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usand Treasure Sword RAW novel - Chapter 208
208
그런 생각도 자주 드는 게 아니다. 가뭄에 콩 나듯이 가끔 생각난다. 피비린내가 구토가 치밀 정도로 역겹게 느껴지고, 죽은 사람의 처참한 몰골을 보면서 망연히 뒷걸음질 칠 때…… 그럴 때 문득 섬광처럼 그런 생각이 스쳐지나간다.
그럴 때를 제외하고는 무적자다.
사람이 나타나면 검을 휘두르고, 그러면 상대는 죽어 자빠진다.
상대가 무인이든 평범한 사람이든 상관없다. 초수가 높은 사람이든 낮은 사람이든, 아니면 아녀자라도 상관하지 않는다. 무조건 죽이고 본다.
그런 일들이 전혀 기억에 없는 것은 아니다. 옷에 묻은 피가 누구의 피인지, 언제, 어떻게, 무엇을 하다가 묻은 것인지 모든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러면 소름이 돋는다.
헛구역질이 치밀면서 오장육부가 뒤틀린다.
그는 살인이 이토록 처절한 것인지 알지 못했다.
살인…… 사람을 죽이는 일쯤은 대수롭지 않게 해낼 수 있다고 자신했었다. 실제로 무인들에게 죽어나가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시신도 많이 접했다. 그러면서도 눈썹 한 올 까딱하지 않았다.
그랬는데…… 이 후회 막급한 죄책감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는 사람이 돌아다니지 않을 법한 곳으로 들어섰다.
아무도 없는 산중에서 마음의 괴로움을 떨쳐버릴 생각이다. 잠시 살인을 쉬면서…… 몸과 마음을 추슬러야 한다.
산속에 들어온 후, 평온을 되찾았다.
염사검은 더 이상 그에게 살인을 요구하지 않았다. 피를 그리워하지 않았다.
역시 생각이 옳았다.
사람이 없는 곳에서는 염사검도 피를 원치 않는다.
잠시 이대로 있으면서 검을 길들여야 한다. 검의 노예가 되는 게 아니라 검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그도 쇠를 다룰 줄 안다.
이래봬도 명장 비오신장의 피를 이어받았다. 뜨거운 장인의 피가 몸에 흐른다. 검과 교통할 수 있는 세상에 몇 안 되는 장인 중에 한 명이라고 자부한다.
검을 길들일 수 있다.
그는 산에 들어와서도 검을 놓지 않았다. 세상에 있을 때처럼 늘 손에 쥐고 다녔다. 틈만 나면 나무를 가르고, 물을 휘저었다. 검으로 사람이 아닌 제 삼의 물질을 갈랐다.
염사검은 너무 인육에 길들여져 있다.
나무를 베고, 물을 베면서 인육으로부터 벗어난다. 인육을 먹고 싶어도, 피가 그리워도, 사람을 베고 싶어서 안달이 나도 할 수 없게 만든다.
염사검은 알아야 한다. 인육을 먹고 싶다면 주인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점을.
그는 염사검을 꽉 쥐면서 웃었다.
“흐흐흐! 넌 내 거야. 난 해망 같은 놈이 아냐. 절대로 어리석게 당하지 않는다고!”
파라락!
검신이 흔들린다.
염사검은 공기의 흐름을 읽어낸다. 변화가 일어나는 현상을 감지한다. 그것이 사람에 의한 움직임이라면 즉각 검신을 파르르 떨어서 반응한다.
지금 그런 반응이 일어났다.
‘어떤 놈이!’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길로 염사검을 움켜쥐었다.
그동안 잘 통제되던 염사검이 통제력을 벗어나려고 한다. 검주를 따르지 않고, 조정하려고 한다. 검주의 머릿속에 살인에 대한 충동만 가득 담아 넣는다.
“안 돼!”
그는 이를 악물며 중얼거렸다.
이런 식으로 염사검에게 영혼을 빼앗길 수 없다. 사람을 죽여도 자신이 죽여야 하지 않는가. 누구를 어떻게 죽였는지도 모르면서 살인광 소리만 듣는다면 너무 억울하지 않나.
그때, 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견디기 힘든가?”
“누구! 누구냐! 어떤 새끼야!”
그는 화가 치솟았다. 말 잘 듣고 있던 염사검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기 시작했는데, 그게 모두 다 새롭게 나타난 이 인간 때문이다.
“흠! 좋은 검이군.”
일견하기에도 강인해 보이는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사각진 얼굴에 이목구비가 큼지막하고 뚜렷했다. 그러나 그를 보는 사람이라면 용모부터 보는 사람은 없다. 호랑이처럼 사나운 기질부터 보게 된다.
사나운 맹수!
그를 단적으로 일컫는 말로 딱 적합하다.
“누, 누구냐!”
그는 감히 태만하지 못했다.
상대가 쏘아본다. 맹수의 눈이 활활 불타오른다. 눈길 속에서 살기가 진득진득하게 묻어나온다. 당장이라도 달려들어서 목을 물어뜯을 것 같다. 날카로운 칼을 복부에 들이밀 것 같다.
그는 위압당했다.
염사검을 든 이후, 어느 누구에도 위압 같은 것을 받은 적이 없는데…… 이 사내는 다르다. 다른 사람들과 완전히 다르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거센 압박감을 준다.
“후후후! 내 집에서 편히 잘 지냈다고 들었다. 그런데도 날 모른다면 이거 섭섭하지 않나.”
사내가 투명한 검을 들어보였다.
‘투명한 검! 투명…… 유리! 유리검! 해과월, 그 새끼가 만든 유리검! 유리검은 운벽슬이라는 계집이 가졌다던데…… 그럼 이 계집이? 아니, 이놈은 사내지.’
그는 혼란스러웠다.
생각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다. 여러 가지 단편들이 퍼뜩퍼뜩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이미 검에 몸을 맡겼군. 염사검에 지배되기 시작했어.”
사내가 말했지만, 그 말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사내가 나타나는 순간부터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사내가 무엇 때문에 나타났겠나. 다른 놈들처럼 염사검을 취할 생각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죽여준다!
헌데 문제가 있다. 이놈은 다른 놈들처럼 만만하지 않다. 아주 강해서 자신 정도는 한 칼에 베어 넘길 게다. 염사검에 온 몸을 맡기지 않고는 승산이 없다.
염사검에 저항하던 정신을 놓아버렸다.
지면 죽는다. 죽지 않으려면 검령을 빌려야 한다.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었고, 선택도 간단했다.
그는 저항하던 영혼을 탁 풀어버렸다. 그리고 치솟기 시작한 혈광에 온 몸을 맡겼다.
그의 눈이 혈광으로 번들거렸다.
“이름이나 알고 가거라. 내 이름은 주한극이다.”
‘주한극? 주한극……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주한극…… 무림맹주였던가? 일검견혼 주한극? 크크크! 주한극이든 뭐든 죽여 버리면 그뿐.’
주한극이라는 이름이 매우 생소하게 들렸다.
무림맹주라는 단어와 주한극이라는 이름이 서로 연결 지어지기는 했지만, 그 말들이 뜻하는 바는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나무나 돌을 일컫는 것처럼 사내 이름이 무림맹주요, 주한극일 뿐이다.
“크크크크!”
그는 염사검을 들었다.
파파팟! 츠츠츠츠츠츳!
염사검에서 강한 기운이 몰려온다.
수교군은 무공을 수련한 무인이 아니다. 해망과 마찬가지로 한낱 장인일 뿐이다. 그런데 그가 검을 들고 서자 절정고수를 대면한 듯 짜릿한 긴장감이 생긴다.
주한극은 쉽게 쳐나가지 못했다.
염사검은 이미 한 번 패배를 겪었다. 혈랑도주가 파해법을 일러주었다.
생각을 읽히지 마라!
그런데 지금은 그런 파해법도 통하지 않는다.
츠읏!
유리검을 까딱거렸다.
머릿속으로 머리를 공격하겠다고 강한 염파를 띄웠다. 그런데 염사검이 끄떡도 하지 않는다. 그만한 염파를 접하고도 머리를 방비하지 않는다.
염사검은 중단(中段), 명치 어림에서 끔쩍도 하지 않는다.
‘무망(無望이란 말인가!’
주한극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패였다.
염사검은 스스로 진화한다.
패배를 거울삼아서 같은 패배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영기를 조정한다.
그 결과가 지금 주한극 앞에 나타나고 있다.
염사검은 더 이상 생각을 예단하지 않는다. 상대의 기운을 감지하지 않는다.
등대(等待)!
조용히 기다린다. 그것밖에 하지 않는다. 기다렸다가 변화가 일어나면 그에 순응한다. 하지만 순응의 움직임이 일어나면 그 속도는 필히 번개를 무색케 할 게다.
파르르르릇!
염사검이 영활한 뱀처럼 살아서 꿈틀거린다.
‘이놈은 이미 검이 아니군.’
주한극의 눈가에 미묘한 파장이 일었다.
염사검을 보다 보니 자신이 녹여버린 혈황검이 생각난다.
‘그놈도 이랬는데……’
쇠붙이에 영기가 붙어버렸다. 어지간한 정신력으로는 쳐다보지도 못할 정도로 강한 영기다.
그런 영기가 한낱 장인인 수교군을 절정고수로 둔갑시켰다.
솔직히 수교군은 여러 면에서 운이 좋다.
첫째, 그는 염사검이 패배를 겪은 후에 염사검을 손에 쥐었다. 그 전의 염사검은 앞뒤 가리지 않고 오직 빼앗기만 했다. 검주를 노예로 부렸다. 그 희생자가 해망이다.
염사검은 패배를 알았고, 진화를 선택했다. 생각을 읽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약간은 인간의 힘을 빌린다. 인간의 본능을 지켜본다.
수교군에게 약간의 인성이 남아있었던 이유다.
이것이 첫 번째 운이다.
두 번째 운은 그가 비오신장의 피를 물려받았다는 것이다.
비오신장은 혈황검에 아주 영통하고 강한 영기를 불어넣었다. 귀령(鬼靈)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그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간에 완성된 혈황검 속에는 영기가 스며 있었다.
이것이다! 비오신장의 제련에는 영기를 불어넣는 과정이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혈황검이 탄생했을 리 없다.
해과월은 그 점을 모른다.
그래서 그가 만든 천살검은 영기를 띄지 않는다. 유리검, 묵검, 무검…… 그가 만든 모든 검들의 특징이 바로 무척 날카롭지만 검에 영기가 없다는 것이다.
반면에 수교군은 영검을 만들었다.
물론 염사검을 만든 사람은 해망이라고 들었다. 하지만 수교군도 그 일에 가담했다. 그리고 그가 모르는 사이에 무엇인가 했을 게 틀림없다.
염사검은 수교군을 아버지로 생각한다.
그래서 해망에 이어서 수교군까지 사정을 봐주고 있다. 만약 그런 인연이 없었다면 당장 주인을 바꿨을 게다. 수교군보다 마성이 훨씬 짙은 자가 나타났는데, 저항할 리 있나. 주인을 갈아타는 게 훨씬 더 낫지.
그는 수교군보다 마성이 몇 배나 짙다.
염사검이 가장 좋아하는 검주다. 이 세상을 샅샅이 뒤져봐도 자신만한 검주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염사검이 혈기를 드러낸다.
염사검은 지금 이 순간, 마성 짙은 자와 한판 겨룸을 벌이고자 한다. 지금의 검주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고자 한다. 검주가 좋아서가 아니라 자신을 탄생시킨 장인이기 때문에 기회를 부여한다.
‘역시 영검!’
그는 유리검을 들었다.
쒜에에엑! 쒜액!
유리검이 허공을 날았다. 순간, 염사검도 움직였다.
까앙!
염사검과 유리검이 정면에서 충돌했다.
염사검은 그의 초식을 그대로 훔쳐 배웠다. 그가 펼치는 검결을 고스란히 따라 했다. 속도와 힘, 변화까지 판박이처럼 똑같았다. 그러니 두 검이 정면에서 충돌하는 것은 필연이다.
“훗!”
주한극은 짧은 탄성을 불어냈다.
무공을 수련하지 않은 수교군…… 내공이 무엇인지 모르는 수교군…… 헌데 밀려오는 검력은 절정고수에 못지않다.
그는 염사검의 뜻을 분명히 알았다.
– 가장 빨리, 가장 깨끗하게
십자로 부딪친 염사검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킨다.
‘알았다, 이놈아!’
역시 생각했던 대로다. 염사검을 탄생시킨 사람은 해망이다. 하지만 염사검에 주입된 동령을 완벽하게 일깨운 사람은 수교군이다. 그가 자신도 모르게 행한 어떤 행동이 동령을 완전하게 일깨워서 검령으로 만들었다.
이제 염사검이 주인을 배신한다.
단 한 판의 겨룸으로 주인에 대한 예의는 끝났다. 주한극의 검을 막아준 것으로 탄생의 예의를 마쳤다. 그리고 이제 더 강한 세상을 향해 비상한다.
그는 염사검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염사검의 선택이 이미 끝났거늘 무엇을 더 신경쓰는가.
퉁!
검을 살짝 밀자, 염사검이 맥없이 밀려났다.
단단하게 부딪쳐 오던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갈대처럼 맥없이 물러섰다. 그 순간,
쒜엑!
예리한 유리검이 수교군의 머리를 싹둑 잘라냈다.
퍼억! 툭! 데구르르르!
수교군의 머리가 싹둑 잘려서 땅바닥에 뒹굴었다.
그는 죽은 수교군에게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염사검, 염사검을 쳐다봤다.
‘요악한 검……’
염사검은 요악하다. 자신이 더 강해질 수 있다면 얼마든지 검주를 재물로 내놓는다.
‘후후후! 좋다. 어디 어디까지 가는지 한 번 가보자꾸나.’
그는 유리검을 놓았다. 그리고 염사검을 손에 쥐었다.
짜르르르르!
손아귀에 전율이 일어났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고요한 울림이 일어났다.
‘내 세 번째 충복……’
검령의 소리였다.
4
‘비성검문이!’
비성검문의 움직임이 거짓말처럼 뚝 그쳤다.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보지 못한다. 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도 모르는 판인데, 하물며 그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그들은 본다.
숱한 세월 동안 한시도 눈을 뗀 적이 없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자세히 볼 수 있다.
그런 눈으로 봤을 때, 비성검문이 움직임을 멈췄다.
“일로(一路), 보고 들어온 거 다 가져와!”
“넷!”
“이로, 삼로! 보고 들어온 거 없어!”
“있습니다. 곧 추려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