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erminally Ill Young Master of the Baek Clan RAW novel - chapter (483)
483화 종장(終章) (2)
와룡분지 내부에는 여전히 수만 명의 사람이 살아 있었다.
당장 반나절 전만 해도 이곳은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찼다.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 덕택이었다.
정,사,마. 심지어 황군까지 한자리에 모였다.
물과 기름과 같아서 결코 섞이지 못할 이들이 힘을 합쳤다.
이강을 비롯한 이들을 바깥으로 내보내기 위해서였다.
검강으로 두들겨도, 철기병의 돌진으로도 멀쩡했던 결계에 금이 갔다.
특히 청림 영화제자들의 차력(借力)은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위력을 보였으니, 마침내 결계에 구멍을 내서 몇 사람이 빠져나가는 데에 성공했다.
그 대탈출을 성공시키고 나서 땅이 떨릴 정도의 함성이 한참을 이어졌다.
곧 빠져나간 이들이 결계를 해체할 것이다.
갇힌 이들은 해방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로부터 이미 세 시진이 넘게 흘렀다.
식량 배급을 한계까지 줄인 상황, 배를 곯기에 충분한 상황이다.
그 강렬한 허기가 사람들의 마음 속 깊이 숨어 있던 의심을 끌어올렸다.
“……영원히 나가지 못하는 것 아닌가.”
“밖에 나간 청안검선도 진을 해체할 방법을 모르는 걸지도.”
세 시진이라고 하면 진을 해체하는 데엔 짧은 시간일지도 모른다.
바깥의 시간은 이미 수년 하고도 육십 일가량 지나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이들은, 그런 의심을 서로 나눴다.
다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갇혀 있는 자신보다 나가 있는 이들을 더 걱정하는 이들도 있었으니, 그중 하나가 바로 백류산이었다.
그는 저 바깥에 나간 아들 둘이 걱정되었다.
백류산은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자 옆에서 똑같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그 옆에는 진마궁주 요대순이 앉아 있었다.
눈이 마주친 둘은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걱정이 되나 보군.”
혼잣말하듯 그리 말한 것은 백류산이었다.
요대순이 흘긋 백류산을 바라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백류산은 괜히 말을 꺼낸 것을 후회했다.
하지만 요대순은 백류산을 무시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조금 늦게 답했을 뿐.
“아들놈 때문에…….”
요대순에게도 아들이 있었다.
아픈 손가락 같은, 철없는 아들 요연비.
하지만 탕아(蕩兒)라고 해도 자식은 자식인 법이다.
의외로 백류산과 요대순 사이에는 공감대가 있던 것이다.
“아들이라. 나도 그런 것이지.”
“그대 자식은 믿음직해 보이던데 …….”
“……고맙소.”
“그리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소이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대화는 끊겼다.
서로 한담을 나눌 사이는 분명 아니었다.
아무리 그 분쟁이 누군가에 의해 의도된 것이었다고 해도…….
“맹주-!”
그때, 누군가가 백류산을 불렀다.
백류산이 벌떡 일어나서 돌아보니, 다름 아닌 사도련주 서문재였다.
“맹주! 저쪽을 보시오!”
안 그래도 백류산은 서문재의 뒤편을 홀린 듯이 보고 있었다.
하늘과 사방은 적운결계에 의해 붉게 막혀 있었는데.
이강이 나갔던 부근이다.
그쪽의 결계에 명백한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쩌저적-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파열음.
균열이 결계 전체에 퍼지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견고했던 무고의 진이 박살 났다.
그리고 맑은 하늘이 나타났다.
시릴 정도로 푸른 창공이 사람들의 눈에 담겼다.
갑작스러운 푸른 빛에 눈이 부셨지만, 몇몇 사람들의 눈에는 틀림없이 물기가 반짝였다.
누군가가 함성을 질렀다.
그것은 순식간에 퍼졌다.
“살았어!”
목숨을 건졌다는 기쁨보다는, 자유를 얻었다는 해방감이 더욱 선명했다.
동료들끼리 껴안으며 함성을 지르는 이들.
맹주인 백류산 역시 설레는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그는 품위가 아슬아슬하게 훼손되지 않을 정도로 경공을 발휘했다.
분지의 경계면에 거의 가장 먼저 도달하는 데에 성공한 백류산.
그는 우뚝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이강이 와룡분지를 벗어났을 때 놀랐던 것처럼, 백류산 역시 비슷한 이유로 놀랐다.
분지 바깥의 상태가 변해 있었다.
나뒹굴던 시신들은 모두 수습되어 있었지만, 그 자리에 이름 모를 봉분들이 잔뜩 있었다.
다만, 그것만으로 시간이 4년이 넘게 흘렀다는 것을 알아차리기는 힘들었다.
그 앞에 무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와룡분지의 결계가 서서히 해체되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대기하던 무인들.
그중에서는 백류산의 자랑스러운 아들, 백씨세가의 소가주인 하준 역시 있었다.
용케 몸을 잠식했던 마기를 통제해 낸 그가 아비를 기다리며 서 있었다.
“하준아-!”
“아버지.”
백류산은 벅찬 가슴을 부여잡으며 다가왔다.
“어떻게, 어떻게 된 것이냐.”
“모두 잘 처리했습니다. 그 덕에 이 진도 해체되었고요!”
기쁜 소식이다. 기쁘기 그지없는 소식이다.
“이강이가 성공한 것이구나!”
백류산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강이는, 네 형은 어디 있느냐.”
하준은 대답하지 못했다.
백류산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웃음이 어색하게 굳었다.
“오지…… 못한 것이냐?”
“형은.”
하준은 무척이나 씁쓸한 얼굴이었다.
“형님은…….”
백류산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약, 석 달 후.
하남(河南).
살을 엘 듯한 추위는 어디 가고 따듯한 봄날의 기운이 완연했다.
나뭇잎은 푸르르고 거리에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당장 지난겨울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은 저잣거리였으나, 그런 참상이 없었던 것처럼 평화로워 보였다.
하남은 무림맹 총본단이 있는 곳이다.
무너지다시피 했던 무림과 강호를 재건하기 위해, 사도련, 마교와 극적인 화친이 성사되었다.
그 대표자들은 오늘 이곳 하남에 모이기로 했다.
앞으로 강호의 운명을 결정할 일들이 오늘의 회담에서 결정된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일까. 하남 저잣거리에는 유독 사람이 많았다.
아이들은 저잣거리가 제 안방인 마냥 뛰어다니기 마련이다.
하지만 가장 장난기 많은 아이도 지금은 숨을 죽이고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대단해…….”
그들은 서로를 조용히 시키기까지 했다.
당과(糖菓) 같은 것이 아닌 이상 아이들을 이렇게 홀릴 수 있는 것은 드물다.
다만 공연패.
그것도 북경에서 온 화려한 공연패의 영웅극이라면 가능한 일이다.
사회자 역할을 하는 자가 과장된 투로 외쳤다.
“그때! 청안검선이 그 운철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청안검선, 즉 백이강의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은 제법 헌앙한 청년이었다.
붉은 비단옷을 입고 눈가에 푸른 분장을 했는데 제법 영웅다웠다.
“그가 일검을 내려그었다. 그것은 마치 마른하늘에 벼락이 치는 듯했으니.”
누군가 징 같은 것을 쳤다.
그러자 검은 옷을 입고 있는 악역들이 우뚝 몸을 멈췄다.
“단 일검으로 참사교도 다섯을 한 번에 베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악역들의 가슴팍에서 붉은 피가 확 솟은 것이다.
붉게 염색한 종잇조각으로 연출한 것인데, 아이들의 혼을 빼놓기엔 충분하게 화려했다.
한 막이 끝나고, 공연패 사람들이 사발을 가지고 관객들에게 들이댔다.
화려한 볼거리였으니 돌아오는 성원이 괜찮았다.
동전이 날아들고 심지어 아이들마저 한두 푼씩 돈을 건넸다.
혹시 돈을 내지 않으려는 자가 있으면 사발을 든 자가 싱글싱글 웃으며 멈춰 섰다.
그러면 대부분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쓰다가 돈을 헌납하는 것이다.
하지만 좀처럼 주머니를 열지 않는 심지 굳은 이가 있었으니…….
“뭐 어쩌라고.”
게다가 퉁명스럽기까지 한 인간이다. 공연패 사람도 반응이 안 좋았다.
“헤헤, 싫으시면 말고…… 째째하기는.”
“야.”
“야? 이 새파랗게 젊은 놈이.”
공연패에서 수금꾼은 덩치가 있는 자가 하기 마련이었다.
돈을 내지 않은 청년은 그에 반해 홀쭉해서 별로 강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청년은 조금도 기가 죽지 않았다.
“어떤 떠벌이가 그때 일을 떠들고 다녔길래 이런 유행이 생겼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는 연기자 한 명을 가리켰다.
“나는 저렇게 못생기지 않았다고. 어?”
담현이다.
그가 가리킨 것은, 자신을 연기한 배역이었다.
“내 얼굴에 저런 왕점이 있냐? 똑바로 확인해!”
수금꾼은 담현의 얼굴을 뜯어보듯 보았다.
남만에서 일어난 청림과 참사교의 싸움은 전 중원에 퍼진 영웅담이지만, 그렇다고 거기 참가한 무인들의 얼굴을 모두가 알아볼 수는 없었다.
다만 이곳은 무림맹이 있는 하남이다.
알아보는 자가 있었다.
“어, 처, 청림이다!”
“보라색 꽃이야! 괴선이다!”
괴선(怪仙)이라니. 어디 늙은 말코도사에게나 붙을 법한 별호가 붙었단 말인가. 그것도 첫 별호인데.
별호가 별로든 어쨌든 담현의 인기는 대단했다.
“와아아! 괴선!”
“아저씨! 아저씨! 정말 용을 타고 싸웠어요?”
특히 아이들로부터 열화와 같은 성원이 쏟아졌다.
담현은 크게 당황했다.
이렇게 사람들이 모두 알아보고 호의를 보이는 것은 도저히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배역 갈아치우라고!”
담현이 헐레벌떡 물러갔다.
두고 보자 외치고 황급히 자리를 뜨는 악역 같았다.
그 속도가 느리지 않아서 아이들이 우르르 따라갔지만 그들은 곧바로 당황했다.
“어, 없어졌어!”
“술법인가 봐. 우와 …….”
담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술법이 맞았다.
초절정고수들의 눈도 피하는 담현의 은형술이다. 평범한 사람들에게서 숨는 것은 쉬웠다.
담현은 목적지까지 계속 이 은형술을 유지하기로 결심했다.
무림맹 본단의 경비를 서는 이들에게는 미안한 일이다.
후에 문책을 당할 것이 분명하니.
그는 계속 조용하게 나아갔다.
정, 사, 마의 지도자.
무림을 이끌고 있는 태두들이 모두 모여 있는 회담장으로.
“하여, 협악을 체결하는 것을 알겠소. 강남무림에서는 사도련의 확장을 중지하고, 청해성에 마교의 분타를 세울 것이며, 정파무림맹은 재정적 지원을 이어 갈 것이오.”
백류산은 철혈(鐵血)이라는 별호가 붙을 만한 사내였다.
난세일수록 부드럽기보다는 강인한 지도자가 필요한 법이다.
백류산은 훌륭하게 강호재건을 주도하고 있었다.
사도련주 서문재.
마교의 부교주로 등극한 요대순.
그들 역시 백류산과 대립하면서도 협력의 손을 놓지 않았다.
“협상되지 못한 여러 사항에 대해서는 일련의 조정과정을 거친 뒤, 아흐레 뒤의 회담에서 추후 협의하기로 결의하겠소. 이의 있는 자는 거수하시오.”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그러면 이상으로서 마치겠소이다.”
장내의 긴장이 조금 풀렸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백류산은 여전히 자리에 앉은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 이야기는 강호재건을 위한 협의회의 안건과는 다른, 개인적인 이야기이외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백류산은 말을 이어 갔다.
“우리들이 와룡분지에 갇혀 있던 동안, 저 바깥에 남은 이들의 희생으로 큰 위험을 넘긴 것을 모두 알 것이라고 생각하오.”
참사교의 위협.
그 멸망의 준비가 중원 바깥에서 이루어지고 있을 누가 알았던가.
강호의 주인들이라고 거들먹대던 이들도 그 일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참사교주를 참하여 그들을 패퇴시킨 백이강이라는 검수가 실종되었음도 아시겠지.”
굳이 그리 소개할 필요 없는 일이다.
여기 앉아 있는 이들 중 이강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백류산은 이강의 일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설명했다.
“내 아들이지만 나 또한 그에게 큰 빚을 졌소. 그리고 여기 있는 무림동도들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오.”
반박하는 이는 없었다.
“그 아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지만. 실종된 내 아들을 수색하고자 하오. 살아 있다면 기쁜 일이고, 죽었다면 유골이라도 수습하고자 하니. 그러니 내가 부탁할 것은 …….”
백류산은 주변을 돌아보며 포권했다.
“그 과정에 강호동도들의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소이다. 그때가 되면, 이 백모의 부탁을 떠올려 주시면 감사하겠소.”
개인적인 부탁이었다.
그러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진마궁주와 전 마교도들은 그의 수색을 최대한 돕겠소이다.”
“사도련과 그 연합의 문파들은 수색자들을 진심을 다해 지원하겠소.”
“녹림맹의 맹도들은 길을 안내하고 수로채는 배를 제공할 것이오.”
이 자리에 참석한 모두가 그리 호응했다.
백류산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담현이 나타났다.
그 등장은 장내의 대부분이 눈치채지 못한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놀란 무인들 앞에서 백류산이 담현을 소개했다.
“이강의 사형, 괴선이라 불리는 도인이오. 수색조를 이끌 것이외다. 나머지는…….”
백류산이 손짓하자 문이 열리고 대기하던 이들이 나타났다.
“내 아들과 팽가의 여식이 참여할 것이오.”
하준과 팽무아였다.
그들 셋이 사라진 이강을 찾아올 수색조로 결정된 것이다.
“이들의 앞길을 도와주었으면 하오.”
“걱정 마십쇼.”
담현이 백류산을 보고 말했다.
“만약 이강이 이미 죽었거든. 뼈 한 조각까지 모두 찾아오겠습니다.”
실종된 이의 아비에게 말하기에는 조금 과격한 표현이 아닌가.
하지만 이강에게 그 괴팍한 사형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어 둔 후였다.
그래서 백류산은 그저 웃어 주었다.
“……믿음직스럽군.”
담현 역시 씩,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