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rd rate samurai with a carreer break RAW novel - Chapter 65
00061 악몽의 밤 =========================================================================
사람들이 왜 사라졌는지, 어떻게 사라졌는지를 알아낸 이상 중요한 것은 단 한 가지였다. ‘어디로’. 기노시타가 납치한 사람들을 가지고 실험을 한다는 것은 거의 확실했으나, 그러기 위해서는 장소가 확보되어야 했다. 사람들이 사라진 곳이 대부분 경성역 인근이었기에 해경은 분명 그 근방의 어디엔가 기노시타가 사람들을 숨겨 둘 만한 장소가 있으리라 짐작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일이 너무 커지는 탓이었다. 사람들을 그런 방식으로 납치하는 것도 상당히 위험한 일인데, 일부러 한 번 납치했다가 장소를 이동하는 이중의 위험을 무릅쓸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경성역 인근의 모든 건물이 표시된 지도를 놓은 해경은 후보가 될 만한 건물을 하나하나 추려냈다. 충분한 공간이 확보되어 있고, 사람들이 드나드는 것이 자연스러워야 하고, 눈에 쉽게 띄지 않으며, 유인을 당하는 자가 전혀 이상하게 생각할 수 없는 장소. 이 모든 조건을 충족시킬 만한 건물은 그리 많지 않을 터였다. 해경은 지나치게 으슥한 골목, 작은 가정집과 구멍가게 등은 일절 제외시켰다. 기노시타가 마음대로 실험을 할 수 있을 만한 규모의 가정집도 생각해 보았으나, 몇 달 사이 낯선 사람이 그리 많이 들락거렸다면 분명 누군가의 눈에 띄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큰 주택까지 모두 제외하자 남는 것은 회사 건물이라든지 요릿집 따위의 상가 건물들이었다. 해경은 지도 위의 상호를 하나하나 짚어 보았다. 회사 건물이라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드나드는 것은 역시 눈에 띌 것이다. 요릿집도 마찬가지였다. 젊은 남녀나 나이든 이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어린아이가 혼자 들락거릴 만한 곳은 아니었다. 후보지를 하나하나 지워가던 해경의 눈에 띈 것은 얼마 전 완공된 건물이었다. 해경은 지도 위에 쓰인 상호를 입 안으로 중얼거렸다. 라‧세느. 조선 호테루에 비해 규모는 약간 작은 편이었으나 상당히 요란하게 선전을 하고 있는 호텔이었다.
해경은 라 세느 호테루의 개점 시기에 난 신문 기사를 모두 뒤져 보았다. 라 세느는 지상 3층 규모로 35개의 객실, 한식당, 양식당, 커피숍과 서양식 욕실을 갖추었다고 선전하고 있었다. 건축을 담당한 것은 이태리로 건축 유학을 다녀와 일본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일본인 건축가 니시다 히로유키[西田 寬之]라고 쓰여 있었다. 해경은 그 기사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생각에 잠겼다. 호텔이라면 남녀노소 누가 드나들어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자가 없을 터였다. 유인을 당한 사람들 역시도 호텔까지 노파의 짐을 들어 주는 것을 의심스럽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호텔 객실을 잡아 놓고 그 많은 사람을 한 방에 몰아넣은 채 실험을 한다는 것은 역시 마음에 걸렸다.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으나 정작 실험을 할 만한 장소가 없었던 것이다.
해경은 다른 기사를 찾았다. 조선 호테루와 라 세느 호테루를 비교하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조선 호테루는 독일인 건축가인 게오르그 데 라란데가 건축했으며 지하 1층, 지상 4층의 규모로’, 라고 시작하는 기사를 본 해경의 눈이 거기 못박혔다. 해경은 잠시 그 기사를 보고 있다가 수화기를 들어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상대방이 전화를 받자 해경은 바로 소개도 없이 말했다.
“건축부의 우차영 설계 부감독님을 연결해 주십시오.”
전화를 교환하는 소리가 들리고 곧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 우차영입니다. 누구신지요?
차영은 지난번 실종 사건의 주인공인 우재영의 형이었다. 해경은 그가 총독부 건축부에서 설계 부감독으로 일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떠올리고 전화를 건 것이었다. 해경은 최대한 정중하게 대답했다.
“안녕하십니까. 경성탐정사무소의 정해경이라고 합니다.”
― 아, 네!
전화 너머에서 차영이 잠깐 놀란 듯 멈칫했다가 곧 약간 높아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재영에게 이야기를 들었던 모양이었다. 차영이 불안한 듯한 말투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무슨 일이십니까? 저희 재영이가 혹여 또 무슨…….
“아닙니다. 초면에 몹시 실례되는 것은 압니다만,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하고 연락을 드린 것입니다.”
―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재영이에게 도움을 주신 분을 제가 모른 척 할 수는 없지요.
차영은 의외로 흔쾌히 대답했다. 해경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대형 건축물을 지을 때 총독부에 신고를 하게 되어 있지요?”
― 물론입니다.
“호텔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까?”
― 네. 조선 호테루의 경우에는 아예 총독부 철도국의 관할로 지은 것입니다. 얼마 전 개점한 라 세느도 자금은 다른 이가 대었지만 공사는 총독부 토목국이 주도했지요. 도면과 관련 서류를 모두 제출하고 신고하지 않으면 그런 건물은 지을 수 없습니다.
차영의 입에서 나온 라 세느라는 이름에 해경은 주먹을 말아 쥐었다. 해경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제가 라 세느의 도면을 볼 수 있겠습니까?”
― 도면을요?
뜻밖의 부탁에 차영이 의아하다는 말투로 되물었다. 물론 느닷없이 경성 한복판 호텔의 도면을 보고 싶다는 이를 선뜻 이해할 만한 사람은 없을 터였다. 잠시 생각하던 차영이 대답했다.
― 도면을 보여드리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습니다. 이쪽으로 방문해 주시지요.
“지금 찾아뵐 수 있습니까?”
― 네. 제 이름을 대고 오십시오.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은 해경은 서둘러 사무실을 나서 총독부로 향했다. 채 이삼십 분도 지나기 전 총독부 건물에 도착한 해경은 입구에서 차영의 이름을 대고 건축부 사무실로 올라갔다. 건축부 사무실의 문 앞에 안경을 낀 중키의 청년이 서성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차영이었다. 미리 나와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차영은 해경 쪽을 보고는 긴가민가하는 얼굴로 다가왔다. 해경이 쓰고 있던 모자를 벗으며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정해경입니다.”
“아, 맞으시군요. 이쪽으로 오시겠습니까?”
차영이 안내한 곳은 문서 보관실이었다. 해경을 세워 두고 한참 무언가를 찾던 차영이 한 뭉치의 종이를 들고 와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이것이 라 세느와 관련된 도면 및 서류들입니다. 외부인에게 공개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만 필요하시다니……다만 반출은 되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확인할 것이 한 가지 있어서요.”
해경은 자리에 앉아 가장 위에 올려진 도면을 펼쳐 보았다. 해경이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건물의 구조였다. 지상 3층에 35개의 객실, 식당, 커피숍 및 사무실과 조리실 등 각종 공간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도면을 꼼꼼하게 살피던 해경은 고개를 들어 차영을 보았다.
“라 세느에 지하층은 없습니까?”
해경이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그 부분이었다. 조선 호테루의 지하층 이야기를 보고 떠올린 생각이었다. 공개되지 않은 지하 공간이 만에 하나 존재한다면 기노시타에게는 최적의 장소가 될 수 있었기에, 매우 적은 가능성인 것을 알지만 직접 확인하러 온 것이었다. 차영이 놀란 표정으로 도면을 다시 한 번 살피더니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알기로는 없고, 이 도면에도 없습니다. 왜 그러시지요?”
“도면에 없는 지하층을 만들 수 있습니까?”
차영이 해경의 질문에 난처하다는 얼굴을 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는 표정이었다. 고개를 갸웃하던 차영이 자리에 앉으며 서류 뭉치를 가리켰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지하층은 잘못 공사하면 위의 건물까지 모두 무너지니까요. 직접 서류를 보고 확인해 보지요.”
도면을 곁에 놓고 잔뜩 쌓인 서류를 하나하나 확인해 보던 차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는 서류와 도면을 몇 번씩 번갈아 살피더니 흠, 하고 얼굴을 찌푸렸다. 해경이 차영에게 물었다.
“왜 그러시지요?”
차영이 망설이다 해경을 마주보았다.
“총독부에서 직접 감독한 것인데 이럴 수가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도면과 실제 공사 내용에 차이가 있어서요. 지하층 공사 내역이 있습니다. 장부에도 지하층 굴착과 관련된 내용이 있고요. 기반 공사라기엔 이상하군요. 없는 지하층을 왜 팠을까요?”
“제출한 도면과 실제 도면이 다를 가능성은 없습니까?”
그 말에 차영이 펄쩍 뛰었다.
“라 세느를 설계한 니시다 선생은 건축부 고문입니다. 그런 일을 했다가는…….”
총독부 건축부의 고문을 맡은 자가 호텔을 설계했고, 도면과 실제 공사 내용이 다르다……해경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도면에 있는 것을 공사하지 않았다면 자재 부족이라든지 기타 등등의 어떤 사정으로 그럴 수도 있다고 하겠으나, 이것은 반대의 경우였다. 차영의 말대로 설계 시 전혀 고려되지 않은 지하층을 판다는 건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상층의 지반이 붕괴하며 대형 사고로 이어질 우려가 큰 탓이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도면을 이중으로 설계했다고 생각하는 편이 훨씬 더 상식적이었다. 총독부 고문이라면 서류상의 절차를 몰랐을 리 만무했다. 그러나 이렇게 도면과 서류를 대강 대조하기만 해도 알아낼 수 있을 정도로 허술하게 다른 도면을 제출했다면 분명 그럴 수 있는 까닭이 있을 터였다. 해경은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위의 지시를 받았다면 가능하겠습니까?”
기노시타가 경성 한복판에서 인체 실험을 하는 것을 단순히 한 의학자의 광기 어린 열정으로 치부할 수는 없었다. 일본이 아무리 조선을 식민 통치하고 있다고 해도 조선인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았다. 일본은 신흥무관학교처럼 아예 독립투사를 기르기 위한 학교까지 세워 가며 저항하는 조선인들을 내심 두려워하고 있었다. 만약 일본인 의학자가 실험을 위한 목적으로 조선인을 납치하여 감금하고 살해했다는 것이 알려지기라도 하면 경성 전체가 분노에 휩싸일 것임은 바보가 아닌 이상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노시타가 대담하게 이런 납치극을 벌이고 있다는 것은 분명 믿는 구석이 있다는 뜻이었다. 해경은 라 세느의 도면을 다시 한 번 보았다. 도면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실제로는 존재하는 지하층. 이 건물은 총독부 관할로 되어 있다……어떤 목적으로 도면에 그려 넣지 않은 것일까.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이 지하층은 애초에 기노시타의 인체 실험을 위해 제공될 공간이었던 것이다. 해경의 말에 차영이 몹시 주저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다면 물론 가능할 겁니다. 하지만 왜 그래야 하겠습니까?”
“어떤 목적이 있어서겠지요. 만약 그랬다고 가정할 때 라 세느에 지하층이 있는 것은 확실한 것이지요?”
“서류상으로는 분명히 그렇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부분을 확인하고 싶어 온 것입니다.”
해경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류를 다시 정리하던 차영이 막 문서 보관실을 나가려는 해경의 등에 대고 말했다.
“저는 선생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모르고, 오늘 제게 이런 도움을 요청하신 까닭도 잘 모르지만 만약 이게 총독부를 건드리는 일이라면 발을 빼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차영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경성제대의 의학부 교수를 건드리는 것만 해도 상당히 큰 일이 될 터였다. 그러나 그의 뒤에 총독부가 버티고 있는 것이라면 이야기는 또 달랐다. 목숨을 내놓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해경에게는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도면에 존재하지 않는 그 공간에 갇혀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해경은 그 자리에 잠시 멈춰 섰다가 대답했다.
“염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보관실을 나선 해경은 빠른 걸음으로 총독부 건물을 나섰다. 굴에 불을 질렀으니 기노시타가 뛰쳐나오는 건 시간 문제였다. 세브란스 병원으로 이동한 시신에서 어떤 점이 밝혀졌는지도 알아야 했고, 이제부터 기노시타의 움직임을 주시해야 했다. 그 전에 라 세느에서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해경은 택시를 잡아 타고 라 세느로 이동하는 동안 계속해서 기노시타가 앞으로 할 행동에 대해 생각했다. 시신을 탈취당했으니 인체 실험을 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나오기 전 모든 증거를 인멸하려 할 것이 분명했다. 기노시타의 뒤를 밟아 현장을 덮치는 것이 가장 확실할 터였으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위험을 무릅써야만 했다.
라 세느 앞에 도착한 해경은 택시에서 내려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건물의 위용은 대단했다. 마치 그림 속의 집 같은 화려한 외관이며, 어느새 내리기 시작한 저녁 어스름 사이로 온 유리창에서 스며 나오는 환한 전등의 빛이 주변의 풍경 한가운데서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해경이 한동안 그 자리에서 건물을 올려다보고 있자, 빨간 제복을 입은 직원이 정문 앞에 서 있다가 다가왔다.
“선생님, 숙박객이십니까?”
해경은 그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직원의 차림을 슬쩍 훑어본 해경은 대답 대신 물었다.
“여기 하루 종일 서 계시는 겁니까?”
직원이 멋쩍은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네에, 개점한 지 얼마 안 되었으니까요. 안내를 해 드리기 위해 종일 여기 있습니다.”
“드나드는 사람이 몹시 많지요?”
“그럼요.”
“누가 드나드는지 일일이 기억하시기는 어렵겠군요.”
직원이 당연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에만 수백 명 수천 명이 오가니까요. 그래도 차림이 조금 특이하시거나 한 분들은 기억이 납니다.”
“혹시 기생 차림을 한 이라든가 홀로 온 노파가 드나드는 적도 있었습니까?”
해경의 물음에 직원이 의아한 표정을 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런 것을 물으시지요? 엊그저께도 웬 아가씨가 누가 들어가는 것을 못 보았냐, 나가는 것을 못 보았냐 하며 묻던데 무슨 일이 있습니까?”
“아가씨라고요?”
해경은 순간 정수리에서 누가 찬물을 쏟아 붓는 것 같은 기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키가 오 척 정도에 머리를 땋고, 흰 저고리에 남색 치마를 입은 아가씨였습니까?”
갑자기 다그치듯 묻는 해경의 얼굴에 직원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옷은 잘 기억이 나지 않고요, 저녁때였는데 웬 아이와 학생을 못 보았냐고 물었습니다. 아, 여기 말고 다른 문이 없냐고 물으시더군요. 그렇게 묻는 분은 처음이라 기억이 납니다.”
소화다. 해경은 직감했다. 침착하기 위해 어금니를 꽉 문 해경은 잠시 숨을 골랐다. 웬 아이와 학생을 보지 못했느냐, 다른 문이 없느냐……소화가 그렇게 물은 데는 까닭이 있었을 터였다. 소화가 물었다는 말을 통해 해경은 그 상황을 그려 볼 수 있었다. 어떤 아이와 학생이 호텔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고, 나오는 것을 보지 못했기에 다른 문이 없느냐고 물은 것이 틀림없었다.
“그 아가씨가 어디로 갔습니까?”
직원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해경은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고는 바빠지기 시작한 머릿속을 정리했다. 소화는 여기에 있었다. 소화가 그 아이와 학생을 따라왔다면 분명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직원에게 두 사람의 행방을 물었다면 그들이 이 안으로 들어간 것은 분명했다. 나오는 것을 보지 못했기에 직접 그들을 찾으려 했을 것이다. 해경은 라 세느의 어딘가에 소화가 있다는 사실을 거의 확신했다. 해경은 숨을 들이쉬며 라 세느를 다시 한 번 올려다보았다. 휘황찬란히 쏟아져 나오는 전등의 빛에 눈이 부셨다. 이 빛의 뒤편 그림자 속에 사라진 사람들이 있었다. 반드시 찾아내야만 했다. 해경은 일단 향운정으로 향했다. 송란 역시 라 세느 안에 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향운정에 도착한 해경이 막 안으로 들어서려는 순간 누군가 안에서 몹시 급하게 나오다 해경과 부딪쳤다. 해경은 뒤로 물러나며 죄송합니다, 하다 말을 멈췄다. 인혜였다. 인혜가 고개를 들어 해경을 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몇 십 번이나 연락을 했는지 몰라요! 어디 갔다가 이제 오는 건가요?”
답지 않게 몹시 흥분한 말투로 목소리를 높이는 인혜였다. 해경은 약간 당황하며 대답했다.
“총독부에 확인할 것이 좀 있었습니다. 그건 그렇고,”
“송란이가, 송란이가 돌아왔단 말이에요!”
라 세느에 대해 말하려던 해경은 인혜의 외침에 순간 하려던 말을 모두 잊어버렸다. 인혜가 벼락을 맞은 얼굴로 굳어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해경의 손을 움켜쥐었다.
“조선적십자병원에 있대요. 거기서 연락이 왔어요. 송란이와 남자가 하나, 이름이, 무슨 경이라고, 아무튼 그렇대요. 지금 그리로 갈 거예요. 아무리 연락을 해도 미스터 정이 받지를 않아서 애가 타 죽는 줄 알았어요! 어서 가요, 어서요!”
“소화 양은요? 소화 양은 어찌 되었습니까?”
해경이 다급하게 물은 말에 인혜가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해경을 잡아끌었다. 향운정 앞에 대기하고 있던 차에서 기사가 내려 재빨리 뒷문을 열어 주었다. 얼결에 인혜의 차에 탄 해경은 마르는 입술을 물었다. 송란이 돌아왔다니 생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송란과 남자 하나, 그렇다면 소화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정신없이 달리는 차 속에서 해경은 주먹을 꽉 쥐었다. 손바닥으로 차가운 식은땀이 배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