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rd rate samurai with a carreer break RAW novel - Chapter 25
00024 이중살인 =========================================================================
이주는 순영, 아니 마리아라고 불린 여자의 일그러진 얼굴에서 오른쪽 눈동자가 영석을 빤히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눈은 기묘하게도 이주가 태어나서 본 그 어떤 것보다 슬펐고, 또한 인간적으로 느껴지는 것이었다. 마리아가 웃었다. 지옥의 악귀가 웃는 것 같은 소리가 그 목구멍을 긁으며 올라왔다. 녹이 슨 경첩이 삐걱대는 듯한 목소리가 천천히 흘러나왔다.
“그 여자는 죽은 지 오래 되었지요.”
부정의 말이었으나, 그것은 긍정처럼 들렸다. 이주는 마치 홀린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일그러진 얼굴은 그녀가 평범한 여자였던 시절을 상상할 수 없게 했다. 그러나 그 얼굴에 자리한 서늘하고 깊은 한쪽 눈동자는 그녀가 아직도 인간임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이주는 처음으로 누군가의 고통이 자신에게 전이되는 감각을 느꼈다. 희미하고 부정확한 감각이었지만 어쩐지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영석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당신이 나를 알아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어.”
파랗게 질린 영석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고개를 흔들었다.
“거짓말이야, 마리아는…….”
마리아가 몸을 동그랗게 말며 쿡쿡거렸다. 한참을 그렇게 웃던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래. 마리아는 죽었지. 처녀의 몸으로 석 달 된 아이를 배고.”
“너는, 너…….”
더듬거리던 영석이 돌연 해경의 멱살을 잡았다. 놀란 이주가 영석을 말리려 했으나, 이미 이성을 잃은 영석에게는 보이는 것이 없는 모양이었다. 영석은 해경의 멱살을 잡아 흔들며 외쳤다.
“이게, 이게 무슨 괴이한 장난이야! 당신 누구요, 누구기에 이런 끔찍한……!”
“끔찍한 것이 저입니까, 아니면 집안이 망했다고 자기 아이를 밴 여자를 버린 남자입니까?”
눈도 하나 까딱하지 않고 영석의 손을 뿌리친 해경이 셔츠의 칼라를 다시 만졌다. 해경은 팔짱을 끼며 마리아를 내려다보았다.
“애초에 당신은 인도교에서 그날 서영석 씨를 본 적이 없습니다. 맞습니까?”
“네.”
마리아는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초연하게 대답했다.
“당신은 존재하지 않는 인물을 만들어 가면서까지 그래야 할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사람들이 그날 서영석이 그 곳에 있었다고 믿게 해야 할 이유가 있었고, 또 그럼으로써 천말년은 그 곳에 없었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지요. 왜? 그날 인도교 위에서 김명희 씨와 같이 있었던 사람이 바로 천말년 씨, 그러니까 강마리아 씨 당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주는 무엇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손바닥에 식은땀이 차게 배어나왔다. 영석이 비틀거리다 이주를 붙들었으나, 이주는 저도 모르게 영석의 손을 떼어내며 뒤로 물러났다.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이 된 것 같았다. 영석이 벼락을 맞은 듯 놀라 이주에게 다가왔다. 이주는 다시 한 걸음을 더 뒤로 물러섰다. 다음 순간 해경이 이주의 팔을 잡아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해경의 차가운 목소리가 영석에게 떨어졌다.
“서영석 씨, 당신은 분명 훌륭한 교사였을 겁니다. 김명희 씨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약혼자였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강마리아 씨에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눈에는 김명희 씨가 더 미인이라서, 인격적으로 더 성숙한 여인이라서 어쩔 수 없이 마음이 갔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저는 그렇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당신과 강마리아 씨, 김명희 씨 세 사람은 일본 유학 시절 처음 만났습니다. 당신과 강마리아 씨는 교제를 시작했지만 중간에 김명희 씨가 나타나며 관계는 완전히 망가졌고, 세 사람은 어떤 사건으로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강마리아 씨의 집안은 기울어 가고 있었고, 조선으로 돌아온 뒤로 완전히 도산했지요. 일생을 가난하게 산 당신은 결혼을 통해 그 가난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 믿었지만 그 꿈이 박살날 위기에 처하자 자기 아이를 가진 여자를 버렸습니다.”
“아니오, 그렇지 않아요!”
영석이 절규하듯 외쳤으나 해경은 그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적어도 여기 계신 강마리아 씨는 그렇다고 믿었을 겁니다. 결혼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남자가, 정작 자기가 어려움에 빠지기 무섭게 다른 여자에게로 가 버렸으니까요. 그녀에게 남은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명희 씨였던 것이 아마 그녀에게는 더 참기 힘든 일이었겠지요. 비슷한 처지였던 두 사람이었지만 결국 경성국민방직이 동양방직을 흡수하여 합병했고, 결혼할 남자마저 빼앗겼으니 강마리아 씨가 죽음을 결심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수 있습니다.”
이주는 해경의 말에서 조금의 현실감도 느낄 수 없었다. 영석은 누구보다도 훌륭한 교사였다. 이주는 그에게 인격적으로 단 하나의 흠조차 없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그런 그가 자기 아이를 밴 여자를 버린 비정한 남자였다는 건 이주에게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주는 식은땀이 배어나오는 손을 말아 쥐었다. 그리고 곧 자신이 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떨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해경의 말을 조용히 듣고만 있던 마리아가 입을 열었다.
“이미 모든 걸 알면서 왜 여기 오셨습니까? 무엇을 듣고 싶어서요? 김명희의 살인범으로 지금 당장 고발을 하면 될 일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건 의도된 살인이었습니까? 애초에 김명희 씨를 죽일 작정으로 유서처럼 보이는 편지를 대필하게 했습니까? 처음부터 그러기 위해 접근했단 말입니까?”
해경이 다그치듯 묻는 말에 마리아가 잠시 눈을 들어 해경을 마주보았다. 흔적만이 남은 입술이 웃는 것처럼 일그러진 호를 그렸다.
“한때 명희를 죽이고 싶었던 적도 있었지요.”
이주는 분노하지 않는 자신에게 의아함을 느꼈다. 누이를 죽였다는 자가 눈앞에 있는데도, 어쩐지 손끝 하나도 꼼짝할 수가 없었다. 마리아는 고개를 조금 숙였다.
“이 몰골로 살아남게 된 이후에도 여러 번 죽으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침내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하나님께서 나를 이런 괴물로 만들고도 살려 두신 것에는 뜻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슨 뜻일까? 괴물이 되었으니 괴물답게 행동하라는 뜻은 아닐까?”
마리아가 자조적으로 웃는 소리를 냈다. 그것은 우는 소리처럼도 들렸다.
“그래서 나는 괴물처럼 살기로 했습니다. 나를 이렇게 만든 자에게 복수하고 싶었습니다. 사지를 찢어 죽이고 불태우려 마음을 먹었지요. 명희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습니다. 조선 팔도 제일가는 방직 기업의 따님이니까요. 소경인 척 명희에게 접근했지만 명희는 나를 전연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당연하겠지요. 누가 이런 나를 알아보겠습니까? 나는 남편도 자식도 잃고 사고로 앞을 못 보게 된 불쌍한 소경 행세를 해서 명희의 마음을 얻었습니다. 무어, 틀린 말은 아니지요. 남편은 도망치고 자식은 그날 뱃속에서 죽었으니.”
마리아는 파랗게 질려 있는 영석을 보았다. 영석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였으나 아무런 소리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마리아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더 심하게 떨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나는 명희에게 눈이 멀지 않았던 시절 읽었던 책 이야기를 자주 했습니다. 모두 우리가 독서회에서 읽은 책이었지요. 그 때문인지, 명희는 언제부턴가 나를 보면 자기가 아주 잘 아는 사람이 생각난다고 했습니다……아마도 특히 섹스피어의 소네트 이야기 때문에 더욱 그랬을 겁니다.”
“‘오, 영리한 사랑이여. 그대는 눈물로 나를 눈멀게 했구나, 잘 보는 눈이 그대 추한 결함들을 찾아내지 못하도록.’”
해경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마리아가 멈칫하더니 해경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해경이 마리아에게 말했다.
“김명희 씨가 섹스피어의 소네트 책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부분에 표시가 되어 있더군요.”
“명희는 일본 유학 시절부터 내가 그 소네트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아마 내 이야기를 듣고 집에 가서 찾아보았을 수도 있겠지요. 나는 그때마다 내가 바로 네가 아는 그 사람이라고 말해 주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말할 수 없었습니다. 명희는 동정심이 많았지요. 훌륭한 선생이었고, 또……남편 될 자를 몹시 존중했습니다. 명희는 나와 서영석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몰랐더군요. 그저 나와 정리한 모양이라고 짐작했던가 봅니다. 그러니 시간이 지날수록 명희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사라졌습니다. 모든 게 다 부질없게 느껴지더군요. 내가 명희를 죽인들 무엇이 달라지나, 내가 명희의 얼굴과 명희의 몸으로 다시 살아 내가 잃었던 모든 것을 되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과장된 몸짓으로 마리아가 팔을 벌렸다. 그녀가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가 바닥에 떨어져 굴렀으나, 그녀는 그것을 주울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주는 그녀가 벌린 팔이 경련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마리아의 숨소리가 점차 가빠졌다.
“나는 소경이 아니었기에 점자를 배우지 못했습니다. 애초부터 배울 생각이 없기도 했지요. 그날 명희는 수업에서 편지를 쓰라 했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고, 수업 후 명희는……나에게 편지를 보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대신 써 줄 테니 이야기를 해 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께 보내는 편지를 쓴 것입니다.”
“당신이 죽었다고 알려진 뒤에 부모님 앞으로 보낸 편지도 직접 쓴 겁니까?”
해경의 물음에 마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이런 자식이라도 살아 있다는 것을 아시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명희가 대신 써 준 편지를 부칠 생각은 없었습니다. 어쩌면 그저 누구에게라도……털어놓고 싶었던 것이지요. 명희는 내가 죽으려 한다고 생각했는지 절대 허튼 생각을 하지 말라 했습니다. 나는 그런 명희에게 화가 났습니다. 더 이상 명희를 죽이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그렇다 한들 내가 명희에게 모든 걸 빼앗겼다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으니까요.”
잔뜩 쉰 목소리가 차분하게 한 단어 한 단어를 발음할 때마다 이주는 머릿속이 텅 비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오로지 백지 같은 머릿속에 마리아의 말들이 쌓일 뿐이었다. 잠시 말을 멈췄던 마리아가 긴 숨을 내쉬었다.
“명희가 어찌 죽었는지가 궁금하시겠군요. 나는 그 자리에서 명희에게 몹시 심하게 화를 냈고, 그 편지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집에 돌아가려 인도교로 향하는 도중에도 명희는 계속해서 나를 따라왔습니다. 나는 인도교 중간에 멈춰 명희에게 계속 따라오면 정말로 뛰어내리겠다고 했지요. 때마침 공사 중으로 난간 일부가 빠진 곳이 있었기에 그리로 투신하겠다 했더니 명희가 나를 붙잡아 몸싸움을 벌였습니다. 나는 정말로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기에 명희를 뿌리쳤는데, 그러다…….”
마리아가 고통스러운 듯 오른쪽 눈을 감았다.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 흰자의 핏줄이 온통 터져 그 눈이 붉게 충혈된 채였다. 그 기억을 떠올리기가 힘든 모양이었다. 마리아는 한층 작아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사이로 명희가 추락했습니다. 손쓸 새도 없었지요. 나는 명희가 비명을 지르고 곧 물에 빠지는 소리를 들었습니다……그리고 다리 밑에서 몇 번 물장구를 치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조용해졌습니다. 나는 그때 어쩌면, 이것이 결국 하나님께서 나에게 예비한 운명인가……생각했습니다. 괴물이 되었으니 괴물로 살 수 있도록 하신 것인지도 모른다……내가 명희에게 품었던 악한 마음을 알고 하나님께서 소원을 들어 주신 것은 아닐까?”
마리아가 쿡쿡거리며 웃었다. 해경은 침묵했다. 마리아가 다시 눈을 감았다. 그녀의 말은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어떤 부분에서는 발음이 뭉개져 알아듣기 어려운 낱말도 있었다. 마리아는 목소리를 쥐어짜내듯 입술을 달싹였다.
“다리 위에는 명희의 핸드백이 떨어져 있었고……내게는 명희의 글씨로 쓴 편지가 있었습니다. 나는 그 편지를 접어 핸드백 아래 놓아두었습니다. 명희가 운이 좋아 나처럼 목숨을 건진다면 그것도 그 아이의 팔자겠지만, 그렇지 않다면……명희도, 서영석도 모두 파멸로 몰아갈 수 있는 기회가 내게 주어진 겁니다……왜, 무엇 때문에 그런 기회를 마다하겠습니까? 경찰이 찾아왔다고 했을 때 나는 기뻐 날뛰기라도 하고 싶었습니다. 서영석이 명희를 죽인 것으로 몰아갈 수 있다면……내 인생을 송두리째 망가뜨린 이가 고통 속에서 단 한 번이라도 내 생각을 다시 한다면!”
“그냥 두었다면 김명희 씨의 자살로 끝났을 일인데요.”
해경의 말에 마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그리고 당신이 나를 찾아와 진실을 요구할 일도 없었을 겁니다. 내 말을 믿든 믿지 않든 이제는 상관없습니다. 모든 것이 끝났어요…….”
말을 마친 마리아는 덩어리가 무너지듯 그 자리에 스르르 주저앉았다. 멈칫한 해경이 몸을 숙여 그녀를 부축하려 한 순간, 마리아의 입에서 시커먼 것이 왈칵 쏟아졌다. 해경의 회색 양장 소매가 삽시간에 시커멓게 물들었다. 이주는 코끝으로 확 끼치는 비릿한 냄새에 저도 모르게 구역질이 올라와 손을 올려 입을 막았다. 그러나 옷이 더러워지는 것도 아랑곳 않고 마리아를 안아 자신을 보게 한 해경은 바로 마리아의 입 안에 자기 손가락을 넣어 혀를 눌렀다. 놀란 이주는 뒤로 물러났다. 해경이 마리아의 고개를 숙이게 하자 마리아가 다시 울컥 검은 덩어리를 토했다. 이주는 땅 위를 물들이는 그 덩어리가 피라는 것을 그제야 알아차렸다. 해경이 바닥에 떨어진 장옷으로 마리아를 감싸 들쳐 업고는 이주에게 손짓을 했다.
“나가서 택시를 잡아요, 빨리!”
발이 땅에 붙어 버린 듯 멍하니 서 있던 이주는 해경이 어서요, 하고 다그치는 얼굴에 번뜩 정신이 들어 골목길을 달려 나갔다. 이주가 택시를 잡기 무섭게 마리아를 업고 달려온 해경이 택시에 마리아를 태우고는 같이 타려는 이주를 막았다. 이주가 이유를 묻기도 전 해경이 택시 문을 거칠게 닫으며 기사에게 외쳤다.
“제일 가까운 병원으로 갈 겁니다, 급해요!”
택시가 순식간에 출발했다. 이주가 멍하니 사라지는 택시를 보고 있는 동안, 골목 안에서 영석이 휘청거리며 걸어 나왔다. 영석은 넋을 놓고 서 있는 이주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잡았다.
“이주야.”
이주는 영석을 돌아보지 않았다. 이미 누이를 잃었는데 매형마저 잃고 싶지 않다던 자신의 말에, 해경이 그 바람을 들어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한 말의 뜻을 이제는 알 수 있었다. 한참이나 이주의 어깨를 짚고 있던 영석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이주는 고개를 숙였다. 보도(步道) 위로 무언가 떨어져 얼룩졌다. 이주는 그제야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화는 차를 끓이며 소파에 앉은 해경을 흘끔 돌아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해경은 눈을 감은 채 말이 없었다. 김명희의 유서에 담긴 비밀을 알았다며 나갔던 날, 해경은 저녁 늦게야 사무실로 돌아왔다. 사무실을 청소하던 소화가 가장 먼저 본 것은 온통 핏자국으로 더럽혀진 양장을 입은 해경의 꼴이었다. 기절할 정도로 놀란 소화에게 아무 것도 설명해 주지 않고 어서 퇴근하라고 하기에 얼이 빠져 나오기는 했지만, 그 다음날 출근했을 때도 해경은 아무 말이 없었다. 오늘이 사흘째 되는 날이었는데 해경은 사흘 내내 평소보다 현저히 말수가 줄었고 정리해 놓은 편지나 신문 기사도 전혀 읽지 않고 있는 채였다. 소화는 해경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걱정했지만, 왠지 함부로 물어서는 안 될 것 같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데워 놓은 찻잔에 차를 따르던 소화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다관을 내려놓았다.
“누구세요?”
문을 연 소화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인 것은 이주였다. 평소와는 달리 교복 차림이 아니라 검은 양장으로 마치 상복을 입은 듯한 차림이었다. 소화가 문을 조금 더 열자 이주가 안으로 들어섰다. 사람이 들어왔는데도 꼼짝도 하지 않는 해경 탓에 이주가 눈치를 보며 소화에게 눈짓을 보냈다. 소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해경의 맞은편으로 이주를 안내했다. 그제야 눈을 뜬 해경은 이주를 보더니 자세를 바로 고쳐 앉았다. 이주가 품 안에서 봉투를 하나 꺼내 탁자 위에 밀어 놓았다.
“의뢰비입니다. 어느 정도 드려야 하는지 몰라 일단 제가 운용할 수 있는 돈은 전부 넣었습니다.”
봉투를 열어 본 해경이 봉투 안에 있던 지전의 절반을 빼어 다시 이주에게 돌려주었다. 이주가 머뭇거리자, 해경이 어서 받으라는 손짓을 했다. 이주는 마지못해 그 돈을 다시 받아 넣었다. 소화는 차를 따라 해경과 이주 앞에 놓았다. 이주가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한참을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오늘 강마리아씨의 빈소에 갔었습니다.”
“그랬습니까.”
해경이 무감하게 대답했다. 이주는 찻잔을 내려놓고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시선을 찻잔 위에 둔 채, 이주가 어렵게 말을 이었다.
“그쪽에서는 그래도, 그렇게라도……이제 딸을 찾아 장례를 치를 수 있게 돼서 다행이라고 하시더군요. 사정을 듣고 아버지와 할아버지께서는 몹시 충격을 받으셨고, 장례비용은 저희가 모두 대는 걸로 했습니다. 매형은,”
무심결에 나온 매형이라는 말에 이주가 아차 싶은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가 입이 마르는지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숨을 내쉬었다.
“……선생님은 학교를 그만두셨습니다. 고향에 내려가 사시겠다고 하더군요.”
“그럼 잘 됐다고 해야 할까요?”
해경의 물음은 어딘지 냉소적인 구석이 있었다. 오랫동안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대답이 없던 이주가 해경을 마주보았다.
“아무리 훌륭해 보이는 사람이라도 결국에는 추한 일면이 있는 겁니까?”
이주가 묻는 말에 해경은 이주를 물끄러미 보다 대답했다.
“훌륭한 교사가 반드시 좋은 부모라는 법은 없고, 훌륭한 지도자가 반드시 좋은 인간이라는 법도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제각기 여러 가지 일면을 지니고 있지요. 동전에 앞면이 있으면 뒷면도 있듯이, 저도 그렇고 이주 군 역시도 그럴 겁니다. 서영석 씨가 강마리아 씨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자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가 훌륭한 교사였다는 건 변하지 않겠지요. 좋은 기억을 남겨 두는 편이 더 좋을 겁니다.”
해경의 말을 생각하던 이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여 보이며 사무실을 나갔다. 소화는 이주가 나간 자리의 찻잔을 치우려다 말고 물었다.
“저……그 분이 돌아가셨나요?”
조심스러운 소화의 물음에 해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랫동안 고생하여 몸이 이미 심하게 망가져 있는 상태였는데, 서영석이 살인범으로 확정이 되면 본인도 죽을 작정으로 약을 먹은 모양입니다. 병원에 데려갔지만 그 날 저녁 사망했기에, 부모에게 연락해 상을 치르게 한 겁니다.”
“아, 아아……그랬군요.”
뜻밖의 이야기에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소화는 어색하게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서둘러 탁자 위에 놓인 찻잔을 치우기 시작했다. 소화가 쟁반에 다기를 담아 돌아서자, 해경은 손으로 눈가를 덮은 채 중얼거렸다.
“사랑이 그 눈을 가리지 않았으면 두 여인이 그렇게 죽는 일은 없었겠지요.”
해경의 말에는 기묘한 감정들이 어려 있었다. 분노인지, 냉소인지, 혹은 포기인지 알 수 없는. 소화의 머릿속으로 퍼뜩 시구가 지나쳤다. ‘오, 영리한 사랑이여. 그대는 눈물로 나를 눈멀게 했구나, 잘 보는 눈이 그대 추한 결함들을 찾아내지 못하도록.’ 소화는 아직 그런 감정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언젠가는 그런 것을 알 수 있을까 생각하던 소화에게, 해경은 마치 그 속내를 읽기라도 한 듯 말했다.
“……그러니 언제나 마음을 잘 지키도록 하십시오.”
소화는 멈칫하며 자리에 선 채 해경을 돌아보았다. 문득 해경 역시 그렇게 누군가에게 눈이 멀어 버리는 듯한 일을 겪어 본 적이 있었을까 궁금해졌다. 그러나 소화는 그런 것을 묻는 대신 찻잔을 내려놓고 닦기 시작했다. 닫아 놓은 창 밖으로 멀리서 전차의 종소리가 울리며 지나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