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olf I saved proposed marriage RAW novel - Chapter 12
12장
침실로 돌아오는 길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레이먼드는 자신의 결정에 대한 의구심이 솟구쳤다가 사그라들었다.
함께 헤쳐나가는 게 옳다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시기가 좋지 않았다.
지금의 에블린은 최대한 무해한 환경에서 압박과 충격을 피해야 했다. 굳이 태중의 아이가 아니었더라도 그래야만 하는 몸이었다.
그래도.
한 가문의 수장씩이나 된 사람을 지나치게 싸고도는 건 아닐까?
에블린이 그런 행동을 바랄 리는 없다. 공작이 되기 이전에도 그랬으니까.
정답이 없다는 게 도리어 끝없는 고뇌를 불러일으켰다. 턱턱 숨이 막히는 감각을 애써 짓누르며, 레이먼드는 문 앞에서 표정을 가다듬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여느 때와 같이 빙그레 미소를 짓고 문을 열자 장미 향이 훅 끼쳤다.
평소 에블린이 즐겨 쓰는 입욕제와 비누 향이었다.
막 씻고 나왔는지 뽀송뽀송해진 그녀가 클레어에게 머리를 맡긴 채 화장대 앞에 앉아 있었다.
“왔어요?”
반기는 웃음에 날카로운 바늘이 가슴을 콕 찌르는 듯 따끔거렸다.
눈치껏 클레어가 자리를 비우자, 레이먼드는 일부러 에블린의 뒤로 가 목덜미를 안았다.
아직 수분기를 머금은 피부는 미세한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아버님이랑 할 얘기 있다고 나가더니. 무슨 얘기 했어요?”
“아가를 잘 챙기라는 얘기요.”
“그건 나도 조심하고 있어요.”
“그 아가 말고요.”
에블린은 반 박자 늦게 이해한 것처럼 보였다. 이내 배시시 나직한 웃음이 들려 왔다.
“어머님도 왔다가 가셨는데.”
“이쯤 되면 내가 사위고 에블린이 딸인 것 같네요.”
에블린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목에 둘린 팔 위로 가만히 올라왔다.
“랜달로 돌아가면 엄마를 보러 가려고요. 그동안 정신이 없었다는 핑계로 그만 잊고 있었어요.”
“그래요. 좋은 소식도 생겼으니까.”
“그리고.”
“또 뭐가 있어요?”
“아버지를 한 번은 뵈어야 할 것 같아서요.”
단 한 번도 아버지에 대해 좋은 말을 한 적이 없는 에블린이었다.
그만큼 큰 심경의 변화라도 생긴 걸까.
레이먼드는 덜컥 걱정스러워졌다.
“별 건 아니에요.”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에블린은 곧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딱 한 번쯤은 묘에 찾아가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한 번도 안 가 봤어요?”
“어릴 때는 조부모님께서 데리고 가지 않으셨어요.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 무덤부터 보여주는 게 좋을 리가 없다고.”
말을 이어붙이지 않아도 뒤 내용은 짐작할 수 있었다.
어느 정도 자랐을 무렵에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사실에 외면했을 것이다.
자유가 거의 없다시피 한 시기였으니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을 거고.
“지금 어디 계세요?”
“이곳에 계세요. 가문 묘가 있거든요. 조부모님도요.”
그래서 만나야겠다는 결심이 깊어졌나 보다.
레이먼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가요. 나도 인사는 드려야죠.”
“나도 처음이라 떨리네요.”
레이먼드는 제 팔을 붙잡은 손을 부드럽게 붙잡아주었다.
조금이라도 떨림이 멎길 바라면서.
* * *
어느 곳이나 그러하듯, 프로스트 가문의 가문 묘 역시 영지에서 가장 양지바른 곳에 있었다.
나이가 지긋한 대리인에게 묻자, 그는 새삼 찡해지는지 코를 훌쩍였다.
“길버트 도련님은 정말 다정한 분이셨습니다. 그렇게 선하시고 영민하신 분이 작위를 이으셨으면 좋았을 텐데.”
아무리 아버지를 뵙기로 다짐했을지언정, 여전히 내게 아버지는 엄마를 지켜주지 못한 무책임한 사람이란 인상이 더 컸다.
그 때문에 그 말을 듣고도 마냥 웃어줄 수만은 없어서 서둘러 말을 돌렸다.
“어쨌든 멀지 않다는 거죠? 오후에 가 보려고요. 생각해 보니, 조부모님도 돌아가신 이후로 뵙지를 못했고요.”
그 얘기가 나오면 백발이 성성한 대리인 영감은 성을 낼 게 뻔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고는 내 앞이라 욕지거리를 내뱉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는 표정이었다.
“정말이지 버나드 프로스트 그자는 제 부모의 묘를 어떻게 그렇게 모른 척할 수 있답니까? 관리비만 내면 그만인 줄 알았던 건지. 공작님과 부인께서 타계하신 이후로 단 한 번도 오질 않았습니다.”
숙부가 가질 않으니 나라고 뭐 갈 수 있었겠는가.
두둔하는 건 아니지만, 그 사람이 왜 두 분의 묘를 찾지 않았는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줄곧 차별받았으니 당연했다.
비뚤어진 애정결핍의 화풀이 대상이 나였다는 건 당연하지 않았어도.
점심을 먹고 느지막이 출발하려는데 대리인 영감이 보따리에 싼 음식 바구니를 건넸다.
“길버트 도련님이 좋아하시던 음식입니다. 자주 뵙지는 못했지만, 오실 때마다 드셨던 기억은 납니다.”
나는 물끄러미 받아든 바구니를 바라보았다.
왜 꽃 한 송이 가져갈 생각을 하지 못했지.
“고마워요. 좋아하실 거예요.”
마차에 몸을 싣고 말발굽 소리가 나기 시작하자, 나는 살짝 보따리 안을 들여다보았다.
건너편에서 레이먼드도 궁금한지 얼굴을 기웃거리다가 어깨를 들썩이며 가볍게 웃었다.
“에블린이 얼굴만 아버지를 닮은 게 아니었네요.”
큼지막한 라즈베리가 박힌 머핀과 초콜릿 쿠키. 그 외의 달콤한 간식들과 내가 즐겨 먹는 겨자소스를 곁들인 양상추 샌드위치와 백포도주.
견고하게 짜인 바구니 안에 빈틈없이 들어찬 익숙하고도 입맛을 자극하는 내음에 도리어 기분이 이상해졌다.
“입덧은 괜찮아요? 냄새만 잘못 맡아도 구역질하고 그랬잖아요.”
“괜찮아요. 자꾸 고기가 당기길래 레이먼드를 닮은 줄 알았는데, 그래도 얘도 내 자식인가 봐요.”
그렇게 이십여 분 정도 신록이 만발한 숲길을 달리자 한적하고 햇빛이 잘 드는 장지가 나타났다.
무덤지기에게 길버트 프로스트의 이름을 대고 안내해 달라고 하자, 비교적 안쪽에 있는 비석 앞으로 데려다주었다.
의무적으로 우리를 따라온 루퍼스가 확실히 ‘그레이 가문보다 훨씬 크네요.’라며 나직이 감탄했다.
크리스틴도 음산하지 않은 분위기에 꽤 놀란 듯했다.
물론 태어나서 처음으로 직접 아버지를 만난 내게 두 사람의 말소리는 흘러가는 바람처럼 다가왔다.
자연의 풍파에 비석에 흠은 제법 났지만, 부식되거나 심하게 마모되지는 않았다. 주변도 잡초 한 포기 없이 말끔했다.
이 안에 있는 묘 대부분이 그랬지만,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말없이 음식을 꺼내 비석 앞에 놓고 잠깐 묵례의 시간을 가진 뒤, 지그시 눈을 떴다.
“아버지께 하고 싶은 말은 없어요?”
레이먼드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없어요.”
아버지의 묘를 찾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내가 원망하는 말만 퍼붓고 매몰차게 돌아설까 봐서였다.
끝까지 책임지지도 못할 거면서 엄마는 왜 사랑했고 나는 왜 태어나게 했는지.
사실 어젯밤만 하더라도 그랬다.
막상 찾아가면 비석에 대고 잔뜩 험한 말을 늘어놓지 않을까.
사람의 감정이란 상상 이상으로 널뛰는 법이었으니까.
그러나 마차 안에서 바구니 속의 음식을 훑는 순간 모든 잡념이 한 줌의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그것들은 내겐 원망의 대상에 그쳤던 사람 역시 좋아하던 음식이 있는 평범한 청년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엄마가 왜 그렇게 나한테 아버지 칭찬만 늘어놨는지 알겠어요.”
루퍼스와 크리스틴을 잠시 물렸다. 이런 얘기는 솔직히 부끄러워서 레이먼드에게도 하기 민망했으나, 그가 아니면 털어놓을 데가 없었다.
“그때는 엄마가 아직도 아버지를 많이 사랑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에블린이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았으면 해서 그러신 거겠죠.”
“그랬나 봐요.”
“그만큼 좋은 분이셨고 어머니께 진심이셨을 거예요. 에블린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걸 아셨더라면 기뻐하셨을 거고요.”
“믿지 않았어요. 다들 아버지가 정말 따뜻한 사람이었다고 했어도. 좋은 사람 때문에 엄마가 힘들었다는 건 인정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나 혼자서 끝없이 실체 없는 원망과 미움을 안고 살았다.
모두, 심지어 엄마까지 입을 모아 아버지에 대해 좋은 말만 했는데도.
그 숙부와 고모들까지 ‘길버트가 똑똑하고 멍청할 정도로 착해서 우리가 차별받았다.’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그 사실을 나만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스스로 감옥에 가둬 옴짝달싹하지 못하도록 옥죄고 있었다.
“있잖아요, 레이먼드. 조금 미안한 소리 하나 해도 돼요?”
“뭔데요?”
“그레이 가문의 묘에 안장한 우리 엄마, 여기로 다시 모셔도 될까요?”
“그래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대답이 나와서 허무해졌다. 나한테만 무거운 고민이었고 남들의 눈에는 별것 아니었던 건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가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친척들을 설득할 필요는 있지 않을까요? 두 분, 정식 부부 관계가 아니셨으니까.”
“그건 알아요. 그래도 이쪽 영지로 옮겨드리고 싶어요. 조금이라도 아버지와 가까이 계시도록.”
일종의 효도랄까.
엄마가 평민이라 가문 묘에 안장이 될 수 있을지는 확신이 없다.
작위를 물려받았어도 무작정 권력을 휘두르면 남용이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것은 뭐든 해 볼 생각이었다.
후련한 마음으로 아버지께 처음으로 ‘또 올게요.’라고 말했다.
그 한 마디가 어찌나 입 안에서만 맴돌고 밖으로 나오질 않던지.
조부모님께도 인사를 드리고 일어서자 벌써 두 시간 정도가 지나 있었다.
안 그래도 더운 날 쓰러진다며 크리스틴이 발을 동동 구르기에 하는 수 없이 마차에 올랐다.
마부의 힘찬 목소리에 말들은 다시 말발굽을 울리며 땅을 내달렸다.
희뿌옇게 흩날리는 흙먼지가 걷힐 때쯤, 살짝 창에 달린 발을 걷어 뒤를 돌아보았다.
저 멀리, 마치 외딴곳에 떨어진 거대한 공원 같은 가문 묘의 입구가 어렴풋하게 보였다.
“나는 나중에 저기 못 묻히겠죠?”
별생각 없이 던진 말에 레이먼드는 난감한 얼굴을 했다.
곰곰이 되짚자, 내 말이 그에겐 꽤 곤혹스럽게 들렸을 듯했다.
“난 프로스트 공작이 아닌 그레이 백작 부인으로 죽을 거예요.”
“고마운데 죽는다는 얘기 하지 마요. 까마득히 먼 얘기를 벌써 하면 슬프잖아요.”
“그렇긴 하네요. 아직 우리 아기는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이 아이가 태어나서 자라면 못해도 우리 두 가문 중 하나를 물려받겠지?
잘하면 두 가문 모두 물려받을 수도 있지만, 그건 피곤하지 않을까.
선택은 아이의 몫이어도 최대한 부담은 주고 싶지 않았다.
“난 회색 머리 백발이 될 때까지 에블린이랑 백년해로할 거예요.”
“그때가 되면 우리 둘이 머리 색이 똑같아지겠네요.”
내 말이 먹혔나 보다. 레이먼드가 몸을 들썩이며 픽 웃었다.
나도 웃으려고 입꼬리를 느슨하게 풀었다.
그러나 소리는 내지 못했다.
갑자기 마차가 기울었다.
* * *
무거운 뭔가가 마차에 크게 부딪히는 충격이 일었다.
저절로 몸이 기우뚱 앞으로 쏠렸고 나는 본능적으로 배부터 감쌌다.
마차가 중심을 잃고 왼쪽으로 쓰러졌다. 미처 몸을 추스르기 전에 벌어진 일이라, 나는 다시 한쪽으로 주르륵 미끄러졌다.
벽면에 충돌하기 직전에 레이먼드가 놀라운 속도로 몸을 날려 날 감싸 안았다.
마차가 완전히 전복하고 나서야 그는 나를 안은 팔에서 살짝 힘을 풀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건 엉망이 된 마차 내부였다. 하필 문 반대쪽으로 밀려나서 옴짝달싹할 수 없는 가운데, 밖에서 크리스틴의 목소리가 들렸다.
“공작님! 백작님! 괜찮으세요?”
레이먼드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둘 다 괜찮아.”
“지금 마차 다시 세워 드릴게요! 뭐든 꽉 붙잡고 계세요!”
마차를 다시 세운다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넘어진 차체가 묵중한 소리를 내며 천천히 일어났다.
레이먼드가 벽에 달린 팔걸이를 붙잡은 덕분에 굴러다니지 않을 수 있었다.
바퀴가 도로 땅에 닿으며 몸이 한 번 들썩였다. 무슨 일이 생긴 건지 멍해졌는데, 문이 벌컥 열리고 얼굴이 하얗게 변한 크리스틴이 나타났다.
“공작님!”
“루퍼스는요?”
“아무래도 누가 일부러 마차를 공격하고 튄 것 같아요. 바로 뒤쫓으러 가셨어요.”
“그럼 이걸 혼자 세운 거예요?”
“예? 아. 네.”
놀라는 부분이 거기냐는 듯, 크리스틴은 대수롭지 않게 흙먼지가 조금 묻은 손을 탁탁 털었다.
내가 멀쩡한 걸 확인한 뒤, 레이먼드는 바깥으로 나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부는 기절했어요. 말들은 도망갔고요.”
침착하려 애썼지만, 그의 안색은 눈에 띄게 질려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루퍼스가 터덜터덜 돌아왔다. 보아하니 놓친 모양이었다.
“두 분, 괜찮으십니까?”
“생각보다는. 꼬리는 못 밟았나 보네.”
루퍼스가 이를 악물었다. 늘 차분한 그로서는 굉장히 드문 표정이었다.
“재빠르더라고요. 하지만 냄새는 확인했습니다.”
순간적으로 레이먼드는 날 힐끗 보더니 멈칫거렸다.
그에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나는 머리를 쓸어넘기며 중얼거리듯 물었다.
“역시 초식동물 수인의 짓인가요?”
크리스틴이 저도 모르게 ‘꺅’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가 입을 틀어막았고, 루퍼스와 레이먼드의 눈가가 일그러지며 얼굴이 험악해졌다.
그제야 나는 뭔가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거 말하면 안 되는 거였나요?”
순식간에 좌불안석이 된 크리스틴이 흘끗흘끗 두 남자의 눈치를 보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를 냈다.
“그, 그게, 굳이 비밀이라고는 안 했지만……”
루퍼스가 관자놀이를 짚으며 크게 한숨을 내뱉었다. 레이먼드도 몸을 돌리더니 하늘을 쳐다보았다.
안 되겠다. 수습도 내가 해야지.
“어머님이 말씀해주셨어요. 크리스틴은 그냥 얼떨결에 같이 있었던 거고요.”
“어머니가요?”
레이먼드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가 아차 싶었는지 누그러졌다.
“에블린. 왜 나한테 말 안 했어요?”
“레이먼드도 나한테 말 안 했잖아요.”
못마땅했지만, 달리 반박할 말도 없어서 입을 열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애꿎은 입술을 한껏 뒤틀던 레이먼드는 결국, 말소리 대신 큰 숨을 내쉬었다.
“내가 뭐라고 할 자격은 없죠. 어차피 알아야 할 일이었고. 다만, 난 조사를 거치고 더 확실해지면 얘기하려고 했어요.”
“알아요. 얘기는 저택으로 돌아가서 해요. 여기는 장소가 영 좋지는 않으니.”
아무도 거친 흙이 폴폴 날리는 숲길에 더 있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여름이라 해가 길었어도 조금 있으면 저녁이 될 테고.
일단 루퍼스와 크리스틴의 타고 온 마차는 무사해서 다행이었다.
출발하는 길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어쩐지 고비가 다시 시작할 것만 같은 안 좋은 예감이 치밀었다.
* * *
마차 한 대는 부서졌고, 마부 한 명은 기절했다. 게다가 네 명 다 몰골이 엉망진창이 되어 돌아오니 저택이 혼비백산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 와중에도 대리인 영감은 침착하게 하인들과 마부를 시켜 도망간 말들을 찾아오도록 지시했고, 부서진 마차의 수거도 집사와 의논했다.
클레어는 거의 울기 직전의 상태로 뛰어다니며 목욕물을 받고 바로 따뜻한 음식을 준비해주었다.
그렇게 대충이나마 안정을 되찾으니, 어머님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방을 찾아오셨다.
“아가. 이게 무슨 일이라니.”
대답하려던 그때.
“습격입니다.”
레이먼드가 퀭한 눈가를 문지르며 문가에 서 있었다. 뒤에는 루퍼스와 크리스틴도 있었다.
할 말이라도 있는지 비서진을 몽땅 끌고 온 레이먼드는 문까지 철저하게 닫고는 비장한 자세로 내 곁에 앉았다.
“비블리즈와 가멜리를 침입한 수인이 이번에는 저희를 목표로 잡은 것 같아요.”
어머님은 나와 레이먼드를 번갈아 쳐다보셨다. 아들 몰래 내게 말씀하셨던 것이 마음에 걸리는 듯하셨다.
내가 입을 떼기 전에 크리스틴이 슬금슬금 다가와 시무룩하게 속삭였다.
“다 들켰어요. 전부 다.”
어머님은 눈썹을 추켜세우며 어깨를 으쓱하셨다.
“어쩐지. 그랬구나.”
“어머니는 전혀 당황하지 않으시네요.”
“난 내 행동이 잘못했다고 생각 안 하거든.”
되려 당당한 태도에 레이먼드는 눈을 흘기다가 말을 이었다.
“어머니다우시네요. 아버지는요?”
“오스틴과 있으시지. 아직 몸이 쉽게 피로를 느끼는지, 어제 나와 에블린만 쏙 뺀 그 회의에 참석을 못 했잖니? 그 얘기를 하시러 갔단다.”
“……비꼬는 건 거기까지만 하세요.”
어머님의 콧방귀에 레이먼드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본격적으로 의논의 포문을 열었다.
“어쨌든 랜달이 아니라 이곳에서 습격했다는 건 내부나 어제 취임식에 온 귀빈 중에서 정보가 샜다는 방증입니다.”
어느 쪽이든 그다지 달가운 소식은 아니었다. 차라리 귀빈 중에 있었으면 하지만, 그마저도 뜻하지 않게 흘렸으면 좋겠다는 게 내 바람이었다.
“게다가 정확히 백작님과 마님이 계신 마차를 공격했습니다. 직접적으로 동족을 건드리지 않은 전례와는 경우가 달라요.”
루퍼스가 턱을 매만지며 짐짓 진지하게 말했다.
“백작님이 강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 마차를 들이박았다는 건, 마님이 함께 계시니 섣불리 움직이지 못할 거라고 확신한 겁니다.”
말을 하면서도 마음에 걸리는지 루퍼스가 나를 슬쩍 돌아보았다.
내가 레이먼드의 발목을 잡았다는 뜻으로 들린 건 아닌지, 나름대로 신경이 쓰인 거다.
어떡하겠어. 사실인데.
“뭐가 됐든, 어서 랜달로 돌아가는 게 좋겠구나. 오늘 습격당했다는 건 일정이 노출됐다는 거니까.”
요컨대 어머님의 말씀은 상대방의 허를 찌르자는 것이었다. 상식적으로 한 번 위험을 겪은 곳에 더 머물 이유도 없었고.
아마도 블랙과 화이트를 공격했던 건 경고이자 긴장감을 조성하기 위해서였을 테다.
늑대 수인의 우두머리인 그레이 가문이 궁극적인 목표물일 거고.
“그런데 왜 하필 늑대 종족인 거예요? 육식 동물이나 맹수 수인은 더 많잖아요.”
“체격이 큰 부류 중에서는 우리 종족이 규모가 커서 그래요. 사실 러더퍼드 공작이나 황후 폐하 같은 사자들이 객관적으로 훨씬 강하죠. 하지만 개체 수가 적어요.”
레이먼드는 담담하게 말했다.
이번 일은 종족 전체와 관련돼서 그런지, 웃음기마저 싹 가신 채 지그시 어느 한 곳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당장 내일 아침에라도 출발하자꾸나. 그자들도 설마 늑대들이 득시글거리는 저택에 쉽게 발을 들이지는 않을 테니까.”
“치고 빠지는 방식을 보면 그럴 가능성은 작습니다. 그럼 분부대로 내일 바로 출발할 수 있도록 채비해 놓으라고 지시하겠습니다.”
어머님의 말씀에 루퍼스가 크리스틴을 데리고 방을 나섰다.
“나도 네 아버지와 오스틴에게 전해줘야겠다. 넌 에블린 곁에 있으렴. 강한 아이여도, 놀란 건 놀란 거니까.”
이어 어머님마저 나서자 방에는 레이먼드와 나, 둘만이 남게 되었다.
이상했다. 때를 따지지 않고 레이먼드와 둘이 있는 게 어색한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지금은 묘하게 거리감이 느껴지는 게 꼭 보이지 않는 투명한 벽이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기분이었다.
보는 눈이 없을 때면 내 손이라도 붙잡고 다독여줬을 레이먼드도 어쩐지 말이 없었다.
슬그머니 하품하는 척, 침대에 누우려는데 그가 나를 불렀다.
“에블린. 혹시 말인데요.”
바로 말이 이어지지 않고 어미가 늘어지는 모양새가 뭔가를 망설이고 있었다.
그는 머뭇거리며 겨우 입술을 달싹였다.
“에블린은 나한테 짐이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
이불 끝자락을 쥐고 앉음과 누움 그 중간의 어정쩡한 자세로 있던 나는 가만히 자세를 고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생각 안 했어요.”
그의 황갈색 눈이 조금 커졌다.
“솔직히 내가 약하지 않았더라면 하고 바라긴 했지만. 짐이라고까지도 여기지 않아요. 애초에 난 인간이고 수인과의 차이는 어쩔 수 없잖아요.”
자책해봤자 달라질 건 없었다.
날 끊임없이 채찍질하고 책망해도 어느 날 갑자기 수인으로부터 내 한 몸 지켜낼 만큼 강해질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럴 바에는 인정할 건 빠르게 인정하고 다른 대책을 찾아야 했다.
내 아이를 위해서라도.
“어머니 말씀이 맞네요. 에블린은 강해요.”
“저번에 자객이 들었을 때, 나한테 했던 말 기억나요?”
아마 못 할 거다. 그때 나한테 해준 말이 얼마나 많은데.
“그레이 저택은 늑대인간들이 사는 곳이라고. 그래서 인간인 나 하나쯤 쉽게 지켜줄 수 있다고.”
그들이 직접적으로 블랙과 화이트를 치지 못한 건, 자신들의 물리적인 힘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그 두 가문보다도 위인 그레이 가문의 일원에게 직접 손을 대는 멍청한 짓을 저지를 경우의 수는 적었다.
남은 건 하나.
외부에 노출된 존재이자, 늑대인간들 사이의 유일한 인간, 수장인 레이먼드의 약점.
나를 노릴 것이다.
상대의 노림수가 훤히 보이면 도리어 떨리지 않았다.
나는 결심에 차서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단 한 번도 먼저 레이먼드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난 그에게 받기만 했고, 폐만 끼쳤으며 나로 인해 그는 손에 직접 피까지 묻혔으니까.
항상 알아서 하겠다고 했을 뿐, 결과적으로 스스로 해결한 건 없었다.
그래서 더는 그에게 기대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그러니 지금 내가 하는 말에 그가 놀라는 건 당연했다.
“나 좀 지켜줘요, 레이먼드.”
* * *
오스틴은 레인저에 복귀했다.
일선에 나설 수 있는 건 아니었고, 습격 사건 때문에 랜달의 경비에도 더 주의를 기울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일단 전체적인 지휘와 후방 지원을 도맡으며 틈틈이 몸을 회복해나갈 거랬다.
그만큼 나았다는 증거이니 기쁘기도 한 편, 한 사람이 빠지니 허전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대신 그 자리를 시부모님께서 채워주셨다. 이런 시기일수록 모여 있어야 한다는 어머님의 강경한 태도 아래, 아버님은 반강제적으로 끌려오셨다.
아직도 앙금이 덜 풀렸는지, 레이먼드와는 데면데면하셔서 두 부자가 함께 있는 시간은 고작 식사 때가 전부였다.
“사실 더글러스님은 마님이 걱정되셔서 오신 겁니다.”
루퍼스가 이번 취임식에 관한 보고서를 올리며 말했다. 작성자는 ‘크리스틴 도지어’였지만, 전체적인 문서 구성을 볼 때 루퍼스의 흔적이 곳곳에서 묻어나왔다.
“제겐 말도 잘 안 거시는데요.”
“당신께서 계신 위치 때문에 체통을 지키려고 하시려다 보니, 사람들 앞에서는 무뚝뚝해지셨어요. 원래는 마음도 약하시고 정도 많으세요.”
루퍼스는 헛기침을 한 번 한 뒤 곧바로 말을 이어붙였다.
“그리고 평생 말 안 듣는 아들만 키우시다가 갑자기 똑똑한 딸이 생기신 격인데, 자연스럽게 대하는 것도 이상하죠.”
“그것도 그러네요.”
나라도 살갑게 굴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렇게 하고 싶어도 입이 잘 안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나저나 크리스틴은요?”
“화이트 가문에서 크리스틴 양 몫의 약혼 선물을 보내서요. 어차피 보고만 올리는 거라면 제가 해도 되니까 나가 보라고 했습니다.”
“루퍼스가 신경을 많이 써 주네요. 고마워요.”
“덕분에 한결 여유가 생겼거든요. 아직 제가 검수를 맡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영민한 사람이라서 다행입니다.”
보고서를 읽던 나는 아랫입술을 말며 나직이 그에게 물었다.
“혹시 도지어 가문에도 이번 습격 사건에 대해서 알렸나요?”
“숨기면 나중에 뒷일을 감당 못 합니다. 무엇보다 동족 사이에서는 신뢰가 중요한 법이죠.”
“도지어 자작이 아무 얘기도 안 했나요?”
“혹시 크리스틴 양 때문이라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쪽도 위험하지 않다는 보장이 없을뿐더러 본인이 강경하게 남고 싶어 해서요.”
“그렇군요. 알겠어요. 이제 가서 루퍼스 일 봐요.”
“네. 간만에 시간이 나서 방 정리를 좀 하려고요. 만약 백작님이 급한 일도 아닌데 저를 찾으시거든 사라졌다고 해주십시오.”
하여튼 정말이지.
모처럼 기분이 좋아 보이는 루퍼스가 나가고 수 분 뒤, 크리스틴이 선물 상자를 잔뜩 들고 나타났다.
“이건 저희 언니가 공작님께 드리는 선물이에요. 저번에 말씀드렸죠? 몰래 축하 선물은 보내겠다고.”
아. 화이트 가문의 약혼 선물에 섞으면 티가 나지 않으니 끼어서 보냈나 보다.
나보다 훨씬 들뜬 크리스틴이 상자들을 가리키며 재촉했다.
“어서 풀어보세요. 저도 뭐가 들어 있는지 보고 싶어요.”
“이렇게 많이 보낼 줄은 몰랐는데요.”
아기 속싸개부터 장난감, 신발까지. 성별을 모른다는 이유에서인지 공용품이 대부분이었다.
날 위한 고급 담요와 허리춤이 낙낙한 원피스들도 몇 벌 있었다.
“고마워서 어쩌죠?”
“레이나의 결혼식에 와 달라는 일종의 뇌물이니까 부담스러워하지 않으셔도 돼요.”
“약혼 선물로는 뭘 보냈어요? 비블리즈는 비단이 유명하니까 의복인가요?”
“비단 자체를 보냈어요. 드레스를 만들어서 결혼식 때 입으려고요. 아, 장신구도 몇 개 있었어요.”
솔직히 비단보다는 장신구 얘기를 할 때 크리스틴의 안색이 눈에 띄게 밝아져서 안 물어볼 수가 없었다.
“보석 좋아하나 봐요?”
“네? 아. 맞아요. 정확히는 장신구를 좋아해요. 예쁘잖아요. 속물처럼 보일까 봐 티를 안 내려고 하기는 하는데.”
이럴 때는 영락없는 아가씨였다.
어쨌든 앞으로 크리스틴에게 선물을 줄 때는 고민할 필요가 없겠다.
“참, 보고서 잘 읽었어요.”
다시 물건들을 상자에 넣던 크리스틴이 움찔거렸다. 쑥스러운지 두 뺨 위로 발갛게 홍조가 물들었다.
“전 그냥 불러주시는 대로 썼을 뿐이에요. 사실 처음에 혼자 보고서랍시고 썼는데 루퍼스님이 말없이 다 고쳐주셨어요.”
“루퍼스는 칭찬하던데요? 일머리 좋다고. 그리고 루퍼스도 처음부터 만능은 아니었을 거예요.”
사실 잘 모른다. 루퍼스라면 처음부터 보좌관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했을지도.
왜 그런 사람들 있지 않은가.
태어날 때부터 빈틈없고 흐트러짐 없을 것만 같은 사람들.
당장 오랜만에 쉴 틈이 났는데도 쉬지 않고 청소를 하러 가지 않았는가. 청소 정도는 하인에게 맡겨도 될 텐데.
마침 레이먼드가 나를 불러서 선물은 하인들에게 옮겨달라고 했다.
눈치껏 크리스틴은 자리를 피했고 레이먼드가 조용히 문을 닫고 들어왔다.
그는 하인들의 손에 들린 꾸러미 쪽으로 턱짓했다.
“저건 다 뭐예요?”
“도지어 자작이 임신 축하 선물을 보냈어요. 아기 속싸개나 장난감이더라고요. 그나저나 왜 불렀어요? 할 말 있어요?”
“꼭 할 말이 있어야 부를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어지간하면 내 눈앞에 있어요. 지켜달라면서요.”
“그럼 나 일해야 하니까 저기 앉아서 구경해요.”
“……그냥 얘기할게요. 놀아줘요. 루퍼스도 어디 갔는지 안 보여요.”
“사라졌으니까 찾지 말래요.”
“나날이 루퍼스가 신경질이 느는 것 같아요. 얼른 짝이라도 찾아줄까 봐요. 가정이 생기면 좀 부드러워지지 않을까요?”
“레이먼드가 잔꾀 안 부리고 일 열심히 하면 짜증 안 낼걸요?”
레이먼드의 아랫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나는 픽 웃으며 그의 볼을 살짝 꼬집고는 책상 앞에 앉았다.
진짜 일할 생각이냐는 듯, 레이먼드가 경악하길래 뭐가 문제냐며 어깨를 으쓱해주었다.
그러나 그는 마른세수와 동시에 회색 머리칼까지 쓸어넘기고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은 할 말 있어서 온 거예요.”
“지금 나 일 못 하게 하려고 거짓말하는 거죠?”
“진짜예요.”
“뭔데요?”
“정보가 어디서 샜는지 대충 알아냈어요.”
그 말에 난 차츰 얼굴에서 장난기를 거두었다. 최악의 상황만은 아니길 바라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데 레이먼드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귀빈 중에서 본의 아니게 흘러나간 모양인데, 그보다 마법사 쪽이 관여되어 있는 것 같아요.”
“마법사가요?”
“자발적인 형태인 건지 고용된 형태인 건지는 불분명하지만. 비블리즈의 담비 수인이 말한 대로 용의자를 추려서 뒷조사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왜 마법사가……”
“일단 들어줘요. 그렇게 추린 결과, 비블리즈를 친 건 토끼 수인 쪽이 거의 확실해요.”
“가멜리는요?”
“거기는 상황이 밤이라서 확실치가 않았다네요. 더구나 냄새조차 희미했다고. 후각을 어지럽히는 물약이나 약초 같은 걸 쓴 게 아닐까 싶어요.”
“그래서 마법사가 관련됐다는 건가요?”
“모인 정보를 토대로 보면 그래요. 수인은 수인의 냄새를 헷갈리지 않아요.”
하지만 이상한 점이 있었다.
그때, 프로스트 가문의 영지에서.
아버지를 뵙고 돌아오는 숲길에서 습격당했을 때 루퍼스는 분명히 수인의 냄새를 맡았다고 했다.
“우리를 덮쳤을 때는 그런 잔재주를 부리지는 않았어요. 이유는 모르죠. 잡힐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위기감을 조성하고 싶었던 건지도.”
레이먼드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의 말대로 자신들의 행동이 경고가 아닌 필사적인 결의에서 비롯된 것임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라면.
그렇다면 의문은 더 본질적이고 깊은 곳으로 향했다.
“대체 왜 그러는 걸까요?”
레이먼드의 말마따나, 그리고 주변에서 흘리듯 했던 말들을 조합해서 미루어 보면 초식동물 수인들은 몇 년 잠잠했더랬다.
맹수 및 육식 동물 수인 역시 굳이 같은 수인끼리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기에, 자기들이 그들에게 줄 공포감을 충분히 이해하고 최대한 행동을 조심하며 서로 건드리지 않고 살아왔다.
물론 아예 문제가 생기지 않은 건 아니지만, 초식 측에서 먼저 이렇게 노골적으로 공격성을 드러낸 적은 처음인 듯했다.
“결정적인 뭔가가 있다고 보기에는 몇 년 동안 아무 일이 없었어요. 쌓였던 게 터졌다고 볼 수밖에는.”
“그러니까요. 그 쌓였던 게 터진 계기가 있었을 거 아녜요.”
“그건 직접 물어야겠죠. 이러나저러나 그들의 대표적인 목표물로 우리 종족이 결정된 것만큼은 확실해요.”
안건만큼이나 어깨가 무거워졌으나 가만히 그들의 행동을 분석할 때가 아니었다.
“레이먼드. 우선은 동족들에게 알리죠. 귀족이야 충분한 경비를 보유했어도 평민은 그렇지 않으니까.”
“그래야겠네요. 손 놓고 당하는 것보다는 불안한 게 나으니까.”
루퍼스의 말대로 도지어 가문은 물론 다른 동족들도 안전하리란 보장이 없었다.
초식이라도 물리적인 힘이 강한 부류는 많았다. 거기다가 마법사까지 협조하는 중이라면 마냥 등한시할 일이 아니었다.
“이제까지의 행동을 보면 보통 인간을 공격할 확률은 낮지만, 그래도 작위가 있는 동족에겐 영지의 경비를 주의하라고도 해야겠어요.”
“랜달도요. 오스틴이 걱정이네요.”
“선봉장으로 나가면 해고라고 단단히 일러두긴 했는데, 또 모르죠. 그 고집불통이 어떻게 나올지.”
‘역시 억지로라도 붙들어 놓을 걸 그랬나.’라며 레이먼드가 이마를 부여잡았다.
“그 부하들이 그냥 두지 않을 거예요. 저번보다 인원도 늘었다면서요.”
레이먼드가 책상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길래 그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달랬다.
그러나 한 손으로 얼굴의 반을 가린 그는 성가시다는 얼굴로 천천히 읊조렸다.
“에블린. 오스틴은 상상 이상의 멍청이라서요. 일이 터지면 자기 몸부터 날릴걸요?”
* * *
오스틴은 가만히 옷 위로 복부를 쓰다듬어 보았다. 단단히 몇 겹으로 여민 붕대의 감촉이 제법 안정감을 선사했다.
“이 정도면 됐겠지.”
아직 전처럼 날아다닐 수는 없어도 통증은 없었다. 걷거나 뛰는 것도 괜찮았다.
조금씩 늑대로 변해 재활 훈련을 하다 보면 다시 예전과 같은 기동성을 되찾을 것이다.
그동안 밀린 일지를 꼼꼼히 정독하며, 그는 새로 들어온 레인저의 이력도 파악했다.
랜달은 지대가 험준한 산지였으니 같은 늑대 수인이어도 기민하고 순발력이 뛰어난 사람이 필요했다.
그러니 지금의 자신은 부하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하루라도 빨리 이전 상태로 돌아가기 위해 재활 계획을 짜던 그의 귀가 의식보다 먼저 쫑긋거렸다.
뭐지?
모두가 잠들었을 텐데.
야간 경비에 나간 조는 돌아올 때가 아니었고.
오스틴은 일지를 내려놓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등 뒤로 손톱을 세웠다.
두 눈에 금빛이 일렁이기 시작한 와중에, 돌연 창문이 깨지며 검은 형체가 뛰어 들어왔다.
* * *
검은 형체는 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재빠르게 움직여 정확히 오스틴에게 달려들었다.
몸은 예전 같지 않았어도 귀와 코는 다르지 않았기에 오스틴은 곧 침입자가 수인이라는 것을 알아채고 이빨까지 드러냈다.
늑대는 아니었다. 자신을 공격할 이유도 없었고, 시기상 레이먼드가 말한 초식동물 쪽이 더 타당했다.
손을 휘둘러 쳐내자, 검은 형체의 속도가 줄어 뚜렷한 윤곽이 보였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이었다. 신장은 오스틴과 비슷했으나 체격은 말랐고, 얼핏 들리는 숨소리에 드문드문 섞인 음성으로 볼 때 남성이었다.
목소리가 젊다. 나이가 많지는 않다. 체격도 말랐고 빠르게 움직이는 걸 보아, 물리적인 힘보다는 속도로 승부를 보는 민첩한 종족이다.
생각할 틈을 주지 않으려는 듯, 잠시 행동이 지체된 검은 로브의 사내는 바로 품에서 단도를 꺼내 도약도 없이 날아올랐다.
오스틴은 물러서지 않았다.
지금 몸 상태로는 움직여봤자 따라잡힐 게 뻔했고, 차라리 상대가 가지지 않은 자신의 강점.
즉, 힘으로 한 번에 끝을 내야만 했다.
예리하게 꽂힐 듯한 칼날이 닿기 직전, 몸을 비스듬히 돌려 상대의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꺾어버렸다.
고통에 찬 거친 비명이 일더니 단도가 데구루루 구석으로 굴러갔다.
그대로 사내를 제압해 바닥에 메쳐버린 오스틴은 돌연 압박해 오는 복부의 고통에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거세게 몸부림치는 사내는 놓지 않았다. 몸집이 작은 종족이라면 동물로 변해 도망치기 쉬울 테니, 곧바로 급소를 가격해 기절시켰다.
찰나의 시간이었으나, 한바탕 폭풍이 몰고 간 듯 방은 엉망이 되었다. 정신을 잃은 사내의 손과 발을 꽁꽁 포박하자, 그제야 소란을 듣고 부하들이 몰려왔다.
“대장님! 무슨 일입니까?”
오스틴은 한 손으로 배를 부여잡으며 다소 힘겹게 말했다.
“일단 형님께 가야겠어.”
“예? 이 시간에 말입니까?”
“이 사람, 수인이야. 정신이 들면 동물로 변해서 탈출할 수도 있어. 그 전에 형님께서 보셔야 해.”
잠깐 부하들은 당혹스러워했으나 곧 일사불란 흩어져 채비를 시작했다. 오스틴은 사방으로 흩날린 일지와 서류들을 주우며 축 늘어진 사내를 힐끗거렸다.
로브 아래 드러난 얼굴은 아직 사내라기도 뭣한 앳된 소년이었다.
아리아나 또래이려나.
그보다 형님께서는 놈들이 형수님을 목표로 공격할 거랬는데.
현재 몸 상태로는 이 정도의 대거리도 무리인가 보다.
힘 좀 썼다고 환부가 연신 욱신거리며 근육이 뻣뻣해졌다.
고통에 대한 자조보다 스멀스멀 치솟는 걱정이 있었다.
나 잘리는 거 아냐?
* * *
오밤중에 부쩍 저택이 소란스러워졌다.
내가 깨지 않도록 다들 배려해준 건지, 아니면 모두의 예민한 청각이 먼저 반응한 건지, 하여튼 내가 가장 늦게 알아챘다.
옆에서 자던 레이먼드도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자리를 비운 뒤였다.
눈가를 문지르며 터벅터벅 1층으로 내려갔지만 아무도 없었다. 말소리는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부터 울리고 있었다.
지하실?
사실상 지하실에는 거의 가 본 적이 없던 나는 조심조심 벽을 잡고 내려갔다.
촛불만이 음산함을 미미하게 밝혀주는 그곳에는 그레이 저택의 핵심 인원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시부모님, 레이먼드, 루퍼스와 크리스틴, 그리고 오스틴까지.
잠깐. 오스틴?
멍하니 인원을 세던 나는 문득 오스틴이 왜 껴있는지 생각하다가 그와 눈이 마주쳤다.
“형수님.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급하게 보고드릴 일이 있어서요.”
일부러 고용인들은 물린 듯했다.
묘하게 조용한 공기가 흐르는 가운데, 크리스틴이 슬쩍 내 팔을 잡아당겨 자신의 뒤로 숨겼다.
나는 그녀의 뒤에서 작게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레인저 숙소에 초식동물 수인이 쳐들어갔나 봐요. 오스틴 님이 바로 붙잡으셨지만.”
“네?”
놀라서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크게 나갔다. 다들 나를 쳐다보았다.
오스틴을 뒤따라온 부하 두 명과 복면을 씌운 채, 그 앞에 무릎 꿇린 알 수 없는 괴한의 고개도 내 쪽으로 움직였다.
내가 크리스틴보다 키가 조금 더 커서 머리가 보이자, 레이먼드가 슬그머니 우리 앞에 섰다.
그러자 아버님이 오스틴에게 복면을 벗기라고 턱짓하셨다.
입에 재갈을 물고 온몸이 밧줄로 단단히 묶인 괴한은 소년이었다.
오스틴보다도 어려 보여서 놀라움을 감추느라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그는 잔뜩 경계 어린 눈으로 우리를 쭉 쳐다보다가 아버님과 레이먼드에게 시선이 딱 꽂혔다.
“본래 형님이나 숙부님을 모셔왔어야 했는데, 한시가 급박해서요. 부득이하게 직접 데리고 왔습니다.”
“잘했다. 급할 때는 어쩔 수 없지. 재갈을 빼주어라.”
오스틴의 오른쪽에 서 있던 부하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년의 입에서 재갈을 빼주었다.
거친 숨과 함께 소년은 곧바로 욕지거리를 거나하게 내뱉었다.
“말버릇이 굉장하네.”
레이먼드가 팔짱을 끼며 고개를 까딱 꺾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아버님이 레이먼드에게 눈짓하셨다. 아무래도 백작은 그였으니 신문 또한 일임하시려는 모양이셨다.
“일단 루퍼스랑 오스틴만 남고 다 올라가세요. 레인저들도요.”
“뭐?”
“다수 대 일로 위협적인 분위기를 만들면 쉽게 입을 열겠어요?”
아버님은 지금 뒷방 늙은이 취급하는 거냐며 성을 내셨으나, 이내 어머님께서 제재하셨다.
눈치 빠른 크리스틴이 두 분과 나를 이끌고 올라왔다. 오스틴의 부하들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얘기 좀 하자꾸나.”
레이먼드는 무슨 생각인지, 오스틴은 괜찮은 건지, 자꾸 눈이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만 흘끗대는데 아버님께서 불쑥 나를 부르셨다.
어머님은 안 가시는지 살폈지만, 나와 같은 이유로 크리스틴을 붙잡고 푸념을 늘어놓으시느라 이쪽을 신경 쓸 여력은 없어 보이셨다.
그렇게 빈 응접실에 조용히 들어오자 멀거니 어둠이 깔린 창가에 서 계신 뒷모습이 날 맞이했다.
괜히 뒷덜미가 조여오고 손바닥에 땀이 나기 시작해서 소파에 앉지도 못하고 주춤거렸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세요?”
“앉아라. 난 서 있고 싶으니.”
왜 하필 이때 레이먼드의 가슴팍을 짓누르던 거대한 회색 늑대가 떠오르는지.
안 돼. 내가 긴장하면 아기도 긴장할 거야.
남몰래 숨을 고르며 가슴을 쓸어내리는데 넌지시 목소리가 들렸다.
“몸은 괜찮고?”
“네. 괜찮아요. 그리고 미처 인사가 늦었는데, 마차 감사드려요. 태어나서 그런 마차 처음 타 봤어요.”
“지난번에는 나 때문에 많이 놀랐을 텐데, 미안하구나.”
달리 쓴 말을 하시려고 따로 불러내신 건 아닌가 보다. 착잡하게 굳어버린 표정과는 달리 말투는 상당히 누그러져 있었다.
“큰일 해결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안 좋은 일에 휘말렸구나. 종족을 대표해서 내가 사과하마.”
“아니에요. 동족이 겪어야 할 일이면 저도 마땅히 겪어야죠. 사실 몇 개월 동안 제 개인적인 일 때문에 종족의 어머니,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잖아요.”
“결혼한 지 아직 반년도 안 됐다. 조급해할 필요 없어. 이 사태가 마무리된 이후에 해도 늦지 않아.”
“그래도.”
“수도에 가 있는 게 어떻겠니?”
눈이 저절로 깜빡이고 말문이 막혔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아버님의 목소리가 여태껏 내가 들은 적 중 가장 부드러워서였고, 두 번째는 저의가 가늠되지 않아서였다.
“수도에 이 저택보다 훨씬 큰 거주지가 있다고 들었다. 황성에서도 가깝고 친인척들도 더러 있다고.”
“그렇긴 한데요.”
“그렇다면 여기보다는 안전하지 않을까, 난 그렇게 생각한다만.”
하고 싶은 말은 분명 있었다. 머릿속에 있는데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고 조각조각 부서져 맴돌았다.
그러니 쉬이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애먼 입술만 자꾸만 달싹거렸다.
“종족에서 경비 인원도 원하는 만큼 붙여주마. 평범한 인간보다는 낫겠지.”
“……거기는 개활지라 밤에는 달이 훤히 다 보여요. 힘들 거예요.”
“그럼, 최소한 저택 내부에만이라도 배치하면 되지 않겠니.”
“……죄송해요. 확답 못 드리겠어요. 잘 모르겠거든요.”
내가 아무런 도움도, 쓸모도 되지 않는다는 것쯤, 내가 가장 잘 안다.
그래서 다들 날 짐짝 취급하지 않고 당연히 지켜야 할 존재로 대우해주는 게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적으로 내가 없으면 레이먼드를 비롯한 그레이 가문의 사람들이 위험에 빠질 일은 없으리란 것도 안다.
내가 레이먼드에게서 떨어지는 순간, 그는 약점이 없어지니까.
근데 난 떨어지기 싫은데.
사실 조금, 아니 많이 무서운데.
“……알았다. 강요할 생각은 없다. 그저 네가 홑몸이 아니니 나도 예민해졌던 듯싶다. 레이먼드도 절대 너랑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겠지. 네 탓 아니다. 자책하지 마라.”
그저 무심히 툭 던진 그 한마디에 왜 이렇게 울컥한 지 모르겠다.
그래도 아버님 앞에서 눈물을 쏟는 추태를 보일 수는 없어 애써 입꼬리를 휘며 가까스로 삼켰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해요.”
“일일이 감사하는 버릇도 고치고. 넌 예의라고 생각해도 꼭 만만하게 보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거든.”
루퍼스의 말이 맞았다.
아버님도 주변의 시선과 가문, 지위 때문에 엄격한 모습을 유지하시느라 마치 그게 본래 성격인 양 되어버리신 거지, 본성은 전혀 그렇지 않으셨다.
“피곤하면 무리하지 말고 자라. 초식 한 마리한테 어떻게 될 만큼 만만한 저택이 아니니.”
“조금만 더 기다려보고요.”
별로 레이먼드가 걱정되는 건 아니었다. 오스틴이 다치지는 않았는지도 멀쩡한 걸 확인했으니 지금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지금 신경을 긁는 건 하나였다.
레이먼드가 그 사람을 어떻게 하지는 않을까.
딱 그거 하나.
* * *
“아까 맨 뒤에 있던 그 여자가 아내라는 인간이지?”
오스틴은 의아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고 단언하지는 못해도 비교적 식성이 다른 수인 간의 적당한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살아온 세월이 얼마던가.
도대체 무엇이 이 소년을 이렇게 분노하고 거칠게 만들었을까.
온몸에서 숲 냄새가 나는 소년은 눈을 부라리며 레이먼드를 노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레이먼드는 지그시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꽤 많이 아끼는 것 같던데.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올려보낸 것도 사실 그 여자를 나한테서 떼어놓으려고 그런 거잖아?”
몇 발자국 뒤에 선 루퍼스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멍청해도 저렇게 멍청할 수가.
레이먼드 그레이가 아내를 끔찍하게 아끼는 걸 알면서도 저런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니.
“그때 그냥 죽였어야 했는데. 저 뒤에 있는 놈이 쫓아오지만 않았어도……”
“너였냐.”
레이먼드가 소년의 턱을 콱 잡아챘다. 가느다랗게 뜬 눈매 속 완벽하게 금색이 된 두 눈이 번뜩였다.
“너였냐고 묻잖아.”
낮게 깔린 목소리가 살기를 머금었다.
* * *
더러 사람들은 잊고는 했다.
심지어 오랫동안 레이먼드를 보아온 오스틴마저도.
레이먼드 그레이는 결코 선량하고 무른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제멋대로에 무모한 기질이 짙어서 잘 티가 나지 않을 뿐, 그는 제 사람이 아니면 기본적으로 냉정했다.
철저히 자신의 영역으로 제한된 자비가 겁 없이 그 안으로 뛰어 들어온 불청객에게 베풀어질 리 없었다.
노상 뜨겁게 불타오르는 것 같던 금빛 눈이 이번만큼은 냉랭하게 기저에 깔렸다.
마치 그의 종족이 두려워하는 달빛처럼 차갑게.
오랜만에 형에게서 살기를 느낀 오스틴은 저절로 시선을 발치로 돌렸다.
목덜미가 콱 조이는 긴장감에 의식하지 않으면 숨 쉬는 것마저 잊을 것만 같았다.
“여러 번 말하게 하지 마. 네가 그랬냐고.”
“내, 내가 그랬다고 했잖아!”
하악뼈가 으스러질 만한 아귀힘에 소년이 말을 토해냈다. 금세라도 으깨버릴 기세로 턱을 붙잡은 손 위로 시퍼런 핏줄이 섰다.
고통에 신음하며 몸부림치는 끔찍한 소리에 루퍼스는 자신이라도 나서야 하는지 슬슬 고민이 되었다.
알아서 제 발로 찾아와준 중요한 인질이 턱이 뭉개져 말이라도 못하게 된다면 참 곤란했다.
레이먼드의 분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지만, 지금은 사적인 감정보다는 대의가 앞서야 할 때였다.
딱 열까지만 센 뒤에도 사태가 진전이 없으면 그를 말리려던 찰나.
정보를 캐내야 한다는 자각은 남아 있었는지, 레이먼드가 거칠게 소년의 턱을 내팽개치며 손을 툭툭 털었다.
“너 같은 어린애의 독단적인 행동일 리는 없고. 배후부터 불어.”
루퍼스가 나무 상자를 끌어오자 레이먼드는 자연스럽게 그 위에 턱 앉아 신문을 시작했다.
“그냥 죽여. 너희 종족 특성이잖아? 약자를 짓밟는 거. 참지 말고 나한테 풀지 그래?”
턱 주변이 벌겋게 부어오른 소년은 이를 악물며 발악했다.
아무리 수인이라도 보통은 여타 인간과 다름없이 자란다. 부모가 있고 형제가 있고, 유대감을 나누며 그렇게 평범하게.
그런 환경 속에서 자란 아이가 이토록 쉽게 저보다 훨씬 강한 상대를 도발하는 것은 어려웠다.
그 상대, 아니면 그와 비슷한 존재에게 큰 원한을 품지 않은 이상.
레이먼드는 뒷덜미를 매만지며 고개를 뚜두둑 꺾었다.
강압적인 무력을 통해 입을 열게 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오스틴보다도 어린 남자애를 상대로 그러기가 여간 껄끄러운 게 아니었다.
더구나 에블린한테 더는 미움 받고 싶지 않았고.
오래 걸려도 무엇이 이 가냘픈 한 마리의 초식동물을 이렇게 독기 어리게 만들었는지 아는 게 우선이었다.
온몸으로 증오를 내뿜는 태도는 분명 물어봐 주기를 바라는 거다.
마치 상대의 특성을 아는 듯한 말투도 질문을 유도하는 것이리라.
이쪽은 저쪽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다. 그러니 어느 정도는 넘어가 줘야 할 필요가 있었다.
레이먼드는 미간을 좁힌 채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험악하게 가느다래진 금색 눈 밑으로 뒤틀린 입가가 달싹였다.
“원하는 대로 들어주지. 떠들어 봐. 네가 품은 그 속내가 뭔지.”
* * *
임산부의 몸이란 여간 변덕스러운 게 아니었다.
살벌하고 묵직한 공기가 흐르는 중에도 까무룩 잠들어버리고 말았다.
심지어 레이먼드를 기다리겠다고 고집스럽게 소파에 앉아 있던 내 몸은 눈을 뜨자, 침대 위였다.
그것도 아주 편안한 자세로 이불까지 곱게 덮인 상태로.
이 저택 사람들이야 당장 클레어만 해도 날 번쩍 안아서 옮기는 건 일도 아니니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문제는 내가 쿨쿨 잠든 내내 상황이 어떻게 변했는지, 하나도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한밤중에 소란이 있었던 사실이 무색하게, 창문과 얇은 커튼을 뚫고 새어 들어오는 여름 아침 햇살은 따사로웠고 저택도 조용했다.
그러나 레이먼드는 없었다.
딱 내가 누운 부분만 이불이 구겨진 걸 보니, 그는 이 방에 들어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혹시 그 수인이 탈출했나?
별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오늘따라 유난히 이질적으로 다가오는 2층 복도를 지나 1층으로 내려갔다.
음식 냄새가 솔솔 풍겼다.
“마님.”
돌연 뒤에서 들리는 나직한 음성에 나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뒤를 돌아보자, 루퍼스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애 떨어질 뻔했잖아요. 왜 놀라게 하고 그래요?”
“마님이 그런 말씀 하시니까 심각하게 들리네요. 다른 표현도 많으니까 그 말은 당분간 자제해주세요. 어쨌든 놀라셨다면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근데 다들 어디 갔어요? 안 보이는데.”
내 말에 루퍼스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뭐 말이라도 잘못했나, 어깨가 움츠러들려던 찰나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당연히 식사 중이시죠. 조찬 때니까요. 마님은 억지로 깨우면 도리어 안 좋다고 그냥 재우라고 하셨습니다.”
“누가요?”
“누구긴요. 마님의 시부모님과 남편이시죠.”
이번에는 내가 눈을 깜빡거렸다.
고용인들이 아무렇지 않게 날 향해 꾸벅 인사를 하고 지나가는 것도 수상한데, 어제 침입 사건을 겪고도 태연히 아침을 먹는다고?
혹시 생생한 꿈이라도 꾼 건가 싶어 루퍼스에게 조심스레 물어보려는데, 그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손뼉을 쳤다.
“아. 오스틴 도련님이 제발 안 잘리게끔 백작님께 말씀 좀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이걸 들으니 꿈은 아닌 게 확실한데.
일단 식당으로 걸음을 옮기자 정말 루퍼스의 말대로 모두 아침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내가 빠지고 시부모님이 채운 자리에 오랜만에 커다란 식기들까지 보였다.
“어머, 에블린. 일어났구나.”
어머님이 태연히 손짓하셨고, 어안이 벙벙해진 나를 하녀가 이끌고 자리에 앉혔다.
“늦게 잔 것 같아서 안 깨웠어요. 몸은 괜찮아요?”
하도 산뜻한 인사라 나도 모르게 레이먼드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자신의 얼굴에 뭐가 묻었냐고 물으며 갸웃거리고는, 소고기 스튜에서 큼지막한 고깃덩어리를 건져내 입에 넣었다.
“아니요. 내가 이상한 건가 봐요.”
아버님은 내가 내려올 때 한 번 힐끗 시선을 주시곤, 조찬 동안 줄곧 신문에만 집중하셨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아니, 내가 이제껏 보아온 그레이 가문의 아침 중 가장 평화롭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시간이 지났다.
다들 날 위해서 일부러 어젯밤 벌어진 일을 입 밖으로 내지 않는 건가, 굉장히 합리적인 의구심이 들 즈음, 크리스틴이 단정한 모습으로 서재에 나타났다.
그녀가 이 기묘한 현상을 설명해줄 유일한 사람일 거라는 강한 확신에 나는 문단속을 단단히 하고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크리스틴. 다들 일부러 그러는 거죠?”
“네? 뭘 말씀하시는 건가요?”
“어젯밤에 있었던 일이요. 누구도 그 얘기를 하지 않아요. 별일 아니라는 것처럼 아침을 먹고, 저택은 평화롭기까지 해요.”
크리스틴은 동그래진 눈으로 내 말을 듣다가 부드럽게 입가를 풀었다. 역시 그녀는 이 상황의 진상을 알고 있을 거라는 기대에 절로 다음 말을 기다리는데.
“그럼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데요?”
“네?”
“공작님 말씀대로 최근에 종족을 위협하는 수인이 어제 저택에 침입했죠. 오스틴 님이 직접 붙잡아서 여기로 데려오셨고요. 백작님이 신문까지 하셨죠. 그래서, 우리가 조바심 내고 몸을 사려야 하나요?”
혀가 굳어버렸나. 아니면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나.
억지로 대답이야 할 수 있겠다만, 답변이랄 수도 없는 엉터리 헛소리만 늘어놓을 것 같아 그냥 입을 다물었다.
크리스틴은 입가에 은은한 호선을 그린 채, 내 손을 꼭 잡았다.
“놀라셨을 거 알아요. 하지만 다들 모르는 체하는 게 아니에요. 그 와중에도 할 일은 있고, 안달을 낸다고 바뀌는 것도 없고, 무엇보다 겁을 먹을 이유가 없으니까 평소처럼 지내는 거예요. 그 사람, 지금 지하에 묶여 있으니까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래도 난 잠들어버린 바람에 상황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못 들었거든요.”
“그건 백작님이 말해주실 거예요. 마침 오시네요.”
그로부터 정확히 한 박자 정도 후, 문이 똑똑 울렸다. 새삼 늑대의 귀는 틀리는 법이 없다는 걸 체감한 나는 이만 물러나겠다는 크리스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예상대로 평소와 똑같은 안색, 표정, 자세의 레이먼드가 들어왔다.
“본의 아니게 먼저 훔쳐 들었는데. 난 숨기려고 한 적 없어요.”
그는 두 손바닥을 내보이며 본인의 결백을 주장했다. 회색 늑대의 귀는 크리스틴보다 훨씬 밝았다.
복도를 걸어오며 드문드문 들리는 말소리의 정확한 내용쯤 손바닥 뒤집듯이 쉽게 파악했겠지.
지레짐작하고 혼자 크리스틴에게 호들갑을 떤 꼴이 되어버렸다.
조금 민망해져, 헛기침을 두 번 한 뒤 표정을 가다듬고 도도하게 굴었다.
“알았어요. 근데 언질이라도 줬으면 좋았을 거예요. 이따가 서재에서 얘기하자는 식으로라도요.”
“방금 일어난 사람한테 그런 말을 하는 게 더 이상하지 않아요?”
“난 어제 레이먼드가 걱정돼서 조마조마해다가 잠들었다고요. 그 정도는 알려줄 수 있잖아요.”
“또, 또 쓸데없이 내 걱정했어요?”
“레이먼드가 그 사람 어떻게 할까 봐 걱정했다고요.”
“안 죽였어요. 그러니까 이제 내 얘기 좀 들어요.”
그는 발끈하면서 주먹 쥔 나를 부드럽게 붙잡아 소파에 앉혔다.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노려보자, 회색 머리가 좌우로 절레절레 고갯짓했다.
“눈에 힘 풀어요. 결론부터 말하면 정확한 배후는 파악하지 못했어요. 어린놈이 어지간하더라고요. 끝내 입을 다물어서 애 좀 먹었어요.”
잠을 못 잤나? 웅얼거리며 눈가를 문지르는데 피로가 이쪽까지 전염되는 것 같았다. 문득 반듯했던 침대 옆자리가 떠올랐다.
“그래도 대략적인 흐름은 알아냈어요. 우리 생각대로 육식, 맹수 수인에 대한 원망이 맞았어요.”
“근데 수인끼리는 서로 잡아먹는 일이 없다고 하지 않았어요?”
“없죠. 하지만 재미로 죽이는 일은 빈번하거든요.”
차츰 내 안색이 질려가는 게 느껴졌다. 말을 꺼내는 레이먼드도 괴로운지 연신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식으로 가족이나 동족을 잃은 초식동물 종족, 그들이 힘을 합친 듯해요.”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런 일은 최근에 생긴 게 아니잖아요. 예전부터 즐비했던 악행인데 왜 이 시점에서 행동하기 시작한 걸까요?”
“그건 그들이 본보기로 우리 늑대를 선택한 것과 관련이 있어요.”
마른세수하는 그의 손 안에서 목소리가 웅 퍼져 울렸다. 이내 얼굴에서 손을 뗀 레이먼드는 건조한 눈으로 스윽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그 끝에 닿은 건 나였다.
“에블린. 당신이 나랑 결혼했기 때문이에요.”
* * *
언젠가 막연히 걱정한 적이 있었다.
정체를 숨기고 사는 동족에게 화려한 신고식을 치르며 등장한 새로운 프로스트 공작, 즉 나의 존재는 독이 되는 것이 아닐까.
지금 되뇌자면 말이 씨가 되는 법이니, 그때 그 생각을 혼잣말로 중얼거리지만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까 싶다.
레이먼드는 그들이 동족을 목표로 잡은 이유가 그가 나와 결혼했기 때문이라고만 했을 뿐, 뒤로 어떤 말도 잇지 않았다.
그건 구태여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내가 충분히 이해, 아니, 자각하고 있었으리라는 것을 그 역시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
희미한 안개처럼 형체 없이 떠돌던 우려가 명확한 현실이 되는 건 상상 이상으로 무거웠고 퍽 괴로운 일이라 난 오히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내 의지로 그렇게 됐다기보다는 누군가 머리를 몇 대 세게 쳐서 강제로 그렇게 만들었다고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하겠다.
“치사한 놈들이죠. 정면승부로는 승산이 없으니 인간인 에블린을 붙잡고 늘어지려는 거예요.”
내 이름이 알려지면서 덩달아 레이먼드도 외부에 노출이 됐다. 그러니 아는 사람 눈에는 보였을 거다.
프로스트 공작의 부군이 늑대인간의 수장이라는 것을.
비블리즈의 습격 사건 발생 시기를 생각하면, 그들은 비교적 최근에 그 사실을 알았을 거다.
뭐, 그러기 전에 내가 작위를 승계한 지 오래되지 않기도 했지만.
아마도 절호의 기회라고 속으로 쾌재를 부르지 않았을까?
맹수 수인의 아내가 인간이라니.
그들의 힘으로서도 쉽게 제압할 수 있는 데다가 늑대의 왕까지 무력화할 수 있는 인간.
더구나 여기저기 이름이 유명해졌으니 접촉하기도 어렵지 않았을 테고.
취임식 정보가 어디서 새어 나갔는지 미루어 볼 때, 의도적으로 내 친척이나 초대를 받을만한 가문에 하인 등으로 잠입했을 수도 있다.
그렇게 기회를 엿보다가 나와 레이먼드가 탄 마차를 습격한 거고.
딱딱 들어맞는 상황에 개운하기도 하면서 착잡한, 생경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사기를 뚝뚝 떨어뜨리는 무기력함에 사로잡혀 있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일은 이미 벌어졌고 끝은 반드시 있었다. 마무리를 누가 맺느냐가 중요한 것뿐.
“뭐라도 알았으니 됐어요. 그 사람, 지금 지하에 있다고 했죠?”
“지금은요. 아무래도 여기는 위험해서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요. 저쪽에서 되찾으려고 다시 습격을 시도할 가능성이 커요.”
나는 곰곰이 그동안 레이먼드와 나눴던 대화를 되짚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실마리가 될만한 단서를 찾아 끄집어낼 수 있었다.
“레이먼드. 그때 마법사가 연관되어 있을 것 같다고 했죠?”
상대는 늑대가 후각이 좋다는 것을 알고 후각을 어지럽히는 약을 썼다. 거기에서 레이먼드는 마법사가 관여되어 있을 거라고 확신했고.
“조언을 구해보는 건 어때요?”
“조언이요? 누구에게요?”
“우리도 아는 마법사가 있잖아요.”
솔직히 도와줄지 모르겠다. 그래도 상황을 전한다면 일말의 단서라도 얻을 수 있을 거다.
나는 초록색 머리칼을 가진 묘한 외모의 남자를 떠올렸다.
“안드레아 말이에요.”
* * *
어거스트 블랙 백작은 참 알기 쉬운 남자였다.
카일은 자신은 그런 아버지를 닮지 않아서 참 다행이라고 여겼다.
빌어먹을 회색 늑대와의 내기에서 지는 바람에 굴욕적인 벌칙을 끝내기도 잠시.
늑대에서 인간이 되는 과정을 아그네스 공주에게 들켜버리는 바람에 온 가족이 그 길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영지로 도망치듯 돌아왔다.
여차여차 프로스트 공작이 황후 폐하께 말을 잘 전해준 덕분에 단순한 촌극으로 넘어가는 것 같았는데.
“제가 직접 만들었어요. 많이 드세요.”
왜 지금 양 볼에 홍조를 띤 공주와 나란히 마주 보고 앉아 한가로운 티타임을 가지고 있는 걸까.
카일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진지하게 따져보았다.
어머니야 황후 폐하의 시녀이시니 당연히 그 곁을 지키러 입성. 아버지는 황후께서 언제든 오고 싶으면 오라셨다며 두 자식을 끌고 아내를 따라 입성.
아. 거기부터구나. 아버지를 따라가면 안 되는 거였어.
아들이 그런 생각을 하거나 말거나, 블랙 백작은 공주가 내민 다과에 밝은 미소로 화답했다.
“공주 전하께서는 손재주도 좋으시군요. 정말 못하시는 게 없으십니다.”
속셈이 빤히 보이는 아부에 아리아나의 입꼬리도 경련을 일으켰다.
업무 중인 황후 대신 아그네스의 옆에는 황후를 빼닮은 그 남동생이 지키고 있었다.
블랙 가문의 두 남매가 어떻게든 가만히 있어 준 덕분에 표면적으로나마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이 공간에서, 그는 외모가 꼭 닮은 세 사람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아들이 아버지를 안 닮아서 다행인가. 너무 무뚝뚝해도 별로인데.
아무리 인간의 형태라고 해도 기본적으로 사자의 기세는 다른 동물에 비할 게 아니었다.
형형한 주황색 눈이 뚫어지게 자신을 쳐다보자 카일의 붉은 눈동자가 슬금슬금 시선을 피했다.
그즈음, 때맞춰 블랙 백작이 자연스럽게 입을 열며 일어섰다.
“그럼 젊은 친구들에게 자리를 맡기고 잠시 자리를 피해드릴까요? 공작께서는 어떠십니까?”
능청스럽긴. 라이언 러더퍼드는 속으로 이죽거렸으나 한편으로는 의아했다.
카일과 아그네스가 둘만의 시간을 보내게 해주고 싶다면 딸도 데려가야 아귀가 맞는다.
정확히 자신만을 콕 짚었다는 건 자리를 비켜주자는 뜻이 아니라 할 말이 있으니 시간을 내어달라는 의미였다.
이미 모든 정신을 카일에게 뺏긴 아그네스가 눈치챌 리도 없겠지만, 라이언은 어색하지 않게 그의 뒤를 따랐다.
세 사람에게서 멀어지자 블랙 백작의 목소리가 나직이 들렸다.
“조용히 얘기할만한 곳이 있습니까? 이곳 구조는 공작께서 더 잘 아시잖습니까.”
“따로 자리를 잡는 것보다는 이렇게 걸으면서 말을 주고받는 게 시선을 덜 끕니다. 얘기하시죠.”
“먼저 본론부터 말씀드리자면, 황실에서 후원하는 마법사들과 만남을 주선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예상 밖의 부탁이군.
지나가던 근위병 두 명이 그를 향해 꾸벅 인사를 했다. 라이언은 그들이 한참 멀어지고 난 뒤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렵지 않죠. 이유는 알아야겠습니다만.”
“최근에 저희 영지에 침입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사실 그 전에 다른 동족의 영지에서도요.”
“침입이요?”
“아시다시피 저희는 육식, 맹수 수인 아닙니까. 그러고 보니 공작께서도 그러시군요. 어쨌든 식성이 다른 수인 종족과 오래전부터 빚어온 갈등이 지금에서야 터진 듯합니다.”
“쉽게 말해서 초식을 하는 수인들이 영지에 침입했다는 겁니까?”
“예. 저희 쪽 경비 한 명이 다쳤습니다. 큰 부상은 아니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기도 찝찝하잖습니까.”
“상황은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마법사는 왜 만나시려는 겁니까?”
“본디 갯과 동물은 후각이 좋습니다. 저희도 그렇고요. 그런 저희가 침입자의 정체를 아직도 확정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확신에 가까운 추측으로 유력한 후보만 추렸죠.”
“약물이나 약초의 힘을 빌렸다, 이 말이시군요.”
그런 것을 전문적으로 취급하고 다룰 수 있는 사람. 제국 내에서는 마법사밖에 없었다.
마법사야 황실에서 후원하는 이들 외에도 암암리에 활동하는 음지의 존재들도 제법 있었기에 소속이 어디인지 아직 단정 짓기는 어려웠다.
생각건대, 블랙 백작이 황실에서 지원금을 받는 마법사들을 의심한다기보다는 그들을 통해서 뭔가라도 알아내려는 것이었다.
“그레이 백작도 아는 일입니까?”
“종족의 군주입니다. 동족 내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은 전부 그 가문으로 보고가 들어갑니다. 이미 지시를 받아서 조사를 착수했고, 그 결과가 방금 말씀드린 것들입니다.”
“영지가 두 곳이나 당했으면 그쪽도 안전하다는 보장이 없겠군요. 더구나 인간 안주인이 있는 마당에.”
입술 새를 비집고 미약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대체 왜 그 사람에겐 안 좋은 일이 끊이지 않는 거지?
“일단 부탁은 받아들이겠습니다. 마침 제 지인 중에 황실에서 지원을 받아 연구를 진행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말을 넣어보죠.”
줄곧 만면 가득 능글맞은 웃음을 그렸던 조금 전과는 달리, 고개를 숙여 감사를 전하는 백작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사실 카일이 핑계고 이 얘기가 본심이었던 건가.
블랙 일가가 돌아간 이후, 라이언은 가브리엘라에게만 조용히 이 안건에 대해서 전했다.
당연히 그가 아그네스와 카일이 어땠는지 얘기하러 왔을 거라고 가볍게 생각한 가브리엘라는 성가시다는 듯, 눈과 눈 사이를 문질렀다.
“산 넘어 산이네. 이쯤 되면 액운이라도 낀 거 아냐?”
“협조를 자청하는 전서를 쓰려고요. 황실에는 피해가 안 가게 제 개인적인 선에서 처리하겠습니다.”
“그건 당연하고. 두 번 다시 내 손으로 널 벌하게 하지 마.”
조용히 웅얼거리는 말투에서 진심이 묻어나왔다. 라이언은 잠깐 눈을 감았다가 뜨며 말을 이어붙였다.
“그리고 마법사가 관여되어 있는 것 같다고 합니다. 안드레아를 자문역으로 보내려고요.”
“안드레아를 보내? 우리 쪽 하수인을 보내서 직접 데려오지? 랜달보다는 수도가 안전하지 않겠어?”
“공작이 홑몸이 아니거든요.”
아. 황후가 짧게 탄식했다. 그녀가 말을 걸기 전에 라이언은 재빨리 머릿속에 적어둔 문장을 쉴 틈 없이 내뱉었다.
“블랙 백작이 만남을 요청해서 그쪽 먼저 해결한 뒤, 랜달로 보낼 생각입니다.”
“굳이 두 번이나? 아니다. 어디서 습격당할지 모르니까. 번거로워도 안전성이 확보된 이쪽에서 움직이는 게 맞겠네. 그보다 안드레아가 협조하겠어? 그 까다로운 인간이?”
“그건 제게 맡겨주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가브리엘라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가망 없는 감정에 목매는 동생이 안쓰러운 건 여전했으나, 한편으로는 다 쏟아붓고 깔끔하게 털어버렸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래야 나중에 후회가 남지 않을 테니.
* * *
끊임없이 먹고 자고 일하는 나날이 반복됐다.
입덧이 가라앉으니 식성이 왕창 불어나서 서류를 보면서도 러더퍼드 공작이 선물해준 과일을 몇 개나 해치웠는지 모르겠다.
보통 이렇게 먹으면 살이 많이 찐다는데, 내 배 속의 작은 녀석이 레이먼드를 닮았는지 내 체형은 그대로였다.
지하실에 한동안 감금됐던 수인은 머리에 검은 복면이 쓰인 채, 오스틴을 비롯한 다른 레인저들이 이끌고 어디론가 연행했다.
듣자니 다시 레인저 숙소 쪽의 구금 시설로 끌려갔다나.
오스틴은 그 몸으로 전투의 선봉장으로 나서면 해고라는 엄포를 듣고 지레 겁을 먹었던 것 같은데, 다행히 잘리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일시적으로 일단락된 듯한 모양새였으나.
늘 그렇듯 문제는 다른 곳에서 터지기 마련이었다.
별안간 칼로 생살을 에는 듯한 고통이 내 아랫배를 덮쳤다.
* * *
몸이 기울며 수북하게 쌓인 서류 더미를 와르르 무너뜨렸다.
순식간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하더니 눈앞이 흐려지며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나마 다행이랄까.
바로 옆에서 일정을 정리하고, 마무리한 서류를 꼼꼼하게 분류하던 크리스틴이 화들짝 놀라 달려왔다.
“공작님! 왜 그러세요?”
입을 뻐끔거려 보았지만 나오는 건 숨소리와 신음뿐이었다. 나는 그녀의 팔을 붙잡고 겨우 입을 크게 벌려 말소리 비슷한 것을 내뱉었다.
“의사……의사를…….”
크리스틴은 눈치가 빠르고 상황판단력도 좋았다. 나를 부축해 소파에 누인 뒤, 곧바로 서재를 뛰쳐나가 클레어와 리타를 찾았다.
그 목소리가 어렴풋하게 울렸다.
나는 두 팔로 배를 꽉 감싸 안았다. 아파서 죽을 것 같은 와중에도 본능적으로 불길한 예감이 치솟았다.
안돼. 제발 버텨줘.
그럴수록 바늘 수천 개가 동시에 배를 찌르는 통증은 심해졌다.
그렇게 몇십 초. 문이 부서질 것처럼 열리며 익숙한 회색 머리카락이 먼저 보였다.
희게 질린 얼굴로 숨을 헐떡이는 레이먼드는 내게 다가와 손을 잡아주었다.
어쩔 줄 몰라서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애써 숨을 고루 내쉬던 나는 손바닥을 뜨겁게 덥히는 온기에 조금 안도했다.
그와 동시에 의식이 뚝 끊겼다.
* * *
의사가 도착해 에블린을 살피는 데까지 실질적으로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 반도 되지 않는 시간이었으나, 기다리는 이로서는 체감상 영겁과도 같았다.
에블린의 상태를 면밀하게 본 의사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에 레이먼드의 얼굴에 희게 질렸다.
“일단 유산은 아닙니다.”
여기저기서 안도의 탄식이 새어 나왔다. 의사는 턱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보통 유산은 하혈을 시작으로 복통이 이어지는데, 부인께서는 복통만 있으셨다는 걸 보니 단순히 심리적 압박과 긴장 상태가 꽤 오래 지속됐던 듯합니다.”
그걸 ‘단순히’라고 말할 수 있는 건지, 루퍼스는 의문이 들었으나 그 부분을 굳이 파고들기에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대를 이어 그레이 가문의 주치의를 지내는 중인 의사는 안 봐도 원인을 알겠다는 듯이 레이먼드를 흘겨보았다.
“그렇게 입이 닳도록 말씀드렸건만. 절대안정이 필요하시다고. 부인께서도 어지간히 고집이 세신가 봅니다.”
그게 레이먼드의 영향을 받은 탓인 양 말하는 투라, 더글러스가 헛기침으로 눈치를 주었다.
“지금 에블린의 상태는 어떤가요?”
벨리카가 물었다. 아직도 놀란 기색이 가시지 않아 안색에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저번보다 약간 나은 정도입니다. 살과 근육이 너무 없어요. 아기는 여타 태아보다 훨씬 튼튼한데, 모체가 약해요. 산책이라도 자주 하셔야 합니다.”
레이먼드는 상념이 많아 보였다.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의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좌우로 흔들며 레이먼드를 콕 짚어 말했다.
“기본적으로 품고 있는 모체가 평범한 인간이란 사실을 잊지 마세요. 지금이야 초기라 괜찮을지 몰라도, 달 수가 찰수록 엄마의 양분을 어마어마하게 흡수할 겁니다. 두 배로 잘 드셔야 하고, 잘 쉬셔야 합니다.”
선생님이 잘못을 저지른 학생을 나무라는 말투였다.
의사가 돌아간 후, 한바탕 폭풍이라도 몰아친 양 저택은 어수선해졌다.
에블린이 아직 정신을 잃은 채라 리타와 클레어는 꼼짝없이 간호하느라 바빴고, 벨리카도 걱정이 됐는지 그 곁을 지키고 있었다.
더글러스는 미간을 좁히고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고 있었는데 치미는 부아를 가까스로 억누르는 모양새였다.
당연히 에블린의 옆자리를 지키고 있을 거라고 믿었던 레이먼드가 보이질 않자, 루퍼스는 발소리를 죽이며 복도를 서성였다.
그러다가 서재 한구석에서 물끄러미 창밖을 쳐다보는 그를 발견했다.
제 기척을 알아채지 못했을 리 없겠지만,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요지부동이었다.
조용히 뒤돌아서려는데 불현듯 서늘한 음색이 루퍼스의 발목을 붙잡았다.
“채비해.”
“어디 가시려고요.”
“그 초식 수인한테 가봐야겠어.”
“혼자서요?”
“생각이 바뀌었어.”
창문 속에 비친 레이먼드가 이를 악물었다. 얼핏 드러난 입술 새로 날 선 송곳니가 보였다.
그 입이 거의 달싹이지 않으며 말소리를 내뱉었다.
“쳐들어오길 가만히 기다리기에는 화가 좀 많이 나서 말이지.”
뭐든 잘근잘근 씹어먹을 기세로.
* * *
눈을 뜨니 해가 진 뒤였다.
혼절했다는 감각도 없이 그냥 오래 눈을 감았다가 뜬 것 같은데, 클레어가 호들갑을 떨었다.
“마님! 정신이 드세요?”
그 목소리에 멍해졌던 의식이 되살아나며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번뜩 떠올랐다.
나는 배를 움켜쥐고는 클레어를 바라보았다.
다행히 희미하게 미소를 짓는 걸 보니 내가 생각한 최악의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나 보다.
온몸에 기운이 쭉 빠지며 노곤해졌다. 이어 크리스틴이 들어왔는데 어머님과 리타는 내가 먹을 음식을 만들라고 주방장을 닦달하느라 1층에 있다고 했다.
나는 크리스틴에게 손짓했다. 누구보다 많이 놀랐을 텐데 바로 잘 대처해줘서 눈물 나게 고마웠다.
“고마워요. 덕분에 무탈할 수 있었어요.”
“아니에요. 그보다 의사가 그러는데 몸에 살도 부족하고 근육도 부족하시대요. 조금씩 운동하시는 게 좋다고.”
“그러겠죠. 그동안 너무 앉아만 있었네요. 활동적인 건 레이먼드에게 배워야겠어요.”
말을 하고 나자, 의식이 끊기기 직전 창백한 얼굴로 날 바라보던 그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쳤다.
“레이먼드는 지금 어디 있어요?”
“백작님이요? 글쎄요. 저는 계속 마님 곁에 있었거든요.”
클레어가 어깨를 으쓱하며 크리스틴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가씨는 모르세요?’라는 눈빛이었는데, 크리스틴도 모호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도 잘. 아까 루퍼스님과 나가시는 건 봤는데.”
“나갔다고요? 어디 간다고 말은 안 했어요?”
“네. 물어보려고 했는데 어쩐지 말을 걸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였거든요.”
그만큼 살벌했죠.
이어 덧붙인 말에 직감적으로 나는 그들의 행선지를 눈치챌 수 있었다. 그렇다고 다급하게 그 뒤를 따라야겠다고 다짐한 건 아니었다.
루퍼스도 있었고, 바보가 아닌 이상 레이먼드도 무모한 짓은 하지 않을 거다.
그나저나 나름대로 최대한 편안하게 있으려고 노력했는데도 알게 모르게 압박을 많이 느꼈던 것 같다.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생기면 안 되기 때문에 레이먼드도 레인저 쪽으로 구금된 그 수인을 또 만나러 갔을 테고.
그가 돌아오면 다음에는 나도 데려가 달라고 해야겠다. 직접 만나서 정보를 캐내든, 담판을 짓든 하루라도 빨리 이 사태를 정리해야 할 성싶었다.
그렇게 굳게 결심하며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런 결심, 하지 말아야 했다는 것을.
* * *
구금 시설은 어디나 어두컴컴하고 삭막하기 짝이 없었다.
보통 신원확인이 되지 않는 수상쩍은 자를 임시로 가둬놓는 용도로 쓰이는 이곳은, 세워지고 처음으로 장기 투숙객이 이용하고 있었다.
오스틴은 이곳이 북적거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랜달의 치안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방증이나 다름없기에.
지금은 다소 다른 이유로 사람들이 모여 있었으나, 달갑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말해.”
또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갑자기 레인저 숙소에 찾아와 그 수인 어딨냐며 으르대는 통에 사정을 묻지도 못하고 레이먼드 앞에 초식동물을 내놓은 오스틴은 루퍼스를 힐끗거렸다.
루퍼스는 말없이 도리질하며 딱 두 글자를 뻐끔거렸다.
‘마님.’
대강 예상은 했다지만, 에블린과 관련됐다고 하면 레이먼드는 앞뒤를 재지 않고 달려드는 경향이 있었다.
이성도, 논리도 먹히지 않는 상태. 기본적으로 냉정한 사람인지라, 오스틴은 가끔 자신이 그의 ‘내 사람’ 범주에 속해서 다행일 따름이라고 여겼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저 싸늘한 송곳니가 냅다 살갗에 꽂힐지도 모를 테니까.
“뭘 말하라는 거야? 그때 캐갈 수 있는 정보는 다 캐갔을 텐데?”
“너희 은거지가 어디냐고.”
며칠 감금되고 제대로 먹지도 못했는데도 어린 수인의 눈빛은 형형했다.
그는 비스듬히 입꼬리를 올리며 레이먼드를 향해 눈을 부릅떴다.
“내 입을 찢어봐. 어디 내가 말하나.”
쯧. 레이먼드가 성가시다는 듯이 혀를 차는 소리가 울렸다. 송연해지는 뒷덜미의 감각에 루퍼스는 그의 표정을 곁눈질했다.
일단 채비하라길래 묵묵히 따르기는 했지만, 도통 레이먼드의 속셈은 오리무중이었다.
자기 입을 찢으라고 도발까지 할 정도로 치기 어린 소년이 쉽사리 정보를 토해낼 리도 없었고.
이만큼 기다렸는데 저쪽에서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는 건, 사실상 이 어린 수인을 버렸다고 봐도 무방했고. 그러니 안달이 난 거다.
에블린이 쓰러진 마당에 더는 꼬리를 드러내길 기다릴 수는 없으니.
그 조바심은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불러왔다.
“풀어줘.”
“네?”
“풀어주라고.”
“형님.”
그건 안 된다며, 오스틴이 놀란 눈치로 쳐다봤지만 차마 반기를 들지는 못했다. 자유를 얻은 초식 수인도 얼떨떨하긴 매한가지였다.
도리어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의심하는 눈초리로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몸을 사렸다.
“이게 무슨 짓이지?”
“전해.”
레이먼드가 바닥에 무언가를 툭 던졌다.
그레이 가문의 인장이 찍힌 편지였다.
수인이 경계를 거두지 않으며 주워들었다.
“난 상황을 최대한 완만하게 해결하고 싶다고, 원하는 게 있다면 답장을 보내라고 똑똑히 전해.”
“하, 늑대의 왕이라더니. 별것 아니잖아? 먼저 꼬리를 내리는 꼴이라니.”
종족과 가족을 동시에 모멸하는 발언에 오스틴이 발끈했으나 레이먼드가 제지했다.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목덜미를 문지르며 툭 대꾸했다.
“마음대로 생각해. 좋은 대로 지껄이고. 다만, 하나 알아둬. 난 너흴 못 찾아서 내버려 두는 게 아니야. 이 잡듯이 연고지를 싹 뒤지면 그만이지. 맹수 수인 중에서 늑대는 개체가 가장 많거든. 그래서 너희가 우릴 노린 거잖아?”
그는 천천히, 그렇지만 거리낌 없는 자세로 풋내 나는 어린 수인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그리고 금색 안광을 밝혔다.
“기회를 주는 거야. 수인 대 수인으로서 최소한의 예우를 갖추는 거라고.”
* * *
레이먼드는 꽤 늦은 밤이 돼서야 돌아왔다.
그를 보고 싶어서 1층까지 내려갔더니 날 물끄러미 바라만 보길래 먼저 손을 붙잡고 웃어 보였다.
자기가 얼마나 죄인 같겠어.
내 손등을 묵묵히 어루만지던 그가 할 말이 있다며 조용히 침실로 이끌었다.
날 소파에 앉혀두고 맞은 편에 앉은 레이먼드에게서 숲 냄새가 났다. 역시 내 생각대로 산 중턱에 있는 레인저 숙소에 다녀온 거다.
“그자를 풀어줬어요.”
하지만 이건 예상 못 했지.
말문이 턱 막혀버려서 짧은 헛웃음만 나왔다. 변명하듯, 나직한 설명이 이어졌다.
“전서를 건넸어요. 되도록 불필요한 싸움을 피하고 완만하게 해결하고 싶다는. 제대로 전한다면 답장이 오겠죠.”
“믿을 수 있겠어요?”
“믿어야죠. 그 수인을 미끼로 마냥 기다리기도 어렵고.”
한마디로 도박을 건 거다.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하나하나 단어를 이어 신중하게 문장을 만들어낸 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레이먼드. 사실 마음만 먹으면 찾아낼 수 있는 거죠?”
건조한 그의 눈이 슬그머니 내게 꽂혔다.
“늑대 수인은 맹수 중에서 인원이 가장 많다면서요. 그만큼 정보통도 잘 구축되어있을 거고. 그런데도 그렇게 하지 않는 건.”
“강자가 지킬 게 더 많은 거 알아요?”
느슨한 호선이 그의 입가에 걸렸다. 어딘지 메말랐고 섧게 느껴졌다.
“우리가 장난친다고 앞발을 휘두르면 그자들은 죽을 수도 있어요. 그런 거예요.”
문득 서글퍼졌다. 화이트 가문의 두 남매와 오스틴은 인간에게 부모님을 잃었다.
그런 식으로 소중한 사람을 잃은 동족이 한둘이 아닐 거다.
내가 거부당하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그런데도 이 사람들이 절대적인 강자인 건가? 위협을 당해도 함부로 힘을 쓸 수 없을 만큼?
대신 화를 내고 싶어도 내게 그럴 자격이 있는지 사실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저 아랫입술을 깨물며 말을 아끼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그의 소탈한 웃음이 귓가를 간질였다.
“그렇다고 마냥 당해줄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마음 놓아도 돼요. 분명 반응이 있을 거예요. 단지 우리 종족을 치는 것만이 목적은 아니었을 테니까.”
늑대 수인을 위협함으로써 이익이 되는 뭔가를 얻어낸다. 그의 말은 그러했다.
다음 날, 러더퍼드 공작으로부터 서신이 한 통 도착했다.
블랙 백작에게 자세한 사정은 전해 들었으니 안드레아를 협조시키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미 블랙 백작과는 접촉을 마친 모양이었고, 아무래도 내 몸 상태와 오가는 도중 생길지 모를 습격을 대비해 이쪽으로도 안드레아를 보내줄 성싶었다.
운이 좋은 걸까.
마침 공작에게 같은 내용으로 편지를 넣으려던 참에 어떻게 알고 딱 맞춰 보냈는지.
한편으로는 그때 그가 한 고백이 잊히지 않아 이런 배려를 선뜻 받아도 되는지 망설여졌다.
그러나 그 고민은 오래 할 수가 없었다.
사정을 모르는 친척들의 은근한 집안 행사 초대에 일신상의 이유로 참석할 수 없다고 일일이 답장을 보내고, 비단 공장과 관련된 보고서도 줄기차게 날아온 덕분이었다.
크리스틴이 이러다가 또 큰일 난다며 안달을 냈지만, 차라리 정신을 다른 곳에 몰두할 수 있을 때가 마음이 편했다.
그렇게 초식 수인 쪽 답장이 빠를지, 안드레아가 랜달에 방문하는 게 빠를지 기다리는 와중 난 임신 4개월째를 맞이했다.
부쩍 몸이 무거워지고 이제는 배도 조금 나와서 새 생명을 가졌다는 게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먹는 양도 두 배로 늘었다. 그래봤자 원체 대식가인 이 집안사람들에 비하면야 아직 턱도 없었지만.
잠은 시도 때도 없이 쏟아져서 책상 앞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으면 크리스틴이나 클레어가 번쩍 들어서 침실로 옮겨주는 일도 다반사였다.
오늘은 춘곤증까지 더해져 무겁게 내려오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해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로부터 얼마간, 스르르 눈을 뜨니 주변이 묘하게 고요했다.
일상적인 적막과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나타나는 침묵은 분위기가 달라서, 나는 곧장 알아채고 서재를 나섰다.
고용인들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범하게 일을 하고 있었으나 핵심 인물이 보이지를 않았다.
시부모님과 레이먼드는 물론, 루퍼스와 크리스틴까지.
퍽퍽한 눈가를 문지르며 저택을 배회하던 내 발걸음이 멈춘 곳은, 레이먼드의 서재 문 앞이었다. 그곳에서 말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여러 음성이 한 데 뒤섞인 걸 듣자니 당최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살며시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마침 루퍼스가 입을 열었다.
“정말 받아주실 겁니까? 이 말도 안 되는 요구를요?”
두 손은 허리춤에 댄 채였고 그답지 않게 단단히 성이 나 보였다.
레이먼드는 소파에 앉아 있었는데 뒷모습이라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의 맞은편에 앉은 시부모님의 안색에서 난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터졌음을 직감했다.
“자중해라, 루퍼스. 레이먼드, 이건 일단 에블린에게 전하는 게 먼저겠구나.”
“더러운 술수를 쓰는군. 뭘 어디까지 봐줘야 하는지.”
아버님의 부아 어린 탄식이 이어졌다. 정황상 초식 수인 측에서 답장이 온 듯한데, 그 내용이 심히 가관인 것 같았다.
역시 도박이었나.
그보다 무슨 내용이길래 나한테 전하는 게 먼저라는 거지?
가만히 벽에 붙어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가정을 다 떠올리는데, 별안간 문이 홱 열렸다.
“들어와요. 에블린의 이름이 적혀 있으니까.”
언제 눈치챘는지,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토끼 눈을 뜬 나를 안으로 이끌었다.
그래. 생각해 보니 여기 다 늑대들 뿐이었지.
인간 하나의 기척이나 냄새를 알아채는 것쯤, 일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거다.
겨우 문 한 짝을 사이에 두었을 뿐인데 복도와 서재 안의 공기는 어마어마하게 달랐다.
그만큼 무거운 내용이 적힌 게 확실한 서신이 테이블 위에 마치 도전장과 같은 기세로 놓여 있었다.
“읽어봐요.”
레이먼드의 목소리는 굴곡 없이 평이해서 의중을 알기 어려웠다.
한쪽에선 루퍼스가 이를 갈며 씩씩댔고 그 곁에는 크리스틴이 불안한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나는 반으로 접힌 종이를 펼쳐 차츰 읽어내렸다.
꽤 긴 내용이었고 나름대로 먼저 화합을 제안한 우리에게 성의를 보이는 답장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몇 줄이 앞서 구구절절 늘어놓은 모든 문장을 싹 잊어버리게 했다.
* * *
“절대 안 됩니다. 만약 하시려거든 동족의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루퍼스가 목소리를 높이는 일은 드물었다. 레이먼드가 할 일을 제쳐두고 농땡이를 피울 때 언성을 높이는 걸 보았지만, 이렇게까지 강경하지는 않았다.
“주제넘지만, 저도 루퍼스 님과 의견이 같아요. 최소한 화이트 가문의 동의는 구해야 하지 않을까요?”
크리스틴도 조심스레 발언했다.
화이트 자작 부인이 처음 인간과의 교류를 시도한 해, 불미스러운 일을 겪고 세상을 떴다는 것을 염려한 말투였다.
그 뒤로 이들은 더 폐쇄적으로 변했다. 나를 받아준 게 예외였고 기적이었을 만큼.
“저쪽에는 이미 정체를 드러내고 인간과 섞여 사는 종족도 있습니다. 민심이 어느 쪽으로 기울지 뻔하잖아요.”
“동족들이 동의해줄지도 미지수구나. 그동안 에블린이 잘해줬다고 해도, 그걸 인간 전체에 대한 호감으로 바꿀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어머님이 나를 바라보며 한숨을 폭 내쉬셨다.
레이먼드의 표정은 성말라 있었다. 설마 이런 조건을 요구해올지는 꿈에도 몰랐던 탓이다.
적대 관계라도 서로 지켜야 할 선은 분명 존재했다. 인간이 누군가를 아무리 미워해도 그 마음 자체는 죄가 되지 않지만, 상대를 해하는 순간 죄가 되는 것처럼.
줄곧 정체를 숨기고 인간 사이에 스며들어 있던 수인들의 암묵적인 선을 그들이라고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니 이것은 우위를 선점하기 위한 무리수였다.
응하지 않으면 두 번의 협상은 없다는 문장에서 강경하면서도 승기를 거머쥐었다는 교만한 태도가 묻어나왔다.
우선 동족들을 불러 모아 이 사태에 대한 회의를 논하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던 그때였다.
“협상 결렬입니다.”
갑자기 레이먼드가 편지를 북북 찢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곳에 모인 시선들이 그에게 꽂혔다.
잔뜩 찌푸린 눈가 속 금색 눈동자에 매섭게 빛났다.
“온화하게 나가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수인끼리 상잔을 벌이는 건 썩 내키지 않지만, 이런 식으로 나오면 얌전히 굴어줄 수만은 없죠.”
“어쩌려고. 쳐들어가기라도 하려는 거니?”
어머님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는 입가에 비스듬한 사선을 머금고는 비소를 내뱉었다.
“까짓것 해 보죠. 먼저 우리를 건드린 건 그쪽이잖아요? 열받게 하는 것도 적당히 해야죠.”
“저는 찬성입니다. 저희가 왜 굽실거려야 합니까? 툭 터놓고 얘기해서 저희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루퍼스까지 거들자 분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갔다.
그동안 쌓였던 것들이 드디어 폭발하는 양상이 되더니 머뭇거리던 크리스틴마저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님은 끝까지 갈팡질팡하시는 듯했으나 아버님은 레이먼드에게 동조하시는 것 같았다.
다만.
“네 말도 옳다. 하지만 자칫 잘못했다가 거센 비난을 받을 수도 있어. 어디까지나 우리는 강자고 그들은 약자니까.”
더 확실한 방법을 보여주기를 원하셨다. 패기로만 모든 일이 해결되지는 않는 법이었다.
“이건 강약의 싸움도 선악의 싸움도 아니에요. 각자 지켜야 할 것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죠.”
‘지켜야 할 것’을 말하는 금색 눈이 나를 바라보았다.
아버님은 무언가 하고픈 말이 많으신 얼굴이었으나 끝까지 말을 꺼내시지는 않았다.
엄연히 현재 가문의 수장이자 종족의 우두머리는 레이먼드였고 그 방법이 불법이 아닌 한, 그의 권한을 인정하시는 것이었다.
대신 눈빛으로 내 의견을 물으셨는데, 난 이미 마음을 정한 뒤였다.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전 종족의 안위를 우선시해야 할 의무가 있잖아요. 그 누구보다도.”
구슬리는 것도 한 번이면 족했다. 두 번, 세 번 물고 늘어질 만큼 아쉬운 것도 없었다.
일이 이렇게 결정되니 속이 다 후련해졌다. 비교적 가뿐한 마음으로 나는 레이먼드에게 물었다.
“그들의 거처를 찾는 데 얼마나 걸릴까요?”
“블랙과 화이트, 그 외 세력의 도움을 받는다면 일주일 안에도 찾아낼 수 있어요. 그렇지만.”
그렇지만?
그의 입꼬리가 씩 한쪽으로 치솟았다.
“마법사의 도움을 받는다면 훨씬 빠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