을 끌어내고자 이 계책을 생각한 것이었다.
‘계획은 나쁘지 않은데 왜 하필 우리가?’
연소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모시는 이가 선뜻 받아들이기에 따르기는 했다만 왠지 악적이 된 것만 같아 떨떠름했다.
‘대검문이 무너진 이유를 알 것도 같네.’
그때 짓궂게 웃은 초유림이 두 사람에게 물었다.
“근데 우리 형님이랑 혼인할 사람은 누구야?”
“······.”
당황한 두 여인이 할 말을 찾는 사이 초유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둘 다? 우리 형님 능력 좋은데?”
연소정이 버럭 소리쳤다.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