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112
혹시나 지방 조직이 벌써부터 통제에서 벗어날까 두려워하던 차였던 것이다.
“이제 한시름 놓았으니, 슬슬 응접실로 자리를 옮겨 보도록 하세나.”
하위지가 손바닥을 마주치며 말하니,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네 사람은 단계(하위지의 호)의 집에 새로 꾸린, 내부를 입식(立式)으로 꾸미고 바닥에 타일을 깐 서양풍 응접실로 움직였다. 특별한 손님을 위하여 루스산 모피가 벽에 걸려 있고, 손님의 편의를 위하여 탁자와 의자를 갖춰 놓고 있었다.
탁자 위에 올라간 백자 화병에 장미꽃이 화려하게 붉었다.
네 사람은 각자 자리에 착석한다. 남은 자리는 상석의 두 좌석뿐.
“…이제 시간이 되었네. 곧 있으면 ‘귀객(貴客)’께서 오실 터인데 준비는 되었나?”
“물론이네. 한 마디, 한 마디에 실수가 없도록 주의하게나. 특히 단계, 취금헌(박팽년의 호)! 자네들 얘기일세!”
이개의 질문에 성삼문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머지 두 사람에게 주의를 준다.
둘은 역시 ‘내가 매죽헌(성삼문의 호)이에게 저런 소리를 들어야 하나?’ 싶었으나, 저지른 죄과가 워낙 많으니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렇게 긴장된 침묵이 이어지다 잠시 후, 대문으로부터 왁자한 소리가 나고 고용인들이 손님을 맞이하며 요란을 떤다.
곧 문이 열리고,
“…여기가 조선국 이조판서 하위지 동지의 저택이 맞소?”
들어오는 ‘귀빈’.
하위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이며 예를 갖춘다.
“먼 곳에서 손이 오셨으니 어찌 개문영입(開門迎入)하지 않을 수 있겠소? 집주인 되는 하위지라 하오.
소련국 제2 외무인민위원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 스피리도노바 동지께 인사드리오.”
그리고 고개를 다시 들어 올리며 하위지는 말끔한 영업용 미소를 지어 보인다.
멀리 러시아에서, 그리고 원산에서 찾아온 사회주의 혁명가를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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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니던, 무엇도 아니던 (6)
“여러분의 초대를 영광으로 생각하오.
원산 제1 문인 소비에트 대표이자, 전 연방 소비에트 대회 의원이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맹 제2 외무인민위원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 스피리도노바라고 하오. 조선의 여러분은 부디 서필의(西必義)라고 불러 주시오.
여기는 나의 보좌관 유자광이오.”
“조선국의 판서 대감들을 뵙습니다. 유자광이라고 합니다.”
“자, 멀리서 오신 손들을 이리 오래 세워 둘 수야 없지요! 여기 상석에 앉으십시오.”
“세심한 배려에 감사하오.”
그렇게 여섯 사람, 네 명의 조선인과 두 명의 원산인이 자리에 앉았다.
“한양을 보니 지난날 일본 제국의 악의적 프로파간다에서 보았던 궁벽한 야만의 나라 따위는 없었소. 위대한 계몽 군주 아래, 그대들 같이 신념에 찬 신료들이 오로지 인민의 번영과 복지를 위하여 봉공하니 조선 왕국은 앞으로도 번영할 것이라 믿소.”
“위대한 혁명가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기쁘기 그지없소.
원산이야말로 마르크스가 이야기하던 경제의 민주적 통제가 이루어지며, 직군별 소비에트로부터 상향식으로 올라가는 프롤레타리아적 민주주의가 실현되었으니 파리 코뮌이 해동 땅에 다시 열린 것 아니겠소이까?”
주거니 받거니, 사회주의자가 전제 군주를 ‘위대한 계몽 군주’라며 립 서비스하고, 유학자는 마르크스를 인용하여 파리 코뮌 운운하니 멀리서 보면 촌극이다.
아무튼 아름다운 이야기들로 서로에게 금칠을 해 주며 대화의 시동을 거니, 잠시 뜸을 들이던 성삼문이 주인인 하위지에게서 바통을 이어받는다.
“…우리가 동지를 이 자리에 모신 이유는 이미 능히 짐작하시리라 생각하오.”
그리 이야기하고, 성삼문은 잠시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소책자 하나를 집어 들고는 스피리도노바에게 건넨다.
“우리 ‘민련’의 강령이오. 동지께서 보시기에 다소 부족한 바도 있을 수 있겠으나 우리는 조선 사회의 안정을 유지하며 차근차근 이뤄지는 공산화를 바랐소.
우선 조선인들은 부르주아지적 생산 양식을 불완전하게나마 접하면서… 아니오. 그 부분은 건너뛰고 바로 본론으로 건너가겠소.”
성삼문은 빠르게 소책자의 책장을 넘기며, ‘본론’에 해당하는 부분이 있는 곳을 펼친다.
―‘조선 민족의 생존권 보장!’
―‘대륙으로부터의 분리 독립!’
…스피리도노바의 눈빛이 순간 파르르 떨리는 것을 감지했으나, 성삼문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그저 이야기를 이어 갈 뿐이다.
“우리는 동지의 논의를 매우 주의 깊게 살펴 보았소. 마침 우리와 같은 시점에, 같은 계기로, 같은 주장을 펴게 되었으니 이는 단순한 우연이라 생각되지 않소. 이는 오히려 필연이라 할 수 있을 것이오.”
“…생존권? 보장?”
이상하다? 반응이 왜 이러지?
왜 스피리도노바 동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가는가?
“그렇소. 서필의 동지의 혁명 전파 전략은 곧 세계적인 확장을 통해 조선과 원산의 영향권을 확대하고 그로써 중원의 패자들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지키고 혁명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단 주장 아니겠소?
이는 우리 민련의 주장과 큰 틀에서 상통하는 것이 아니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 ‘흥미로운’ 주장이라 보오.”
스피리도노바가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곧 박팽년이 옆에서 성삼문의 말을 거든다.
“그렇기에 우리는 제2 인민 위원 동지에게 더더욱 호기심과, 궁금증을 가졌었소. 우리 당파의 노선과 앞으로 원산의 활동이 얼마나 합치할지, 어떤 협력이 장래에 가능해질지에 대해 말이오.”
“그랬… 었소?”
“혹시 서필의 동지의 자세한 구상을, 혁명 수출에 대한 계획을 들어 볼 수 있겠소?”
그렇게 본격적으로 박팽년에게서 질문이 들어오자, 스피리도노바는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 뜬다.
“…좋소. 나의 설명이 그대들의 호기심을 해결하기에 충분하길 바라겠소.”
* * *
순간 스피리도노바의 눈앞에 대신들의 인중에서 칫솔 모양 콧수염이 자라나는 환상이 보이다 말았다.
민족의, 그것도 ‘우리 민족’의 생존권….
사회주의로의 연착륙… 덜 급진적인… 부르주아를 안고 가는….
레벤스라움(Lebensraum, 특히 나치가 강조한 게르만 민족의 영토 확장 정책)…?
민족 사회주의(National Socialism, 나치즘)…?
하나같이 1936년에서 직통으로 날아온 사회주의자에게는 가혹한 단어 선택들이다.
사실 스피리도노바를 ‘과학적 사회주의자’라고 하기에는 애매하다.
급진적 테러리즘에, 마르크스의 과학적 인식 약간을, 거기에 인민주의 등 러시아 고유 사상의 영향을 고루 받았으니 ‘사회주의자’라고 뭉뚱그려야 그의 사상을 표현할 수 있겠다.
하지만 굳이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더라도 눈앞의 상황은 충분히 기괴하게 보인다.
.―“우선 중국 중심의 지배 체제가 이 동아시아의 후진성을 유지하는 주요한 원인이라 보았소. 마르크스 동지가 몽골의 루스 지배가 루스를 퇴락시켰다 말한 바와 같이 말이오.”
―“고로 혁명은 곧 조선 민족의 독립과 떼놓을 수 없소.”
파시즘을 사회주의와 가르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민족’이다.
단순히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게 다가 아니다. ‘민족’을 단위로 세계를 재구성하려 한다는 것이 파시즘의 요체다.
―“헌데 오늘날의 조선 민족은 명국의 경제적 약탈로 크게 낙후되어 있으니, 이를 재건하는 와중에 발생한 농촌의 애국적인 자본가들을 어찌 탄압일로로 대할 수 있겠소? 소련 또한 그들을 지원하지 않았소?”
사회주의자들은 전 세계의 노동 계급을 위해 싸운다. 그를 위해 각국에서의 계급 투쟁을 지원하고 국제적 연대를 통해 세계적인 혁명과 공산주의를 꿈꾼다.
…하지만 파시스트들은 뭘 바라는가? 민족의 번영이다.
자본가와 노동자는 싸우지 않고 ‘협력’해야 한다. 같은 민족이니까.
이… 수용소 없는 나치들 같으니라고.
맙소사, 아니, 젠장. 정말 이게 혁명의 수출과 ‘큰 틀에서 상통’하는 바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소련의 지원을 받아 발전하는 농업 자본가 계급에서 자금을 지원받아 계급 타협 노선을 꾀하고, 거기에 민족주의적 확장 정책을 더하면? …이게 파쇼와 뭐가 다르단 말인가?
…아니, 아니다.
이들은 전근대 사회를 변혁하고자 하는 이들이니 레닌… 빌어 처먹을 레닌과 스탈린을 잘못 주워 먹고 민족주의를 지향할 수도 있지 않은가? 거기에 바보 같은 신경제정책의 선례를 더하면….
저, 끔찍한 혼종이 무슨 과정을 거쳐 나왔는지는 대강 알겠다.
결국 저들의 입장 자체만 뜯어보면 공산주의에 적대하지도 않고.
자본가의 발흥과 그에 대한 지원 역시 과도기적인 것일 뿐이라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이는 원산의 정책과도 크게 엇나가지 않으니….
…그래, 이해할 만하다. 아니. 이해해라, 마샤(Маша, 마리아의 애칭).
어찌 되었건 간에 스피리도노바의 주장에 관심을 가져 주니 앞으로 이어질 소련의 대외 정책 기조를 홍보할 아주 좋은 기회가 되지 않겠는가?
그리 생각하며 애써 스피리도노바는 쓰린 속을 달랬다. 정신을 차려야만 했다.
원산이 조선에 달라붙은 작은 도시 국가인 이상, 양국 간의 우호 관계 유지는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 아니겠는가?
그래, 크게 염려하지 않아도 괜찮다. 저들의 방향성을 소소하게 교정해 주는 것쯤이야 훗날에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지금은 더 급한 일이 있으니까.
스피리도노바는 곧 어색한 침묵이 쌓이고 있음을 깨닫고 서둘러 입을 열었다.
“여러분의 호의와 관심에 감사하오. 그러나 우리 소련의 대외 확장 정책은 식민지 개발보다는 사회주의 형제국들의 건설에 가깝다 할 수 있겠소.”
“아, 그거야 물론인 말씀이오. 그렇게 소련의 강역을 넓히는 것 아니겠소?”
“…약간 이해가 다른 듯하오. 영토 확장이 아니오. ‘혁명 수출’이오.”
어리둥절해하는 판서 대감들의 모습을 보고, 스피리도노바는 잠시 속으로 한숨을 쉬다 설명을 이어 간다.
“당장, 원산과 조선만이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형제 국가로서 유이하게 존재하지 않소?”
“그 말이 옳소.”
“원산은 고작 하나의 마을 수준이었으나 찬탈자를 물리친 뒤 이 땅에 적법한 국왕 전하의 지위를 되돌려 놓았소.
그로써 우리는 공산주의를 향하여 전진하는 조선을 목도하게 되었고.
그렇게 원산은 조선과의 경제적 연결을 통해 제대로 된 근대적 산업을 이룩할 수 있었소. 생각해 보면, 1만 5,000명만으로 철도를 건설하고 조선소를 세우며 수력 발전기를 가동시킬 수 있었겠소?”
가능할 리가. 원산과 조선이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이자 그 양적인 확대는 질적인 도약으로 이어졌다.
“그와 같이 우리는 세계 곳곳에 조선과 같은 사회주의 형제 국가들을 세우려 하오. 각지의 피착취 계급들을 해방시키고, 문명의 진보와 발전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지금 근방에서도 만주족들의 민족 해방 운동과 일본에서의 비밀 결사가 꽤나 성장하고 있지 않소? 그들도 마땅히 세계 혁명을 향해 함께 나아가는 동지로서 후원할 것이고.”
그렇게 세계 곳곳에 소련의 가맹국들이 생긴다. 중근동과 아랍 세계에,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 유럽에, 남북 아메리카와 오세아니아에.
그리하여 전 세계에 붉은 깃발이 휘날릴 때까지.
스피리도노바가 잠시 후 간단한 설명을 마쳤을 때,
대신들의 표정을 굳어 있었다.
“내, 한 가지만 물어보아도 되겠소?”
“질문은 언제든 환영이오.”
이개는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토한 뒤 입을 움직인다.
“세계가 소련의 기치 아래 서게 된다면…
조선은 어찌 되는 것이오?”
짧은 질문이, 응접실 안의 있는 모든 소음을 총알처럼 꿰뚫어 죽였다. 아주 잠시 동안이었지만 모든 소리가 사라지고 영원할 것 같은 침묵이 테이블 위에 내려앉았다.
“…그야, 조선의 선택에 달려 있을 것이오.”
“선택에 달려 있다 함은….”
“조선이 소련에 가입하려 할 수도 있을 것이오. 그렇다면 원산과 다른 형제국들처럼 조선도 세계 혁명을 향한 여정의 동지자가 되겠지.
물론, 그를 거부한다 하더라도 조선은 언제까지나 원산의 최우방일 것이오.”
침묵을 깨졌으나 분위기는 달라지지 않았다.
모두가 스피리도노바의 대답을 이렇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장래의 조선에 대한 고려: 없음.
* * *
뭐, 중간에 어색해지던 순간이 있었으나 회담은 그럭저럭 마무리되었다.
조선인들은 소련의 확장 정책 이후로 조선의 영향력이 감소할까 걱정하는 듯했으나, 그건 사실 원산 내부에서도 조금씩 일고 있는 주장이기는 했다. 차마 드러내 놓고 말하진 못하지만.
당연히 아시아의 그닥 크지 않은 반도 국가와, 작은 도시 국가는, 소련이 하나의 세계가 된다면 그 일부에 불과하게 되리라.
…하지만 그건, 이후에 고민할 문제였다. 소련의 세계 정책에서 조선과 원산의 영향력 상실을 고민할 정도까지 가려면 최소 10년? 아니면 수십 년은 더 기다려야 하리라.
아무튼, 그 뒤로도 이런저런 이야기들은 이어졌다.
―“저희 조선국에서도 소련과의 제도적 호환성을 위하여 소련의 부처에 맞게 이런저런 자료들을 분류하고 정리해 두었소.”
“그게 정말이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행정적인 재앙이 있었다 들었소만….”
“하하, 우리 조선 또한 그 문제를 해결하려 발로 뛰었다오. 손께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소.”
스피리도노바의 업무는 세계 혁명, 즉 병조와 예조에 걸쳐 있는 업무다.
하여, 저들 또한 그러한 스피리도노바의 업무 영역에 맞춰 관서 하나를 더 차렸으니 그 이름도 혁명수출국(革命輸出局)이다.
아무튼 초대에 감사를 표하고 나오니, 바로 내일이 정식으로 조선 국왕 앞에 입조하는 날이다.
“마리아, 이제 숙소로 돌아가십니까?”
“아니, 그 혁명수출국이라는 곳부터 먼저 들러 보려 하네. 곧 있으면 조선의 관료들이 퇴청하는 시간이라니 걸음을 좀 서두르지.”
그렇게 몇십 분을 걸었을까? 문득 돌아보니 거리에 기묘한 갓과 청색, 녹색 관복 차림의 남성들의 비중이 높아진다.
관청들이 가까워진 것이다.
마침내 도달한 곳은 육조 거리 뒤편의 어느 작은 기와 건물. 어떤 특이할 장식도 없이 단조로운.
민가들은 점차 화려해지는 가운데 관청들이 역설적으로 소박함을 유지하는 현상이 흥미롭다.
스피리도노바는 잠시 긴장한다.
관원들이 있을까? 있을 것이다. 첫인상은 중요하다. 유자광도 그를 깨달았는지 새삼스레 옷매무새를 단정히 한다. 그래봐야 양복이라 저들은 신경도 안 쓸 텐데.
아무튼 헛기침을 몇 번 한 뒤, 스피리도노바는 문을 밀친다.
…그리고 관헌이 텅 빈 것을 확인한다.
“…여기가 아닌가?”
“아뇨, 맞습니다. 앞에 현판도 제대로 적혀 있습니다.”
뭐지?
이게 뭐지?
상황 판단이 되지 않아 잠시 행동이 정지된 스피리도노바의 뒤에서 “뉘신지요?”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반가운 마음마저 느끼며, 스피리도노바가 돌아보니 초록색 옷을 입은 젊은 관료다.
“나는 소련 제2 외무인민위원… 아니 되었네. 이번에 조선으로 파견 온 원산의 판서일세. 이곳이 혁명수출국 맞는가? 자네는 혁명수출국의 관원인가?”
“아! 예, 맞습니다. 아니, 저는 그저 병조의 말직 관원이오나 이곳은 혁명수출국이 맞사옵니다.”
“…자네도 혁명수출국 관원이 아니라고? 왜 이곳은 비어 있지?”
“아, 그게….”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이곳 말고도 소련의 관제에 맞춰 이런저런 관서들이 신설되었다.
예를 들어 산업인민위원회에 대응하는 상공국(商工局)이, 사회복지인민위원회에 발맞추는 구민국(救民局)이 세워졌다.
이곳들을 중심으로 관련 업무에 종사하는 육조와 그 속아문의 관원들을 겸직시켜, 원산에서 해당 인민위원회의 인사들이 파견될 시에 보좌를 맡긴다.
동시에 해당 인민위원회의 업무 분야에 맞게 업무 자료들을 정리하고, 필요할 때는 그렇게 정리된 정보를 소련에 통지한다는 꽤나 괜찮은 기획 의도를 토대로 설계한 체계였다.
그리고 웬만한 기획은 망하기 직전까지는 좋아 보인다.
관원 전부가 겸직 체제로 굴러간다. 왜냐하면 설계 의도가 ‘이미 있는 자료들을 소련 관제랑 맞게 정리하는 것’이니까.
자료의 허브(hub)로서 독립적인 관원을 배치할 필요는 없다는 판단이 선 것이다.
여기에 더해, 갑작스레 업무를 더 떠안게 된 관원들은 해당 기관들을 ‘대강 업무 끝나고 자료 몇 개 원본이나 필사본으로 던져두는 곳’으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그 자료를 관리하고 정리할 독립적인 관원이 없다? 그리고 책임 소재도 예조니, 병조니 하며 여러 관청에 애매하게 퍼져 있다?
결과는 뻔하지 않은가?
스피리도노바는 혁명수출국의 전각 중 한 곳의 여닫이문을 열었다.
그 안에 층층이 쌓여, 바닥부터 천장까지 무질서하게 얽힌 수천 장의 서류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게 내 관할?
…내가 정리해야 할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