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113
“…그러면 자네가 가지고 온 자료는 무엇인가?”
“아, 이게 나마자(羅馬字, 로마자)로 쓰여 있어 대강 혁명수출국 관할의 것이라 생각하고 보관하러 온 것이라….”
“그러면, 그 내용도 모르면서 여기다 놓으러 왔다는 건가? 이… 더미에?”
스피리도노바가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서류의 무덤을 가리키자 관료는 면목이 없다는 듯 급히 고개를 숙이며 자신이 가져온 서류를 내밀 뿐이었다.
“아, 아직 예조에 나마자나 서역어에 능한 이가 많지 않아 생긴 불찰이오니 부디….”
“그래, 그대들의 사정은 이해하겠네.”
그래, 그럴 수 있다. 임기응변에 따라 돌리다 보니 행정이 엉망진창으로 꼬인 건 사실 원산도 마찬가지 아닌가?
저 많은 자료도 책임 소재가 애매한 채 쌓여 왔으니 몇 달 동안 적체가 있던 것쯤은 이해해 줄 수….
급히 머리를 식히며 스피리도노바가 서류를 받아 든다.
―‘밥 에드워즈가 급히 보냄.’
―‘아니, 몇 달째 부탁했는데 지원은 대체 언제 옵니까? 혹시 조선이 멸망했습니까? 리투아니아인들이 또 쑥대밭으로 만들어 놔서 구휼 작업에만 어마어마한 부담이… …루스 농민들이 망하기 직전….’
―‘료바, 당신이 나한테 이러기 있습니까? 내가 얼마나 개처럼 일하고 있는….’
아니, 취소한다.
편지 속 에드워즈의 비명에 스피리도노바의 눈동자가 미친 듯이 흔들리자, 사태를 짐작한 예조의 파릇파릇한 관원은 온몸이 얼어붙고 유자광은 안절부절못한다.
―‘…요청 사항은 지난번에 보낸 편지 내용에서 한 1할 정도 추가하면 됩니다. 제 요청 사항을 기억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지난번에… 보낸… 편지…?
손에 들린 에드워즈의 분노 가득한 편지를 한번 보고,
나머지 편지가 어딘가 묻혀 있을 혁명수출국 내부를 한번 보고.
…저기 …어딘가에 …요청 사항들이 있다?
“일을, 일을 어떻게… 이따위로 처리하나!!!”
이성의 끈이 끊어진다.
* * *
/ 작가의 말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 스피리도노바가 속했던 (좌파) 사회혁명당(Партия социалистов―революционеров)은 기존의 인민주의자들을 주축으로 창당된 뒤 다양한 사상적 혼합을 겪었고,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그 이념적 계보가 그리 뚜렷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스피리도노바의 사상 또한 ‘마르크스주의’ 또는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분류 안에 말끔히 정리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이러한 지점은 레닌이나 트로츠키 같은 여타 러시아 제국의 혁명가들에게도 어느 정도 통용되는 사항이기도 합니다.
파시즘은 20세기 초의 어떤 운동, 조류를 통틀어 일컫는 용어로서, 분명한 사상적인 정의와 실체가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것이 사회 보수주의자, 권위주의자, 계급적 혁명에 대한 전망을 저버린 사회주의자 등 다양한 주체들을 흡수하고 묶어 내면서 보인 특정한 경향성과 특징을 서술할 수는 있겠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파시즘은 일반적으로 민족이라는 유기적 실체를 구성하고 그를 통해 세계를 구성하려 합니다. 민족은 하나의 몸처럼 움직여야 하기에 계급 간 투쟁 등의 ‘내분’은 부정되며, 그렇기에 계급 타협적인 경제 정책 속에서 민족적 영광과 단결, 권위와 힘을 숭상합니다. 민족의 일부로서, 각 개인은 그러한 민족과 국가와의 관계 속에서 삶의 의미와 동력을 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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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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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우리에게 관심이 있다 (1)
레닌그라드.
루스의 모든 도시 중에서 가장 성대하고, 가장 위엄 있는 도시.
그곳에는 카간에게 통치권을 일임받아 루스 전역의 차르로서 군림하는 나선부총관(羅禪府總管)이 자리하고 있다.
이 근방의 모든 군주의 군주로서, 총관 로버트 밥 에드워즈는 높다란 옥좌에 앉아 단 위에 오른 조선과 원산에서 파견된 제신들을 굽어보았다.
그리고 다시 그 아래에는 고개 숙인 사절단이 있었다.
그 막대한 권력과 권위, 그리고 온 기독교 세계의 공후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이치고는 통치자다운 위압감이 부족했으나, 에드워즈 총관 전하는 여전히 명실상부한 새로운 루스의 차르였다.
“레닌그라드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위대한 루스의 총관 전하를 뵈옵니다.”
노브고로드에서 온 이들은 자신들의 지배자에게 공손히 절을 올린다.
몇 가지 공손함과 충성심을 드러내는 가식적인 인사치레들이 오간 뒤, 노브고로드의 포사드니크(поса́дник, 시장) 이사크 안드레비치 보레츠키(Исаак Андреевич Борецкий)는 곧장 본론으로 넘어갔다.
“…총관 전하, 지금 저희 노브고로드는 전하 말고는 믿을 바가 없습니다. 주님께 맹세코! 저희는 총관 전하께 충성을 다하여 함께 싸울 것입니다!
”그대들의 충성심을 잘 알겠습니다. 총관부는 곧 노브고로드 공국에도 지원 인력을 보내고 재건 사업을 위한 자금을 제공할 것입니다.
또한 아직 완공되지 못한 요새들의 건축에 박차를 가할 테니 그대들로서는 정부에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할 것입니다.”
“봉신으로서 당연한 의무입니다. 전하께서 루스에 이런 선정을 베푸시니 루스인들 모두가 총관 전하의 자비를 노래할 뿐입니다!”
“잠시 후에 그대들을 환영하는 연회가 열릴 예정이니 부디 자리를 빛내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편히들 쉬십시오. 총관부는 그대들을 환영합니다.”
“감사합니다, 총관 전하!”
일이 순식간에 성사되자 보레츠키는 허리를 숙일 수 있을 한계까지 깊이 숙여 절한 뒤, 희희낙락한 얼굴로 알현실을 나섰다.
누군가는 그의 태도가 비굴할 정도로 순종적이라 흉을 보리라.
노브고로드가 지난 200년 동안 몽골의 침공에서 비교적 안전했음을 생각한다면, 뭇 서유럽인들은 노브고로드의 태세 전환에 의아한 마음을 감추지 못할 것이다.
누군가는 보레츠키가 총관부의 입김 아래 베체(Ве́че, 민회)에서 권력을 회복해서 그렇다고 비난하리라.
본래 도시의 지도자였던 대주교좌가 몰락하고, 바실리 2세가 노브고로드 공작위에서 축출되면서 노브고로드에도 친(親)몽골 인사가 새로 선출되었다고 말이다.
다 계산이 안 되는 바보들이라 그렇다.
레닌그라드가 어디에 세워졌는가? 노브고로드의 한구석, 루스의 맨 끄트머리다.
그곳으로 향한 수천 명의 동양인들, 마찬가지로 일자리를 찾아 모인 수천의 루스인들과 원주민들.
그들의 생필품은 누가, 어떻게 공급할까? 사치품은? 도시 건설 도중에 부족한 부속품은?
다 노브고로드 상인들의 몫이었다.
몽골 제국의 교역로 재건으로 인해 동방에서 밀려들어 오는 사치품들, 거기에 대규모 토목공사와 신도시 형성?
이교도가 팔든, 무덤에서 일어난 표트르(Пётр, 베드로)가 팔든 동양제 비단과 도자기는 여전히 부르는 게 값이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이름이 새겨져 있든, 뭔가 알아먹지도 못할 동양 문자가 새겨져 있든 은괴는 은괴다.
…아니, 잘못 말했다.
부활한 표트르가 주는 자기 그릇? 황제의 은화? 그깟 것들보다 이교도의 특상 도자기와 순도 높은 은괴가 훨씬 낫다!
수익이 이대로만 나와 준다면 보레츠키는 사실 카간이 예수의 동생 정도 된다는 새로운 교파를 창설할 의향도 있다. 아마 베체는 찬성할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쌓인 부를 이번에….
“망할 리투아니아 놈들. 저놈들은 도움이 된 적이 없어!”
―핑.
“젠장!”
약탈하러 온 리투아니아 놈들이 맛있게 먹었다.
아마 앞으로 요새들이 완공되면 찔러 보지도 못할 테니 한번 정탐이나 겸해서 휩쓸어 보려는 속셈이었으리라.
분명 카간이 오기 전까지 모스크바 대공을 견제해야 한다며 카지미에시와 밀월 관계를 구축하려 했던 그이지만, 지금 그 작자는 보레츠키에게 한낱 마적 떼 무리에 불과했다.
솔직히 말해 얼마 전까지는 그래도 카간의 지배라니, 아무리 실익이 커도 찝찝하다 생각하기는 했다.
배부른 소리. 몽골 제국 치하에서 등 따숩게 흑자 보던 때가 좋았다.
결국에 몽골 제국은 교역로를 주었고, 리투아니아인들은 도적 떼를 주었다.
“이교도 차르로부터 우릴 구원한다고? 그 차르가 우리에게 빵을 준단 말이다!”
“맞습니다! 우리 노브고로드의 보야르들이 총관 전하 아래 일치단결하여 저 망할 침략자들을 물리쳐야 합니다! 총관 전하께서 요새를 건설하신 부근은 멀쩡하지 않았습니까?”
―핑! 핑!
함께 사절로 온 미하일(Михаи́л) 역시 분기를 이기지 못하고 외친다.
사절단은 숙소로 돌아와 곧 있을 연회를 위해 중요한 예행연습을 하고 있었다. 낯선 세계에서 온 지배자들의 마음에 흡족할 세련된 몸가짐을 익히는 과정이었다.
사절단의 대표라 할 수 있을 두 사람은 특히 그 준비가 철저했다.
“플레스코프 공국 놈들은 벌써 손놀림이 자유자재라고 하더군. 결코 밀려서는 안 된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레닌그라드에서의 독점적 모피 판매권을 놓칠 수는 없습니다! 이미 꿀과 생선의 판매권을 플레스코프에 빼앗기지 않았습니까?”
―핑그르르….
“젠장! 이 망할 콩 쪼가리! 이 바보 같은 짓거리를 관두고야….”
“각하, 지금 플레스코프의 대공은 무려 ‘두부’까지 집을 줄 안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그로 인해 권람 각하에게 크게 칭찬받아 생선 판매권 획득에 영향을 끼쳤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나도 아네.”
보레츠키는 순간 내던지려던 젓가락을 다시 쥐고서, 한 알 한 알 다시 콩을 옮기기 시작한다.
지배자들의 새로운 교양을 익히기 위하여.
* * *
“폴란드 국왕이자 리투아니아의 대공, 위대한 카지미에시 만세! 이건 대승이야!!!”
“우… 우와아아아아! 리투아니아 만세! 예수스 크리스투스(Jezus Chrystus) 만세!”
“이번 정벌은 대성공입니다! 이렇게 막대한 부라니… 아마 적들 또한 거대한 상흔을 입었을 것이 뻔합니다!”
“이교도 카간의 악명 또한 결국에는 과장이었군요!”
“그리스도의 칼 아래 적들이 혼비백산하는 꼴이란 너무도 우습더군!”
…혹시라도 몽골군을 마주칠까 재빠르게 총관부 거점지만 피해서 기독교인 마을과 상단만 털었던 주제에? 낯짝들이 상당히 두꺼운 기사들이다.
그리 생각하면서도 카지미에시 4세 역시 광대뼈 쪽 근육이 기쁨으로 씰룩거리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저 화려한 중국제 도자기에, 각종 향신료, 그리고 어마어마한 은화라니?
물론 중국제가 아니라 조선제였지만 그런 건 서융의 카지미에시 따위 알지 못했다.
중요한 것은 어마어마한 이윤뿐.
“잠깐의 정벌이었네. 고작해 봐야 중소 도시들 몇 개를 불태우고 약탈한 것뿐이었는데….”
레닌그라드와 국경 근방에 요새들이 건설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결정한 약탈… 아니, 이교도 정벌이었다.
목적도 제대로 된 전쟁 전 적진 흔들기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고, 전쟁을 바라는 유럽의 압박을 조금이라도 해소해 보려 일으킨 무리수였다.
애초에 노브고로드는 충분히 회유해 봄 직한 세력이다. 그들을 공격하는 것은 좌충수일 수도 있었으리라. 교황과 귀족들의 은근한 압박만 없었더라도 이런 위험 부담은 감수할 바가 아니다.
…라고 생각했던 순간이 그에게도 있었다.
레닌그라드라는 도시가 건설되며 노브고로드가 막대한 이익을 보았다는 사실은 알았다.
또한 루스의 새로운 차르가 동방에서 어마어마한 재부를 가져온 바 또한 이미 확인한 바다.
첩보로도, 민간의 움직임으로도 쉬이 알 수 있는 사실들이었다.
다만 알 수 없던 것은 그 정도와 규모.
심지어는, 어느 장인의 말도 안 되는 솜씨로 제련된 것 같은 금속을… 그냥 길에다….
“자네들 이걸 보게나! ‘철의 길’을 가지고 주조한 검이라네!”
“역시나, 나도 그걸 뜯어 왔어야 했는데!”
“자네는 은화를 잔뜩 쟁여 와 놓고 뭘 아쉬워 하나?”
연회장에서 한 멍청이가 술에 취해 칼을 뽑아 든다. 그 선명하고 서늘한 광휘에는 이교도에 의해 벼려진 날카로움이 담겨 있다.
이리 막대한 부를, 자원을 갈취해 왔으니 저들 또한 혼란에 빠져 있으리라. 여세를 몰아 곧 다시 한번 쳐야 하리라.
그 생각에 카지미에시는 흡족하게, 술잔을 다시 입에 가져간다. 오늘은 취할 만한 날이다.
* * *
“징하군. 정말 철로까지 뜯어갔습니까?”
“네, 리투아니아군이 오갔던 경로를 따라 철로들이 심각하게 훼손되어 있었습니다. 허나 벌써 침략 이후로 몇 달이 지났으니 이제 대부분 복원되었습니다.”
“습격 중에 교통 인프라를 파괴한다는 고급스러운 전략까지 구사할 줄 아는 적들이오. 유럽인들에 대한 평가를 상향 조정해야만 하겠소.”
김시습의 보고에, 바토르스키가 단평을 던지니, 에드워즈는 한숨을 쉬면서도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설마 그냥 선로의 연철 자체가 탐나서 뜯어 갔다는 무식한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아무튼 리투아니아인들의 시대를 앞서간 초토화 작전(아님)에 다들 감탄하고 있는 사이, 권람이 슬며시 가장 짜증스러운 소식을 전달한다.
“전체적으로 보면 피해는 그닥 크지 않으나 시멘트 공장이나 벽돌 공장 인근으로 농민들이 모여들고 있소. 아마 그곳을 안전지대라고 생각하는 것 같소.”
“…구휼은 제대로 되고 있습니까?”
“일단 담요는 덮어 주고, 감자죽 정도는 먹이고 있소. 하지만 이들에게 농기구를 나눠 주고 인근에서 농사를 시키려면… 저들을 굶기지는 않겠으나 우리가 바라는 농민 공동체로 조직할 자원은 아직 없소.”
“소련에서 연락이 제대로 오지 않은 지는 얼마나 되었습니까?”
“한… 2년쯤?”
“젠장, 딱 한 번만 더 보내 보죠.”
…트로츠키가 우릴 버렸나?
누구랄 것 없이 그런 생각이 한 번 들기 시작하니 걷잡을 수가 없다.
아니, 지원을 보내 줄 수 없으면 보내 줄 수 없다는 답변이라도 와야 할 것 아닌가?
뭔가 통신이 막혀 있나?
“분명 서신은 제대로 전달되는 게 맞습니까?”
“물론이오. 우리가 보낸 서신은 분명 상인들 편으로 조선 의주까지 도달할 것이오. 저들도 돈을 벌어야 할 테니 조선까지 갈 것이고. 그러면 의주 동헌에 서신을 전달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소?”
권람이 단언하자 에드워즈는 다시 머리만 아파 온다. 권람의 확언이 의심스럽기도 하고 그렇다.
물론 권람은 옳다. 정보 적체는 조선에 도달한 그 뒤에 있었으니까.
* * *
“조선 국왕 전하, 전하를 알현하는 제 꼴이… 말이 아니오나 조선과 소련을 위한 급한 업무를 처리하느라 이렇게 되었으니 부디 양해를 부탁드리옵니다.”
그렇게 시작된 스피리도노바의 보고는 우선 한양 조정을 뒤흔들었다.
지난 농업진흥위원회의 관리 문제 이후 계속 미봉책으로 이어지던 조선―원산의 행정 폭탄 돌리기.
분명 폭탄을 만든 건 트로츠키와 조선인들인데, 그걸 직격타로 맞은 건 엉뚱한 스피리도노바였으니 어찌 억울하지 않을 수가 있겠나?
일부러 최대한 초췌한 꼴로, 머리는 약간 산발로 흩어 놓고, 눈과 볼 아래쪽에는 약간 검게 화장하여 더욱 움푹 팬 용모로 나왔다.
그러니 이럴 때 한번 대놓고 불 질러 봐야 하지 않겠나?
“…나선 총관으로부터 들어오는 서찰이 몇 달 동안이나 적체되어 있었다고?”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지금 예조에 나마자를 읽고 깨친 이들과 영어, 불어를 능통히 할 줄 아는 이들이 극히 드물어….”
“하하, 인재가 드물면 드물다고 되는 일인 줄 몰랐소? 내가 트로츠키 동지에게 이 일을 전달했을 때 트로츠키 동지에게 예판이 포기 못 할 만큼 ‘드문’ 인재인지 꼭 한번 확인해 보고 싶구려.”
“…송구하옵나이다, 전하”
“아니지. 나와 그대는 이미 세 나라의 언어를 할 줄 아니 앞으로 나에게 시키는 것은 어떻소? 내, 말직 관료의 생활이 항상 궁금했던 차이니 그냥 내게 시키시오? 내 직접 총관의 서신을 보고 트로츠키 동지에게 보고하면 되겠소? 하하!”
“…부디 죽여 주시옵소서.”
“조선 국왕 전하? 제가 알기로는 이 부처의 첫 고안자가 신숙주 동지라 합니다.”
“그렇소? 더욱 흥미로운 소식이구려….
일이 이렇게 될 때까지 과인은 전혀 몰랐으나, 아국의 조신(朝臣)들은 모두 현명하고 어진 이들이 아니오? 고로 이는 모두 과인의 부족함의 소치일 터.”
“주, 죽여 주시옵소서!”
괜히 어떻게든 면피해 보려다 서글서글한 미소로 숙청을 말하는 이홍위에게 급히 고개 숙이는 신숙주.
거기에 이를 아득바득 가는 스피리도노바가 양념을 끼얹으니 추가로 몸을 내던져 울부짖는 하위지.
하하, 엉망이로군. 그 만족스러운 광경에 미소까지 지을 뻔했다.
“스피리도노바 동지?”
“부르셨습니까, 조선 국왕 전하?”
“개미의 구멍을 지금 막지 않으면 후에 방죽 전체가 무너지거늘(堤潰蟻穴), 그대의 덕에 큰 문제를 미리 알게 되었으니 이 어찌 감사의 뜻을 전하지 않을 수 있겠소?”
“저는 의무를 다했을 뿐입니다.”
“아름다운 말이오. 허나, 옛사람이 굳이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를 말한 것은 의무를 다함이 가장 어렵기 때문이오. 그렇기에 그대를 신뢰하여 내 이런저런 권한을 맡겨 보려 하오.
작금의 상황을 타개할 조언을 가져온다면 내 최대한 거기에 따라 보리다.”
“…감사합니다.”
짜릿하다.
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면 더 하고 싶어지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고, 금지되고 부도덕한 일에서 야릇한 쾌감을 느끼는 게 인간의 쾌락 중추가 작동하는 이상한 방식이다.
스피리도노바는 지금껏 어째서 트로츠키가 조선국 섭정 노릇을 접고 싶어 하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아니, 전제 국가의 섭정이라니 사회주의자로서 매 순간이 찝찝하지 않겠는가?