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111
분명 넓게 보면 사회주의적인 방향성, 그러나 향촌 지향의 인민주의자들이나, 소련과의 확고한 연결성을 가진 친소파들이 절대 택할 수 없을 민족주의적 색채라.
여기까지만 해도 심모원려로 나온 기획이겠으나, 정작 그 정책적인 방향성은 모호할 수밖에 없다는 치명적인 약점.
그를 덮는 ‘조선 민족의 생활 권역’이라는 거대한 기획.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기획을 실현시켜 줄 가장 주요한 열쇠는, 바로 소련이다.
바로 이 신문에 나온 스피리도노바다.
만일 두 사람의 그가 말하는 혁명의 확장은 곧 조선의 확장과 기묘하게 얽히고, 조선의 확장은 곧 대신파의 입지 증진과 함께 갈 것이다.
대신파 입장에서는 혁명의 확장에 아주 약간만 숟가락만 얹어 준다면, 소련의 확장적 움직임만으로도 대신파는 정치적인 이득을 볼 수 있으리라.
이 완벽한 계획, 아마 박팽년과 성삼문의 머릿속에서 나왔을 이런 정치적 기획은… 흠잡을 데 없이 훌륭했다. 김종직으로서는 그들의 약진을 막을 방법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곧 멀리서 역의 일꾼이 김종직의 이름을 외친다. 아마 말을 잘 씻기고 잘 먹여 놨다고 알려 주려 하는 것이리라.
김종직은 허섭한 지역 신문을 내버려 두고 자리를 떠난다.
곧 한양으로 올라가서… 저 대신파와 맞서 싸워야 한다.
할 일이 많다.
아무것도 아니던, 무엇도 아니던 (5)
“‘민련’이 이번에 개령과 금산으로 세를 넓혔네.”
“그거 좋은 소식이군. 선산 쪽이 김종직의 본관이고 영남 향민계의 본산 아닌가? 그를 포위하는 형세로 세를 늘린다면 영남 쪽으로 뻗어 가기에는 좋을 터이네.”
“훌륭하지 않은가? 이리 세를 크게 넓히다니 우리 ‘신숙주 동지’를 볼 때마다 느끼던 자격지심이 달아나는 기분이라네.”
“으하하학! 이건 우리 일 잘하는 병판께 드리는 상일세! 여기 한 잔 더 받게나!”
박팽년의 말이 능청스레 신숙주를 언급하자 하위지는 호쾌하게 웃으며 그에게 술을 따른다.
그 모습이… 잘나가는 동료만 빼놓고 몰래 2차, 3차 공지하는 찌질한 회사원들 같은 꼬라지였다.
조선의 병권을 쥔 박팽년과 관료 인사권을 쥔 하위지.
이 두 사람은 오늘도 그 지위에 걸맞은 품위 있는 술자리를 가지고 있던 것이다.
민련.
즉, 조선 민족주의연맹(朝鮮民族主義聯盟).
이름만 보아도 ‘만주공산주의대동맹’에서 영감을 얻었음이 분명히 드러난다.
“조직의 겉치레부터 기깔나지 않는가? 내가 지었지만 참으로 좋은 이름일세.”
“이거, 이름 도둑놈치고는 너무 교만이 하늘을 찌르는구만? 우리 겸손치 못한 이판께 벌주일세!”
“캬아! 이거 소인이 잘못한 바가 너무도 크니 그 교만한 마음만큼 큰 사발에다 따라 주시구려!”
“단번에 못 들이켜면 한 잔 더 받아야 할 걸세!”
…앞서 언급했듯 이 두 사람은 각각 병조판서와 이조판서다. 삼정승이 일정승이 된 작금에 이들의 지위는 거의 좌우의정에 비길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쯤 되는 인사들이 이리 추태를 부린다면 그 모습이 눈꼴 시린 이도 분명 있을 것이다.
“좋기는 뭐가 그리 좋은가? 어찌 자네들은 성균관 생원 시절부터 뭐 그리 달라진 게 없나?”
예를 들어 여기, 두 사람의 신선놀음에 산통을 깨는 성삼문처럼 말이다.
물론 평소에 만취 중 술병 깨 먹기가 특기인 작자가 그리 일갈하니 두 사람의 반응은 영 신통치 않았지만.
허나 곧 오늘따라 성삼문이 예민한 이유가 밝혀진다.
“듣자 하니 의욕만 앞서는 못난이들이 선산에 가서 일을 그르친 모양이네, 김종직이와 그 춘부장 앞에서 ‘마르크스주의는 무부무군’이니 뭐니 헛소리를 지껄였다는구만.”
‘무부무군(無父無君)’.
그 네 글자가 언급되자마자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투구에 술을 따르던 박팽년의 손이 멎고, 목젖이 떨리도록 웃어 젖히던 하위지는 갑자기 입을 합 다문다.
“…뭐?”
“그래! 이제야 심각성을 알겠나? 혹여나 선산 쪽의 향민계 조직을 흔들 수 있을까 싶었는데 텄네, 텄어! 저 천치들 때문에 선산 쪽에는 대신파가 발도 못 들일 터이네!”
술이 가득 찰랑거리는 투구는 바닥이 둥글어 어디 내려놓지도 못하니, 박팽년은 결국 성삼문이 계속 눈치를 주자 눈물을 머금고 술을 누각 난간 너머 화단에 끼얹어 버린다.
꽃들은 아닌 밤중에 알코올 샤워를 맞고 취했는지 흥청흥청 꽃잎들을 떨군다.
“김종직이의 춘부장이 내 기억으로는….”
“자배(子培, 김숙자의 자) 선생이시네.”
“…아니, 고작 촌부들 주제에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그분께?”
“내가 말하지 않았나? 참으로 천치에 호로자식들이라고! 다시 생각할수록 열 뻗치니 언급을 말게나!”
대체 어떤 머저리가 야은(冶隱, 길재의 호) 선생의 제자께, 포은(圃隱, 정몽주의 호) 선생의 손제자께 무부무군 어쩌고를 지껄이는 만행을 저질렀단 말인가?
게다가 대신들도 한양에서 조직을 펼칠 때, 오토 바우어 등 오스트리아 사회주의자들과 레닌의 민족 자결주의를 즐겨 언급하였으니.
마르크스주의를 가지고 무부무군이라 싸잡아 욕하면 그냥 제 얼굴에 힘껏 가래를 뱉는 꼴이다.
“아무튼, 영남 쪽 조직은 좆 됐구만.”
“…군자의 아름다운 언행을 바라지는 않겠으나 부디 말이라도 바르게 하게나.”
언제나와 같이 촌철살인으로 상황을 정리하는 하위지의 말에, 멀리 이 아수라장으로부터 떨어져 있던 이개가 푹 한숨을 쉰다.
마치 발정기 유인원의 생태를 관찰하는 박물학자 같은 표정이다.
“아무튼 간에 매죽헌(梅竹軒, 성삼문의 호)의 말이 옳으네. 단계(丹溪, 하위지의 호), 자네의 출신지가 선산이기도 하여 어찌 조직적 이점을 취할 수 있을까 기대하였건만….”
“단번에 망했군그래.”
“결국 영남에서 남은 쓸 만한 기반은 자네 본관인 진주와 매죽헌의 본관인 창녕일세. 전부 남쪽이니 김해 일대의 농업공장 지대와 가까워 곧장 친소파와 경쟁해야 할 터이니….”
이개의 요약에 박팽년, 하위지 또한 성삼문이 그랬듯 얼굴빛이 어두워진다.
순식간에 영남 조직화 사업에 적신호가, 아니 긴급 재난 경보가 뜬 것이니.
아직 조직이 제대로 꾸려진 지 2년도 채 되지 않았다.
휘하의 세력들이 워낙 다양하고, 이들에 대한 제대로 된 교육과 통제가 되어 먹질 않다 보니 이렇게까지 결정타를 먹이진 않더라도 사건·사고는 벌써 올해에만 여러 번째였다.
“…후, 결국에는 다시 유시를 내려야만 하겠군.”
“이것도 한두 번이지 우리 정도 되는 인사가 계속 자제하라, 자제하라 계속 말하면 친소파나 인민주의자들은 꼴사납다고들 조소할 게 아닌가?”
박팽년의 결정에 하위지가 답답하단 듯 외쳤으나 그도 별 대안이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다른 누구에게 통제를 맡길 것인가? 홍주의 어느 골수 유생에게? 아니면 한양의 열성적인 민족주의자 서리(書吏)에게? 대구의 딸기 농장주 나으리에게?
소작 부리던 밭들이 텅텅 비자 손 털던 땅 주인들에게서 마구잡이로 토지를 사들이고, 소련으로부터 특용작물 재배를 후원받아 대농이 된 신흥 지주들.
그들에게 땅을 판 뒤 한양으로 올라와, 대신들이 터 준 관로를 따라 조정에 진출하고들 있는 서리들.
마르크스니, 엥겔스니, 하는 불온하고 부정한 소리를 모조리 치워 버리고 싶어 하던 보수주의자 유생들.
이들이 모두 ‘대신파’라는 애매하기 짝이 없는 이름 아래 묶여 있는 처지니 결국 구심점은 파벌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대신들밖에 없다.
고로 조직에서 모난 부분이 있고, 실책이 있으면 거기에 제동을 걸 것도 대신들뿐이다.
“…종이를 가져다주겠나?”
소맷자락에서 붓을 꺼내든 박팽년이 술기운을 물리치고 팔을 걷는다. 이제 민련 조직원들에게 전달할 ‘수뇌부로부터의 조언’을 써낼 시간이 왔다.
곧, 각지에 신흥 지주들의 자금으로 깔아 놓은 기관지를 통해 박팽년이 술에 취해 써 놓은 글귀가 사방에 퍼질 것이다.
지금 쓰는 한 자 한 자가, 전국의 수천 수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임을 알기에 박팽년은 호흡과 자세를 가다듬는다.
“…우선 사고 친 작자부터 처리해야겠지.”
박팽년은 첫 한 획을 그어 나간다.
* * *
“…하여 선산에서 난동을 부리며 다른 선비들을 더러 무부무군하다고 모함한 개령의 조병태에게는 영구 제명의 처벌을 내린다.
민련 개령지부에서는 이 지시 사항을 전달받는 즉시 조병태의 연맹원 자격을 정지하고 그의 발언에 대한 공식적 사죄를 준비….”
“이건 말도 안 되는 처사요! 무부무군한 놈들에게 무부무군하다 말하였을 뿐인데, 뜻을 굽히지 않았다 하여 선비를 이리 모욕 주다니!”
개령 선비 조병태는 ‘애민애족 7월호’에 나온 박팽년의 지시 사항을 읊는 지부장에게 악을 쓰며 외친다.
“까놓고 말해 보게! 개령 조직을 누가 다 세웠나? 내가 팔 걷어붙여 가며 자네들 모아 놨더니 이렇게 뒤통수를 때려?”
“조병태 연맹원! 말을 조심하게!”
“말조심은 무슨! 개령은 어차피 다 조직되었으니 이제 이 조병태는 뒷간에다 갖다 버려 버리겠다는 거 아닌가? 박배성 지부장! 자네 입으로 한번 말해 보란 말일세!”
그래도 지부장과 한때 형 동생 하던 사이였던 만큼 조병태는 일말의 기대를 품고 있었다.
이 지역 개령의 유림들. 선산에 협동조합이 조직될 때는 콧방귀를 뀌다 농사들 한 번씩 거나하게 말아먹고 나서는 괜한 열등감과 원한에 이를 부득부득 갈던 이들.
‘박배성 말은 들으나 마나’라며, 어차피 그 나물에 그 밥인 대신들 밑으로 들어가지 않겠다던 그들을 겨우 설득해서 모은 것이 이 조병태 아니던가?
그 공로를 생각해서라도 박배성이 자신에 대해 탄원서 한번 내주지 않겠나, 하는 기대를 가지던 조병태였다.
“그래서! 이 나를 버리겠다는 거냐고 묻지 않았나?”
“…네, 그러려고 합니다.”
“뭐?”
“미안합니다, 형님.”
박배성은 의자에서 일어나 다른 연맹원들에게 눈짓을 보낸다. 그러자 조병태에게 가장 가까이 붙어 있던 두 사람이 나와 그의 두 팔을 붙잡고 끌고 간다.
“놔라! 이거 놓으란 말이다!”
“조병태 연맹원의 영구 제명을 의결하겠소. 찬성 측 손들어 보시오.”
손을 들지 않은 이는 없었다.
“연맹 상부의 지시조차 제대로 따르지 않는 이가 어찌 애국(愛國), 애족(愛族), 애군(愛君)이라는 연맹의 대의를 따를 수 있겠소? 오늘의 일이 남은 연맹원 여러분께 본보기가 되기만을 바라오.
자, 그럼 구호 외치고 오늘의 회합을 마무리하겠소.”
표결은 종료되었고, 박팽년의 의지는 관철되었다.
“조선 천세! 조선 민족 천천세!”
“조선 민족 천천세!”
* * *
“…또한 우리 민족에 헌신하고 봉사하는 이라면 모두가 우리의 동지이니, 향민계의 은근한 이족(吏族) 차별에 대하여 우리 민련은 단호히 거부하는 바이다!”
“이번 달 ‘애민애족’에 진정 그런 내용이 나온다는 말인가?”
“아, 물론이네! 역시 우리의 뒤를 봐주는 건 박팽년과 성삼문 동지뿐 아니겠는가?”
“하하하, 문과가 아니라 개구멍으로 진사(進仕) 한다며 비웃던 선비네들 면상이 보고 싶구만!”
한양의 아전들은 인근 주점에 모여 기분 좋게 숙덕거렸다.
이들 모두가 향민계와 그 휘하 협동조합의 외면 속에서 농사를 망친 이들이다. 결국 땅을 거의 내버리거나, 아예 팔아 버리고는 한양으로 상경하여 가슴 아픈 타향살이를 이어 왔다.
이들의 숨줄은 대신파가 추진한, 일명 ‘경력직 위주 채용 정책’.
아전 출신은 경향(京鄕)을 가리지 않고 취재(取才)에서 각종 가산점을 받았으며, 그 덕에 이들 모두 말직으로나마 출사(出仕)할 수 있었다.
이들에게 대신파의 성삼문이니, 이개니, 하위지니 하는 인사들은 그야말로 구원자이며 영웅이라.
또한 반대로 향민계와 인민주의자들에게는 이를 가는 이들도 적지 않았으니, 이들이야말로 한성의 민련 조직을 지탱하고 이끄는 주된 원동력이었다.
물론 향민계의 그 ‘이족 차별’이 대신파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음을 아는 이들은 이 자리에 없었다.
그 사실을 아는 자는 이미 대신파 수뇌부와 연결된 민련 핵심 인사가 되었거나, 대신파 하는 꼴을 보기 더러워 차라리 낙향을 택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우리가 이리 민련에 충성하고, 대신파에 충성한다면 뭐 하나라도 우리에게 더 낫게 돌아오는 몫이 없겠는가?”
그렇기에 이 순진하고 열정적인 이들은 그만큼 꿈을 품을 수 있었다.
대신파가 득세한다면, 핍박받던 아전들도 제각기 드높아질 수 있으리라는 희망.
“확장 정책을 펴면, 관련한 아문(衙門)들에 우리 아전 출신들이 대거 꽂힐 것이란 전망도 있네.”
“역관들도 대거 등용한다니, 나는 아들자식에게 조선말보다 일본말부터 가르치고 있다오? 하하!”
“명심하게나, 우리가 믿을 뒷배는 대신파뿐일세! 내일도 집회 날이니 다들 기억들 하라고!”
그들 모두의 눈이 그런 희망으로 반짝였다.
* * *
“…또한 모두에게 당부하니, 장차 조선국과 그 민족이 공산주의적 사회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큰 뜻에 있어서는 우리 조직 또한 동의하는 바이다.
다만 그를 성취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속도와 방향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조정의 다른 벗들이 길을 벗어났을 때 동지에게 그러하듯 야단치고 권면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다.”
“옳소이다! 원산 정부가 우리에게 종자를 제공하고 농기구를 대여하여 주거늘 어찌 다른 마음을 품을 수 있겠소!”
“병판 대감께서 연맹의 뜻을 다시금 바로 세우셨으니 우리 또한 이에 발맞춰 정진하지 않으면 아니 되오!”
“우와아아아아!”
함길도 길주의 연맹원들은 지부장이 그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환호성을 지른다.
“드디어 조직의 방향성에서 우리의 의도가 관철되었구만?”
“그럼, 그럼! 공산주의를 멀리하면 아니 되네! 저 한심한 유생들이야 시류를 읽지 못한다 하나 우리는 다르지 않겠나?”
내전 이후 금성대군에게 걸었던 베팅이 완전히 망했다 싶었던 함길도의 족장들은 다행히, 왕업을 시작한 땅의 지주들, 개국 공신의 자손들이라는 이름 덕에 완연한 패가망신을 면할 수 있었다.
허나 사병이자 소작인으로 부리던 부족원들이 코앞에 있는 부유한 원산으로 뛰쳐나가고,
원산의 착호병들이 여진인 사병 따위 하찮아 보일 무장 상태로 그들 앞에 찾아왔을 때,
함길도의 여진 족장들은 소위 말하는 ‘서열 정리’를 머릿속에서 마친 것이다.
특히 길주는 소규모이나마 원산과 조선이 건설한 농업공장이 들어서 있었으니 그 위력이 어떻게 보였을지는 더 말해 무엇하랴? 드디어 길주의 족장들에게는 모든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들은 이번만큼은 성공하리라 믿고 남아 있던 모든 판돈을 소련에다 던졌다.
그리고 이번 베팅은 옳았다.
향민계 계열 협동조합에서 받아 주지를 않으니, 각자 제 땅에다가 원산에서 지원받은 묘목들을 길러 사과와 배의 농장을 가꾸었고, 조선 각지로 보낼 농우(農牛)를 길러 재미를 보았다.
이들에게 원산과의 관계는 곧 생명 줄이었던 것이다.
“또한, 기억하라! 우리의 민족주의는 생령과 평등을 위한 것이지 사멸과 압제를 위함이 아니라! 우리는 만주인들과 일본인, 그리고 몽골인과 한인(漢人)에 대한 어떠한 차별도 용인치 아니한다!”
“우와아아아아!”
그리고 마침내, 그들에게 가장 중요했을 단락이 나오니 환호성이 쉼 없이 쏟아진다.
특히 목청 크게 천세를 외치는 이들.
오른쪽 팔에는 태극 완장을, 왼쪽 팔에는 만(滿) 자가 쓰여진 완장을 찬 이들.
그렇다. 만주족공산주의대동맹 소속 동맹원들이다.
물론 처음 이아구가 이곳의 ‘동포들’에게 ‘만주족의 몽골과 중국의 압제 아래서의 서글픈 역사’에 대해 강연했을 때 낭만적인 동족 의식을 느끼지는 않았다. 아니, 되려 비웃었다.
그러나 이후 이고납합이 ‘만주국’ 건국 이후에 그 후원자들에게 쥐어질 막대한 이권을 슬쩍 이야기해 주니, 갑자기 ‘만주인’으로서 동족들의 고통이 골수에 사무치고 위대한 민족 영웅 이만주의 서사가 혈관 속을 타고 흐르는 것이 아닌가?
이제 원산의 중재 아래 만주인들의 자치권을 확보한다면? 그곳에서도 원산의 지원 아래 드넓은 밭과 과수원과 목장을 세우고 떵떵거리며 살 수 있다면?
아, 토바리시(Товарищ, 동지) 트로츠키 천천세인 것이다!
“동맹원 여러분! 이제 알겠소? 우리에게 밝은 미래가 머지않았소! 조선 천세! 원산 천세! 만주 천천세!”
지부장이 분위기를 북돋으니 이 열광이 식으려야 식을 수가 없다.
당장 지부장부터가 시뻘건 만맹의 완장을 차고 있으니 말이다.
이 젊고 야심만만한 지부장은, 한때 호군(護軍)으로서 금성대군을 위하여 종군하였으나 소련의 한양 진공 이후 눈치가 보여 스스로 사직한 뒤 본관인 길주에서 죽은 듯 머무르고 있었다.
허나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농업공장의 진흥을 보고 발 빠르게 원산의 특용 작물 지원 사업에 적극 부역 하며 이 지역의 친소련 기조를 이끄는 선구자로 자리매김하였다.
이후 ‘만주족 민족 자본가’로서 북청 자치구와의 연계를 통해 열성적인 노동자들을 대량으로 공급받아 큰 이문을 봤고, 보답으로 북청 자치구와 이고납합 동지에게 크게 기부하여 정치적 기반을 닦아 놓았으니….
이제 길주의 이시애(李施愛)가 가는 길에 거칠 것이 무엇 있으랴?
“민련의 수뇌 박팽년 동지 천세! 혁명의 지도자 트로츠키 동지 천세! 만주인의 영도자 이고납합 동지 천세!
만주인의 복된 미래를 위하여 천천세!”
“천세 천세 천천세!”
그렇게 길주의 족장들은, 모두가 단꿈에 젖어 흥청거렸다.
이제 그들 앞에 펼쳐질 것은 오로지 밝은 내일뿐이다.
* * *
이 모든 이들, 완전히 다른 처지에 놓인 이들의 야망과 꿈과 욕망.
이들을 제대로 묶어 하나의 힘으로 결집시키는 것이 관건이다.
조병태의 동맹원 자격 박탈 소식을 들은 성삼문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성삼문뿐 아니라 대신파 수뇌부의 나머지 세 사람도 얼굴에 긴장이 풀어진 기색이 완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