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spicious little prince is a world's top ten masters RAW novel - Chapter (82)
◈ 82화. 광녀(狂女)
진무립의 등장은 지쳐 쓰러지기 직전의 천무대에게 힘을 불어넣었다.
대주와 부대주를 모두 잃은 혈살추혼대는 조장들이 나서서 부대를 통솔했으나 진무립 일행의 역습을 당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진무립이 지시를 내리는 조장들부터 제거하자 구심점을 잃은 혈살추혼대는 거짓말처럼 빠르게 무너져갔다.
그리고 그로부터 반 시진이 흘렀을 무렵, 마지막 적의 목이 바닥에 떨어지며 치열한 전투가 끝을 맺었다.
긴장이 풀린 천무대원들은 전투가 끝나기 무섭게 주저앉았다.
거친 숨을 토해낸 그들은 믿기지 않는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비록 입을 열 힘조차 없었지만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살아남았다.’
만만치 않은 적을 상대로, 그것도 압도적인 열세에 처한 상황에서 단 한 명의 사망자도 없이 승리했다.
언제 적의 공격이 시작될지 몰라 내력조차 회복하지 못한 상태로 임한 전투.
정무원의 노사들이 오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이 모든 게 부질없는 발악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후기지수들이 자신들을 지키겠다고 싸우는데 쉽게 무너질 수는 없었다.
악으로 버티고 버티다 도저히 안 되겠다고 생각할 무렵, 광무대주 진무립이 놀랍게도 적의 수장을 격파하고 돌아왔다.
그는 엄청난 움직임으로 적의 조장들을 베더니 순식간에 전세를 역전시켜 기어코 승리를 이끌었다.
함께 싸운 다른 후기지수들의 능력도 놀라운 것이었으나 진무립이 발하는 빛은 너무나 강렬했다.
희미한 안개가 가부좌를 틀고 앉은 진무립을 감싼다.
몽롱한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당자경은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렸다.
‘저자가 정말 후기지수란 말인가?’
당자경은 좀처럼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적을 앞에 두고 보이는 담대함과 철저한 계산속에 적의 지휘관부터 처리하는 냉정함.
그게 전부가 아니다.
적과 싸우면서도 아군에게 빈틈이 생길 때마다 귀신같이 나타나 보완했으며 상대가 허점을 보이는 순간 망설임 없이 파고든다.
항시 전장 전체를 인지하고 있을 만큼 시야가 넓다는 증거다.
‘하늘이 내린 재능인가.’
강유월이 진무립을 높게 평가하는 이유가 납득이 된다.
아니, 오히려 그의 평가가 부족할 정도다.
그때 내력을 갈무리한 진무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번을 설 필요는 없으니 오늘 밤은 푹 주무십쇼.”
숲 외곽을 은무대가 지키고 있으니 새벽까진 번을 설 필요가 없을 것이다.
“광무대주.”
당자경과 나백륜을 비롯해 거동할 수 있는 천무대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약속한 것처럼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오늘의 도움은 죽는 날까지 절대 잊지 않을 것이오.”
진무립을 대하는 말투가 전과 비할 수 없이 공손하다.
당자경에 이어 나백륜이 입을 열었다.
“대주의 도움이 아니었더라면 우린 모두 이곳에 뼈를 묻었을 것이오. 구명지은에 감사드리오.”
진무립도 마주 예를 갖췄다.
“지원부대로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나백륜이 멋쩍게 웃었다.
“미안한 말이지만 솔직히 누가 우릴 도우러 오리란 기대는 전혀 하지 않았다오. 맹주님도 그걸 기대하고 운룡각에 지원을 맡긴 것은 아닐 것이오. 뜻하지 않은 도움에 목숨까지 건졌으니 어찌 예를 갖추지 않겠소이까? 정말 고맙소이다.”
진무립은 웃으며 말했다.
“정 고마우면 사천에 돌아가서 술이나 한잔 사십시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사천이라는 말이 나오자 왠지 그리운 감정이 떠오른다.
나백륜은 빙그레 웃었다.
“돌아가게 된다면 내 월봉을 전부 털어서라도 제대로 대접하지.”
둘의 대화가 끝나자 당자경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대주는 우리가 이곳에 올 줄 어떻게 알고 온 것이오?”
“혈야광인의 실험장은 적사곡에 있었습니다.”
“적사곡?”
진무립은 개방도가 남긴 혈서와 적사곡에 갔던 일을 비롯해 모든 것을 설명해주었다.
믿기지 않는 눈으로 진무립을 쳐다보던 천무대원들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자신들이 본 진무립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나곡에서 갈라진 천무대가 임무를 마치고 합류할 지점은 이곳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진무립의 이야기가 끝나자 천무대원들은 나직이 탄성을 흘렸다.
“광무대주의 통찰력이 우리를 구했군.”
이곳에 진무립을 일개 후기지수라고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진무립이 말했다.
“송폭과 칙객에 갔던 이들이 돌아오면 즉시 출발할 겁니다. 언제든 움직일 수 있게 회복에 전념하십시오.”
당자경이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다른 곳의 상황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는 않을 거요. 과연 추격을 뿌리칠 여력이 있을지 모르겠소.”
당장 이곳만 봐도 다리를 다친 나백륜은 뛰는 것조차 어려웠다.
당자경의 걱정에 진무립이 말했다.
“숲의 북쪽 절벽 뒤에 말을 숨겨뒀습니다.”
“말을?”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흔적을 감추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그들이 모두 복귀하면 단숨에 창도까지 가서 운룡각 무인들과 합류할 겁니다. 사천맹에도 사람을 보내두었으니 아마 변경에 도착할 때쯤이면 지원이 올 것입니다.”
나백륜이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일 처리가 참으로 꼼꼼하군. 나는 말이라도 제대로 탈 수 있게 쉬어야겠소이다.”
천무대는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하며 회복에 들어갔다.
단려화와 용추, 육군명은 운기행공을 마치고 늦은 요기를 하는 중이었다.
육군명은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단려화를 쳐다봤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아까부터 단려화의 안색이 유독 어두워 보였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때 용추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난 알지.”
육군명이 물었다.
“뭐야?”
“아까 적과 싸울 때…….”
그때 단려화의 눈에 섬뜩한 살기가 떠올랐다.
“그 이상 말하면 죽여버릴 줄 알아요.”
“그렇다면 입을 다물겠습니다.”
“좋은 판단이에요.”
어느새 다가온 진무립이 육군명의 손에서 육포 한 조각을 뺏어 들었다.
“전투 중에 광녀(狂女)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은데 그 때문인가?”
육군명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가운데 단려화는 표정을 굳혔다.
진무립의 등장으로 전세가 역전된 후 힘을 좀 썼더니 미친년 소리를 들었다.
죽어가는 적이 억울함에 분노를 표출한 것뿐이지만 그녀는 왠지 모를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러다가 내 무명이 광녀로 굳혀질지도 몰라. 앞으로는 가급적 얌전히 싸워야겠어.’
그녀는 싸늘한 눈으로 진무립을 쳐다봤다.
“무림의 평화를 유지하고 싶다면 입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평소와 사뭇 다른 표정과 말투가 심상치 않다.
진무립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지.”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난 진무립은 숲길에 접어들었다.
‘다 죽어가는 천무대를 살려두고 있었다는 건 전원이 모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일시에 소탕하려 했던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 여유를 이용해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진무립은 조용히 서진환을 찾았다.
나무 위에 몸을 숨기고 있던 서진환이 훌쩍 뛰어내려 부복했다.
“승전을 감축드립니다.”
“고맙다. 할 얘기가 있으니 전원 소집해라.”
“예.”
잠시 후 부대주 은수련을 비롯한 은무대 전원이 진무립의 앞에 집결했다.
“너희들도 봐서 알겠지만 천무대는 말을 태운다고 해도 쉽게 도망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게다가 이곳은 적지다.”
은수련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냈다.
“차라리 속하들이 먼저 가서 추격자를 제거하는 것은 어떨까요?”
진무립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하면 너희들이 천무대와 마주칠 확률이 높다. 아직은 존재를 드러낼 때가 아니야.”
언젠가 상천의 존재가 세상의 인정을 받을 날이 오겠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진무립은 지도를 펼쳤다.
“오는 길에 숲이 딸린 작은 강을 지나쳐왔던 걸 기억하고 있을 거다.”
서진환이 답했다.
“예. 분명 이곳에서 북동쪽으로 하루 거리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너희들은 지금부터 그곳에서 몸을 숨기고 기다려라. 내가 도착하기 전까지 절대 적에게 노출되어선 안 된다.”
“지금 당장 움직이겠습니다.”
그의 어깨를 잡은 진무립이 미안한 듯 웃었다.
“내 고집 때문에 너희들이 고생이 많구나.”
서진환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천주님께서는 일면식도 없는 저희를 위해 스스로의 삶을 살아갈 기회마저 포기하셨습니다. 속하들은 천주님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곁에 서 있던 은수련도 동의하듯 고개를 숙였다.
“상천의 가족들은 천주님이 아니었더라면 아직도 하루하루 쫓기는 피폐한 삶을 살고 있었을 거예요.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
진무립은 멋쩍게 웃었다.
“고맙다. 상천이 진정한 무림의 일부가 되고자 한다면 혈교의 일도 우리와 무관한 것이라 볼 수는 없다. 언젠가 오늘의 노력을 보상받는 날이 올 것이니 조금만 더 힘내자.”
진무립을 향한 은무대원들의 눈빛엔 굳건한 믿음이 엿보였다.
몇 가지 지시를 추가한 진무립이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어서 가라.”
일제히 부복한 은무대가 예를 갖췄다.
“명을 받듭니다.”
은무대를 보낸 진무립은 말을 숲으로 옮기고 돌아왔다.
새벽 서리에 타다 남은 불씨가 사그라든다.
나뭇가지를 주워온 진무립은 무인들이 잠든 공간에 다시 불을 피웠다.
꺼져가던 온기가 되살아나자 잔뜩 웅크린 무인들이 몸을 뒤척인다.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자던 단려화가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안 자요?”
눈을 비비는 그 모습이 왠지 귀엽게 느껴진다.
“나 정도 고수는 하루 이틀 안 자도 멀쩡하거든.”
“어머. 사실 나도 그래요.”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약속한 것처럼 씩 웃었다.
불가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잠든 무인들이 깨지 않게 전음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집이 그립지 않나?] [가끔 그럴 때도 있는데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네요.]이번엔 단려화가 물었다.
진무립은 웃으며 가슴을 문질렀다.
[이곳에 그들을 품고 있는 이상 항상 함께하는 것과 마찬가지야.]모친이 마지막까지 품고 있던 짐을 덜어주고자 행한 사천행이다.
지금은 마도림을 다시 반석 위에 올리는 것에만 집중할 시기였다.
[화령도는 어떤 곳이지?] [호수에 떠 있는 아름다운 섬이에요. 계절마다 달라지는 풍광은 지루해질 틈이 없고 언제나 활기로 가득한 곳이죠. 언제 한번 꼭 놀러 와요. 내가 안내할게요.]잠시 옛 기억을 떠올린 진무립은 빙그레 웃었다.
두런두런 이어지던 대화는 동쪽 하늘이 밝아질 때까지 이어졌다.
지금까지 서로에 대해 잘 몰랐던 것을 알아가는 충실한 시간이었다.
스며드는 햇살이 어둠을 쫓아내며 고요한 숲에 아침을 가져왔다.
잠든 무인들이 하나둘 깨어날 무렵, 단려화의 시선이 남쪽으로 향했다.
“누군가 오는 것 같아요.”
“내가 가보지.”
“잠깐만요.”
서둘러 일어난 그녀의 고개가 이번엔 서쪽을 향했다.
“저쪽에서도…….”
두 방향은 천무대가 향했던 송폭과 칙객이 위치한 곳이다.
진무립은 서둘러 불씨를 밟아서 끄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무인들을 깨웠다.
“누군가 오고 있습니다. 지금 확인하고 올 테니 만일을 대비해 준비하고 계십시오.”
당자경을 비롯한 천무대원들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단려화가 말했다.
“내가 서쪽을 확인할게요.”
“부탁하지.”
나뭇가지를 사뿐히 밟고 도약한 진무립은 즉시 남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렇게 백 장가량을 나아갔을 무렵, 저 멀리 숲 밖의 풍경이 눈에 담기며 십여 명의 무인들이 보였다.
‘왔구나.’
지친 기색이 역력해 보이는 이들은 구양무와 천무대원들이었다.
진무립은 머릿속으로 계획을 재정비했다.
‘어서 와라. 보름 안에 사천으로 데려가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