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se Who Live Without the Law RAW novel - Chapter 23
23화 가짜와 진짜 (2)
* * *
멍하니 서 있던 기드온이 눈을 껌벅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지금 이 새끼가 한 말 들은 사람?”
기드온이 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카이루스가 대답했다.
“장미정원의 대표님이 굉장히 훌륭한 인격자시더라고. 이제부터 내가 뭘 할 건지 말해줄게.”
카이루스는 그렇게 말하며 기드온의 허리에 닿아있던 검을 천천히 회수했다.
“여기서 네 녀석 이마빡을 칼로 쑤시고, 장미정원으로 가서 그 사실을 밝힐 거야. 그리고는 장미정원에서 일하겠다고 맹세할 거다.”
세실리아는 모든 것에 가격표를 붙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싼 물건이 망가진 대가로 더 비싼 물건을 공짜로 얻게 되는 거다.
그녀가 이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다. 기드온의 등을 타고 살짝 식은땀이 흐른다.
“길가에서 굴러먹던 주제에 날 어떻게 할 수 있다고 믿는 모양이군.”
“지금 하고 있잖아. 어떻게. 눈에 의안 박아넣으셨나?”
기드온의 공격은 막혔다. 하지만 카이루스의 공격은 적중했다. 뭐, 지독하게 튼튼해서 피해를 입히지는 못했지만….
상대의 공격은 닿지 않았는데 카이루스의 공격은 닿았다는 건 변하지 않는다.
그 이상으로 서로 간의 실력차를 증명할 수 있는 결과가 또 있을까?
“….”
기드온도 그 명백한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이전에 맞붙었던 사라와 비교하면 이 기드온이라는 작자는 실력이 한참 부족하다. 간부라고 다 같은 간부는 아닌 법이니까.
하지만 기드온의 입장에서는, 스스로가 장미정원의 간부라는 걸 밝혔는데 여기에서 꼬리를 말 수도 없는 노릇이다.
고민하는 기드운을 바라보던 카이루스가 이내 밝게 웃으며 검을 거뒀다.
“다음부터는 이런 장난 하지 마세요. 저같이 뒷배 없는 녀석들이 그런 협박을 당하면 오금이 쪼그라든단 말입니다.”
기드온에게 던지는 말도 다시금 존댓말로 바뀌어 있었다. 어차피 체면 때문에 여기에서 꼬리를 말지 못할 테니, 카이루스가 그럴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거다.
‘생존할 수 있다 해도, 그게 내 목표의 전부는 아니니까.’
장미정원의 구성원이 되어버린다면 죽지는 않는다. 하지만 페더윙 가문의 부흥과 복수라는 카이루스의 목표는 달성하기 어려운 일이 되어버린다.
조직에 소속된다는 것은 개인의 욕망이나 꿈보다, 조직의 목표를 더 우선해야 한다는 소리니까.
“하… 하하하! 고작 이 정도 장난으로 놀라다니, 아직 멀었군 그래!”
카이루스의 의도를 알아차린 기드온이 곧바로 카이루스를 향한 적의를 거두고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미친 척하는 정상인은 결국 말이 통하는 법이다. 카이루스의 시선이 슬쩍 타냐 라이샌드에게 향했다.
최소한 저 정도는 되어야지 미쳤다고 말할 수 있다.
“제가 나름대로 다양한 경험을 해봤거든요. 미친 사람들, 그중에서도 특히 위험한 방식으로 미친 사람들을 굉장히 많이 봤습니다.”
베넷 시는 범죄자들이 많고, 치안이 불안하다. 그건 카이루스도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위험한 형태로 미친 또라이들의 비율?
그 지표만큼은….
베넷 시조차 칼슨 노동교화소를 따라잡지 못한다.
카이루스는 노동교화소에서 6년을 보내며 무수한 또라이들을 봐왔다.
“그래서?”
기드온의 질문에 카이루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덕분에 눈앞의 상대가 진품 또라이인지, 아니면 짜가리 또라이인지 순식간에 견적서를 뽑아내는 재능이 생겼죠.”
카이루스는 기드온에게 한 발 더 다가간 다음, 녀석의 눈을 바라보며 기드온만 들을 수 있게 말했다.
“장미정원의 대표님과 저기에서 기도하고 있는 타냐 라이샌드라는 아가씨는 진품이에요.”
하지만 지금 알록달록한 정장을 입고 피젯 스피너를 돌리고 있는 이놈? 이건 가짜다. 카이루스는 단언할 수 있었다.
“기드온 님은 죽기 싫고, 자기보다 강한 사람을 마주하면 두려움을 느끼죠. 돈과 예쁜 여자를 밝히고, 맛있는 거 먹고 쾌적한 곳에서 살고 싶을 테고.”
그는 다수가 동의할 수 있는 평범한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다.
“그럼 너는 어떤지 궁금한데.”
기드온의 질문에 카이루스가 웃으며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사제가 자신을 강복할 수 없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스스로가 미쳤는지 자력으로 판단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미친 사람이라고 하는 거다. 자기가 미쳤는지 모르니까.
“약간 어수선한 형태긴 했지만,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이런 작은 모임의 계약을 보증하는데 설마하니 장미정원의 간부께서 직접 오실 줄은 몰랐는데 말이에요.”
당연히 기드온은 카이루스를 포함해 이 방에 있는 범죄자들의 계약을 보증해주기 위해 온 게 아니었다.
그냥, 존경하고 경애해 마지않는 세실리아 롱호른 대표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한 괘씸한 새끼가 있다고 해서 손을 좀 봐줄 생각으로 찾아온 거다.
장미정원에 들어가서 몇 년이나 충실히 일한 자신에게도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는데!
“크흠, 그래. 해야 할 일은 해야지.”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이유에 대해 어떤 핑계를 대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에 카이루스가 적절한 핑곗거리를 던져줬다.
기드온으로서는 카이루스가 던져준 걸 받아먹지 않을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사실, 지금 이 방에 있는 사람들은 현재 분위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다 알고 있다.
머리에 화살 박힌 등신이 아니라면 모를 수가 없다. 베넷 시에서 눈치 없는 녀석들은 장수하지 못하는 법이다.
‘장미정원의 간부가 카이루스에게 쫄았다.’
‘팀장이라면 고위 간부는 아니지만, 그래도 장미정원의 간부인데 길바닥 굴러다니는 녀석에게 기세에서 밀렸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동시에, 눈치가 빠르다는 소리를 듣고 싶다면 자신이 알아차린 사실을 상황과 때를 봐가며 떠들어야 한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지금 여기서 기드온에게 쫄? 같은 말을 하면 순식간에 뒈진다.’
‘기드온은 카이루스에게 쫀 거지, 나한테 쫀 게 아니야.’
모두가 합의한 계약서의 내용을 기드온이 확인한다. 오랜 시간 장미정원에서 일했던 기드온이 계약 보증 절차를 모를 리는 없다.
이제 그런 일을 할 짬이 아니라고 해도, 그동안 쌓은 경력이 있으니까.
“이걸로 끝이다. 너희들이 맺은 계약은 장미정원에 의해 보장된다.”
최초 등장할 때 인상 깊던 경쾌한 하이톤의 목소리는 이제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방금 전의 요상스러운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는 건 알록달록한 정장뿐이다.
저게 기드온의 평상시 모습이겠지.
“고생 많으셨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배려에 감사드리는 의미로 식사라도 한 끼 사드리고 싶지만… 장미정원 간부님을 이렇게 오랫동안 붙들고 있을 수도 없겠죠.”
긴말을 짧게 줄이자면, 너한테 볼일은 끝났으니 이제 꺼지라는 뜻이다.
의도는 알아차렸지만, 그렇다고 기드온이 당장 뭘 할 수는 없다. 결국 그는 별다른 말 없이 돌아갔다.
“자, 그럼 오늘 우리가 모였던 목적도 모두 이룬 것 같네.”
이 자리에 함께한 사람들이 만나서 반갑다고 맥주 한잔할 정도로 정겨운 사이는 아니다.
각자 갈 길을 가면 된다. 카이루스는 천천히 방을 나갔다. 카이루스의 등을 에릭슨이 보고 있다.
이 자리에서 가장 큰 손해를 본 사람은 에릭슨이다. 졸지에 애인을 잃어버렸으니까.
‘저 녀석은 나에게 아무런 위해도 끼치지 못해.’
에릭슨이 잃은 애인이 그가 가진 전부였다면, 아니면 그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었다면 카이루스는 이런 결론을 내리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그게 아니다. 에릭슨에게는 다른 소중한 것들이 많다.
예를 들면 자신의 목숨.
또는 이 일을 끝낸 다음 자신이 거머쥐게 될 목돈.
거기에 더해 그 목돈으로 할 수 있는 무수한 향락과 사치, 안락한 생활.
‘애초에 이번 일로 얻을 수 있는 액수가 나온 순간부터 죽은 애인의 시신에는 눈길도 거의 안 줬지.’
입으로는 계속 죽은 애인을 들먹이고 있지만, 기껏해야 자신의 평판을 지키기 위한 행위일 뿐이다.
애인이 죽었는데 돈 이야기를 듣자마자 군침만 줄줄 흘리고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에릭슨을 어떻게 평가할지 빤하니까.
카이루스는 업사이드의 밤거리를 거닐며, 에릭슨이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결론내렸다. 물론 만약을 대비해서 최소한의 경계는 할 생각이다.
하지만 그 경계가 실질적인 위협을 상대하게 되는 일은 없을 확률이 높다.
“바로 준비해야겠네.”
이번 모임에서 나눈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카이루스는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결국 기차는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곳을 통과하는 이동수단이다.
자칫 잘못하면 달리는 기차를 따라잡아야 하는 기깔나는 상황이 펼쳐진다.
다시 봄달래의 아지트로 돌아가자, 봄달래가 분홍색 찻잔에 들어있는 핫초코를 휘휘 젓는 꼴이 카이루스의 눈에 들어온다.
“거 좀 어울리는 잔을 사용하지 그래.”
“이거 비싼 잔이야. 장인이 직접 도색한 거라고.”
가격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사람에게 어울리는지의 여부가 더 중요한 법인데. 카이루스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끄응, 하는 소리를 냈다.
“넌 바로 출발해야 할 거야. 우선적인 목적지는 세인트 드빌 역.”
휙 하고 날아온 봇짐을 받아들며, 카이루스가 작게 미소 지었다.
“세인트 드빌이라. 피나무꿀이 아주 기가 막히지.”
카이루스가 어릴 적 쓴 약을 먹기 싫어할 때, 그의 어머니는 약을 꿀에 섞어주곤 했다.
쓴 약을 그냥 먹을 수 있게 되었을 때도 그 꿀이 먹고 싶어서 어머니에게 못 먹겠다고 칭얼거리던 기억이 떠올랐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그 꿀이 세인트 드빌의 특산품이었다.
“또 옛날이야기냐? 거기 재개발해서 제국 방직공사가 세운 산업단지가 자리 잡았어.”
이전에 있던 것들을 싹 다 밀어버린 다음 방직공장과 염색공장이 들어섰다는 것이 봄달래의 설명이었다.
카이루스의 입에서 미소가 확 사라졌다.
“그거참… 슬프네.”
어릴 적 추억 속에 잠깐이나마 빠질 수 있는 물건 하나가 사라진 셈이니까.
“어쩌겠냐, 발로른 제국의 모든 것은 황제의 소유잖아.”
봄달래의 말에 카이루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농사를 짓거나 공장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모두 자비로운 황제로부터 허락을 받고 땅을 ‘빌려서’ 필요한 용도로 쓰고 있을 뿐이다.
당연히, 황제가 꺼지라고 명령하면 꺼져야 한다. 보상금 같은 건 한 푼도 없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아이란 공화국이 더 살만한 것 같다니까.”
카이루스의 말에 봄달래가 코웃음 쳤다.
“6살짜리 어린애가 일당 10드램에 15시간 일하다가 잠깐 졸아서 손을 다치는 순간 즉시 해고되는 나라가?”
아이란 공화국의 모든 사람들은 스스로 판단하고 움직이는 자유민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유롭게 선택할 권리가 있고, 이를 책임지는 건 오롯이 그 개인의 의무다.
따라서 하루 15시간의 노동을 하고 10드램을 받기로 자신이 선택했다면, 그 모든 책임은 그 사람이 감당한다.
모두가 자비로운 황제 폐하의 충성스러운 신민이기에, 최소한의 노동여건이 보장되어 있는 발로른 제국과는 사뭇 다르다.
봄달래와 헤어진 다음, 간단하게 짐을 챙긴 카이루스는 베넷 시를 떠나기 전에 롱웨이브 비스트로의 주인 조나단과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고용된 입장에서 먼 길을 떠나게 되니 그전에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으니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카이루스는 시계를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세인트 드빌의 특산품을 더 이상 못 구하는 게 아쉽긴 하네요. 어디 보자… 이제 시간도 된 것 같으니, 저는 가보겠습니다.”
“그러던가.”
조나단의 시큰둥한 대답을 끝으로 카이루스는 식당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