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rd rate samurai with a carreer break RAW novel - Chapter 143
00118 황금광 시대 =========================================================================
해경은 신림리라고 쓰인 팻말을 확인하고는 속도를 올렸다. 오랜만의 운전이기도 했으나 기억을 더듬어 단 한 번 와본 길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경성 바깥은 도로가 잘 닦여 있지도 않은 탓에 차가 수시로 덜컹거렸다. 가끔 돌 따위가 튀어오르며 차 아래를 긁는 듯한 소리가 났다.
아무 것도 묻지 않고도 훤히 알겠다는 듯 차를 빌려 주며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으니 소화만 무사히 데려오라고 신신당부를 하던 인혜의 얼굴이 떠올랐다. 해경은 손목에 찬 시계를 보았다. 통화가 끊어진 순간부터 거의 두 시간 가까이가 지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해가 길어져 아직 날이 저물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날까지 저문다면 어두운 산길을 더듬어 올라가야 할 터였다.
해경은 차가 하나 겨우 다닐 수 있을 만한 길로 접어들었다. 장준학이 차를 몰아 집 근처까지 갔던 길이 이 길인 듯싶었다. 비가 오던 날이라 주변 풍경이 어두워 확신할 수는 없었으나 다른 방법이 없었다. 산길을 오르던 해경은 중도에 차를 멈췄다. 분명 이 위로 더 올라갔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누군가 차가 올라가는 길에 철조망을 쳐 놓아 길이 끊겨 있었던 것이다. 정확히는 쳐 놓았다기보다는 어딘가에 쳐 놓았던 것을 서둘러 걷어 아무렇게나 팽개쳐 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차에서 내린 해경은 막힌 길을 살펴보다 문득 발에 채이는 것이 있어 고개를 숙였다. 나무 팻말이었다. ‘이곳은 私有地(사유지)로 許可(허가)받지 못한 者(자)의 出入(출입)을 禁(금)함.’ 금광 출원을 하려 해도 사유지라 진입할 수 없는 땅이라고 입을 모아 말하던 증언들을 떠올린 해경은 재킷을 벗어 차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고는 끊긴 길 옆의 숲으로 향했다. 차가 들어오는 것을 금지하기 위해서인지 길 위로만 철조망을 가져다 놓아, 사람이 길 아닌 곳으로 올라가는 것까지 막지는 못했다.
오르막길을 숨이 찬 줄도 모르고 급히 달려가던 해경의 눈에 멀리 굳게 닫힌 철문이 들어왔다. 어스름이 내리기 시작한 숲 속의 집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불길한 정적이었다. 숨을 고르며 철문 가까이 간 해경은 문을 밀어 보았다. 뜻밖에도 잠기지 않은 것인지 문이 그대로 스르르 열렸다. 손을 멈춘 해경은 집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섰다. 어떤 창에도 불은 켜져 있지 않았다.
“소화 양!”
소화의 이름을 불렀으나 안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지난번 라 세느 때는 소화가 분명 그 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어떻게든 구하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으나, 이번에는 달랐다. 소화가 무사한지, 어떤 일을 당한 것인지, 이 집 안에 아직 있기는 한 것인지 그 무엇도 알 수 없었다. 숨을 들이쉰 해경은 현관으로 달려가 문을 당겼다. 잠겨 있는 문이 철컥 소리를 냈다.
“안에 있습니까?”
현관을 쾅쾅 소리가 날 정도로 두드린 해경은 안에 귀를 기울였다. 빈 집안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 반사되며 희미하게 끝을 흐렸다. 해경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거실로 난 커다란 창이 커튼으로 가려진 채였다. 해경은 더 앞뒤 볼 것도 없이 창으로 몸을 날렸다. 엄청난 소리가 나며 유리창이 산산이 부서졌다.
바닥에 흩어진 유리조각 위로 한 바퀴 구른 해경은 재빨리 몸을 일으키며 옷자락을 털 새도 없이 집 안을 둘러보았다. 그날 자신이 앉아 있던 소파를 비롯한 가구 따위는 모두 그대로였으나 벽난로는 이미 거의 온기가 사라진 채였다. 불이 꺼진 지 시간이 제법 지난 모양이었다.
해경은 환자가 있었던 침실로 달려가 문을 열어젖혔다. 침대는 텅 비어 있었다. 누군가 다급히 침대에서 빠져나간 듯 이불과 시트는 온통 흐트러진 채였다. 옷장 역시 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손에 집히는 대로 아무 것이나 쓸어 담은 것처럼 안의 물건 역시 엉망으로 끄집어낸 것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침실을 빠져나온 해경은 다른 문을 열었다. 준학이 쓰던 방이었는지 책상과 책장, 침대만이 놓여 있었다. 서둘러 책상 위와 서랍 등을 살폈으나 미리 모두 챙겨 나간 듯 아무 것도 없었다. 화장실이며 부엌까지 살핀 해경이 마지막으로 발견한 곳은 서재였다.
문이 굳게 닫힌 서재를 본 해경은 가까이 다가가 문고리를 돌렸다. 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다. 있는 힘껏 발로 문을 걷어차 연 해경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바닥에 엎어져 있는 작은 몸이었다. 곱게 땋아 내린 머리와 수수한 옷차림이 아니었더라도 해경은 그것이 누구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소화 양.”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소화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치 죽은 듯 미동조차 없어, 해경은 급히 소화의 곁으로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는 목덜미에 손을 대어 보았다. 손끝으로 약하게 뛰는 맥박이 느껴졌다. 살아 있다. 엎드린 모습으로 기절했다면 분명 누군가 뒤에서 공격했을 텐데, 눈으로 보기에는 누군가 기절을 할 정도로 심하게 때리거나 흉기를 쓴 흔적은 없었다.
해경은 급히 품으로 소화를 안아들어 기대게 하고는 코 밑이며 입가에 손을 대어 숨을 쉬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눈꺼풀을 손끝으로 들어 올려 들여다보자 초점을 잃은 눈의 동공이 몹시 작게 수축된 것이 눈에 들어왔다. 해경은 일전에 그런 눈을 한 사람을 본 적이 있었다. 아편 중독자였다. 동공이 점처럼 작아지는 것은 몰핀 중독 특유의 증상이었다. 몰핀. 몰핀이다. 다급히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주사약이나 주사기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 목소리 들립니까? 소화 양!”
해경은 소화의 뺨을 두어 번 툭툭 치며 소화를 불렀다. 그러자 대답 대신 소화의 고개가 뒤로 힘없이 떨어졌다. 얼른 손으로 머리를 받친 해경은 주위를 둘러보다 소화를 안아 올려 침실로 향했다. 침대 위에 소화를 반듯하게 눕힌 해경은 욕실에서 수건을 물에 적혀 와서는 찬 물수건으로 소화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손과 발까지 모두 꼼꼼하게 닦아내자 소화의 손끝이 움찔거렸다.
“정신이 듭니까?”
해경이 조심스럽게 묻자 소화가 간신히 눈썹을 약간 움직였다. 하얗게 마른 입술이 무어라고 몇 번 달싹였으나 말을 알아듣기는 힘들었다. 귀를 기울이던 해경은 시계를 다시 한 번 보고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소화를 데리고 더 이상 어두워지기 전에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현명할 듯싶었다. 해경이 소화를 들쳐 업자 소화가 해경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채 무슨 말인가를 중얼거렸다.
“전화……이름…….”
비몽사몽간인지 아무런 맥락 없는 단어들이 튀어나온 탓에 소화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해경은 소화를 업고 다시 차를 세워 둔 곳까지 산길을 내려갔다. 어스름이 내려 정확히는 보이지 않았으나 길 위로 바퀴 자국이 난 것이 문득 눈에 들어왔다. 해경은 잠깐 발을 멈추고 눈을 가늘게 썼다. 가장 위에 남겨진 바퀴 자국의 방향이 산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최근에 내려간 것이다.
장준학일까.
만약 장준학이라면 그가 소화를 기절시킨 후 바로 환자를 데리고 차로 산을 내려가다 중간에 차가 올라올 수 없도록 길을 막아 버렸다고 보는 것이 옳을 터였다. 그러나 누군가가 아예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고 싶었다면 아예 사람이 올라올 수 있는 길까지 모두 막아 버렸어야 했다.
등에 업힌 가벼운 몸을 다시 한 번 추슬러 올린 해경은 뒤를 돌아보았다. 이렇게 작은 소녀를, 게다가 정신을 잃은 채라면 이 산 속 어딘가에 버리는 것이 결코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이런 날씨라면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체온이 떨어지며 죽을 수도 있었다. 운 좋게 정신이 들었더라도 낯선 산길을 헤매다 길을 잃고 조난당할 확률도 높았다. 손에 피를 묻히기 싫었다 해도 얼마든지 죽도록 방치하는 것은 가능했지만, 장준학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우선 소화가 깨어나면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을 것이었으므로 지금은 우선 병원으로 옮겨야 했다. 해경은 소화를 업고 산길을 내려가 세워 둔 차에 소화를 태웠다. 힘없이 자리에 기댄 소화의 얼굴은 창백했으나 뺨만 붉게 달아올라 있어, 누군가 마치 시체에 화장을 한 것 같았다.
얼른 소화가 숨을 쉬는지 다시 확인해 본 해경은 벗어 두었던 코트를 가져다 소화에게 덮어 주고는 시동을 걸었다. 소화가 무사하다면 내일이든 모레든 되돌아와 준학의 집 안을 샅샅이 살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를 몰고 험한 길을 다시 되짚어 나가는 동안 소화는 때때로 미간을 찌푸리며 무어라고 헛소리 같은 것을 중얼거렸다. 해경이 향한 곳은 세브란스 병원이었다. 응급 환자로 급히 입원을 시키자 해경이 환자를 데려왔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오득경 선생이 가장 먼저 달려왔다.
“몰핀 중독인 것 같습니다.”
해경의 말을 들은 득경은 소화를 서둘러 소화의 맥박을 확인하고는 눈꺼풀을 뒤집어 눈을 관찰하고는 바로 주사약을 하나 요청해 주사를 놓았다. 소화의 안색과 호흡이 어찌 되는지 잠시 관찰하던 득경은 해경을 돌아보며 말했다.
“급성이군요. 평소에 지병이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일이 좀 있어서요.”
해경이 얼버무린 말에 득경이 눈을 가늘게 떴다. 혹여 아편과 관련된 것인지 의심하는 듯했다. 그러나 득경은 더 이상 아무 것도 묻지 않고는 소화에게 달아 놓은 링겔 병을 다시 한 번 살펴보더니 말했다.
“혈관에 잘못 놓았다면 죽을 수도 있었는데 다행이군요. 아트로핀(atropine)을 놓았으니 곧 좋아질 겁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기거든 바로 간호사를 호출하십시오.”
“감사합니다.”
해경이 고개를 숙여 보이자 득경이 병실을 나갔다. 병실 안이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어둠으로 잠겨든 창 밖에서 와사등의 불빛이 안개 낀 밤의 별처럼 스며들었다. 해경은 침대 옆에 앉아 눈을 감고 있는 소화를 내려다보았다. 침대 바깥으로 힘이 빠진 손이 스르르 떨어져, 해경은 조심스럽게 그 손을 잡아 다시 이불 안으로 넣으려다 멈칫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이었다.
작은 손을 가만히 양손으로 감싸 잡은 해경은 긴 숨을 내쉬었다. 장준학이 자비를 베푼 것인지, 아니면 소화를 살려 둔 데 다른 목적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지금은 그의 의도가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소화를 살려 돌려보내 주었다는 것만이 중요할 뿐이었다. 해경은 소화의 손을 감싸 쥔 채 거기에 이마를 대었다.
산 속에 홀로 버려진 소녀. 만약 자신이 그때 그렇게 어리지 않았더라면, 지금 소화를 구하러 달려갔듯 그때도 그럴 수 있었더라면 그날 밤 이처럼 일생을 두고 후회할 일은 생기지 않았을까. 다시는 그런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 무거운 돌을 얹어 놓은 것처럼 가슴 한쪽이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해경은 가만히 숨을 죽였다. 아주 작은 숨소리가 새근거렸다. 소화의 숨소리였다. 지난번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잠깐 잠들었다가 누나의 꿈을 꾸었던 일이 문득 떠올랐다. 어둠 속을 달리다 누나가 내민 손을 움켜잡은 순간의 그 생생한 온기가 지금 자신의 손 안에 존재했다.
언젠가부터 해경은 자신이 소화를 볼 때면 잃어버린 누나를 생각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기억 속 누나는 영원히 열다섯의 모습이기 때문일까. 해경은 손을 뻗어 소화의 이마 위로 흘러내려온 머리칼을 쓸어넘겨 주었다.
“소화 양.”
혼잣말처럼 나지막이 부른 목소리의 끝이 조금 떨렸다. 그러나 해경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문득 뇌리로 환의 목소리가 되살아났다.
‘정 선생은 어떤 빈틈도 만들지 않으려는 사람이지요.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를 느끼는 것은 그러면 그럴수록 인간은 도리어 자신의 틈을 드러낸다는 거요. ……아다린을 먹어야만 잠을 잘 수 있을 정도의 심화가 있다면 누구에게든 말하는 편이 차라리 나아요.’
왜 그 말이 지금 생각났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해경은 순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은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쩐지 지금 바로 누군가에게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다는 것 역시도. 해경은 고개를 숙였다. 병실의 등이 창백한 빛을 떨어뜨렸다. 닫힌 문 밖으로는 간호사들의 발소리가 희미하게 가까워졌다 멀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해경은 아주 오랫동안 침묵했다. 그리고는 천천히 첫 마디를 떼었다.
“……나는 소화 양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소화가 지금 자신의 말을 듣지 못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그렇기에 소화의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으려 한다는 것도. 해경은 자신이 비겁하다고 생각했으나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마치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자신의 죄를 털어놓듯, 해경은 경성의 청년 탐정이라는 이름 뒤에 감춘 자신의 가장 나약하고 어두운 모습을 들여다보기 위해 눈을 감았다. 감은 눈꺼풀 안으로 양손에 피를 묻힌 채 어찌할 바를 모르는 어린 소년이 우뚝 선 채 자신을 마주보고 있었다. 해경은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애써 입술을 달싹였다.
“나는 사람을 죽이려 한 적이 있습니다. 내 누이를 겁탈하려던 자를…… 나는 그가 죽은 줄 알았고, 우리는 그 집에서 도망을 쳤습니다. 아주 추운…… 밤이었지요. 사람들은 우리를 쫓아왔고, 누나는 나를 먼저 도망치게 했습니다. 나는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누나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살인자라는 것을 감추고 살았지요. 아무도 내가 사람을 죽였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소화 양 역시도 그럴 겁니다. 그 누구도, 정해경을 아는 그 누구도…….”
이제는 익숙해진 악몽 속에서 마주하는 괴물의 모습은 결국 늘 자신이었다. 해경은 말을 멈추었다. 아무도 듣지 않을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누군가가 돌을 던지는 듯 가슴 한쪽이 욱신거렸다. 해경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소화의 작은 손을 가만히 쥐었다.
소화가 언젠가 자신에게 손을 주는 것을 몹시 부끄러워하던 것이 떠올랐다. 뭉툭한 손톱과 굳은살 탓에 빈말로라도 섬섬옥수라고는 할 수 없는 손이었으나, 해경은 그 작은 손의 온기가 때로 자신에게 위안을 주는 것을 느끼곤 했다.
처음에는 그저 어린 소녀라고만 생각했던 소화가 마치 어머니처럼, 누이처럼 자신을 걱정하기도 하고 잔소리를 늘어놓기도 할 때마다 해경은 간혹 낯선 기분이 되었다. 항상 자신이 소화를 보호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런 순간이면 소화에게 도리어 보호를 받는 입장이 된 것 같았다. 경성에 올라온 뒤로 자신에게 가장 많은 도움을 주었고, 늘 자신의 뒤를 보아 주었던 인혜에게도 그런 기분을 느꼈던 적은 없었다. 왜일까. 해경은 소화의 손을 잡은 채 나지막하게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나는 그 전의 내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이 이름은 진짜인지, 내 부모님은 누구인지, 나는 어디서 태어났는지, 어떻게 그렇게…… 되어 버렸는지. 누나가 살아 있다면 대답을 줄 수도 있겠지요. 나는 틀림없이 그럴 거라고 믿습니다. ……소화 양, 내가 죽이려 했던 사람은 지금 살아 있습니다. 그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나는 그를 압니다. 내가 그를 죽이려 했던 것을, 바로 내가 알고 있습니다. 나는…….”
해경은 마지막 단어를 내뱉기 전 말을 멈추었다. 해경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어 본 일이 없었다.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조차도. 그 말을 하는 순간 자신이 그 말에 잡아먹힐 것 같다고 생각한 탓이었다. 해경은 늘 아무런 실체가 없는 두려움이 말로써 힘을 얻게 된다면 지금까지 자신을 지탱하던 모든 것이 무너질지도 모른다고 믿어 왔다. 아무에게도 고백할 수 없었던 어둠을 털어놓는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해경은 소화의 손을 조금 더 꼭 잡았다. 그 손의 온기가 자신의 차가운 손 안으로 천천히 스며들었다. 마지막 말을 하지 못하고 아주 오랫동안 침묵하던 해경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는 거의 숨소리에 가까웠다.
“……두렵습니다.”
십 수 년을 자신이 살인자라고 믿고 살아왔던 해경이었다. 잠이 들면 사람을 죽이는 꿈을 꾸었다. 자신이 죽인 사람은 때로 권중만이었고 때로 누나였으며 때로는 자기 자신이었다. 권중만이 살아서 돌아온 것을 알았을 때, 끈질기게 따라붙던 그 악몽은 형체를 바꾸었다. 만약 권중만이 그때 자기를 죽이려 했던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을 알면 어떻게 될까.
그러나 해경의 더 큰 두려움은 그것이었다. 권중만이 살아 있다면, 누나는 이미 죽은 것이 아닐까. 그 밤의 산 속에서, 혹은 다시 그의 손아귀로 끌려들어가. 어느 쪽이든 해경에게는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희망. 해경은 그 말을 입 안으로 뇌었다. 희망은 절망 없이는 태어나지 않는다. 어둠이 있어야만 빛의 존재를 깨달을 수 있듯이. 해경은 언제나 희망을 가져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해 왔다. 그것은 자신의 안에 언제나 도사리고 있는 절망 때문이었다. 누나를 찾고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 지금까지 달려왔지만, 이 모든 것이 결국 다 부질없는 일이라면. 파도 한 번이면 무너져 버릴 모래성 같은 것에 인생을 걸어 버린 것이라면.
그때 소화의 손이 조금 움찔했다. 놀란 해경은 고개를 들었다. 소화가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끝을 말아 겨우 해경의 손을 쥐듯 움직였다.
“소화 양?”
설마 깨어 있었던 것인가 싶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해경은 조심스럽게 소화를 불러 보았다. 그러나 무의식중에 움직인 것인지 소화의 고개가 대답 대신 반대편으로 약간 기울어졌다. 해경은 긴 숨을 내쉬며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누군가가 들어 주기를 바라고 한 말이었으나, 정작 소화가 자신의 어둠을 알게 되는 것은 두려웠다. 자신을 돕기 위해 서슴없이 위험을 무릅쓰는 소화를 볼 때마다 해경은 더더욱 자신이 소화를 지켜 주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소화에게는 언제나 강한 모습이고 싶었다. 다시 한 번 잡은 손을 놓치고 후회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다짐한 탓이었다.
해경은 고개를 숙여 소화의 손을 감싸 쥔 위로 이마를 대었다. 그러나 지금만은, 아무도 듣지 않는 이 장소에서 자신의 가장 나약한 모습을 드러낸 것을 누군가에게 용서받고 싶었다. 괜찮다고 말하는 듯 자신의 손을 힘없이 움켜쥔 손끝에서 전해지는 체온을 느끼며, 해경은 창 밖의 와사등이 모두 꺼지고 완전히 어둠이 내려앉을 때까지 눈을 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