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spicious little prince is a world's top ten masters RAW novel - Chapter (285)
285화. 가을
호숫가의 단풍나무가 역류하는 폭포수에 휘말려 몸을 흔든다.
붉은 잎새가 눈송이처럼 흩날리는 가운데 주르륵 밀려 나간 운화결이 신음을 삼켰다.
‘큭!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힘이냐?’
검극의 일점에 온 힘을 쏟아붓고도 상대의 장심에 튕겨 나왔으니 황당한 것이다.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민첩함.
거구에 어울리는 강력한 힘.
상대는 권사로서 모든 것을 갖춘 엄청난 괴물이었다.
반면 평사군 또한 운화결의 날카로움에 적잖이 놀라고 있었다.
그는 손목을 매만지며 인상을 썼다.
“시큰하군. 천주께서 눈여겨보신 이유가 있었어.”
자세를 잔뜩 낮춘 운화결의 손으로 검 대신 창이 빨려든다.
‘간격을 허용하면 독이 된다.’
만리추종향을 하독하는 건 상대의 힘을 뺀 다음이다.
물론 그것도 지켜보는 이사령 곽인평이 없을 때의 이야기다.
탓.
순식간에 사라진 평사군이 운화결의 우측에 나타나 주먹을 내질러 온다.
슈아아!
범인이라면 반응조차 불가할 정도로 엄청난 속도의 권영이 송곳처럼 옆구리를 파고든다.
운화결은 즉시 미끄러지며 창대를 끌어당겼다.
카앙!
의도대로 튕겨 나가며 간격을 확보한 운화결이 팔천영신공 승무관천(昇武貫天)의 초식을 전개했다.
콰지직!
일점에 온 힘을 쏟아부은 창두가 공간을 꿰뚫고 가공할 기세로 쏘아진다.
쏴아아아!
창두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위력은 평사군조차도 무시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눈에 이채를 띈 그는 창두를 피해 좌측으로 미끄러지더니 순식간에 방향을 바꿔 짓쳐 들었다.
운화결은 창대를 회수함과 동시에 역으로 휘둘렀다.
쉬익!
자루 끝의 날카로운 칼날이 접근하는 평사군의 가슴을 노려간다.
상체를 뒤로 뺀 평사군이 좌수를 내뻗어 창대를 잡아가는 순간이었다.
별안간 눈앞에서 나타난 장력이 평사군의 가슴을 거칠게 강타했다.
콰앙!
“큭.”
불시의 일격에 세 걸음 물러난 평사군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운화결을 쳐다봤다.
창대를 쥔 왼손의 소매 아래로 운화결의 우장이 은밀히 뻗어 나온 상태.
그 찰나의 순간 장력을 퍼부어 타격을 주고 공간마저 확보한 것이다.
기습적인 공격인지라 위력은 강하지 않았으나 이런 임기응변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하하!”
이제야 사사령 이하의 사령들이 운화결에게 애를 먹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광룡과 네 차이는 어느 정도지?”
운화결은 어렵지 않게 대답했다.
“다음에는 반드시 이길 수 있을 정도의 차이.”
“소문으로는 신룡과도 동수를 이뤘다고 하던데.”
“체면을 세워준 것이겠지. 아니면 신룡이 생각보다 약하거나.”
“그런가.”
작게 끄덕인 평사군이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별거 아니군.”
운화결은 미소를 감췄다.
굳이 진무립의 모든 것을 알려줄 필요는 없다.
이들이 진무립을 가볍게 보면 볼수록 전쟁은 빨리 끝날 테니까.
목을 좌우로 우두둑 꺾은 평사군이 지면을 박차고 쇄도했다.
쾅!
“어디 오늘 제대로 놀아보자.”
비산하는 흙먼지 사이로 화살처럼 쏘아진 주먹이 강풍을 동반하며 날아든다.
쐐애액!
창의 간격을 비집고 들어온 권영이 다섯 개로 나뉘는 순간, 운화결은 손목을 튕겨 창대를 띄웠다.
그리곤 두 손으로 허공에 원을 그려 원선지벽의 초식을 전개했다.
콰콰콰콰쾅!
찰나의 순간 다섯 번의 굉음이 터져 나오며 운화결의 신형이 화살처럼 튕겨 나간다.
‘역시 정면에선 어려워.’
인상을 쓴 운화결의 손으로 봉이 빨려들었다.
두 사람이 치열한 탐색전을 시작했을 때.
비무를 지켜보던 곽인성은 몸을 돌려 절벽 위로 뛰어올랐다.
‘쓸만하겠군.’
자신들과 비교하는 건 시기상조다.
그러나 그간 무림에서 쌓아온 운화결의 경험은 결코 무시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저 멀리 앞서 나가는 주유성이 보인다.
곽인성이 그의 곁을 따라붙으며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주유성이 무미건조한 어조로 물었다.
“무엇을?”
“운화결.”
“천주님과 군사가 직접 상대하라고 한 것을 보면 중히 쓰고자 하는 것이겠지.”
지금까지 운화결을 거들떠보지도 않던 세 사람이다.
그런 자신들에게 운화결을 직접 챙기라고 한 것을 보면 위에서 그를 확실하게 믿는 게 분명했다.
묵묵히 끄덕이는 곽인평의 두 눈에 서산에 걸린 붉은 물결이 들어온다.
“아름답군.”
곽인평을 슬쩍 쳐다본 주유성이 그와 시선을 공유했다.
붉게 물든 산을 바라보던 주유성이 인상을 썼다.
“기분 나쁠 뿐이다.”
“하하하.”
노을이 걸린 늦가을의 산새.
부친의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하고, 좋아하던 여자아이의 손을 놓치고 도망치던 그날도 때마침 가을이었다.
‘빈아.’
세 글자였던 성과 이름 중 기억나는 것은 그 한 글자가 전부다.
언제나 그렇게 불러왔으니까.
그러나 넘어진 채 자신을 향해 손을 뻗던 아이의 눈빛은 아직도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그날 그 아이의 손을 놓쳤던,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본 주유성이 주먹을 움켜쥐며 말했다.
“내게 있어 아름다운 붉은색은 단 하나뿐이다.”
나른한 목소리 속 진심이 섞인 말은 누차 들어온 이야기다.
“피인가.”
언제나 표정이 없는 주유성의 입가에 모처럼 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피에 젖은 천하야말로 그 무엇보다 아름답지 않겠는가?”
곽인성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못 말리겠군.”
주유성의 검은 천주인 황천패조차도 눈살을 찌푸릴 만큼 살기가 짙다.
그럼에도 황천패가 조언을 하지 않는 건, 그 강력함의 원천이 바로 증오와 복수심이었기 때문이다.
누가 먼저 전쟁을 일으켰건, 누가 먼저 공격을 했건 다른 자의 사정은 알 바가 아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아간 천하를 피로 물들이고 그 위에 군림한다.
그의 머릿속엔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다.
곽인성이 다짐하듯 말했다.
“이번 전쟁. 반드시 이겨서 우리의 천하를 되찾는 거다.”
“아니.”
고개 저은 주유성의 눈이 지독한 살기로 번들거렸다.
“전부 죽이고 죽일 것이다. 천하가 우리에게 거역한 것을 땅을 치고 후회할 때까지.”
* * *
언덕 위에 올라선 이하빈이 붉게 물든 고즈넉한 마을을 눈에 담았다.
마지막 추수를 마친 농부들이 하나둘 마을로 들어오는 가운데 이하빈은 불어오는 바람이 제법 차가워짐을 느끼고 있었다.
“참으로 아름답군.”
어느새 뒤로 다가온 송조광이 윤건을 고쳐 쓰며 웃었다.
“어디 절경이 따로 있겠는가? 이런 것이 바로 천하 절경이지.”
연기가 피어오르는 굴뚝.
공터에서 뛰놀던 아이들이 모친의 부름에 따라 집으로 달려가고.
저 멀리 노을 진 산새는 수려한 자태를 자랑하며 작은 마을을 굽어본다.
대별산의 전경도 아름다웠으니 이 또한 그에 못지않게 가슴에 와닿았다.
송조광이 이하빈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렇지 않은가?”
“……모르겠군.”
언덕 아래로 보이는 평온한 일상조차도 왠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녀의 불편한 심기에 송조광은 지난 기억을 상기했다.
‘아차.’
그녀가 머물던 은곡이 붕괴한 날도 마침 오늘과 같은 가을이었다.
뒤늦게 진무립과 함께 그곳에 도착한 송조광은 아직 그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시산혈해의 참상 속에, 살아남은 이는 혼절한 채 시신 밑에 깔려있던 이하빈이 유일했다.
송조광은 쓰게 웃으며 돌아섰다.
“저녁을 준비하고 있네. 늦지 않게 돌아오게나.”
“…….”
그는 대꾸하지 않는 그녀를 뒤로하고 천천히 언덕을 내려갔다.
홀로 남은 그녀가 속으로 읊조렸다.
‘복령천.’
모친에게서 부친을 빼앗아가고 자신에게서 모친을 빼앗아간 원흉의 후예.
그들이 그릇된 욕심만 품지 않았더라면 그날의 괴로움도 없었을 것이다.
주먹을 움켜쥔 그녀가 붉은 하늘에 애증의 얼굴을 그렸다.
‘아버지. 당신이 가족조차 팽개치고 탐했던 그 모든 것들, 이번엔 내 손으로 반드시 끝낼 겁니다.’
이하빈과 헤어진 송조광은 마을 외곽의 낡은 장원에 들어섰다.
이들이 안가로 삼은 이곳 장원은 오래전 대과에 급제해 북경으로 올라간 고관의 집이다.
진무립 일행은 그의 인척으로 위장해 이곳에 머무는 중이었다.
마당에 나와 고기를 굽는 진무립과 단려화, 불을 지피는 은무대와 밥을 짓는 상천팔기의 모습은 상천이 세워지기 전의 과거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아무것도 없던 시절 자주 이렇게 모여 앉아 식사를 하곤 했던 것이다.
송조광이 반갑게 웃으며 다가갔다.
“아직입니까?”
콧잔등에 숯검댕을 묻힌 진무립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팔자 좋아. 주군은 앉아서 고기 굽고 있는데 느긋하게 뒷짐을 지고 들어오네.”
“하하하! 주군께서 잘하시는 일이 아닙니까?”
소매로 진무립의 얼굴을 닦아준 단려화가 송조광에게 물었다.
“이소저는요?”
“곧 돌아올 겝니다.”
마당에 상이 차려지고 있을 때, 방 안에 틀어박혀 가부좌를 틀고 있던 당우가 미간을 좁혔다.
‘느낌이 달라졌다.’
제법 멀리 떨어진 거리, 만리추종향의 연자가 뭉쳐있는 탓에 정확히 확신할 순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와 미세하게 달라진 감각을 보면 운화결이 뭔가 한 게 분명하다.
“나와라. 밥 먹자.”
진무립의 목소리에 당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소공자.”
문을 열고 나간 당우는 모여 앉아 기다리는 동료들을 볼 수 있었다.
단려화가 싱긋 웃으며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어서 와서 앉아요.”
“네.”
때마침 이하빈이 돌아오며 조용히 자리에 앉는다.
진무립이 고기를 나눠주며 그녀에게 말했다.
“또 옛날 생각을 하다 온 모양이군.”
그녀는 부정하지 않았다.
“예.”
구석에 앉아있던 백채륜이 말했다.
“지금 많이 해두세요. 머지않아 그럴 일이 없어질 테니까요.”
복령천을 완벽하게 섬멸한다면 그녀는 괴로운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날 것이다.
그때 남쪽의 큰 마을에 갔던 시평이 두 팔 가득 술병을 안고 들어왔다.
팔에 안은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허리춤과 어깨, 가슴에도 묵직한 호리병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시평이 인상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치사하게 나 빼고 먼저 시작했습니까?”
연길상이 껄껄 웃으며 벌떡 일어났다.
“왔구나!”
모처럼의 술이 반갑지 않을 리 없다.
마일관과 대중경이 일어나 그의 몸에 달린 술병을 하나씩 풀었다.
“수고했다.”
“아직 식사 전이다. 앉아라.”
시평이 게슴츠레 눈을 흘겼다.
“기다리지도 않고 먼저 먹으려 했던 거 같은데?”
백채륜은 고기를 한 점 뜯으며 손을 뻗었다.
허공에 둥실 떠오른 호리병이 그의 손에 안착한다.
“늦은 사람이 잘못한 게 아니겠습니까?”
“넌 먹지 마.”
투덜거리는 그 모습에 좌중이 웃음을 터트렸다.
차갑게 변한 늦가을의 바람도 술자리의 열기를 식힐 수는 없었다.
향긋한 주향과 함께 저녁 식사 자리가 무르익어 간다.
술을 한 모금 들이켠 진무립이 어둑해지는 하늘을 바라본다.
“이제 곧 겨울이 오겠군.”
단려화가 그의 어깨에 온기를 더했다.
“내년 이맘때 우린 뭘 하고 있을까요?”
어떤 결과가 나오든.
그때면 전쟁은 끝났을 것이다.
연길상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때도 이렇게 술을 마시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에 이어 송조광이 말했다.
“어쩌면 술독에 빠져 주당이 되었을지도 모르지.”
대중경의 창백한 얼굴에 술기운이 번졌다.
“살아있다면 말이오.”
“…….”
순간 장내에 싸늘한 정적이 깃든다.
단려화가 눈을 흘기며 어색한 정적을 깼다.
“분위기 좋았는데 초 치지 말아요.”
진무립이 대소를 터트렸다.
“하하하!”
그의 웃음과 함께 무겁던 분위기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진무립이 모두를 차례로 돌아보며 말했다.
“살아남자. 모두 살아서 천하의 명주를 전부 맛보는 거다.”
당우가 물었다.
“소공자가 사는 겁니까?”
“물론이지.”
고개를 끄덕인 진무립이 확신에 찬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이 전쟁, 반드시 이긴다. 그러니 아무것도 걱정할 것 없다. 내가 반드시 축배를 들게 해줄 테니까.”
누구도 진무립의 입에서 나온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가 된다고 하면 무조건 된다.
지금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교차하는 눈빛들에 결의가 차올랐다.
겨울이 가을을 밀어내며 다가오기 시작한다.
그와 함께 결전의 날이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